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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 속에 깃든 의미들
<광장> 김보솔 감독
글 _ 김혜선(웹매거진 한국영화 편집장)
사진 _ 서범세(한국경제매거진 기자)
2025-07-15
잿빛 가득한 거리. 그곳에 자전거를 밀고 가는 남자가 있다. 거리를 오가는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훌쩍 솟아 있는 키, 그리고 밝은 금발. 하얀 눈이 촘촘하게, 어쩐지 슬프게 흩날리는 광장 위에서 남자는 자전거를 탄다. 광장을 빙빙 돌며 이어폰을 끼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얼굴 위로 이런 대화가 스친다.
“올해는 얼굴 보기 힘들겠고. 내년엔 돌아올 거니?”
“잘 모르겠어요. 아직 여기 할 일이 남아서요.”
애니메이션 <광장>은 북한의 평양에서 장기 근무 중인 스웨덴 외교관 이삭 보리와 그가 사랑하는 북한 여성 서복주, 그리고 보리를 감시하는 통역관 리명준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러닝 타임 1시간 13분, 제작 기간 5년 11개월. 신인 김보솔 감독은 그 사이 부족한 제작비를 위해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고, 소수의 스태프와 작품에 대한 애정을 끈질기게 이어갔다. 그리고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졸업 작품이 된 <광장>으로 올해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장편 콩트르샹 부문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 공개된 소지섭 주연의 넷플릭스 시리즈 <광장>과 혼동하지 마시길.) 이 부문에서는 이미 안재훈 감독의 <무녀도>와 홍준표 감독의 <태일이>가 각각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바 있다. 대규모 자본의 작품들이 많은 장편 경쟁 부문에 비해 애니메이션의 독립적이고 도전적인 예술성을 조금 더 주목하는 장편 콩트르샹 부문에서 한국의 애니메이션은 좋은 계보를 이어온 셈이다. 물론, 졸업작으로 수상한 경우는 김보솔 감독이 처음이다.
외로움이라는 언어
북한이라는 나라, 평양이라는 도시, 감시 사회라는 분위기를 애니메이션으로? 당연히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다. 굳이 왜냐고 묻는 이도 있었다. 김보솔 감독은 “연극영화과를 다니던 대학 시절에는 훨씬 장르적이고 대중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성향이 강했거든요. <광장>은 매우 마이너한 이야기이고, 제 인생에서 딱 지금만 쓸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라는 답변을 들려줬다. “남북한 이야기가 지금의 20대, 30대에게는 더 이상 생각해볼 만한 주제도 아니잖아요. 통일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도 너무 없고요. 예전에는 피로 이어져 있는 가족이 여전히 북한에 있는 세대가 많았지만 지금은 그 수가 많이 줄었죠. 더 이상 남북한에 대한 이야기들을 안 하니까, 지금 하는 게 오히려 의미가 있겠다 싶었어요.” 보리가 한국인 할머니를 둔 한국계 3세, ‘쿼터’여서 한국어를 잘하는 것도 피로 이어진 세대를 표현하기 위한 시나리오상의 설정이었다.
김보솔 감독의 북한에 대한 관심은 고등학교 시절에 형성되었다. 생물 수업 시간에 몸살이 난 생물 선생님 대신 교실에 들어온 어느 문과 선생님이 자율학습을 시키던 도중, 남북한과 미국, 러시아의 국제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당시 한국 고등학교 입시 체제에서는 듣기 힘든 뜻밖의 이야기였다. 그에 더해 선생님이 특별 언급했던 책, 리영희 작가의 <대화>가 기억 속에 콕 박혀 버렸다. 재수 시절과 대학 시절 리영희 작가의 책들을 탐독한 것도 그 영향이다.
