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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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준이 지난 여름에 겪은 일을 알고 있다

<여름이 지나가면>

글 _ 김철홍(영화평론가)

2025-07-01

제목에 ‘여름’이 들어가서일까? <여름이 지나가면>은 보고 났을 때 공포영화를 본 듯한 찝찝함을 남기는 영화다. 단지 공포영화가 여름을 대표하는 장르여서만은 아닐 테다. 무엇보다 뒷맛이 남는 것은 영화의 마지막 때문이다. 해피 엔딩이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분명 영화가 보여준 것 이상의 큰 비극을 예감하게 만드는 결말이다. 일단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불길함의 근거가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오토바이 소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영문(최현진)-영진(최우록) 형제가 탄 오토바이는 아마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제자리인 극 중 작은 도시로 돌아올 것이다. 다시 말해 더 큰 비극을 만들어낼 존재는, 그래서 무서워해야 할 장본인은 그들이 아니다. 내가 공포를 느낀 대상은 엄마가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아 매우 확정적으로 도시에 돌아올 기준(이재준)이다.

바로 그 기준이 도시로 돌아오고 있다. 외딴곳에서 그곳 사람들과 고립된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영화를 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으로 복귀하고 있다. 기준은 이제 우리와, 아니 어쩌면 우리의 2세들과 함께 어울려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미래가 무섭게 느껴지는 까닭은 기준이 영문에게 물들었기 때문이다. <여름이 지나가면>은 영화를 본 관객들에게, 그래서 ‘기준이 지난여름에 겪은 일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날리는 영화다. 그 경고가 어떤 경고인지 알기 위해선 먼저 이 영화를 공포영화의 문법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랬을 때, 이 영화가 그려내고자 한 사회의 문제점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공포영화로서의 <여름이 지나가면> 먼저 <여름이 지나가면>의 서사 구조를 간단히 요약해보자. 이 영화는 한 가족이 여름 동안 한적한 동네에 머물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구조를 띠고 있다. 장르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공포영화, 특히 귀신이 나오는 영화들의 아주 전형적인 구조이기도 하다. 이때 주인공이 귀신에게 잠식당하는 과정에서 극에 긴장감이 발생하며, 그중 절정은 가족 구성원 중 가장 약한 존재인 아이가 위험에 처했을 때다. 여기서 작품 간의 차별점은 주인공 가족이 집으로 돌아가는 ‘이유’와 마지막에 (살아)남은 가족 구성원 수뿐이다. 그리고 그 이유가 스크린에 각각의 형태로 구현되는 것이 공포영화의 기본 구조다. 말하자면 영화 속 주인공 가족들은 귀신으로 대표되는 이해 불가능한 존재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 그 공간을 떠난다. 공포영화 속 세계관에서 보통 악은 완벽히 제거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일단 그 공간을 뜨는 것이 인물들이 내릴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인 경우가 많다.

<여름이 지나가면>의 후반부에서 인물들은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 <여름이 지나가면>의 가장 큰 위기는 기준이 영문에게 완전히 매혹당했다는 것이 드러난 순간이다. 그 위기를 뒤늦게 알아차린 엄마는 이제라도 기준을 회유해보려 한다. “영문이가 시켜서 한 거 맞잖아!” 그러나 기준은 절대로 엄마의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 부인할 뿐만 아니라 엄마에게 영문이 지을 법한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맞받아친다. 그 표정을 본 엄마가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흐느낀다. 이때 엄마의 얼굴은 수많은 공포영화에 반드시 등장하는 그 얼굴과 다름없다. 사랑하는 아이가 악령에 씐 것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될 때 짓게 되는 부모의 표정 말이다.



어른의 말을 (안) 듣고 있는 아이의 얼굴 그런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른이 이 상황을 막을 수 있는 순간이 있었을까? <여름이 지나가면>에는 공포영화 같은 반전이 있다. 기준을 위험으로 모는 존재가 사실은 어른들이었다는 것, 그리고 악으로 보이는 영문마저 바로 어른들이 만들어낸 존재였다는 것이다. 그것을 고발하는 것이 이 영화의 본 목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목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여름이 지나가면>의 미덕이 드러난다. <여름이 지나가면>은 그 반전을 여타 반전 영화들처럼 후반부에 한번에 터트리지 않는다. 대신 그 단서들을 영화 전체에 흩뿌려 놓는다. 그럼으로써 어른들이 만든 이 불합리한 세계가 그만큼 교묘하고 알아차릴 수 없는 방식으로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관련해서 영화엔 자주 반복해서 등장하는 특정 숏(Shot)이 하나 있다. 바로 어른들의 대화를 (안) 듣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보여주는 숏이다. 이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부터 등장한다. 검은 화면을 배경으로 기준의 부모가 통화를 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들은 지금 기준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어서 화면이 밝아지면 조수석에 앉아 휴대전화 게임을 하고 있는 기준이 보인다. 그 화면 위로 계속해서 기준의 미래에 관한 부모의 통화 음성이 깔리지만, 그래서 아마 기준에게도 엄마의 목소리가 반드시 들릴 수밖에 없겠지만, 기준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들리지만 듣진 않는 아이의 모습. 이 ‘(안) 듣는 모습’이 <여름이 지나가면>이 제시하는 소통이 단절된 한국의 모습이다.

