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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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❶

경계 없는 모두의 콘텐츠를 위하여

서수연 한국콘텐츠접근성연구센터 대표

글 _ 곽명동(마이데일리 기자)
사진 _ 서범세(한경매거진앤북 기자)

2026-05-11

소녀는 작가를 꿈꿨다. 고교 시절부터 글쓰기를 워낙 좋아했던 그는 문창과에 진학해 마음껏 읽고 쓰며 작가적 소양을 쌓았다. 졸업 후에는 구성작가로 일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글을 썼다. 글솜씨 못지않게 목소리도 좋고 딕션이 정확해 성우에도 매력을 느꼈다. 구성작가로 일하며 번 돈으로 성우학원에 등록해 꿈을 키워나갔다. 글쓰기와 목소리의 장점을 살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에서 자원봉사로도 활동했다. 봉사 활동 중이던 어느 날, 팀장이 말했다. “글도 잘 쓰고 목소리도 좋으니 음성해설 해보는 건 어때? 돈은 조금밖에 못 주지만 보람은 있을 거야.” 보람 있는 일이라는 말 한마디에 시작한 이 길은 서수연 한국콘텐츠접근성연구센터 대표를 국내 1호 음성해설(Audio Description, AD) 작가로 이끌었다.

영화뿐만 아니라 드라마, 연극 등 다양한 콘텐츠의 음성해설에 참여하고 있는
‘국내 1호 음성해설 작가’ 서수연 대표



대본, 녹음, 최종 편집 - 3단계의 여정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팀장의 제안 이후 2003년, 서 대표는 처음으로 KBS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걸렸네>(1990~2007)의 음성해설 대본을 썼다. 이후 현재까지 영화 <김관장 대 김관장 대 김관장>(2007), <해운대>(2009), <김씨표류기>(2009), <이끼>(2010)를 비롯해 드라마 <대장금>(MBC, 2003~2004), <불멸의 이순신>(KBS, 2004~2005), <브람스를 좋아하세요?>(SBS, 2020), <더 킹 : 영원의 군주>(SBS, 2020), <CSI: 과학수사대> 시리즈 그리고 연극·뮤지컬·무용·전시 등 7천500여 편 이상을 작업했다.

“과거엔 영상을 CD로 받아서 작업했어요. 2009년에 흥행 영화 <해운대>의 불법 영상 유출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된 적 있었죠. 보안이 굉장히 중요한 이슈가 됐어요. 그 이후에는 촬영장에 직접 가서 작업했죠. <이끼> 작업할 때는 남양주 종합촬영소에 꼼짝없이 갇혀 밤을 새워 일하기도 했어요. 어찌나 무섭던지.(웃음)”

CD가 사라진 지금은 파일로 받아 작업한다. 제작사가 영상을 보내면 대본 작업에 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작품에 어울리는 성우도 함께 정한다. 남성성이 강한 조폭영화 장르에는 오히려 차분한 목소리의 여성을 선택하는 식이다. 대본 작업이 가장 중요하다. 작가, 성우, 녹음 엔지니어가 서로 실수하지 않도록 대본을 꼼꼼하게 작성해야 녹음 과정에서 오독 가능성이 줄어든다. 녹음을 마치면 다시 오디오 검수와 최종 편집 과정을 거친다. “<대추나무 사랑걸렸네>를 할 때는 제가 쓰고 직접 낭독했어요. 이제는 성우가 읽기 쉽도록 눈에 잘 들어오게 대본 작업을 하죠.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서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며 일해요.”

2시간짜리 영화를 작업하는 데 2주가량이 소요된다. 60분짜리 드라마 한 편은 5일 정도 걸린다. 특히 지상파 드라마는 매주 방송되기 때문에 이틀 안에 대본을 완성해야 한다. 예전엔 비디오테이프로 녹화해 정지와 재생을 반복하며 대본을 썼다. 너무 많이 누르다 비디오가 고장 나는 일이 다반사였다.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일이 ‘정확한 이름’을 찾는 거예요. SF영화에 등장하는 우주선에는 수많은 버튼과 장치가 있잖아요. 버튼 이름을 설명해주면 더 좋죠. 적확하고 직관적인 단어를 찾는 게 중요해요.”