어느 정도 관심이 내재된 상태에서 2016년에 접한 흥미로운 기사 하나가 김보솔 감독에게 일종의 트리거가 되었다. 북한에서 3년간 실제로 근무했던 스웨덴 외교관이 남한에 와서 인터뷰를 한 기사였다. 북한에서의 생활에 대한 스웨덴 외교관의 첫 마디는 “너무 외로웠어요”였다. 하루 업무가 끝나고 북한 동료들과 맥주 한 잔 나누는 게 소원이었지만 감시와 차단 때문에 불가능했다는 것. “그 외교관이 스트레스가 너무 많이 쌓이면 아무도 없는 광장에서 혼자 자전거를 타는 게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었다는 인터뷰를 읽는데, 이미지가 너무 선명하게 그려졌어요. 그때 북한에서 외롭게 자전거를 타는 노랑머리의 외국인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이방인의 외로움’을 키워드로, 낯선 배경은 북한으로. 그렇게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잘 모르는 북한 사회에 대한 궁금증이 쌓여 갔다. 북한을 기존 미디어에서 다루는 방식과는 다르게 다루고 싶었다. 북한 특수요원이 엄청난 액션을 펼치는 애니메이션도 아니니 철저한 고증도 하고 싶었다. 고민 끝에 프로듀서를 통해서 탈북민 카페에 글을 올려 평양에 거주했던 탈북민을 찾았다. 그렇게 만나게 된 이가 통일부에서 자문 및 여러 일을 하고 있던 오진아 감독이다. 4시간여의 인터뷰 끝에 일어서면서 김보솔 감독은 오진아 감독에게 물었다. “감독님은 북한에 있을 때 외로웠던 적 없으세요?” 오진아 감독의 대답은 의외였다. “외로운 때가 없었다”는 것이다. 너무 불안했기 때문에, 불안의 장막이 외로움을 가렸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후 집으로 돌아온 김보솔 감독은 시나리오를 다시 썼다.
체류 연장 신청을 하더라도 언제 떠날지 알 수 없는 근무 환경. 한국어를 아무리 유창하게 쓰더라도 표현하지 못하는 마음. 서로 바라보면 행복하고 벅차지만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아슬아슬한 만남. 조용한 감시의 시선을 느끼며 홀로 저녁을 먹고 취해야 하는 나날. 평양 사람들 속에 섞일 수 없는 이방인 보리의 외로움과 안타까움이 이야기의 전반부를 차지하다가 어느새 그 외로움은 그런 보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보고하는 통역관 명준의 외로움으로 옮아 간다. “명준의 외로움을 표현하는 게 클라이맥스가 되었어요. 이야기의 시작에는 보리와 복주의 로맨스가 있지만 사실 주인공은 그들을 바라보는 명준이죠.”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의 장편 콩트르샹 부문 심사위원들(인연을 잃어버린 외로움을 개와 로봇의 관계로 기막히게 묘사했던 애니메이션 <로봇 드림>의 파블로 베르헤르 감독이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다)도 그 외로움에 주목했다. 수상 이후 심사위원들은 김보솔 감독에게 “인물이 가진 외로움이 잘 전달되었다”는 말을 건넸다. 외로움이 만국 공통의 언어라는 것을 새삼 인정한 셈이다.
납작한 연출을 벗어나기 위해
<광장>의 세계에서는 지브리, 호소다 마모루, 신카이 마코토 등 한국 애니메이터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일본 애니메이션의 흔적을 발견하기 어렵다. “캐릭터 디자인은 프로덕션 디자인, 조연출까지 맡은 애니메이터 오유진 감독이 담당했어요. 우리의 애니메이션 인생에서 스타트가 되는 이 작품을 우리만의 스타일로 만들자, 일본 애니메이션과 다른 독창성 있는 스타일을 구축해보자고 논의했죠. 그 차별성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던 것 같습니다.” 김보솔 감독의 의지 때문인지 보리, 복주, 명준을 비롯한 여러 캐릭터의 디자인은 각각의 개성이 뚜렷하다. 주요 인물들의 과장된 액션보다 감정의 파장과 교류가 중요했기 때문에 보리와 복주가 평양을 떠나는 문제를 두고 싸울 때, 명준이 보리를 밀어낼 수밖에 없을 때의 자연스럽지만 강렬한 표정 변화도 인상적이다.
