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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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Aleksander Kalka, 베니스국제영화제. ASAC)

(제공=Aleksander Kalka, 베니스국제영화제. ASAC)

GLOBAL ❷

‘영화다운 영화’들의 귀환

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참관기

글 _ 유승목(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

2025-09-15

아드리아해에 흩뿌리던 비가 멎고 태양이 다시 고개를 내민다. 8월 말 베네치아(베니스)는 분주하다. 로마광장에서 종착역인 리도섬까지 가는 바포레토(수상버스)는 발 디딜 틈이 없다. 산마르코광장 등 정류장을 하나씩 거칠수록 편한 차림의 관광객은 하나둘 사라진다. 끝까지 한배를 타는 건 턱시도와 드레스 차림의 사람들, 한 손엔 수첩을 들고 어깨에는 카메라를 멘 기자들, 그리고 어디선가 건너온 영화학도들이다. 흔들리는 수면을 건너 이들이 향하는 곳은 ‘팔라초 델 치네마(영화의 전당)’.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제인 ‘베니스국제영화제’의 심장이다. 지난 8월 27일 개막해 11일간 펼쳐진 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이하 베니스영화제) 현장을 찾았다.

오스카 전초전이 된 베니스영화제 한때 세상에서 가장 부유했던 도시. 찬란했던 베네치아의 영광은 이제 흔적만 남았다. 하지만 황금이 남기고 간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지금 이 도시는 문화와 예술이 지탱한다. ‘베네치아 비엔날레’라는 이름으로 미술, 건축, 무용, 음악, 연극, 그리고 영화라는 여섯 장르의 예술 축제가 ‘물 위의 도시(La città sull’acqua)’를 떠받치고 있다. 그리고 8월과 9월에 가장 빛나는 기둥은 단연 영화다. 베니스영화제는 매년 이 시기, 리도섬을 전 세계가 주목하는 영화예술의 메카로 변모시킨다. 국제영화제작자연맹(FIAPF)이 공인한 국제영화제는 현재 27개국 44개. 1932년 시작한 베니스영화제는 이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수많은 영화제가 명멸하는 와중에도 명맥을 이어왔다. 부침이 없던 건 아니다. 어느 순간 베니스는 상업성과 대중성을 품으며 ‘만국 영화 박람회’가 된 칸국제영화제의 스포트라이트를 바라보는 위치에서 자존심을 구겼다. 현격했던 차이는 최근 들어 다시 좁혀지고 있다.

실마리는 예술과 대중을 잇는 베니스의 세련된 안목에 있었다. “베니스는 오스카(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의 포문을 여는 시작점”(고경범 CJ ENM 글로벌프로젝트담당·영화 <부고니아> 공동 제작자)이라는 한 마디가 글로벌 영화계에서 베니스의 중요성을 잘 드러낸다. 그 말처럼 지난 4년 새 베니스영화제 경쟁·비경쟁 부문에 소개된 작품 중 90여 개가 오스카 후보에 올랐고, 상당수가 트로피까지 거머쥐는 등 베니스는 시상식 시즌의 전초 무대가 되었다. 2018년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에 황금사자상을 안기는 등 칸이 극장 상영 규정을 앞세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영화를 초청 대상에서 배제할 때, 넷플릭스 등에서 공개된 수준급 OTT 영화들을 품은 예리한 감각도 황금사자가 회춘한 비결이다.

오스카 시즌에 주목받을 영화들을 미리 알아볼 수 있는 베니스영화제
(제공=Jacopo Salvi, 베니스국제영화제. ASAC)



짐 자무시, 박찬욱, 그리고 벤 하니야 좋은 영화, 훌륭한 감독과 배우, 그리고 관객으로 함께하는 시네필(Cinephile, 영화 애호가)들. 전 세계 이름난 도시에서 열리는 수많은 영화제의 성공 방정식을 요약하면 이렇다. 이런 맥락에서 올해 베니스의 위상은 한층 높아졌다. 올해 리도섬에 모인 작품들을 통해 세계 영화계의 흐름을 가늠할 수 있을 만큼 풍요로웠기 때문이다. 82회를 맞은 올해 베니스영화제는 단단한 균형감을 보여줬다. 거장 감독과 넷플릭스가 함께 귀환했고, 미래지향적 시각에서 영화적 담론을 만들어내면서다. 사회적 의제를 건드리는 작품과 실험적 시도 역시 골고루 배치되었다. 리도섬에서 마주친 현지 영화계 관계자는 이런 말을 남겼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제영화제가 되었다는 건 결국은 가장 먼저 영화라는 예술의 가치를 알아봤기 때문이 아닐까요. 여긴 늘 새로워요.”

