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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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❷

우리만의 세계관에 대하여

한국영화 및 영상 산업의 한계와 과제

SPECIAL ❷

우리만의 세계관에 대하여

한국영화 및 영상 산업의 한계와 과제

글 _ 성찬얼(씨네플레이 부편집장)

2025-08-18

‘작품’의 시대는 저물고 있는가. 아니면 지나치게 극단적인 기우인가. 개별 작품이 없다면, 산업과 예술계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산업적 측면에서 이제는 단일 작품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 담긴 세계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잘 만들어진 세계관은 흔히 말하는 미디어 믹스나 시리즈화를 통해 이른바 ‘유니버스’로 확장될 수 있고, 소위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기 때문이다. 업계에선 콘텐츠를 개별 작품 하나로만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잘 만든 세계관 안에서 제작하려는 움직임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최근 한국영화를 비롯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시리즈 등에서 그런 움직임이 어떤 형태로 드러나고 있는지, 또 어떤 한계와 마주했는지 짚어보고자 한다.

크로스오버 개념으로 세계관을 확장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세계관의 붐은 어떻게 왔는가 영화계에서 세계관이란 단어가 중심에 선 건 근래에 가깝다. 영화는 이제 막 100년을 넘긴, 예술 중 가장 ‘최신 유행’에 해당하는 분야인데 그중에서도 ‘세계관’이란 표현을 쓸 만한 작품들이 동시대에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는 뜻이다. 애초에 세계관이란 단어는 인문학, 혹은 문학에 훨씬 친근한 단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그 뜻도 “자연적 세계 및 인간 세계를 이루는 인생의 의의나 가치에 관한 통일적인 견해”라고 명시되어 아예 철학 용어로 분류되어 있다. 즉, 실재하는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관찰자의 주관적 시선을 이르는 단어인 것이다. 다만 그 사전적 용법을 넘어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시각’이라는 단어의 본질을 가져와 문학에서 화자 혹은 작가가 작품에 묘사하는 세계를 이르는 용어로 확장되었다. 대부분은 장르물에서 사용되지만, 비장르물이더라도 화자·작가가 취사선택한 서술로 작중 현실을 묘사하므로, 세계관이란 단어로 통용하곤 한다.

다시 영화에 비유하자면, 세계관이란 단어는 카메라가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작가가 이야기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감독이 어떤 표현으로 프레임 내 미장센을 구성하는지 모두 담는 단어다. 산업적 측면에서 영화의 세계관이라면, 곧 작중 가상의 세계를 어떻게 설계했는지를 의미한다. 영화 속 가상의 세계를 (그 세계가 실제 현실을 반영하든 아니든) 어떻게 구축하고 설정할 것인가. 그래서 다음 상품을 만들 기반을 마련해 두는 것이 산업에서 말하는 세계관의 요지다. 유니버스, 프랜차이즈, 시리즈 등으로 세계관은 연결되고 커진다.

일반적으로 그동안 영화계에서 세계관이란 단어가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은 건 하나의 세계관을 가진 영화가 성공했을 때나 속편 형식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특정한 인물, 혹은 특정한 사건을 중심으로 펼친 영화가 성공하면, 이에 따라 동일한 인물, 혹은 완결된 사건 이후의 후속 사건을 토대로 속편을 제작한다. 이 전형적인 패턴에서 벗어나는 작품이 나오기도 하지만, 대체로 본편에 등장한 조연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방식, 혹은 아예 다른 배경을 가져오되 구성이나 톤앤매너를 ‘복붙(복사-붙여 넣기)’ 하는 방식으로 본편에 종속된 시리즈를 만드는 방향으로 수익을 끌어내려 했다.

