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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하고 생생한 청춘의 오늘
<보이 인 더 풀>
글 _ 손시내(영화웹진 <리버스> 기자)
2025-05-16
수영선수가 되고 싶었던 소녀와 수영선수가 되어 버린 소년, 재능, 꿈, 포기, 좌절. <보이 인 더 풀>의 이야기에서 연상되는 단어들은 고난이나 역경, 슬픔과 같은 말들을 떠올리게 하지만, 소녀와 소년의 얼굴은 꽤나 무표정하다. 심통이 나서 씩씩대는 때도 있긴 하나 인물들의 얼굴에 머무는 카메라에는 아무도 없는 수영장 물의 표면처럼 고요한 감정이 주로 일렁인다. 내가 지금 서글프다고, 나는 지금 아프다고, 우리가 이렇게 괴롭다고, 소리쳐 말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인물들의 기질은 고스란히 영화의 특징이 된다. 개인의 내면과 사회적 상황, 어느 방향으로든 강렬하고 진한 서사를 펼쳐낼 수 있는 씨앗이 있지만, <보이 인 더 풀>은 무언가 설명하거나 강요하는 법 없이 종종 여백을 만들고 그 사이를 물의 푸른빛으로 채운다.
물결 같은 청춘의 얼굴
영화는 2007년 여름, 열세 살 석영(이예원)이 엄마, 동생과 함께 지방의 할머니 집으로 이사하며 시작한다. 10대 시절을 배경으로 익숙하지 않거나 원하지 않는 장소에 도착하는 상황은 최근 꽤 많은 영화들에서 봐 왔던 설정이다. 그런 경우, 가족과 집은 벗어나고 싶지만 당장은 벗어날 수 없는 울타리가 되고, 인물은 그 울타리와 씨름하며 성장통을 앓는다. 정든 친구들과 학교를 떠나는 게 싫어 엉엉 울고, 할머니 집에 도착해서 툴툴거리는 석영을 보게 되는 도입부에서 그와 비슷한 전개를 상상하게 되지만, 석영의 길은 조금 다르다. 아빠와 떨어져 지내는 정황이나 엄마가 동생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줬다는 대사처럼 부모의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요소들이 드문드문 등장하긴 해도, 석영을 둘러싼 환경이 아주 구체적으로 제시되는 일은 없다. 대신 여전히 수영을 하고 싶고, 수영선수가 되고 싶은 석영의 마음이 맨 먼저 달려 나간다.
그런 석영을 멈춰 세우는 것 역시 눈에 보이는 벽이나 울타리보다는 또박또박 말로 설명하거나 분명히 표현하기 어려운 석영의 마음이다. 쭈뼛거리며 동네 수영장을 찾았다가 바다로 나간 석영은 물에 들어갔다가 균형을 잃고 허우적댄다. 멀리서 한 소년이 뛰어들어 석영을 구한다. 수영을 한 번도 배운 적 없다는 우주(양희원)다. 말 없는 소년과 당찬 소녀. 투덕대며 조금 가까워진 둘은 해변에 앉아 비밀 하나를 공유한다. 우주의 발가락 사이에 물갈퀴가 있다는 것. 신비한 비밀은 둘을 가깝게도 만들지만, 둘 사이에 좁힐 수 없는 속도의 차이도 만든다. “나랑 같이 수영하자”는 석영의 말을 듣고 우주는 수영장에 드나들기 시작한다. 다른 아이들은 물론 선수를 키우고 싶은 코치의 눈에도 단번에 든 우주를 보는 석영의 얼굴은 미묘하다. 물갈퀴 없이 정정당당하게 시합해보자고 제안한 석영은 앞서 나가는 우주를 보며 그 자리에 멈춰 선다.
영화는 곧장 2013년 여름으로 건너간다. 열아홉 살이 된 석영(효우)은 잠시 머물 줄 알았던 할머니 집에서 여전히 살고, 열여덟 살 우주(이민재)는 컴퓨터 모니터 속에서 ‘한국 신기록 경신’이라는 소식과 함께 인터뷰를 하고 있다. 누군가는 원했던 길을 걷지 못했는데, 누군가는 그 길을 뚜벅뚜벅 걸어간다. 세상 일이 마음처럼 되지 않아 속상해하며 정처 없이 헤매는 건 성장영화 주인공이 보편적으로 겪는 일이다. 오늘날 청춘의 모습을 포착하고자 하는 영화들은 그 방황과 절망의 구체적인 풍경에 속수무책으로 이끌리기 쉽다. 세상은 이토록 잔인하고 사는 게 이처럼 불안하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청춘의 시간이 뚜렷한 사건이나 폭압적 상황만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 풍경이 구체적이고 폭력적일수록 청춘의 이미지가 또렷해 보일 수 있지만, 그들이 헤엄쳐 나가는 시간의 결이 도리어 생생하게 드러나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
<보이 인 더 풀>의 두 주인공 석영과 우주의 알 수 없는 표정은 그래서 조금 특별하다. 이들은 세상이라는 벽을 지칠 때까지 두드리다가 자포자기하거나 자기 탓을 하며 스스로를 공격하는 유형의 인물이 아니다. 어쩔 줄 모르게 끓어오르는 에너지의 소유자들도 아니다. 이들은 각자 마주한 만큼의 세상을 바라보며 맞닥뜨린 상황에 적당히 적응한다. 여기 약간의 쓴웃음은 있지만, 과도한 비애나 분노, 자기연민 같은 감정은 없다.
“어떤 마음일까?” <보이 인 더 풀>을 보는 동안 종종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세상에 지쳐 버린 것도, 복잡한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은 것도 아닌 듯 보이는, 마치 물의 표면 같은 무표정. 완전히 닫히지도 열리지도 않은 이 얼굴은 10대 시절을 지나온 이들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여지와 함께 궁금함을 부르는 미묘한 비밀도 만든다. 여기에 일렁이는 건, 촘촘한 사건과 다양한 감정으로 구성된 영화들이 전하지 않는 또 다른 결의 생생함이다.