기준이 학교에 도착한 다음 신(Scene)에서도 비슷한 구도를 확인할 수 있다. 기준은 이번엔 휴대전화 대신 창밖 운동장에서 뛰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 옆모습 위로, 이번엔 엄마와 담임선생(강길우)의 대화 음성이 깔린다. 기준은 이번에도 역시 그걸 (안) 듣고 있다. 그리고 이 단절은 기준이 창밖을 보다가 나지막한 욕설을 내뱉음에 따라 즉각 중단된다. 과격한 말이 나와야만 서로가 서로를 마주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이 장면은, 영화 후반부 더 큰 규모로 돌아와 관객을 공포에 휩싸이게 만들 것이다.

그 이후에도 이 구도는 아주 노골적으로 반복된다. 기준이 이번에 엄마의 얼굴 대신 보고 있는 것은 플레이스테이션을 통해 즐기고 있는 게임의 화면이다. 관련한 대표적인 장면은 기준이 친구 석호를 데려와 함께 게임을 하는 장면이다. 학교에 다녀온 첫날이라 엄마는 아이들에게 궁금한 것이 많다. 그래서 기준과 석호에게 질문을 쏟아붓지만 두 아이는 게임을 하느라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 그러자 엄마는 아이들의 게임을 강제로 멈추려 든다. 어찌 보면 매우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는 반응이지만, 당연히 좋은 소통 방식은 아니다. 오히려 이 좋지 않은 방식이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것이, 이 관계가 건강하지 않음을 더 강력하게 드러내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러한 어긋난 소통의 문제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기준의 엄마가 악의 본체라고 여기는 영문과 독대하는 순간이다. 기준 엄마가 영문에게 “너희가 걱정이 된다”는 말을 하자 영문이 날카롭게 되묻는다. “무슨 걱정이요?” 진짜로 걱정해야 할 것, 즉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어른은 이에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나쁜 아이에게 밀릴 수는 없는 나쁜 어른은, 결국 영문이 신고 있는 기준의 신발을 지적하고 만다. 그러나 이 대화에서 타인의 말을 진정으로 듣고 있지 않는 자는 과연 누구일까. 모두 알고 있듯, 기준의 신발은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여지없이 어른들이 만든 프레임에 휘둘리게 되고, 그렇게 영문은 또 한 번의 나쁜 짓을 하게 된다. 이어지는 카센터 신에서 영문이 돈을 훔친 것으로 오해를 받는 상황에 몰리게끔 한 것도, 극의 흐름상 다소 과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기준 엄마와의 결정적 대화와 연달아서 등장하는 영문과 어른들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영문이 지닌 현재의 악한 모습이 애초에 어떻게 만들어지게 된 것인지를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이 영화가 무섭지 않은 당신은 누구인가 영화 후반부, 이제 정말로 괴물이 된 영문과 기준이 만난다. 영문은 정당하지 않은 행위를 통해 구한, 누군가는 악마가 깃든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신발과 플레이스테이션을 기준에게 건넨다. 그리고 기준에게 다시는 자신에게 접근하지 말라며 경고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기준은 이 순간 영문에게 완전히 매료되어 버리고 만다. 기준의 입장에서 영문은 세상에서 가장 주체적인 아이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사줘야만 가질 수 있는 신발과 플레이스테이션을 자신의 의지로 얻을 수 있는 존재. 게임이 아닌 현실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얻을 수 있는 존재. 이 순간으로 인해 기준은 후에 엄마와의 대화에서도, 특정 행동을 ‘자신의 의지’로 했다는 것을 강조하게 된다.

그렇게 기준 가족은 여차저차해 마침내 영문에게 잠식된 마을을 벗어나게 된다. 이를 ‘여차저차’라고 표현한 것은, 그 과정이 정말로 뭔가 생략되어 있듯 단숨에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를 <여름이 지나가면>의 패착으로 봐야 할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이 생략은 여전히 어른이 모든 의사 결정을 마음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뜻할 수 있다. 엄마는 분명 기준과의 긴 대화를 생략한 채, 도시로의 복귀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렇게 기준이 도시로 향한다. 앞서 언급했듯, 영문은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해결된 것 아닐까? 그런데 왜 이 영화는 아직도 지독한 한 편의 공포영화처럼 찝찝한 뒷맛을 남기는 것일까.

그 원인이 바로 생략에 있다. 앞 문단에서 말한 기준과의 긴 대화가 없는 것이 바로 이 공포의 근원이다. <여름이 지나가면>에는 다른 공포영화들에 반드시 있지만, 이 영화에는 없는 한 장면이 있다. 바로 악에 깃든 인물을 치유하는 퇴마 신이다. 공포영화들은 마지막엔 이 시퀀스를 넣음으로써 모든 악의 근원이 해결되었음을 보여주곤 한다. 그러나 <여름이 지나가면>에는 그것이 생략되어 있다. 그래서 기준은 아무것도 이해받지 못한 채, 마음속 남아 있는 악의 씨앗을 단 하나도 치유하지 못한 채, 다시 도시로 향한다. 그렇게 기준은 우리의 아이들과 어울리게 될 것이다. 언제든지 밖으로 튀어나올 수 있는 악을 품은 채 말이다. 그 미래를 암시하는 이 영화가 무섭지 않은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가.



여름이지나가면 한국독립영화 독립영화 장병기감독 세대갈등 김철홍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