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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들)의 사정
<우리 둘 사이에>
글 _ 최은영(영화평론가)
2025-07-15
성지혜 감독의 장편 데뷔작 <우리 둘 사이에>라는 제목은 모호하면서도 의미심장하다. 제목만 보고 알아챌 수 있는 사실은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것, 혹은 어떤 사건이 존재하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점일 테다. 그렇다면 그 사건 혹은 존재를 사이에 두고 있는 두 사람은 누구이며 어떤 관계에 놓여 있을까. ‘우리 둘’ 사이에 일어난 일이 어떤 형태의 삶으로 두 사람을 인도할 것인가. 그리고 영화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까.
우리 안에 존재하는 틈
영화의 첫 장면, 휠체어를 탄 한 여성이 건널목에서 불안하게 주위를 살핀다. 그녀는 곧 맞은편에서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남성을 발견하고 마침내 안심하며 마주 손을 흔든다. 둘 사이에 놓여 있는 건널목은 두 사람의 따뜻한 조우 이후에도 그들 사이에 어쩔 수 없는 간극이 놓여 있음을 주지시킨다. 연인에서 부부가 된 은진(김시은)과 호선(설정환)은 긴 세월 동안 변함없는 사랑으로 서로를 보살펴 왔고, 단단한 신뢰로 맺어져 있다. 은진은 열일곱 살에 사고로 인한 척수 장애로 하체가 마비된 후천적 장애인이다. 작가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에세이로 집필하던 중 그녀는 뜻하지 않게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남편 호선은 대학 강사로, 출강하던 대학에 자신과 같은 전공의 교수가 새로 부임하게 되면서 강의가 줄어들게 되지만, 아내에게 이를 내색하지 않는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출산 직전까지, 은진은 끊임없는 선택의 기로에서 마음의 갈등을 겪는다.
‘우리 둘 사이에’ 아기가 생기자, 빈틈없어 보였던 두 사람의 마음에 작은 틈이 생긴다. 영화의 시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사건은 은진의 임신이며, 영화는 임신한 은진이 겪어야 하는 새로운 상황들을 은진을 중심에 놓고 방사형으로 배치한다. 가장 가까운 관계인 남편 호선과 은진의 엄마로 이루어진 가족, 그리고 은진의 에세이 출판사 대표, 은진을 검진하는 의사들로 이어지는 외부인들이 임신 후 은진이 맞닥뜨린 상황이 전개되는 동안 거쳐 가는 사람들이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은진은 차례로 그들을 일대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은 대체로 은진의 선택을 지지하고 힘을 북돋워주는 조력자들인 동시에, 임신과 출산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 부담에 대한 선택은 결국 은진의 몫임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한다.
은진과 가족들과의 관계는 여기에 또 다른 층위를 얹는다. 남편과 어머니는 은진의 강력한 정서적 지지자인 동시에 그녀의 힘든 상황을 보조해야 하는 탓에 은진으로 하여금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상대들이기도 하다. 죄책감은 은진의 마음을 옥죄어 가고 그 속에서 은진은 어쩔 수 없는 외로움에 직면한다. 뱃속에서 자라는 생명조차 은진에게 두려움과 죄책감의 대상이 되고, 보이지 않는 감정적 스트레스로 인해 그녀는 온전히 기댈 수 있는 완벽한 친구 지후(오지후)를 스스로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지후는 은진의 또 다른 자아이자 해리성 인격장애가 만들어낸 가상의 친구로, 영화의 제목이 가리키는 ‘우리 둘’은 처음에는 은진과 호선이었다가 은진과 지후의 관계로 넘어가고, 지후의 존재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과정에서 은진은 우리가 아닌 혼자서 그 모든 일들을 받아들여야 함을 깨닫는다.