현실의 문턱, 삶을 이루는 것들
그렇다고 해서 <보이 인 더 풀>이 상황을 구성하고 전하는 데 전혀 무심한 것은 아니다. 선수로 키워낼 만한 재목을 찾는 코치는 여자아이보다는 남자아이를 훨씬 선호한다. 성장하며 어떤 변화를 겪을지 모르는 게 이유라는 것이다. 꿈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일에는 이처럼 다양한 방해물이 존재한다. 영화는 그 진입의 길목에 서 있었거나 서 있는 인물들을 다양하게 비춘다. 초등학생 수영 대회에 나가 상도 받았던 석영은 수영을 좋아하고 잘했지만 성장기의 어느 문턱에서 멈춰 선다. 우주의 수영을 보고 수영선수의 꿈을 접었다는 친구의 말은 재능과 꿈, 타고난 것과 하고 싶은 것 사이의 간극을 생각하게 한다. 앞서 나가는 이의 등을 바라보는 마음은 복잡 미묘할 것이다. “선수 할 것도 아닌데 열심히 해서 뭐해.” 영화는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대로 남겨 두기로 하는 마음을 굳이 탓하지도 연민하지도 않은 채 가만히 바라본다. 여기에는 물론 어둑한 그림자가 일렁이겠지만, 그게 헤집을 수 없이 깊은 어둠은 아니다.
체육고등학교에 진학한 우주는 신기록을 세우며 모두의 주목을 받았지만, 이후 기량은 좋지 않다. 그의 고백처럼 물갈퀴가 점점 작아져서일까. 모두가 입을 모아 타고났다고 말했던 재능 있는 소년은 석영이 가보지 못한 또 다른 문턱에서 헤매고 있다. 석영만 알고 있는 비밀을 지닌 우주는 분명 어느 정도는 신비로운 미지의 인물이다. 그의 꿈이나 목표 같은 것을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더 이상 수영을 잘하게 되지 않으면, 선수가 아니게 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될까” 하는 그의 중얼거림은 현실에 발붙인 모두의 고민과 맞닿아 있다. 체조를 전공하는 우주의 체고 동기 역시 지금 서 있는 길을 계속 걸어가야 하는지 고민한다. 피아노를 전공하는 석영의 동생도 마찬가지다. 재능이란 눈부신 것이지만, 그것이 가져다주는 덜컹거림과 한계는 미지의 영역이다. 영화는 그 영역을 파헤치는 대신 그 앞에서 서성이는 이들의 쓸쓸한 등을 가만히 두드린다.
어른이 된 석영의 동생 가영이 아무도 없는 강의실에서 석영에게 피아노를 쳐주고, 악보 하나를 건네는 대목은 그래서 잊을 수 없는 감흥을 남긴다. 피아노를 치기 위해 서울로 떠나던 동생의 들뜬 모습이나 피아노 앞에서 행복해하는 얼굴은 이제 없지만, 동생은 자기가 묵묵히 걸어온 길의 흔적을 언니에게 들려준다. 동생이 들려준 악보를 가지고 집에 돌아온 석영은 그것을 다시 엄마에게 건넨다. 언젠가 피아노를 쳤을 테고, 딸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었을 엄마의 이야기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지만, 악보의 전달은 그 이야기를 짐작하게 한다. 어른이 되어 다시 수영장을 찾은 석영이 다른 여자아이와 이야기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에서는 어떤 안도감도 느껴진다. 인생에는 수영이나 피아노만 있는 게 아니다. 삶을 이루는 많은 요소와 함께 우리는 계속 살아갈 거라고 <보이 인 더 풀>은 이야기한다.
푸른빛을 넘어서
‘수영장의 소년.’ 제목이 넌지시 일러주듯, 영화는 찰랑이는 물의 이미지를 가득 품고 있지만 저 어둡고 깊은 심해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일렁이는 물그림자, 저녁이나 새벽녘의 푸르스름한 기운, 아쿠아리움의 파란빛 등 영화를 주로 이루는 색채는 채도 낮은 푸른색이다. 차분하고 고요한 분위기 속에 석영과 우주의 서로에 대한 미묘한 감정 역시 담긴다. 어린 시절의 친구라고 하기에는 함께한 시간이 그리 길지 않고, 그렇다고 먼 사이라고 하기엔 중요한 비밀을 공유한 사이. 나의 약한 부분을 건드리지만, 그래서 지쳐 쉬고 싶을 때 곁에 있고 싶은 사람. 우정이나 사랑으로 다 담을 수 없는 둘의 관계는 <보이 인 더 풀>의 묘한 매력 중 하나다.
두 사람이 속한 곳도, 두 사람의 속도도 다 다르지만 둘은 유독 물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 많다. 우주가 석영을 구했던 바닷속이나 아무도 없는 밤의 수영장처럼 둘은 물을 통해 겉으로는 발설되지 않는 무언가를 공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게 무엇인지 더 깊이 알기 위해 골똘히 들여다보는 일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라는 것이 밖에서는 보이지 않고 명료히 설명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물을 통해 만났고, 물과 더불어 상처 입었던 둘은 마지막 장면에서 마침내 물과 함께 조우한다. 바다도 수영장도 아닌 곳, 재능과 꿈으로부터 한 뼘 떨어져 있는 곳에서. 아프고 불행하다고 외치지 않는 청춘들은, 우정과 사랑을 살짝 비껴난 관계로 맺어진 청춘들은 이제 어디로 갈까. 영화는 그처럼 보이지 않는 질문과 함께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