미국 시리즈 <CSI: 과학수사대>에는 약물 이름이 많이 나온다. 프레임을 정지시켜 놓고 영어로 된 약 이름을 메모한 뒤 인터넷을 샅샅이 뒤진다. 논문도 찾아보고 커뮤니티도 돌아다닌다. 한 문장을 쓰기 위해 3시간을 쏟아붓기도 한다. 사소해 보이는 시각 정보 하나도 최대한 사실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음성해설 작가의 중요한 임무다.

국내 최초 장애 예술 전문 공간인 모두미술공간의
음성해설 작품을 녹음하는 서수연 대표(제공=서수연 대표)



분석력, 압축력, 따뜻한 마음 “장르마다 톤과 용어가 중요해요. 현대극에선 책상, 테이블이라고 쓸 수 있지만 사극에서는 ‘서탁’이라는 단어를 쓰죠. 휴대폰도 다 달라요. 스마트폰, 폴더폰 등 그 시대에 맞는 이름을 제대로 찾아 전달하죠.”

서 대표는 음성해설에 시각 정보와 함께 다양한 감정을 담아낸다. 캐릭터의 표정과 분위기를 어떻게 잘 전달할지 끊임없이 고민하며 객관성을 추구하면서도 주관적 감성을 놓치지 않는다.

후배들에게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자질은 분석력, 압축력, 그리고 따뜻한 마음이다. 대사와 음향 사이의 좁은 틈에 효과적인 해설을 넣느라 매일 머리카락을 쥐어뜯는다. 영상 이미지의 핵심을 정확하게 잡아내 분석하는 능력은 기본이고, 선택한 후에는 가장 ‘적확한 언어’로 되살린다. 길게 설명하면 늘어진다. 최대한 압축해 이미지의 정수만 표현해야 한다.

“그 이미지를 얼마나 아름답게 묘사하느냐는 창작의 영역이죠. 언어를 단련할 수밖에 없어요. 단순히 ‘여름 나무’가 아니라 ‘햇빛이 보석처럼 빛나는’,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반짝인다’ 등으로 써야죠. 언어를 유려하게 다루고 표현하는 작가적 역량이 필요해요. 이건 전문가의 영역이거든요.”

따뜻한 마음도 중요하다. 사소한 것도 허투루 여기지 않고 소중하게 담아내겠다는 자세로 임해야 보람도 크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그린 <화려한 휴가>(2007)처럼 가슴이 아픈 영화는 여운이 오래간다. 세월호 참사를 다룬 영화를 작업할 때는 눈물이 흐른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밖에 나가 천천히 걷다가 다시 들어와 일한다.

공포영화는 고역이다. <주온>(2002) <장화, 홍련>(2003)을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흐른다. “귀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몇 번을 봐야 하거든요. 흉측한 장면을 설명하기 위해 화면을 정지시키며 보다가 스스로 깜짝 놀라죠. 공포영화에선 칼로 사람을 찌르는 소리가 끔찍한데, 어느 부위를 찔렀는지 정확히 설명하기 위해 여러 번 돌려볼 때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무서워요. 그래서 밤에는 절대 안 하고 낮에 일해요.(웃음)”

그는 궁금증을 남기지 않는 해설에 공을 들인다. 코미디영화 <김관장 대 김관장 대 김관장>을 극장에서 보는데, 관객들은 가수 탁재훈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박장대소했다. 시각장애인은 왜 관객이 웃는지 알 수 없는 상황. 서 대표는 고심 끝에 ‘특별출연 탁재훈’이라는 설명으로 궁금증을 없앴다.

한국콘텐츠접근성연구센터가 음성해설 제작에 참여한 영화 <막걸리가 알려줄거야>(2024),
<굿뉴스>(2025). 한국콘텐츠접근성연구센터는 독립영화부터 OTT 영화까지 플랫폼과 규모에
상관없이 음성해설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사진=판씨네마, 넷플릭스 제공)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는 직업 이러한 노력으로 칭찬을 받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엔딩 크레딧에서 ‘서수연’ 이름을 확인하면 처음부터 다시 본다는 말에 큰 감동을 받는다.