그러던 2012년 <어벤져스>가 세계적으로 흥행하며 영화계의 판도를 바꿨다. <어벤져스>는 특정 시리즈의 속편이 아닌 여러 시리즈를 경유한 이벤트 무비였다. 각기 다른 작품의 조우라는 뜻에서 보통 ‘크로스오버’라고 부르는 형식을 영화에 차용한 것이다. <아이언맨>(2008), <인크레더블헐크>(2008), <토르: 천둥의 신>(2011), 그리고 캡틴아메리카 첫 영화 <퍼스트 어벤져>(2011)를 경유한 크로스오버 <어벤져스>는 전 세계 15억 달러 수익을 올리며 ‘유니버스’라는 새로운 먹거리를 영화계에 선물했다. 마블 스튜디오가 성공시킨 이 사업모델은 레전더리 엔터테인먼트의 몬스터버스, 워너브러더스의 DC 확장 유니버스, 유니버설 픽처스의 다크 유니버스, 소니 픽처스의 스파이더맨 유니버스 등으로 이어졌다. 물론 세계에서 영화 시장 규모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 한국에서도 이 유니버스 바람이 일면서 세계관을 향한 관심도 높아졌다.

물론 이건 단순히 할리우드에서 발발한 유행 때문만은 아니다. 현직 영화·드라마 프로듀서는 “관객들이 단일 플롯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라고 세계관이 대두된 이유를 설명했다. 요즘 10·20·30대 관객들은 영상매체(TV, 드라마, 영화, 개인 동영상 등) 경험이 풍부한 만큼 하나의 플롯을 담은 작품에 관한 흥미가 상대적으로 떨어졌고, 그에 따라 다중 플롯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다중 플롯을 효과적으로 그리기 위해 세계관의 필요성이 커졌다는 것이다. 산업 내 요인만이 아니라 시대에 따른 관객의 변화에도 호응하고자 하는 움직임인 셈이다.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 유니버스
(왼쪽부터 <서울역> <부산행> <반도>)

장재현 감독의 오컬트 세계관
(왼쪽부터 <검은 사제들> <사바하> <파묘>)



세계관의 두 가지 유형 이런 세계관 구축은 보통 두 가지 양상이 있다. 첫째는 작가 중심의 세계관이다. 작가, 감독 등 특정한 창작자가 이야기를 풀어내는 과정에서 세계관을 구축해 작품에 적용하는 방식이다. 대표적인 사례라면 연상호 감독과 장재현 감독이다. 연상호 감독은 실사영화 <부산행>(2016)과 애니메이션 <서울역>(2016)을 비슷한 시기에 제작했다. 두 영화는 대한민국에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한다는 설정을 공유하는데, 실제로 모든 인물이나 사건이 이어지는 것은 아니나 극 중 상황이 연결되고 무엇보다 좀비가 된 대한민국 사회라는 배경을 경유하는 점을 발판 삼아 연상호 감독 본인이 하나의 세계관으로 공인했다. 그는 <부산행>이 천만 관객을 돌파한 이후 단편 애니메이션 <집으로>(2016), 영화 <반도>(2020), 웹툰 <631>(2021)로 자신의 세계관을 연결했다.

장재현 감독의 오컬트 세계관은 공인된 세계관은 아니나 <검은 사제들>(2015)의 가톨릭 구마 의식, <사바하>(2019)의 불교와 기독교적 세계관의 충돌, <파묘>(2024)의 한국 토종 무속과 일본 주술 등 초자연적 현상을 공유하며 하나의 세계관으로 널리 알려졌다.(최근 <검은 수녀들>(2025)에 <검은 사제들>의 출연자가 나오며 공식적으로 유니버스화되긴 했으나 이는 장재현 감독이 아닌 제작사 중심의 세계관이므로 아래에서 다룬다.) 이런 식으로 한 창작자가 작품을 거듭하며 유사한 소재, 인물 구성 등을 중첩해 세계관으로 인정받는 경우도 존재한다.