올해 경쟁 부문에 올라 황금사자상을 놓고 다툰 21편의 작품 큐레이팅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진정한 장편영화의 귀환이다. 라즐로 네메즈의 <나의 이름은>이 132분에 달하는 등 2시간이 넘는 러닝 타임의 영화들이 7편이나 이름을 올렸다. 유튜브발 ‘숏폼’ 열풍이 휘몰아치며 긴 이야기는 하품 나오는 옛날 콘텐츠란 인식이 커지는 가운데 베니스는 ‘영화다운 영화’를 강조한 것이다. 영화라는 예술 매체가 갖는 다양한 장르적 경험도 중시했다. 공상과학(SF)에 블랙코미디를 더한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부고니아>부터 기예르모 델 토로의 판타지 호러 <프랑켄슈타인>, 앤솔로지(3부작) 드라마인 짐 자무시의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 현실을 고발하는 다큐멘터리인 카우타르 벤 하니야의 <힌드의 목소리>,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정치 스릴러 <크렘린의 마법사> 등 유행을 타지 않고 감독 본연의 미학과 영화적 고민을 느낄 수 있는 다채로운 장르의 작품들이 초청되었다.

올해 영화제의 경쟁 부문 수상 결과에선 세계 영화계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한 징후가 읽힌다. 짐 자무시의 황금사자상 수상은 ‘깜짝 수상’으로 주목받는다. 박찬욱의 <어쩔수가없다>와 벤 하니야의 <힌드의 목소리>가 영화제 기간 가장 유력한 후보로 불렸지만, 그렇다고 짐 자무시의 수상이 크게 이해하지 못할 만한 것은 아니다. 늘 그랬듯 베니스는 영화의 예술적 가치를 주목해 왔기 때문. 올해 경쟁 부문 심사위원장을 맡은 알렉산더 페인이 일상에 휴머니즘을 녹여내는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족 간의 감정적 단절을 담담하게 조명한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는 비슷한 맥락을 보여준다. 베니스는 반드시 전쟁 등 거대한 사건을 다룬 정치적 영화만이 시대를 기록하는 게 아니란 점을 황금사자상 수상으로 드러낸 것이다. 자주색 정장에 까만 선글라스를 낀 채 단상에 오른 자무시 역시 “예술은 정치적이기 위해 정치를 직접 다룰 필요는 없다”며 “사람들 사이의 공감과 연결을 만드는 것이 문제 해결의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로 황금사자상을 거머쥔 짐 자무시 감독
(제공=Andrea Avezz, 베니스국제영화제. ASAC)



황금사자상의 이변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베니스가 2등상 격인 심사위원대상(은사자상)에 결국 정치적 메시지가 분명한 <힌드의 목소리>를 올렸다는 것이다. 앞서 칸국제영화제가 이란 영화감독 자파르 파나히의 <그저 사고였을 뿐>에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준 것처럼, 영화라는 예술이 미학만큼 사회적 증언을 기록하고 시대적 아픔을 발화하는 장(場)의 역할을 하겠다는 의도가 읽힌다. 오스카로 가는 출발점인 베니스에서 이스라엘과 밀접한 할리우드가 꺼릴 만한 이 작품을 2등상에 선정했다는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다. 할리우드 스타 브래드 피트, 호아킨 피닉스, 알폰소 쿠아론 등이 공동 제작자로 참여한 이 영화는 지난해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목숨을 잃은 가자지구 소녀 힌드 라잡의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다큐멘터리 드라마다. 베니스에서 상영될 당시 무려 23분에 달하는 기립박수를 받으며 화제를 낳았다.

