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7월

Quick Menu

PEOPLE ❶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봄밤> 강미자 감독

글 _ 차한비(리버스 기자)
사진 _ 이승재(한국경제신문 기자)

2025-07-01

데뷔작 <푸른 강은 흘러라>(2008) 이후 17년 만에 강미자 감독이 두 번째 연출작 <봄밤>으로 돌아온다. 권여선의 동명 단편소설을 각색한 영화는, 긴 세월을 함께한 영경(한예리)과 수환(김설진)의 마지막 계절을 담는다. 여자는 술에 취하지 않으면 밤을 견디지 못하고, 남자는 제때 병을 치료하지 못한 탓에 목숨이 위태롭다. “살아갈 길이 없네” 자조하면, “죽을 길은 있어” 농담하는 연인. 여기엔 복잡한 플롯이나 화려한 편집은 어울리지 않는다. <봄밤>은 지고지순하리만치 단순한 형식을 유지하며 소멸에 가까운 몸의 감각, 말없이 흐르는 시간, 투명하게 맞닿은 마음을 겹겹이 쌓아 올린다. 만취한 영경은 수환의 등에 뺨을 파묻은 채 하염없이 시를 외운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미자 감독에게 <봄밤>은 어쩌면 애타는 봄을, 삶에 깊숙이 고여 든 아픔을 꺼내어 다시 한번 영화로 살아보려는 시도였는지도 모른다.

<봄밤> 메인 포스터



“깊이 고여 있는 아픔”

Q 영경은 참 많이 운다. 감독도 <봄밤>을 보며 운 적 있나.

엉엉 운 적은 없고, 한 번 눈물이 핑 돌기는 했다. 원래 잘 울지 못한다. 예전에는 나도 많이 울었을까 싶은데 언젠가부터 눈물이 잘 안 나더라.

Q원작 소설을 읽으면서는 영경의 울음에 마음이 갔다고 했는데.

소설을 보면서도 울지는 않았다. 뭐라고 딱 정리해서 말하기는 어려운데, 아팠다. 영경과 수환의 사랑에 마음이 아팠던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그런 아픔을 꽤 자주 느낀다. 어떤 엄청난 일이 벌어져서는 아니다. 그저 내 안에 아픔이 깊이 고여 있구나 싶다. 사람마다 외부에 반응하는 감정은 다양할 텐데, 그중 아픔과 슬픔이 나에게는 특별한 것 같다.

Q“깊이 고여 있는 아픔”이라면 시간 흐름에 따라 축적된 감정을 의미하는 듯하다.

잘은 모르겠지만 나는 가방에 노란 리본과 동백 배지를 항상 달고 다닌다. 지금 세월호 참사나 제주 4·3 사건을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다. 2014년 4월 16일에 나는 떡 만드는 모임에 참석 중이었다. 오랫동안 집중했던 드라마 편집을 마친 후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그 모임에 갔는데 시루에 떡을 찔 때쯤 사람들이 참사에 관해 대화하는 걸 들었다. 별 느낌이 없었다. 떡 만들기에 분주하기도 했고, 작업이 막 끝난 참이라 멍한 상태였거든. 집에 가서 뉴스를 보고서야 큰일이구나 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불현듯 그 일이 떠오르면서 무척 아팠다. 그러니까 내가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는 이유는, 2014년 4월 16일의 나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그토록 고통스러운 순간을 덤덤하게 지나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내 일에 온통 맺혀 있어서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했던 상태를 떠올리려고. 평소엔 뭐든 잘 잊는 편이다. 20~30대에는 ‘생각하지 말자’를 되뇌며 살았거든. 하도 일이 많으니 생각을 계속해서는 살 수가 없겠더라. 그게 버릇이 되었는지 자꾸 잊는데, 이렇게 나이 들면 뭔가 훅하고 다가올 때가 있나 보다.



Q영화가 시간을 담는 방식도 독특하다. 소설 속 영경과 수환은 이미 너무 많은 일을 겪은 후에 만났고, 함께 12년을 보냈다. 둘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길고 반복적인 호흡이 필요할 거라 예상했는데, 영화는 오히려 압축적인 방식을 택한다. 러닝 타임도 1시간 남짓이다.

애초에 소설을 그대로 재현할 생각이 없었다. 원작의 서사가 아닌 감정을 영화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인물 또한 영경과 수환 둘에게만 초점을 맞추려 했다. 이 영화는 이런 식으로 만들고 싶다, 이런 식으로밖에 만들 수 없겠다, 그런 마음이었기에 별로 주저하지 않았다. 드라마를 편집하는 과정에서는 늘 뭔가를 더 멋지고 재미있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 작업도 매력과 장점이 있다. 다만, <봄밤>엔 같은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고 봤다. 영경과 수환의 감정은 영화적으로 꾸미거나 설명할수록 관객에게 가 닿지 않을 듯했다. 화려한 작품을 연출하고자 했다면 기획 자체가 달랐을 거다. 큰 자본이 필요하고, 시간도 오래 걸렸겠지. 그걸 기다리다가 영화를 만들지 못했을 수도 있고. 나는 머릿속이 복잡하지 않았다. 의도가 명확했기에 시나리오를 쓰고, 배우를 만나고, 촬영하고, 편집하기까지 흔들림 없이 진행했다.