진공 상태의 인물들
장애인을 소재로 다루는 많은 영화들은 대개 캐릭터 구축에서 이분법적인 방식을 취한다. 장애인 당사자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인물들과, 장애인을 무시하거나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무신경한 인물들, 나아가서는 그들을 이용하고 상처 입히려는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대립 상황이 장애를 소재로 한 영화들의 서사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방식으로 등장한다. 이렇듯 스테레오타입화된 영화들에 비추어보면 <우리 둘 사이에>에서는 조금 다른 방식을 취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 주인공 은진뿐만 아니라 은진의 주변 인물들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은 매우 사려 깊고 이성적이다. 따라서 영화에는 어떤 파국이나 감정적 격렬함의 순간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설정은 영화의 전략과도 관계가 있다. 하지마비 장애인의 임신이라는 소재를 통해 영화는 출산에 이르기까지 임신의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디테일한 난관들을 자세히 그려내는 데 보다 집중하며, 보는 이들의 정서적 이해를 이끌어내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여기에는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 사회적 편견과 대립되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배제한 채 장애인, 그리고 임신에 관한 보다 섬세한 정보들을 전달함으로써 당사자와 주변인들의 민감한 심리를 관객에게 이해시키려는 영화의 의도가 숨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스테레오타입화된 장애 소재 영화와 마찬가지로 일정한 한계를 노출한다. 현실 세계의 인간들이 보여주는 약점과 실패의 순간들, 그 좌충우돌의 과정이 생략된 상태로 곧장 상황에 대한 적절한 이해로 나아가는 인물들은 영화 바깥에서 존재하는 현실 세계의 생명력을 상실하기 마련이다. <우리 둘 사이에>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 특히 은진과 호선은 그런 면에서 대단히 이상적인 관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한다. 이러한 진공 상태의 인물들로 인해 장애인의 임신, 그리고 나아가 여성의 임신 과정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정보들이 전달되는 과정이 매끄럽게 진행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거기에서 멈춰 버리는 것은 한 편의 영화가 보여주는 개성, 그리고 가장 현실 세계와 닮아 있는 형식으로 인해 그 고유성을 획득하는 예술 장르인 영화의 본질과 멀어지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내 안의 또 다른 나
영화는 장애인의 임신이라는 현실적 드라마의 상황에 미스터리적인 요소로 해리성 인격장애를 등장시킨다. 은진은 임신 기간 잠시 입원했던 병원에서 역시 임신후유증으로 입원한 산모 지후와 가까워지고, 병원 밖에서 따로 만나거나 통화를 하며 그녀의 존재에 위로를 받는다. 지후는 은진이 현재 겪고 있는 두려움과 죄책감,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하는 임신의 증상들에 대해 누구보다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다. 은진이 필요로 할 때면 언제나 홀연히 나타나는 지후가 사실은 은진의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은 은진에게 일종의 각성을 가져온다. 지후가 떠나간 뒤, 은진은 한층 성숙한 태도로 자신과 주변을 돌보며 출산에 임한다.
양육이나 가사와 같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전통적인 여성의 책임으로 여겨지는 노동과 그러한 상황을 공포의 감각으로 주목하는 영화들이 있었다. 막중한 육체적, 감정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이 책임을 동등한 형태로 나눠 갖거나 그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는 상황에 처한 여성들의 정신착란 상태는, 내면의 소리를 대신 표출해주는 타인으로 빙의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82년생 김지영>(2019)이나 과거의 자아를 불러내어 착란의 방식으로 스스로 위무하는 샤를리즈 테론 주연의 <툴리>(2018)처럼 고립된 여성의 억눌러 온 자아의 뒤틀린 발현이다. <우리 둘 사이에>는 주변의 억압적 요소보다 주인공 스스로가 느끼는 극한의 감정에 주목하며, 지후를 비단 은진이 만들어낸 환상에 머물지 않고 은진과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는 여성 전반의 상징으로 확장시키려 시도한다.
우리,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 둘 사이에>는 명백히 착한 영화다. 선의로 가득 찬 인물들은 은연중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방관하거나 놓치고 있지 않은지 끊임없이 되돌아보면서도 타인과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엷은 막을 뚫고 나가는 대신 자기 안에 머물기를 택한다. 주변에 존재하는 부조리함은 이들 주변을 감싸고 희미하게 일렁이지만 그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한다. 호선이 퇴근길에서 자꾸 마주치는 어린아이는 부모로부터 방임된 것처럼 보이지만 호선이 베푸는 선의란 아이와 잠시 같이 놀아주는 것 이상은 아니다. 방임된 아이의 존재는 호선에게 다가올 미래의 불안감을 투영하는 소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병원에서 은진이 멀리서 관찰하곤 하는 장애가 있는 아이와 그 엄마의 모습은 은진의 과거와 미래를 뭉뚱그려 표상하는 이미지다.
영화는 장애인으로서 임신과 출산의 과정을 겪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부부의 여정이 어떤 모습으로 이어지게 될지를 명확하게 그려내지 않는다. 장애, 임신, 출산이라는 키워드를 일종의 당위로 해석해 직조해낸 캐릭터들이 갖는 한계는 결국 몰개성으로 이어지고, 영화 속 인물들은 살아 숨 쉬는 존재라기보다는 상황에 대처하는 안내서에 그려진 삽화처럼 기능한다. 영화에서 수없이 고난과 방황을 겪는 인물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고난을 극복할 무언가를 찾아내거나 혹은 실패한다. 이러한 방향성에 당위란 존재하지 않으며, 삶은 그 모든 부조리가 만들어낸 묘한 균형 속에서 흐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포착해내는 영화들은 존재의 의미를 획득한다. <우리 둘 사이에>에서 결여된 것은 두 사람만의 이야기, 그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삶의 방향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