이 밖에 이탈리아 영화감독 지안프랑코 로시의 <구름 아래>에 심사위원특별상을, 프랑스 영화감독 발레리 동젤리의 <앳 워크>에 각본상을 쥐어준 결정도 납득이 가는 결정이다. 볼피컵으로 불리는 남녀주연상은 각각 이탈리아 국민 배우인 토니 세브릴로(<라 그라치아>), 중국 배우 신즈레이(<우리 머리 위의 태양>)가 받았다. 다만 베니 사프디의 <더 스매싱 머신>이 받은 감독상은 밋밋한 전개로 영화제 기간 중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터라 ‘옥의 티’로도 꼽힌다.

황금사자상 유력 후보였던 카우타르 벤 하니야 감독의
<힌드의 목소리>는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제공=Andrea Avezz, 베니스국제영화제. ASAC)



<어쩔수가없다>, 독보적인 존재감 올해 리도섬엔 수작들이 무더기로 쏟아졌지만, 이 중에서도 돋보이는 건 단연 한국영화였다. ‘미장센의 대가’ 박찬욱이 배우 이병헌, 손예진 등 동방의 별을 이끌고 등장해 신작 <어쩔수가없다>로 20년 만에 황금사자상 쟁탈전에 도전장을 내밀면서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부침을 겪으며 시장이 존폐의 기로에 섰다는 위기론까지 대두된 한국영화계에 있어 오랜만에 단비 같은 소식이라 일찌감치 국내에서도 주목받았다. 특히 ‘깐느 박’으로 불릴 만큼 칸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였던 박찬욱 감독이 막판 후반작업 등을 이유로 칸을 건너뛰고 베니스를 찾았다는 데서 이목이 집중되었다. 베니스는 고(故) 김기덕 감독이 2012년 <피에타>로 황금사자상을 받은 뒤론 한국영화와 인연이 드문 영화제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힌드의 목소리>가 영화제 후반부 분위기를 주도했다면 <어쩔수가없다>는 영화제 초반을 달군 작품으로 거론되었다. 무엇보다 유수의 작품을 제치고 영화제 프라임 타임으로 불리는 첫 주 금요일 밤 황금시간대인 지난 8월 28일 월드 프리미어(세계 첫 공개) 공식 상영이 잡혔다는 점에서 최고의 화제성을 보여줬다. 상영시간이 수상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 세계 언론과 영화 산업 관계자, 애호가들이 가장 주목하는 시간에 상영시간표를 짰다는 것은 베니스가 올해 전면에 내세우는 작품임을 보여주는 시그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2023년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가여운 것들>이 영화제 금요일 프라임 타임에 프리미어 상영으로 공개되었고, 그해 황금사자상을 받은 바 있다.

베니스영화제 프라임 타임에 공개된 <어쩔수가없다>
월드 프리미어 현장에서
수많은 팬을 반기는 박찬욱 감독과 이병헌(제공=Jacopo Salvi, 베니스국제영화제. ASAC)



한국영화는 K-팝과 함께 세계로 뻗어 나간 한류의 첫 번째 파도로 주목받았지만, 최근 들어선 홀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는 우려를 샀다. 2019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받은 이후 국제영화제에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관객이 오지 않는 극장의 현실이 200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 이후 지속된 특유의 K-무비 작품성까지 떨어뜨리고 있다는 위기감도 커졌다. <오징어 게임> 시리즈나 <케이팝 데몬 헌터스> 같은 작품들이 전 세계를 휩쓸었지만,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작품이란 점에서 온전히 한국영화의 성과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팔라초 델 치네마에서 진행된 <어쩔수가없다> 월드 프리미어 상영 현장은 ‘K-무비’가 여전히 저력을 갖고,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무대였다. 오후 9시 45분부터 영화제 메인 상영관인 ‘살라 그란데’에서 진행되는 시사회를 앞두고 정장과 드레스를 차려입은 인파로 리도섬이 붐비기 시작한 것. 이날 한때 비바람이 몰아치기도 했지만, 이른 시간부터 극장 바깥은 영화 팬들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들은 영화 상영을 앞두고 박찬욱 감독을 포함한 <어쩔수가없다> 사단이 레드카펫에 등장하자 환호를 질렀다. 일부 팬들은 주연배우인 이병헌을 향해 “리(Lee)!”라고 외치며 사인을 요구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워낙 열기가 뜨거웠던 탓에 영화 상영은 당초 예정되었던 시간을 훌쩍 넘겨서야 시작했다.