극 중 캐릭터들의 얼굴에는 코와 뺨에 줄곧 홍조가 머물러 있다. “인물들의 얼굴을 살색으로만 채우면 화면에서 너무 납작하게 보이기 때문에 텍스처가 느껴지는 홍조를 표현해서 두껍게 보이게 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야기의 배경이 평양의 겨울인 것도 작용했다. 시린 겨울이 느껴지게 만들기 위해 어떤 신에는 얼굴의 홍조를 일부러 과장하고 입김의 표현도 세심하게 했다.
포토숍으로 그려서 여전히 손맛이 느껴지는 캐릭터들을 둘러싸는 배경은 광고 제작 및 그래픽디자인 전문 회사 크리에이티브 섬에 맡겼다. 실제 북한의 풍경 사진들에서 <광장>의 배경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다. “대동강이 흘러서인지 몰라도 대부분의 사진들이 뿌옇더라고요. 안개가 많이 끼어 있었어요. 그리고 북한이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이 되면 습도가 높아져서 시야가 뿌옇게 된다는 사실에도 집중했죠. 그레인 효과도 많이 넣어서 거친 텍스처를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김보솔 감독의 노력 덕분에 극 중의 날씨는 인물들의 불안과 긴장, 외로움의 정서를 나타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광장>에는 없는 것도 많다. 만지고 싶게 폭신하고 청명한 구름, 빌딩 숲 사이 노을지는 하늘, 석양의 빛이 동네 골목에 내려 앉는 순간 같은 것들. “사실 제작비가 부족해서 그림자를 많이 포기하려고 한 것도 이유예요. 그림자가 있으려면 빛의 방향이 뚜렷한 배경이 있어야 되니까요. 그걸 의도적으로 피해 가려고 했죠. 그래도 눈이 오는 배경은 날씨와 시간대를 철저하게 계산해서 만들었습니다.”
애니메이션 특유의 과장과 생략을 구사하기보다는 극영화적인 연출로 러닝 타임 내내 인물들의 긴장과 불안을 촘촘하게 담았다는 점도 눈길이 간다. “너와 만나는 것 자체가 복주에게는 위험한 일이라며 그녀를 찾지 말라”고 하는 명준의 뒤에서 계단 위에 우두커니 서 있는 보리의 모습을 점진적인 컷의 변화로 보여주는 장면, 후반부 명준이 사라진 보리를 찾기 위해 지하철로 달려가고, 그런 명준을 상관인 진철이 추격하는 장면은 매우 영화적인 시퀀스이기도 하다.
“카메라가 물리적으로 다 있어야 있을 수 있는 곳에 있죠. 180도 라인을 철저하게 지키고 숏(Shot) 사이즈도 약간 클래식한 게, 영화를 전공했던 대학 시절의 습관이 몸 배어 있는 것 같아요. 숏을 지루하게 짠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는데, <광장>은 그런 습관을 깨려고 노력한 작품이기도 해요.” 하루 아침에 복주가 사라진 후 더 강화된 감시를 받던 보리가 어느 밤 술에 취해 끝없는 절망 같은 어둠 속으로 추락한다. 그것이 곧 숙소 창문 아래로 맥주병이 떨어지면서 취한 보리의 몸이 쏟아지듯 창문에 걸리는 장면과 연결된다. 이 시퀀스는 <광장>에서 애니메이션적인 과장과 상상이 가장 잘 발휘된 장면이다. 이제 막 애니메이션 세계의 문을 연 김보솔 감독은 장르적 현실의 서스펜스 속에서 애니메이션이 지닐 수 있는 변칙의 표현력을 습득해 가는 중이라고 해도 좋겠다. 이런 그의 진지함은 스웨덴인의 한국어와 북한말을 연기해줄 수 있는 배우들을 캐스팅해 수많은 연습을 시킨 노력으로도 증명된다. 1960년대 한국의 천재 작곡가로 꼽히지만 월북 이후 사라진 김순남의 음악을 편곡하고 싶어 할 만큼의 치열한 마음 또한 홍상수 영화의 음악으로 유명한 정용진 음악감독이 전례 없이 학생 졸업 작품의 음악을 맡아준 원동력이 되었다.
