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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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속에 공포를 담은 영리한 실사화
<좀비딸>
글 _ 조재휘(영화평론가)
2025-08-18
웹툰 소재 영화라는 현상의 기시감
<은판 위의 여인>(2016) 때 구로사와 기요시는 인터뷰에서 “일본에서는 보통 감독들이 작업물을 가져와서는 ‘이걸 각색해서 영화로 만들자’고 말하는 일이 허다하다”며 지나칠 정도로 베스트셀러 소설과 인기 만화의 재현으로 몰려가는 일본영화계의 경향을 비판한 바 있다. 이는 더 이상 작가주의가 설 자리를 잃어 가니 거장들은 해외로 나가고 자국의 실사영화가 관객에게 외면받으며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일본영화계 나름의 자구책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학과 만화, 애니메이션의 산업적 기반이 상당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원작의 팬 층으로부터 유입될 잠재적 관객의 존재를 상정하고, 그중 일부라도 끌어들이면 손실은 보지 않을 것이라는 시장성에 대한 분석이 깔려 있는 것이다.
한국영화에서 점점 활발해져 가는 웹툰의 실사화 역시 비슷한 현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웹툰은 대중적 파급력이 큰 매체로 자리 잡으면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고, 그에 따라 웹툰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 드라마의 비중도 꾸준히 증가해 왔다. <다세포 소녀>(2006)와 <아파트>(2006)가 시범적으로 물꼬를 텄고 <이끼>(2010)와 <내부자들>(2015)의 성공이 충분한 상업적 가능성을 확인시켜주었다면 <신과 함께-죄와 벌>(2017)과 <강철비>(2017)의 대대적인 성공은 웹툰 소재 영화를 블록버스터 규모로 키우는 기점이 되어 <전지적 독자 시점>(2025)에만 312억 원이 투입되기에 이르렀다. 극장 영화만 아니라 드라마 시리즈로까지 시선을 넓혀보면 <지옥>(2021)과 <지옥 시즌2>(2024), <무빙>(2023)과 <정년이>(2024) 등으로 이러한 경향은 더욱 결정적인 것이 된다.
한국영화 산업의 붕괴와 극장의 침체를 심심찮게 말하게 된 시점에서 웹툰 원작의 실사화가 늘어만 가는 이러한 경향은 연기력이 부족한 아이돌의 주연배우 기용과 더불어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니다. 양질의 각본과 오리지널 기획은 사라지다시피 줄어만 가는데, 그에 반비례하듯 미디어믹스 기획의 산물이 범람하는 이 상황은 한국영화에서 장르의 규율을 따르면서도 대중성과 작가성의 균형을 맞추고자 하는 감독이 운신할 자리는 줄어드는 반면, 철저히 검증된 아이템에만 의존하는 기획에 의해 영화 제작이 주도되는 현실을 방증한다. 업계에는 리스크를 감수하는 모험적 사고는 사라지고 채산만 맞으면 된다는 식의 기조가 만연하게 되었으며, 더는 주류 영화에서 진지한 함의를 담은 작품을 만들기가 어려워졌다. 78회 칸국제영화제 주요 부문 초청작에 한국영화가 한 편도 호명되지 못한 건, 지난 십여 년간 개선의 여지가 분명 있었음에도 외면한 채 시장주의 일변도로 달려오며 착실하게 스스로의 토대를 망가뜨려 온 한국영화 시스템이 거둔 씁쓸한 귀결이다.
웹툰 실사화의 모범이 된 <좀비딸>
<좀비딸>(2025)은 먼저 언급한 한국영화 일련의 경향성에 그대로 부합한다. 이건 아무리 보아도 동명의 네이버 웹툰 인기작을 소재로 삼아 관객 수를 확보하려는 상업적 기획의 산물이자 가족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소시민적 신파와 한동안 범람했던 좀비 아포칼립스, 배우의 개인기에 의존하는 코미디 등 현대 한국 상업영화 일각의 전형성을 답습하고 있을 따름이지, 필감성이라는 감독의 필모그래피가 발전해 나가는 흐름을 논의할 성격의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다분히 소재주의적인 색채를 띠는 영화들이 원작의 인기에 편승하려는 얄팍한 의도로 졸속성을 면치 못하는 것과는 대조적이게도, <좀비딸>은 의외의 준수한 만듦새를 보여주는 영화다. 여기에는 비록 고유의 작가적 개성이나 통념의 허를 찌르는 재기(才氣)는 없지만, 대다수의 관객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대중영화로서의 본분을 지키면서 일정 수준의 영화적 세공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웰메이드에의 지향점이 있다.
