2026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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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7회 전주프로젝트 ‘전주시네마프로젝트: 넥스트에디션’ 피칭 현장 (제공=전주국제영화제)

2025년 17회 전주프로젝트 ‘전주시네마프로젝트: 넥스트에디션’ 피칭 현장 (제공=전주국제영화제)

GLOBAL

지속 가능한 창작의 문을 열려면?

전주시네마프로젝트가 마주한 질문

글 _ 김은형(한겨레신문 문화부 선임기자)

2026-05-26

“2014년 8월, 벤하민 나이스타트(감독)가 전화를 걸어 <엘 모비미엔토>라는 새 장편영화에 참여할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대본이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전주국제영화제의 지원을 받기로 해서 완성해야 하는 기한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유일한 조건이었다. 열정과 창의력을 담보로 한 ‘백지위임장’을 얻은 셈이었다.”

- 2015년 전주시네마프로젝트(이하 JCP) 상영작
<엘 모비미엔토> 제작노트 중

“<세자매>를 탈고한 시점이 2017년 겨울쯤이었던 것 같다. 지금껏 써왔던 시나리오 중에 반응도 가장 좋았고 제작비 부담도 적었다. 그리고 4년이 흘렀다. 4년이란 세월 동안 단 한 군데의 투자자도 나서지 않았다. 문득 전주시네마프로젝트가 떠올랐다. 우리는 다급한 심정으로 전주의 문을 두드렸고, 전주국제영화제 측에선 <세자매>의 손을 잡아 주었다. 1억 원이란 소중한 시드머니가 생긴 우리는 그 뒤로 거짓말같이 일이 잘 풀려 4년 동안 풀지 못했던 매듭을 단 몇 개월 만에 일사천리로 해결했다.”

- 2020년 JCP 상영작 <세자매> 이승원 감독

‘백지위임장’과 ‘시드머니’. 2023년 전주국제영화제가 JCP 10주년을 맞아 발간한 <전주시네마프로젝트, ‘프로듀서로서의 영화제’를 꿈꾼 10년>에 담긴 글들에 등장한 두 단어는 전 세계 독립예술영화인들이 열망하는 열쇳말일 것이다. 제한 없는 창작의 자유와 서랍 속의 대본을 스크린으로 옮길 수 있는 종잣돈. 자유와 돈이라는 까다로운 줄타기 속에서 전주국제영화제가 2014년부터 시행해온 이 프로젝트는 아르헨티나의 벤하민 나이스타트 감독이나 한국의 이승원 감독과 같은 전 세계 독립예술영화인들의 든든한 동아줄이 되어왔다.

2024년 16회 전주프로젝트 ‘JCP: 넥스트에디션’ 피칭 현장에서
소개되고 있는 마르타 포피보다 감독의 <개인과 군중의, 몸>.
이 영화는 올해 JCP 상영작이었다(제공=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 삼인삼색에서 JCP로: 혁신의 바통을 넘기다 JCP는 2000년 전주국제영화제가 출범하며 영화제의 대표 프로그램으로 운영해온 ‘디지털 삼인삼색’의 후속 프로젝트였다. 당시 아직 낯선 디지털 카메라를 명망 있는 영화작가 3인에게 쥐어주고 각각 30~40분짜리 작품을 만들어 옴니버스로 완성한 디지털 삼인삼색은 봉준호, 홍상수를 비롯해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츠카모토 신야, 가와세 나오미, 장 마리 스트라우브, 클레어 드니 등 거장부터 유망한 신인까지 참여를 끌어내며 전주국제영화제의 국제적 인지도를 높였다. 이후 그 10년 동안 디지털은 영화제가 추구하는 표준이 되면서 김영진 당시 수석 프로그래머를 중심으로 장편 프로젝트로의 전환을 추진했다. 작품당 제작 예산을 1억 원(평균치)으로 늘려 총 3억 원 규모로 설계된 JCP는 2014년 박정범 감독의 <산다>, 신연식 감독의 <조류인간>, 헝가리 감독 기요르기 폴피의 <자유낙하>로 출발했다.