이야기의 처음과 중간, 마지막을 장식하는 광장은 다양한 의미의 공간이다. 사방이 열린 공간인 동시에 감시의 시선으로 얽힌 정치적 공간이기도 하고, 불꽃놀이와 축제가 열리는 해방의 공간이기도 하다. 동시에 숱한 군중 속에서 홀로 있는 나를 깨닫거나 외로움 가득한 이들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의 공간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김보솔 감독에게 광장은 어떤 의미일까? “정화와 치유가 되는 공간이죠.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는 한 인간이 온전히 건강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개성이 발휘되는 밀실과 사회성이 드러나는 광장이라는 공간이 서로 잘 순환되어야 하는 걸 말하고 있잖아요. 소설 <광장>의 주인공 리명준이 진리를 찾아 떠났던 젊은 청년이었다면 애니메이션 <광장>의 리명준은 또 다른 많은 의미들을 품고 있죠. 그래서 제가 광장이라는 공간을 선택한 것 같습니다.”
새로운 자취의 첫걸음으로
연극영화과에서 영화를 전공한 대학 시절 촬영과 스토리보드, 모션 그래픽 작업을 주로 했던 김보솔 감독은 졸업 후 전시기획사의 영상팀에서 일했다. 몇 차례 인디밴드 뮤직비디오의 애니메이션 작업을 맡았다가 애니메이션의 매력에 빠져 아예 직접 만들어보자고 마음먹었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애니메이션 전공으로 입학한 후 그를 설레게 한 것은 아카데미의 자료실에 놓여 있는 졸업생들의 전설적인 단편들이었다. 봉준호 감독의 <지리멸렬>, 조성희 감독의 <남매의 집>, 엄태화 감독의 <숲> 등. “자료실에 VHS 테이프로 보관되어 있는데, 거기서 빛이 나는 것 같은” 작품들이었다.
그 전설적인 작품들 사이에 함께 놓이고 싶어서, 후회하지 않을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다짐은 김보솔 감독을 외로울 틈이 없게 만들었다. 대신 불안으로 인한 번아웃이 찾아왔다. 시작할 때는 이렇게까지 힘들 줄 몰랐던 5년 11개월. 서른여덟이 되어서야 결실을 맺었으니,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쌓아 가려고 자신을 다독이지 않았다면 끝내기 힘들었을 여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스 앤더슨처럼 극영화도 애니메이션도 만들 수 있는 연출자가 되고 싶다는 김보솔 감독은 어느새 차기작 구상을 시작했다. 세 자매가 광화문 한복판에서 귀신과 싸우는 이야기로, 대형 참사를 겪었던 이들이 서로 연대하고 아픔을 공유하는 가치를 담고 싶다고. <광장>의 개봉도 준비하면서 다가올 국내 관객들의 반응이 가장 궁금한 한편,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이들에게 한국 내에서만이 아니라 해외 애니메이션 네트워크와의 접촉, 해외 투자의 길도 많이 열리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한국의 신진 애니메이터나 영화감독들이 해외 영화제의 네트워킹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도록 정부의 제도적 도움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어쩌면 김보솔 감독만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갈 젊은 감독들의 바람이기도 할 것이다.
하나의 창이 닫히면 하나의 창이 열린다. 한국영화가 길고 긴 어려움의 터널에 진입했다면, 한국의 애니메이션은 지난해부터 놀랄 만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사랑의 하츄핑> <퇴마록> <킹 오브 킹스> 같은 대규모 자본이 들어간 작품들이 국내외 관객의 관심을 받으면서 한국의 애니메이션은 도약의 시기를 맞는 느낌이다. 규모는 다르지만 애니메이션 <광장> 또한 새로운 자취의 첫걸음이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시대를 슬퍼했다는 최인훈 소설가의 태도를 기준 삼아 <광장>을 만들었다는 김보솔 감독의 치열하고 진중한 미래를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