시각장애인 임덕윤 감독과의 인연도 잊을 수 없다. 임덕윤 감독은 2003년 당뇨 합병증으로 망막혈관이 찢어지는 심한 초자체 출혈로 수술을 받았다. 몇 차례 수술 끝에 왼쪽 눈만 살렸다. 그러나 요양 도중 만성신부전증까지 겹쳐 왼쪽 눈마저 시력을 잃고 말았다. 그는 절망에 빠져 있던 어느 날, <CSI: 과학수사대>의 음성해설을 듣고는 “이렇게 설명해준다면 나도 어릴 적 꿈꿨던 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며 구체관절인형을 이용해 단편영화를 찍었다. 이후 <조금 불편한, 그다지 불행하지 않은 0.43>(2010) 등을 연출하며 호평을 받았다.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고 앞으로 나아가게끔 용기를 줬다는 생각에 뿌듯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임덕윤 감독의 용기는 그렇게 서수연 대표의 자부심이 됐다.

한 작품을 여러 번 감상했다는 반응은 최고의 칭찬이다. <더 킹 : 영원의 군주>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비시각장애인들도 좋아했던 드라마다. 소리 파일을 따로 구해 서로 공유하고, 운전하면서 듣거나 재방송할 때 화면해설 방송을 같이 보면서 놀이 문화로도 확장됐다. 음성해설은 이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가 없는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마치 ‘라디오 드라마’를 듣는 것 같다는 평이다. “좋은 음성해설의 기준은 다시 듣고 싶어 하게 만드는 것이죠. N차 관람과 똑같아요. 한 영화를 극장에서 여러 번 보듯이, 음성해설도 자주 찾아 듣는 콘텐츠가 됐어요.”

원고를 작성할 때 선해설과 후해설에도 시간을 많이 들인다. 먼저 해설하면 스포일러가 되고, 나중에 해설하면 뜬금없는 이야기가 된다. 극 중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전후 맥락을 파악해 꼭 알아야 할 핵심 정보를 제공하는 일은 음성해설의 가장 어려운 분야 중 하나다.

음성해설이 ‘번역’이 될 때 2010년 배리어프리영화위원회가 주최한 워크숍에서 외국 음성해설 제작자와의 만남은 서 대표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당시 영국, 일본 등의 전문가들이 참석했다. 한 발제자가 말했다. “음성해설은 번역이다.” 그동안은 음성해설이 영상 이미지를 묘사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한 단계 높은 ‘번역’이라는 설명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때부터 틈나는 대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뒤늦게 시작한 만큼 체력적으로 힘들어 구토를 할 정도까지 매달렸다. 결국 2017년 런던시티대학교에서 영상번역 대학원 과정을 수료하고, 뉴캐슬대학교에서 미디어와 저널리즘 석사 과정을 밟고 돌아와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결과, 서 대표는 현재 영어번역학과에서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강의도 하고 있다. “강의 주제는 ‘음성해설 번역과 접근성’이에요. 한국은 실무가 발전했지만, 연구는 걸음마 단계거든요. 학문적 연구 성과가 더 쌓인다면 음성해설도 한층 더 좋아질 거예요.”

제주아트센터 접근성 특강(왼쪽),
군포문화재단 접근성 및 시각장애 이해 강의에 나선 서수연 대표(제공=서수연 대표)



학생들은 최근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AI 기술에 불안감도 드러낸다. 실제 번역사가 줄어드는 추세다. 그러나 서 대표의 시선은 단호하다. “음성해설은 단순히 영상을 보고 묘사하는 것이 아니에요. 캐릭터의 특성을 모두 알고, 앞뒤 맥락을 파악해서 대사와 대사 사이 가장 효과 높은 설명을 찾아내는 고난도의 작업이죠. 10년 이상 경험을 쌓아야 겨우 잘한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숙련된 감각이 필요해요.”