백미는 자정을 넘겨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 순간이다. 1천 명이 넘는 관객들이 일제히 일어나 2층 객석에 자리 잡은 박찬욱 감독과 배우들에게 기립박수를 터뜨린 것. 환호와 박수는 9분 가까이 이어졌다. 이날 한 관객이 상기된 목소리로 “기대 이상으로 흥미로웠다”며 “사회가 만들어낸 괴물을 잘 표현했다”고 말했고, 미국 연예 매체 버라이어티는 “박찬욱이 현존하는 가장 품위 있는 감독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이자 매혹적인 블랙 코미디”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어쩔수가없다>는 베니스영화제에서 호평을 얻으며 K-무비의 저력을 보여줬다
(제공=Jacopo Salvi, 베니스국제영화제. ASAC)



<부고니아>로 확인한 한국영화의 활로 한국영화의 저력은 함께 경쟁 부문에 오른 영화 <부고니아>를 통해서도 드러났다. CJ ENM이 기획개발을 주도해 할리우드 유명 감독인 아리 애스터가 제작하고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자신의 페르소나인 엠마 스톤을 내세워 연출한 이 영화는 2003년 개봉한 한국영화 <지구를 지켜라!>를 리메이크했다. 개봉 당시 흥행엔 참패했지만 신선한 작품성과 상상력 하나만큼은 인정받았던 영화가 20여 년 만에 할리우드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영화제 기간 중 만난 고경범 CJ ENM 글로벌프로젝트담당은 <지구를 지켜라!>가 리메이크 되고, 올해 베니스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된 의미를 이렇게 말했다. “<지구를 지켜라!>는 봉준호와 박찬욱이 등장한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기에 나온 상상력입니다. 이걸 리메이크한 <부고니아>는 그 상상력이 지금도 세계 영화 시장에서 유효하다는 걸 보여준다고 봐요. 이런 맥락에서 이 영화가 <어쩔수가없다>와 함께 베니스에 초청받은 건 상징적인 사건이죠.”

<부고니아>는 위기에 빠진 한국영화 산업에 새로운 활로를 던졌다는 평가다. 투자 경색으로 신작 제작이 멈춘 충무로에 한국영화 지식재산권(IP)으로 새로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기 때문이다. K-콘텐츠가 세계적인 주류 문화 트렌드로 자리 잡은 시점에서, 한국적인 상상력과 스토리가 글로벌 소구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한국영화계가 오직 한국 시장만 바라보고 작품을 만들어선 안 된다는 시그널을 보여준 셈이기도 하다. 영화제 기자회견에서 만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바로 반응이 왔다”며 “조금씩 시나리오를 흔들어보며 상상했던 것과 맞춰 나갔는데, 정말 강렬했던 여정”이라고 말했다. 

베니스영화제가 폐막한 뒤 국내에선 <어쩔수가없다>의 황금사자상 수상 불발에 아쉬운 기색을 드러낸다. 영화제 현장을 다녀온 입장에선 아쉬움보다는 기대감이 크다. <어쩔수가없다>에 대한 찬사, 한국영화 IP를 활용한 <부고니아>의 선전은 한국영화가 여전히 세계영화계 주류 담론의 한복판에서 설득력을 갖고 있음을 확인시켜주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 본섬과 리도섬을 가로지르는 물 위를 건너며 일정을 챙긴 불편함조차 한국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목격한 대가로 기꺼이 치를 만한 통행세처럼 느껴졌다. 베니스영화제는 막을 내렸고 극장가는 여전히 보릿고개를 넘고 있지만 그래도 한국영화에 대한 낙관적인 상상은 어쩔 수가 없다.

<지구를 지켜라!>의 할리우드 리메이크 <부고니아>는 한국영화의 상상력과 스토리가 전 세계에서 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사진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맨 오른쪽)과 출연진
(제공=Andrea Avezz, 베니스국제영화제. AS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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