웹툰 원작의 영화화는 사실 양날의 칼이기도 하다. 원작의 팬덤을 극장에 대거 끌어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상업적 잠재력이 있지만, 그런 만큼 각색에 실패하면 광범위한 팬덤의 비판에 직면해야 한다. 영화 <신과 함께>가 원작의 변호사 캐릭터 진기한을 삭제한 대신 차사 강림에게 역할의 일부를 떠넘긴 점이나, <비질란테>가 8부작 시리즈임에도 141화에 달하는 원작의 인물 간 관계 형성과 과거사, 결전으로 가기까지의 복선을 대거 생략해 개연성에 문제가 있고 원작에 비해 단조로워 본래의 매력을 살리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았던 걸 상기해보자. 이는 웹툰에서 실사영화로 매체를 바꿀 때, 얼핏 비슷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실상 각 매체가 가지는 특성이 전혀 다름에도 이야기의 대략적인 윤곽만 가져오면 된다는 몰이해에 기인한다.
연재를 이어가는 도중 급격한 인기 저하나 논란으로 인해 졸속으로 마무리되지 않는 한, 웹툰은 분량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포맷이기에 복잡다단한 서사와 정보량, 다양한 캐릭터를 담아내기에 넉넉한 여유를 가진다. 반면 영화는 2시간 안팎에 기승전결을 갖추어야 하는 제약에 시달릴 수밖에 없기에 웹툰의 이야기를 가져오더라도 서사의 디테일을 살리기 어렵고, 따라서 원작의 요소들을 대거 잘라내고 직관적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단순명쾌한 플롯 안에 납작하게 구겨 넣을 수밖에 없게 된다. 또한 수용자의 입장에서 웹툰은 독자가 스스로 읽는 페이스를 직접 조절하고 때로는 반복 감상도 용이하지만 영화는 전혀 그러하지 않다는 차이도 서사를 받아들이는 독자-관객의 질적 경험에 큰 차이를 가져오는 요인이다. 그래서 웹툰을 소재로 한 영화의 상당수는 속도감 있고 빠른 전개로 흘러가는 대신, 원작의 풍부한 면면들을 대거 희생한 결과로 인해 대개 원작을 훼손하고 평범한 장르의 틀을 답습한 범작으로 주저앉았다는 평을 듣기 십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좀비딸>은 굉장히 성공적인 영화화 각색의 예시를 보여준다. 프리랜서 번역가였던 정환의 직업이 동물원 사육사로 변경되고, 친구인 동배 또한 수의사에서 약사로 설정이 바뀌고 아마추어 복싱 우승의 이력이 삭제되었다. 정환이 동배의 도움을 받아 수아를 조련하는 일련의 과정이 축소되는가 하면, 연화는 마지막에 가서야 수아가 좀비였음을 알게 되지만, 영화에서는 정환의 어머니 밤순의 집에 들르면서 원작에 비해 이른 시점에 사실을 알게 된다. 수아가 춤을 좋아한다는 설정과 놀이동산에 놀러가는 장면은 영화에서 추가된 것이며, 수아가 좀비임이 발각되는 계기도 수아의 친아버지 이문기의 시신이 발견된 것에서 놀이동산에 간 수아가 관람객과 부딪히고 그 모습을 찍은 유튜브 영상이 퍼지는 걸로 바뀌었다. 결말 또한 웹툰에서 정환은 사망 처리되지만 영화에서는 <베테랑>(2015)을 의식한 듯 병상에 누운 혼수상태에서 살짝 손끝을 움직이는 걸로 살아날 것임을 암시하는 등 여러 세부 사항에서 적지 않은 각색이 가해졌지만, 딸의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버지의 부성애라는 극의 중심을 유지한 바탕에서 이루어진 세부적 조정에 가깝다.