Q암전 효과는 어떻게 떠올린 아이디어였나.

시나리오 쓸 때부터 생각했다. 영경과 수환이 43세에서 55세에 다다르는 세월을 연대기적으로 보여줄 마음은 없었다. 그보다는 둘이 나눈 사랑과 감정의 밀도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했다. 12년이라는 사실적 시간을 어떻게 영화적 시간으로 가져올지 고민하다가 반복과 암전을 주요 형식으로 삼았다.

Q배우들이 그 시간을 드러내려 분장했다면 도리어 어색했겠다 싶더라.

대개 노화와 질병, 죽음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분장을 택하지 않나. <봄밤>에서는 아니었다. 실제로 배우들이 체중을 감량해서 만든 모습이다. 두 배우 모두 정말 힘들었을 거다.

<봄밤> 스틸컷



“슬프고, 아름답고, 고통스럽다”

Q <푸른 강은 흘러라>(2008) 이후 한예리 배우와 오랜만에 재회했다.

한예리 배우가 무용을 전공하던 시절, 학생 단편영화에 가끔 출연했다. 배우의 고유한 에너지와 비정형적 표현이 인상 깊었다. 정해진 틀 안에서 연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바깥의 것을 건드릴 수 있는 배우라는 느낌을 받았다. <푸른 강은 흘러라> 주인공으로 처음부터 한예리 배우를 점찍었고, <봄밤>도 한예리 배우만 생각했다. 원작 속 영경의 현재 나이는 55세지만, 나는 배우의 현재 상태 그대로 가져가고 싶었다.

Q한예리 배우가 시나리오를 읽은 후 “슬프고, 아름답고, 고통스럽다”는 감상을 전했다고.

시나리오 보내고 마음을 졸였는데, 일주일쯤 지나서 연락을 줬다. 큰 산 하나를 넘은 기분이었다. 만약 한예리 배우가 거절했다면 작업 자체를 재고했을 수도 있다. “슬프고, 아름답고, 고통스럽다”는 말이 참 고마워서 좋은 영화로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고된 여정으로 배우를 이끈 입장에서 어깨가 무겁기도 했다. 현장에서 한예리 배우에게 많이 배웠다. 예술가로서 자신이 선택한 바에 완전히 집중하는 사람이다. 작업에 임하는 태도와 준비가 철저했고, 말 그대로 ‘프로’라는 말이 어울렸다.



Q수환 역에 김설진 배우를 추천한 이도 한예리 배우라고.

연기 워크숍을 함께했다며 조심스레 만남을 제안했다. 예리 씨가 영경으로서 보여주고 싶은 상대가 있다면, 전적으로 믿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나는 김설진 배우의 존재를 몰랐다. 사진을 캡처해서 휴대전화에 저장해 놓고 틈틈이 봤다. 만나기 전에도, 만난 후에도 봤다. ‘아, 수환은 이런 느낌이구나’ 하며 마음에 담고 다녔다.

Q한예리와 김설진 모두 춤을 추는, 몸을 잘 쓰기로 유명한 배우들이다. 병으로 육체가 소진되어 가는 영경과 수환에게 비춰보면 공교로운 데가 있다.

한예리 배우와 <푸른 강은 흘러라>로 만났을 때, 하루는 밖에서 뒷모습을 찍었다. 저쪽으로 한번 걸어가 달라고 했지. 걷는 모습에서 나오는 분위기, 자연스러운 몸의 흐름을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연기와 춤을 딱히 연결해서 상상하진 않았다. 그보단 배우가 몸으로 건네는 감정과 그 깊이를 믿는 편이다. 김설진 배우도 마찬가지였다. 춤추는 영상을 봤지만, 그걸 전제로 캐스팅하진 않았다. 다만, 요양원으로 돌아온 영경과 수환이 쓰러지는 장면을 놓고 고심하기는 했다. 시나리오에 그 장면을 쓰면서 ‘할 수 있는 배우가 있을까?’ 했다. 설진 배우에게도 솔직히 털어놓았다. 당시 우리는 시나리오대로만 연기해도 대단하다며 우스갯소리를 했는데, 막상 마치고 보니 시나리오를 뛰어넘는 영화가 만들어졌더라. 설진 배우가 늘 예리 배우를 보고 있다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영경의 호흡을 따라가고 맞춰주며, 영경이 뭘 하든 다 받아냈다. 편집하면서 보니 내가 현장에서 눈치 채지 못했던 순간에도 설진 배우는 그렇게 했더라. 수환과 영경은 영화 속에서 함께 만들어진 인물이다.

Q술집 장면도 떠오른다. 영경이 술을 들이켜려던 차에, 잔을 만지작거리는 수환을 발견한다. 그러자 손을 내려 수환과 잔을 부딪친다. 지문을 따르는 연기가 아니라, 그 순간 영경과 수환으로서 행동했구나 싶었다.