성과는 단박에 드러났다. <자유낙하>는 카를로비바리국제영화제에서, <산다>는 로카르노국제영화제와 마르델플라타국제영화제 등에서 수상 소식을 전해왔다. 첫해 ‘디지털 삼인삼색’에서 ‘디지털’을 뗐고 두 번째 해에는 ‘전주시네마프로젝트’라는 새 문패를 달았다. 이후에도 2016년 <우아한 나체들>(루카스 발렌타 리너 감독) 토리노국제영화제 수상, 2017년 <초행>(김대환 감독)의 로카르노국제영화제 수상, 2019년 <이사도라의 아이들>(다미앙 매니블 감독)의 로카르노국제영화제,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 수상 등 낭보가 이어졌고, 2023년 스페인 감독 로이스 파티뇨의 <삼사라>와 2024년 벤 러셀, 기욤 카이요 감독의 다큐멘터리영화 <다이렉트 액션>이 베를린국제영화제 인카운터 부문에서 각각 심사위원특별상과 작품상을 가져오는 쾌거를 이뤘다. 특히 2006년 디지털 삼인삼색 회고전 ‘디지털 아시아’를 개최하면서 전주국제영화제와 남다른 인연을 맺은 로카르노국제영화제는 혁신적인 예술영화와 신인 감독을 발굴하는 영화제 정체성의 상당 부분을 JCP에 의지하는 듯한 상영과 수상 목록을 보여줬다. 2020년대 들어서는 세계 3대 영화제 가운데 하나인 베를린국제영화제의 초청작이 늘어나면서 JCP의 결과물이 한층 더 국제적인 주목을 받는 수준으로 도약했음을 입증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2014년 JCP 상영작인
박정범 감독의 <산다>,
신연식 감독의 <조류인간>,
기요르기 폴피 감독의 <자유낙하>
(제공=리틀빅픽쳐스,
루스이소니도스, 전주국제영화제)



지원이 아닌 투자: 국제 공동제작의 새로운 모델 이런 JCP의 작품들은 영화제의 ‘지원’이 아닌 ‘투자·제작’으로 탄생했다. 창작자를 금전적으로 ‘지원’하고 투자자와 매칭해주는 영화제 프로그램은 많지만 전주처럼 영화제가 직접 투자와 제작에 뛰어들어 10년 넘게 유지되어 온 프로젝트는 유례를 찾기 힘들다. 그만큼 어려운 작업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투자’라는 단어가 쓰였을 때 그 짝패 단어인 ‘수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제가 수익만 추구하는 작품을 만들 수는 없지만 또 수익이 없는 작품만 만들어낼 때 ‘투자’의 의미는 완전해지기 힘들다.

작품적인 성취를 넘어 투자의 성과에 대한 고민이 싹트던 2017년 JCP에 도착한 게 다큐멘터리영화 <노무현입니다>(이창재 감독)였다. 영화제 쪽은 비공개 심사를 통해 리스크만큼 화제성을 지닌 이 기획에 투자를 결정했고 영화제 공개 뒤 극장 개봉에서 누적 관객 수 185만 명이라는 ‘잭팟’을 터뜨렸다. <노무현입니다>의 성공은 JCP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회의적 시선을 잠재우면서 이 프로젝트가 영화제에 정착하는 데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영화의 성공으로 프로젝트 참여에 대한 문의가 늘어나면서 공모를 통한 피칭 프로그램과 심사 과정을 도입했다. 이후 JCP는 국내와 국외에서 각기 다른 성과를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국내 작품 선정을 통해서는 김대환(<초행>), 장우진(<겨울밤에>(2020)) 등 재능 있는 차세대 감독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국외 작품을 통해서는 최근 한국 영화계 전체의 화두가 된 국제 공동제작의 모범적 시스템을 구축했다. 공모를 시행한 이후 들어오는 작품은 국내외 할 것 없이 이미 개발 중인 프로젝트들이 대부분이다. 또 이곳에서 받는 1억 원은 종잣돈이 되어 다른 투자자를 불러모으는 계기가 된다.