클라이맥스 스튜디오에서 주도한 ‘콘크리트 유니버스’는 웹툰 <유쾌한 왕따>(왼쪽 사진)를 기반으로 하며 현재 <콘크리트 유토피아> <황야>에서 그쳤다



반면 상업영화의 본거지 할리우드는 일반적으로 제작사·배급사 중심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세계관은 사전 제작 단계에서부터 세계관으로 설계해 그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작품을 기획하는 식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앞서 언급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다. 한국 산업에선 쉽게 시도하기 어려운 부분인데, 제작사·배급사 중심의 세계관은 시장 타기층과 회사 자본의 규모, 보유하고 있는 지식재산권(IP)의 인지도가 상당히 차이 나기 때문이다. 여러 편을 제작하며 하나의 세계관을 완성하기 위해선, 그 작품들의 흥행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데 IP의 인지도나 개봉 규모가 남다른 할리우드는 그런 부분에서 훨씬 유리하다. 물론 그만큼 짊어지는 리스크도 상당하지만.

한국영화계도 이 같은 제작사·배급사 중심의 세계관을 2020년대 들어 차근차근 도전한 바 있다. 앞서 말한 <검은 사제들> <검은 수녀들> 세계관은 두 영화의 제작사인 영화사 집에서 추진한 것이다. 클라이맥스 스튜디오에서 추진한 ‘콘크리트 유니버스’도 제작사 중심 프로젝트의 대표 예시다. 클라이맥스 스튜디오는 웹툰 <유쾌한 왕따>의 실사화 권리를 획득해 이를 토대로 다양한 작품을 기획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로 대지진 이후 엉망이 된 대한민국을 조망한 후 <황야>(2024)와 <유쾌한 왕따> <콘크리트 마켓> 등 다른 작품으로 이 대지진에서 파생된 여러 사건을 그리는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그러나 현재는 이 세계관에서 <콘크리트 유토피아> <황야> 외에는 공개된 작품이 없다. 이 부분은 결국 한국영화계의 세계관이 지닌 한계와 연결된다.

한국 대중문화의 글로벌화로 문학(어문) 저작권도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섰다(제공=KPIPA 리포트 제12호 출판 한류 지속성장을 위한 미래 과제)



넓어진 표현 수위, OTT 시대의 변화 시대의 흐름에 맞춰 꽤 발 빠르게 세계관 기획에 나선 한국영화계는 그러나 예상외의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먼저 산업의 급변화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을 기점으로 영화계는 관객몰이가 어려워진 것은 물론이고 촬영조차 어려운 시기를 지나며 급격한 위축을 겪었다. 이는 다양한 작품 제작을 바탕으로, 혹은 그것을 타깃으로 하는 세계관 기획에 제동을 걸게 했다. 당장 작품 제작이 어려운 시점에서 단일 작품도 아니고 여러 작품을 염두에 두는 기획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동반된 문제는 OTT 플랫폼의 급부상이다. 극장 방문을 자제하게 되는 팬데믹 기간 동안 OTT가 그 대체품으로 떠올랐고 영화계가 정상 궤도에 올라선 전후로 많은 작품이 배급로를 찾지 못해 OTT로 직행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니버스를 표방한 작품이 공개 전 유니버스를 철회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해당 유니버스의 작품에 대한 권리가 분산된 것으로, 이렇게 되면 세계관 기획은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변화는 두 가지 반향을 낳았는데, 하나는 장르적 허용 범위가 넓어진 것이다. 다양한 관객층을 노려야 하는, 또 심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극장용 영화보다 OTT 플랫폼은 국소적 시청자층을 겨냥해도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점에서 표현 범위나 수위가 넓어졌다. 또 이 기간에 글로벌 플랫폼이든 국내 기업 플랫폼이든 OTT 플랫폼 대다수가 K-콘텐츠를 지켜보는 글로벌 시청자층을 확보했다. 그리하여 세계관의 장르적 표현 허용 범위가 넓어지고 타깃 시청자층이 두터워짐에 따라 다양한 작품이 나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코로나19 시기를 지나며 콘텐츠계에 일어난 아이러니다. 극장 개봉작 수는 점점 더 줄어드는 반면, OTT 공개작은 작품 수가 증가했는데 제작 환경은 기존 방송계가 아닌 영화계에 가까워졌다.