이장과의 대립이나 정환 가족이 국민 역적으로 몰리고 갈등이 심화되는 과정, 정환 가족과 마찬가지로 좀비가 된 가족을 몰래 감춰 둔 다른 집안이 많았다는 점이나, 좀비 사태가 진정되고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온 세상의 변화상 등을 그린 에피소드는 대거 축소되거나 삭제되었고, 원작에선 느긋한 시간을 보내다가 집 안에서 제압당한 정환이 수아를 데리고 무인도로 탈출하고자 선착장까지 도망친 끝에 진압대와 마주치도록 바뀌었다. 독립적인 완결성을 갖는 한 편의 극으로 만들기에 불필요한 서사의 가지를 대거 쳐내고 메인 플롯에 집중하면서 보다 극적이고 효율적인 전개가 이루어지도록 한 이러한 각색은 얼핏 평범해 보이지만, 웹툰과 영화 두 매체의 차이를 고려해 원작의 정체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한 노력의 산물이다. 이는 앞서 공개된 <전지적 독자 시점>이 기본적인 이야기 흐름은 따라가지만 과정의 개연성과 핍진성, 등장인물의 캐릭터성을 대거 바꾸어 버리면서 원작을 훼손했다는 비판적인 반응을 얻은 것과 극단적인 대조를 이룬다. 물론 좀비 아포칼립스라는 상대적으로 익숙한 배경 설정을 취하는 <좀비딸>과 달리 <전지적 독자 시점>은 극에 몰입하기 전에 관객이 받아들이고 숙지해야 할 세계관에 관련한 정보량이 한 편으로 압축하기엔 과도하게 크다는 점도 각색에 난항을 불러온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좀비딸>에 담긴 한국영화의 정치적 무의식
영화가 지니는, 만화나 애니메이션과의 근본적인 차이는 현실의 피사체에 기반을 둔다는 데 있다. 의외로 인간의 뇌는 미세한 차이를 쉽게 알아차리고 반응하기 때문에 아무리 극사실적인 표현과 해상감을 뽐내는 컴퓨터그래픽(CG)이라도 실사와의 위화감을 극복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전지적 독자 시점>의 실패에는 원작을 파괴하다시피한 시나리오의 문제도 있지만, 실사 촬영의 품위를 따라오지 못하는 디지털 이미지의 조악함이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자아낸 면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만화나 애니메이션은 반대로 대응한다.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디테일을 덜어내 버린 대신 특징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변형과 과장, 왜곡을 가하는 데포르마시옹(Déformation)은 프레임 속의 요소들을 기호화시켜 버림으로써 비현실적인 장면을 접하는 뇌의 검열을 우회하고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와 만화는 시각 매체이지만 전혀 다른 영역일 수밖에 없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는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연출 기법과 디자인도 실사영화에 고스란히 옮겨 오는 순간 어색해지는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2021)에서 무기가 카페에서 <마녀 배달부 키키>(1989)의 실사 리메이크를 칭찬하는 커플의 대화를 듣고 속으로 화를 삭히는 대목에서 은연중 드러나듯, 일본영화계에서 지금도 양산되고 있는 리메이크 실사화가 어김없이 조악하다는 혹평을 면치 못하는 건, 실사화 과정에서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가지는 특유의 과장된 표현 기법을 실사에 맞게 재구성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원작 재현’을 하면서 근본적인 미학의 차이를 무시해 버리는 과오를 범해 버린 탓이다.
<좀비딸>의 영리함은 실사로 구현했을 때 현실감을 해치는 만화적 표현을 구분해 적절히 걸러냈다는 데 있다. 특히 원작에선 사람처럼 두 발로 걸어 다니거나 정환 가족과 함께 쌈을 싸먹고 사람의 말을 하는가 하면 좀비가 된 수아를 무력으로 제압하던 고양이 애용이의 존재감이 영화에서는 대폭 줄어들었는데, 만약 웹툰 원작 그대로 애용이의 캐릭터성을 살려냈다면 순간순간은 즐거울지 몰라도 기괴하고 유치찬란하다는 비판을 모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실사의 실감을 갖게 되면서부터 <좀비딸>은 소소한 일상 코믹물의 성격을 지녔던 웹툰 <좀비가 되어버린 나의 딸>과는 사뭇 다른 결과 함의를 얻게 된다.