종잣돈이 아니라 후반 작업 등 제작의 다양한 단계에서 JCP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도 늘어났다. 각 작품의 다른 처지와 필요에 맞춘 공동제작·공동투자의 형태가 자연스럽게 정착된 것이다. 2020년 다네 콤렌의 <애프터워터>와 2022년 에리크 보들레르의 <입 속의 꽃잎>은 2022년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부문에 나란히 초청됐다. <애프터워터>는 한국, 독일, 스페인, 세르비아 공동제작으로 완성됐고, <입 속의 꽃잎>은 한국, 독일, 프랑스 공동제작이다. 장병원 전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이 두 작품이 베를린을 비롯해 중요한 영화제에서 낸 많은 성과를 통해 “영화산업으로부터 소외된 창작자들의 예술적 자율성을 고무하는” JCP의 독특한 방식이 “국제 공동제작의 한 모델이 돼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자평했다.

2024년 이 프로젝트를 통해 <다이렉트 액션>을 공개한 벤 러셀 감독은 “JCP가 초기에 제작투자해 확보해준 예산으로 리서치를 할 수 있었고 이는 프랑스, 독일, 스위스에서 지원을 받기 위한 중요한 근거가 됐다”고 회고했다. 이 작품은 최종적으로 한국과 독일, 프랑스의 합작으로 완성됐고, 2024년 베를린국제영화제 수상은 물론 다큐멘터리 영화제인 시네마 뒤 레엘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또 다른 JCP 선정작들의 활약도 있다. <구름이 그림자를 숨길 때>가 2024년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 오리손테스 라티노스 경쟁 부문 개막작 선정, <제자리에 있는 건 없다>가 2024년 카를로비바리국제영화제 프록시마 경쟁 부문 선정과 아다나 골든 볼 국제영화제 감독상 및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면서 JCP는 해외에서 그 성과를 착실히 쌓아왔다.

<초행>(위) 김대환 감독, <겨울밤에> 장우진 감독 등 차세대
감독들을 발굴한 JCP
(제공=인디플러그, 인디스토리)



새로운 기로에 선 JCP: 예산과 방향성의 재정비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올해 전주국제영화제는 영화제 기간 동안 JCP 공모 지원작들의 피칭을 하는 ‘JCP: 넥스트에디션’을 진행하지 않았다. 올해 영화제 예산 배분의 어려움으로 인해 이 행사가 시작된 뒤 처음으로 열리지 않았다. 이는 JCP가 다시 한번 큰 기로에 놓여있음을 보여준다.

2014년 JCP가 시작된 이래 선정되어 2026년까지 영화제를 통해 공개된 작품 40편(국내 25편, 국외 15편) 가운데 국내에서 정식 개봉된 국외 작품은 아직 없다. 전주국제영화제 쪽은 이 가운데 초기작인 <자유낙하> <엘 모비미엔토> <우아한 나체들> 등 세 편을 제외한 2018~2024년 상영작 11편을 예술영화 전문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인 콜렉티오에서 올해 1월 말부터 순차 공개하고 있다. 최근 OTT는 영화를 보는 주요 플랫폼으로 부상했기 때문에 이 작품들의 OTT 직행을 비판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선택의 배경에는 홍보 마케팅을 포함한 개봉 비용의 상승과 생소한 이름의 작가 영화는 ‘팔리지 않는’ 한국 영화시장의 냉정한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기록적인 성과를 낸 <노무현입니다> 외에 2021년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8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호평받은 <세자매> 같은 작품도 있지만 이후 손익분기점을 내지 못한 작품이 쌓여가면서 투자라는 관점에서 지속 가능성의 고민이 다시 생겨날 수밖에 없다.

JCP가 올해 피칭 행사를 건너뛰면서 휴지기를 가진 데는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놓여있기도 하다. 그중 하나는 10여 년 전 책정했던 1억 원이라는 투자 비용 가치의 변화다. 문성경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는 “결국 많은 고민의 기저에는 예산 문제가 있다”면서 “인건비를 비롯해 모든 비용이 상승한 데다 환율까지 급격히 뛰면서 영화 제작비도 급등했다. 예전 같으면 JCP에서 투자받은 1억 원으로 후반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다. 창작자가 결국 또 다른 투자자를 구해야 하는데 애를 먹으면서, 선정 다음 해 상영이라는 원칙이 점점 지켜지기 힘들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연유로 완성이 늦어지면서 최근 몇 년간 JCP 선정 이후 2년 뒤 공개되는 작품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2025년 선정된 주셩저 감독의 <A Distant House Smokes on the Horizon>과 데보라 스트라트맨 감독의 <Hello Ladies>도 2027년 영화제에서 공개될 예정이다.