그렇다고 안주하지는 않는다. AI가 넘볼 수 없는 독보적인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전문성을 계속 키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화면 보고 그냥 쓰면 되는 거 아니야?”라는 일각의 오해를 불식시키는 것도 급선무다. 음성해설이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즐기는 콘텐츠로 자리 잡으려면 질을 높이기 위한 부단한 노력과 사회적 인식 변화가 함께 필요하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경계를 허물고, 접근성을 넓히는 영국 유학 시절 BBC를 방문하면 구성원들이 ‘음성해설은 기본’이라는 마인드로 일하는 것이 느껴졌다. 영국도 한국처럼 음성해설 의무 비율은 10%이지만, 자체적으로 더 늘려 20% 이상을 초과 달성한다. 최근 영국은 넷플릭스,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디즈니+ 등 주요 OTT 서비스에도 전체 콘텐츠의 80% 이상에 자막, 10% 이상에 음성해설, 5% 이상에 수어 서비스를 의무적으로 제공하는 조치를 취했다. 유럽연합(EU)도 지난해 6월부터 ‘유럽 접근성법’(European Accessibility Act, EAA)을 시행해 디지털 콘텐츠에 장애인 접근성을 보장하도록 의무화했다. 시각장애인이 콘텐츠 제작에 직접 참여하는 시대도 열렸다. 넷플릭스는 시각장애인이 음성해설 제작에 직접 참여하는 전문 인력 양성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한국도 걸음을 맞추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는 2005년부터 시각·청각장애인들의 영화 관람을 위해 한글자막과 화면해설을 포함한 ‘가치봄’ 서비스를 전국 74개 관에서 운영해왔다. 서 대표는 아직 영진위와 함께 일해 본 적은 없지만, 이 서비스가 더욱 확대되기를 기대하며 함께 일하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제가 한국콘텐츠접근성연구센터를 세운 이유는 더 많은 사람들이 경계 없이 콘텐츠를 즐기는 세상을 원하기 때문이죠. 2019년 영국 극장을 갔을 때 많은 곳에서 음성해설을 지원하고 있더라고요. 한국도 점점 그렇게 변하고 있다는 걸 실감해요.”

서수연 대표가 참여한 디즈니+ <폭군> 음성해설(제공=서수연 대표)



음성해설이 주목받는 현실과는 달리, 영상 콘텐츠의 더빙은 줄어드는 추세다. 과거 지상파에서 <주말의 명화>(MBC, 1969~2010) 등에 더빙을 입혀 방송하던 풍경은 이제 추억이 됐다. 이는 음성해설과 무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자막을 읽기 어려운 노인, 시력이 약한 사람, 영상보다 소리에 집중하고 싶은 사람 모두에게 더빙과 음성해설은 ‘듣는 언어’로 세상에 접근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노인 등 자막 읽기가 불편하신 분들이 많거든요. 그런 분들을 위해 영진위 차원에서도 더빙 지원을 확대해 줬으면 좋겠어요. 더빙 버전에 음성해설까지 더해진다면 시각장애인도 함께 즐길 수 있잖아요. 그게 진짜 경계 없는 콘텐츠 아닐까요.” 그러나 이 꿈이 현실이 되려면 넘어야 할 벽이 높다. 더빙이든 음성해설이든, 콘텐츠 접근성을 넓히는 일은 결국 사람과 제도가 함께 바뀌어야 가능하다.

과거 지상파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이라고 표현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 말은 서 대표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다. 언뜻 친절해 보이는 말이지만, 한 시각장애인은 ‘위한’이라는 표현 속에 ‘시혜’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화면해설은 베푸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권리로 누려야 한다.

음성해설가의 처우 개선도 당면 과제다. 대본료는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수천 편의 작품을 작업하고 단 한 문장을 위해 몇 시간을 고민하는 전문가의 노고에 비해 보상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의무 비율 10%를 채우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영상 콘텐츠 제작자들이 자발적으로 음성해설을 늘리고 해설가에게 합당한 보상이 돌아가는 선순환이 만들어질 때 비로소 진정한 ‘접근성’이 실현된다고 그는 말한다.

23년 전과 비교하면 음성해설에 대한 관심은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 세상은 여전히 각박하고 어수선하지만, 그래도 조금씩 따뜻한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이 위안이 된다. 5월 출간 예정인 서 대표의 에세이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 미처 몰랐던 음성해설 이야기>에 그간의 여정이 담겨 있다.

작가와 성우가 되고 싶었던 소녀의 꿈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 꿈은 이제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소리로 세상을 그려내며 누군가의 어둠 속에 빛을 밝히는 일, 그것이 서 대표가 오늘도 아름다운 언어를 찾아 나서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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