웹툰에서는 데포르메가 가해지는 만화의 특성상 아무리 잔인하고 충격적인 상황이 그려지더라도 체감되는 공포와 거부감의 수위는 낮다. 우리의 뇌에서 이미 현실이 아닌 걸 인식하고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사영화의 영역으로 넘어오면 만화의 프레임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것이라도 받아들이는 시각정보량의 차이가 극대화되기 때문에 관객의 입장에서 받게 되는 실감의 편차가 비교할 수 없이 커지게 된다. 병원에서 군인이 소총으로 좀비를 사살하는 초반부의 장면부터 감지되는 좀비의 혐오스러움과 폭력의 강도는 원작(에서 경찰이 권총을 꺼냈던 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감은 영화 <좀비딸>이 웹툰 <좀비가 되어버린 나의 딸>의 실사화를 떠나서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이라면 이미 경험했거나 잠재적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의 불쾌한 기억, 심리적 외상(Psychological Trauma)을 환기시키게 하는 기제가 된다.
예컨대 <괴물>(2006)이나 <부산행>(2016)과 같은 영화들은 각각 괴수물과 좀비물이라는 장르의 콘셉트를 취하지만, 장르의 관습을 따르기보다는 아이디어의 구성요소를 부분적으로 가져오고, 그것을 한국 사회의 일상적 풍경에 적용함으로써 관객들이 암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사회적 공포를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전략적 일치점을 보인다. 그것은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할 국가의 무책임과 무능력인 한편 언제든지 주변 사람들이 적으로 돌변해 목을 졸라올지 모른다는 가족 외의 타자, 공동체에 대한 불신이다. 즉, 한국영화에서 한국 사회는 돌발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진 적당히 평화로운 외양으로 봉합되어 있지만, 실상은 법과 제도에 대한 일말의 신뢰와 같은 사회적 자본이 파산해 버린 상태이며 국가와 타자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공동체가 아니라 생존을 방해하고 목줄을 억죌 뿐이기에 기피해야 할 대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좀비딸>은 웹툰 원작이 존재하고 유머가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작보다는 한국 사회의 표층 아래 내재된 잠재적 현실의 공포를 드러내고자 했던 <괴물>과 <부산행>의 계보에 속한 영화로 받아들이게 된다. 진정한 공포는 좀비가 아니라, 사회적 정상성이 무엇인가를 규정짓고 그 범주에서 벗어난 타자들을 상식의 궤를 벗어난 비정상으로 간주해 사살하는, 일말의 여지를 주지 않는 국가 장치의 무자비함에 있다. 웹툰에서는 그럴 의도까지는 없었으리라 짐작되지만 실사화된 <좀비딸>의 몇몇 순간들은 4·3 사건에서 5·18 광주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자국민을 폭도나 간첩, 빨갱이로 규정하고 거리낌 없이 폭력을 행사했던, 혹은 세월호 유가족을 비롯해 사회적 소수자, 피해자들을 낙인찍고 조리돌림을 가했던 근현대사 이래의 불우한 기억들을 연상시킨다. <좀비딸>이 손익분기점을 넘기고 220만 관객을 기록한 현시점에서 이 영화의 성공 요인을 꼽으라면 혹자는 인기 웹툰의 실사화 때문이라 하겠지만 그보다는 한국 사회에 대해 갖는 자국민의 인식과 대중적 정념을 건드렸다는 데서 찾는 편이 보다 더 실제에 부합되는 설명일 것이다.
우려되는 건 웹툰 실사화 기획이 점점 늘어날수록 좁아지고 빈곤해져만 가는 한국영화의 창조적 여력, 그리고 대규모 예산을 투입해 블록버스터로 몸집을 키운 실사화 작품들이 실패했을 때 영화 산업에 끼치게 될 치명적 파장이다. 비록 <좀비딸>은 흥행의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지만 훨씬 많은 예산을 들인 <전지적 독자 시점>의 실패는 과거 일본영화가 각각 30억과 80억 엔의 천문학적 제작비를 들이고 본전조차 건지지 못했던 <캡틴 하록>(2013), <갓챠맨>(2013)과 닮은꼴로 겹쳐 보인다. 물론 한국영화에서 웹툰 원작의 실사화는 고지식하게 원작을 재현하는 데만 매달리는 일본의 그것과는 현격한 질적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코로나19 이후에도 좀처럼 침체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는 와중에, 이 유행 역시 기성의 성공 코드를 답습하는 데 그치는 현재 한국 상업영화의 고질적인 병폐를 심화시킬 뿐이지 않은가 하는 불안의 시선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