이런 변화에서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소재, 즉 세계관은 상대적으로 빠르게 제작에 착수할 수 있는 기성 작품에서 구하게 되었는데, 특히 중점적으로 다뤄진 것이 웹툰과 문학이다. 웹툰은 이미 영상의 범주에 있는 분야였고, 글로벌로 서비스되는 플랫폼이 생기면서 글로벌 관객층을 노리기에도 적합했다. 문학 역시 K-콘텐츠의 부상과 함께 이전보다 번역 출판이 활발하게 이뤄져 어문 저작권 수지가 2020년 38만 달러 적자에서 2023년 148만 달러 흑자로 우상향했다(KPIPA 리포트 제12호 출판 한류 지속성장을 위한 미래 과제에서 발췌). 장르문학은 중국 성운상 번역작품 부문을 수상한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의 김초엽 작가와 영국 대거상 번역추리소설 부문을 수상한 <밤의 여행자들>의 윤고은 작가 등 여성 작가들의 활약을 필두로 독창적인 세계관을 인정받았다. 기존 문학과 궤를 달리한 웹소설 또한 한국식으로 해석한 무협이나 퓨전 판타지물 등이 성행하며 독자적 영역을 인정받았기에 영화나 드라마로도 적합한 원작들이 대거 생겨났다.

콘텐츠 제작의 무게추가 국내 산업이 아닌 OTT 플랫폼 중심으로 옮겨 가고, 기본 소비층과 장르적 허용 범위가 넓어지면서 창작자들 또한 OTT 플랫폼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글로벌 OTT 플랫폼이 한국 콘텐츠에 투자를 시작한 후 전면적으로 오리지널 콘텐츠 확보에 나서면서 다양한 방면으로 더욱 세계관을 중시한 작품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OTT 플랫폼의 성장으로 표현 수위나 장르 범주가 넓어졌으나 기존 드라마에서 흥행한 소재에 머물고 있다는 한계가 보인다. 글로벌 OTT에서 원하는 K-콘텐츠의 특징이 이런 작품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왼쪽부터 <인간수업> <지금 우리 학교는> <마스크걸>)



세계관 중심의 기획, 부딪힌 한계 그러나 현재의 세계관을 만드는 과정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 앞서 말한 대로 기업 단계에서 세계관을 주도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설령 기획 단계에서부터 세계관을 염두에 둔다 해도 문제는 이런 세계관의 설계 이유가 대체로 보여주기 위함에 가깝다는 것이다. 다중 플롯, 혹은 자극적인 시각적 요소나 사건을 만들기 위한 접근법으로 세계관을 만들다 보니 단일 작품의 시나리오나 각본에 비하면 이야기나 각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가 빈약해지고 만다. 인터뷰에 응한 제작자는 잘 짜인 세계관도, 절묘하게 설계된 이야기도 아닌 “투자 유치를 위한 세계관 설계”가 선행한다고 지적했다.

또 세계관을 디테일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기획 단계에 기획자나 작가가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문제는 영화계의 처우가 과거에 비해 좋아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시나리오 작가의 처우는 좋지 않아서, 전문 작가의 손을 거쳐 공들인 세계관이 나오는 경우가 드물다. 대체로 감독이나 제작자 등이 작품의 전권을 쥐고 있고, 이들에게 세계관이 좌지우지되는 현실은 2025년 개봉한 모 영화의 저작권 소송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이런 한계를 타파하고자 세계관이 이미 완성된 IP를 구매해 영상 작품으로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조차도 세계관이란 측면에선 큰 발전을 거뒀다고 보긴 어렵다. ‘원작의 영상화’에 있어서 원작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세계관에 관한 재해석이나 영상 매체에 적합한 방식으로의 세계관 구현이 부족하다는 의미다. 한 제작자는 “상징성이 있는 IP의 부재”가 이런 현상과 이어진다고도 지적했다. 할리우드 기준으로 이미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는 IP가 여러 차례 영상화되면서 원작과 달라도 그 세계관을 갈고 닦아 가는 것에 비해, 현재 한국 문화계의 IP는 그 정도로 오랜 역사를 거친 것이 없다는 것. 할리우드의 마블이나 DC가 같은 캐릭터를 바탕으로 다른 세계관을 여러 차례 구축한 것과 달리, 한국은 그렇게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세계관을 지닌 작품이 부족하거나 각색의 전문성이 부족해서 ‘원작의 단순한 영상화’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SF 단편 소설 7편을 토대로 만든 8편의 SF 앤솔로지 드라마 <SF8>