편집하다 보면 그런 차이가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 어떤 배우는 자기가 잘하려고만 하고 상대와 호흡을 안 맞추기도 하거든. 그러면 편집하기도 힘들고, 관객에게도 연기가 매력적으로 다가가기 어렵다. 한예리와 김설진 두 배우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계적으로 합을 맞추는 게 아니라, 감정의 기조를 공유했다. 수환이 항상 영경을 받쳐주는 느낌이었고, 두 배우가 그런 관계를 영화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 갔다. 사전에 두 배우와 가능한 한 자주 만나서 시나리오를 같이 읽으려고 했다. 영경과 수환이 어떤 사람인지, 이 장면의 감정은 어떤지 의견을 나누며 감정의 바탕을 쌓았고, 그게 촬영과 연기에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훨씬 더 단순해져야 한다”

Q 인물 구성뿐 아니라 현장 스태프도 소규모였다. 각본을 공동 집필한 이지상 감독이 촬영을 맡았고, 서태범 감독은 촬영과 조명을 동시에 소화했다. 협업 과정은 어땠나.

이지상 감독은 나와 벌써 30년 넘게 산 사람이니 특별히 맞출 것도 없었다. 인생이나 영화에 관해 원체 이야기를 많이 나눴으니까. 작업하다 보면 가장 힘든 것이 소통이다. 대화가 통하지 않거나 소통할 대상과 절차가 늘어나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봄밤>은 작품의 형식만큼 만드는 방식도 미니멀했다. 스태프는 나까지 포함해 6명이었는데 독수리 육남매 같은 느낌이었다. (웃음) 마음이 잘 맞기도 했거니와 다들 현장 경험이 풍부해서 일을 착착 진행했다.



Q편집 과정에서 가장 오래 머문 구간은 어디였나.

컷이 많은 영화가 아니다 보니 특정 장면에 시간을 쏟기보다는 영화 전체의 감정 흐름을 어떻게 조율할지에 공을 들였다. 조금만 더 가면 지루해지고, 이르게 끊으면 턱 막히는 느낌이 들 수 있으니까. 어떤 이미지들이 어떤 순간에 만날 것인가. 그 조합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여기에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썼다. 마지막까지 부여잡고 있던 장면을 드러낼 때는 좀 아쉽긴 했다. 영경이 수환에게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어주는 장면이었다. 시나리오 쓰면서 넣고 빼기를 반복했는데, 일단 찍기는 했다. 배우들 연기도 좋았다. 그런데 편집해보니 그 장면이 들어가면 다음 장면들은 사족이 되더라. 영경과 수환의 감정에 집중하게 하려면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단순해져야 한다는 걸 느꼈고, 그 점이 보통의 편집 작업과는 가장 다른 부분이었다.

Q말한 대로 <봄밤>은 감독의 평소 작업과는 결이 사뭇 다른데, 그와 동시에 어떤 반작용으로 나온 작품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뭔가에 반발해 만든 영화가 아니니까. <봄밤>은 처음부터 단순하고 독립적이며, 형식적이고, 아픔에 집중하는 영화로 만들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영화를 시작한 곳은 한국실험영화연구소다. 거기서 첫 번째 단편 <현빈>(1998)을 만들었다. 대사가 없는 25분짜리 영화인데, <봄밤> 편집 과정에서 이지상 감독이 문득 <현빈> 얘기를 꺼냈다. 두 영화에 닮은 데가 있다고. 그 말을 듣고 30여 년 만에 <현빈>을 다시 봤다. 의식하고 만든 건 아니지만, 두 영화 사이에 맞닿은 부분이 정말 있더라. 먹고살기 위해 드라마 편집으로 넘어가긴 했지만, 그간 무의식에서 뭔가는 이어졌던 거다. 스스로에게 말했다. “미자야, 어쨌든 너는 영화를 하고 싶어서 이 길에 접어들었고, 점찍듯 띄엄띄엄 작업하기는 했어도 네 원형을 놓치지 않았구나.” 실험영화 특유의 도전 정신, 전복적 태도, 형식에 관한 고민이 내 영화적 원형인 것 같다.

Q그러니 다들 차기작 계획을 궁금해한다. 다음 영화까지 또 15년이 걸리면 어쩌나 싶어서.

15년 후? 그때는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웃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요즘 스스로에게 자주 묻는다. 나는 뭘 하고 싶은 걸까. 인생이 원래 그렇듯, 앞날은 모르는 일이지 않나. 2008년에 <푸른 강은 흘러라>를 만든 후, 죽기 전에 영화 한 편은 꼭 다시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다. <봄밤>은 선물이다. 아무 계산 없이 시작했고, 심지어 처음엔 소설 판권에 대한 고민조차 없었다. 영화를 완성하고 여러 일을 겪으면서 ‘또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조건이 갖춰지길 기다리기보다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음 작품을 만들고 싶다.

<봄밤> 스틸컷



봄밤 강미자감독 한예리 김설진 한국독립영화 독립영화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