프로젝트의 방향성도 재정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문성경 프로그래머는 “국내 배급 가능성이 높은 작품과 해외 배급 가능성이 높은 작품의 색깔은 매우 다르다”면서 “심사를 하려면 영화제의 철학을 담은 하나의 통일된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현실적인 고려를 하다 보면 심사 기준이 옅어지는 딜레마가 있다”는 고민을 털어놨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JCP 상영작
<리틀 라이프>(위)와
<개인과 군중의, 몸>(제공=전주국제영화제)



글로벌 독립영화 창작의 수원지: 미래가 마르지 않게 여러 현실적 제약과 위기의식이 있음에도 JCP는 새로운 영화, 도전적인 실험을 하고자 하는 창작자에게 사막 한가운데 놓인 샘물 같은 존재라는 데 영화인들은 공감한다. <노무현입니다>에 이어 JCP를 통해 <노회찬6411>(2021)을 제작했던 최낙용 대표는 “전주시네마프로젝트는 여전히 비용의 규모 면에서나 투자라는 형식에서나 한국과 외국 창작자들에게 큰 힘이 되는 제도”라면서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투자인 동시에 창작 역량에 대한 지원이기 때문에 당장 수익이 나지 않더라도 그 질적 성과는 쌓여서 결국 양적(가시적) 성과로도 이어진다. 국내외 독립영화 생태계의 수원지와 같은 역할을 하는 JCP에 대한 믿음을 좀 더 가지고 그 문은 지속적으로 열어놓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프랑스 영화평론가이자 베를린국제영화제 등에서 프로그래머로 활동해온 앙투안 티리옹은 <전주시네마프로젝트, ‘프로듀서로서의 영화제’를 꿈꾼 10년>의 ‘소박하지만 본질적인 방식으로 - 프로그래머가 바라본 전주시네마프로젝트’를 통해 비즈니스의 논리가 강하게 작용하는 국가나 대규모 국제영화제의 지원방식과 달리 전주국제영화제가 택한 방식은 “영화 시작 단계부터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대규모의 재정적 지원(1억 원)을 해 예술가가 업계의 까다로운 관리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창작을 하도록 돕는다”면서 “창작의 자유를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예술가들에게 이는 분명 희망이 될 것”이라고 짚었다.

최근 이탈리아 토리노 국립영화박물관은 단편영화 제작에 직접 뛰어들었고 일본 피아필름페스티벌은 감독과 제작·배급사를 연결해주던 스콜라십 프로그램을 프로듀싱 프로그램으로 전환하는 논의를 시작하는 등 JCP의 방식은 해외 영화제와 영화 기관에게 새로운 실험의 전례로서 영향을 끼치고 있기도 하다.

JCP 선정작은 아니지만 작가 감독을 발굴하고 지지해 온 전주국제영화제의 기조를 보여주는 성과도 있다. 전주국제영화제가 지난해부터 논의를 거듭해 올해 초 배급 투자를 결정한 아르헨티나 감독 리산드로 알론소의 <두 배의 자유>(Double Freedom)가 올해 칸국제영화제 감독주간에 진출해 전 세계 최초 공개됐다. 전주국제영화제는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 다양한 영화 인력을 발굴하고 지지해 온 전통을 이어가며 제작, 투자, 배급을 아우르고 있다. 문성경 프로그래머는 “실질적인 자금의 지원은 영화 존재의 다양성에 이바지하려는 전주국제영화제의 노력”이라고 말한다.

같은 맥락에서 새로운 영화 작가들을 위한 투자를 이어 온 JCP의 존재 이유 역시 글로벌 영화 생태계에 선순환을 가져오려는 움직임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JCP는 전주국제영화제만을 위한 기획으로 한계 지을 수 없다. 지난 12년간 지속된 노력은 더 풍성한 결실을 거두기 위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올해 JCP의 쉼표를 찍은 전주국제영화제는 2027년 ‘JCP: 넥스트에디션’을 위한 예산 확보를 위해 다각도로 노력 중이다. 그 이후로도 지속 가능한 JCP의 미래를 그려보기 위해 영화제 내부의 고심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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