또한 한국 영상 콘텐츠의 오리지널 세계관, 원작 기반 세계관 모두 기존의 성공 사례를 약간 변형하는 것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한국영화를 관통했던 흥행작의 소재들, 예를 들어 조직범죄, 학교 폭력, 좀비 등을 꼽을 수 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에서 특히 이런 경향이 도드라지는데, 오리지널 세계관을 토대로 한 <인간수업>(2020)은 청소년 범죄물이었고, 웹툰을 옮긴 <지금 우리 학교는>(2022)은 좀비물이란 장르적 토대 위로 청소년 폭력을 그린 바 있다. <범죄도시> 시리즈(2017~) 역시 하나의 세계관으로 본다면 주인공 마석도 형사를 통해 각종 범죄를 경유하며 세계관을 펼쳐 나갔다. 물론 국내에서 흥행한 소재들이 가장 한국적인 면모, 대중의 취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지표이긴 하나 결국 세계관을 통해 산업을 확장한다는 면에선 동어반복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색다르게 판타지, SF적 상상력을 토대로 한 세계관이 등장한 바 있긴 하다. <승리호>(2021)나 <고요의 바다>(2021), <해피니스>(2021), <택배기사>(2023) 등은 SF를 전면에 내세웠고 지향하는 서브 장르는 각각 모험극, 스릴러, 호러, 포스트 디스토피아 등으로 다양하다. 그러나 그 세계관의 탄탄함과는 별개로 SF 장르에 들어가는 제작비, 국내 시장에서의 미적지근한 장르 선호도, 해외 작품들과의 차별화 실패로 각 작품이 지닌 세계관이 폭넓게 이어지지 못했다. MBC와 웨이브(Wavve)가 공동으로 제작한 <SF8>(2020)의 경우, 오리지널 시나리오 <만신>을 제외하고 SF 단편 소설 일곱 편을 가져와 여덟 편의 SF 드라마 앤솔로지를 선보이며 SF 영상물의 지반을 넓혀보려 했으나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다.

성과를 거두고 있는 부분은 오히려 애니메이션 쪽이다. 웹소설을 바탕으로 한 <나 혼자만 레벨업>(2024~)이나 웹툰을 바탕으로 한 <유미의 세포들 더 무비>(2024), PC통신 시절을 대표하는 오컬트 소설을 옮긴 애니메이션 <퇴마록>(2025) 등이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이들은 원작의 세계관을 성실하게 옮기거나 이전과는 다른 특색 있는 비주얼로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특히 <나 혼자만 레벨업>은 애니메이션의 흥행에 힘입어 변우석 주연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실사화까지 결정되며, 한국 웹소설 열풍에 박차를 가하는 분수령이 되고 있다.

웹툰 원작 <유미의 세포들 더 무비>(왼쪽 사진), 오컬트 소설을 옮긴 <퇴마록>은 세계관을 품고 대중의 관심을 받은 애니메이션이 되었다



현실적 절충안 찾는 과도기 한국영화 및 영상매체 산업이 세계관의 중요성을 깨닫고 발 빠르게 적응하고 있는 건 분명하다. 그런 형태의 작업은 분명 과거의 산업이 해 왔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러나 최근 원작을 토대로 영상화한 <전지적 독자 시점>의 경우, ‘원작 파괴’라는 반응을 자아내는 것을 보면, 세계관을 구체화하고 작품에 녹여내는 부분에서 부족한 역량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IP의 중요성, 스토리와 세계관의 일체감, 상품성과 작품성 깊은 디테일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 한국영화 및 영상 산업계는 그에 맞는 방안을 찾아가는 과도기라고 볼 수 있다. 아직은 본고장과는 차이가 나는 다소 미숙한 방법일지라도, 이렇게 세계관의 노하우가 쌓인다면 언젠가 가상의 세계가 현실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 날이 오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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