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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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넓은 시야를 갖게 하는 쪽으로
상반기 KAFA의 활약과 미래의 과제들
글, 사진 _ 이선필(오마이뉴스 영화전문기자)
2025-08-01
올해 칸국제영화제 라시네프 섹션 레드카펫.
올해 5월에 열린 78회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는 한국 영화인들에겐 일종의 희비가 엇갈린 축제의 장이었다. 공식 상영 부문에 해당하는 경쟁과 비경쟁, 미드나이트 섹션에서 잇따라 한국영화들이 초청받지 못했다. 2013년 문병곤 감독의 <세이프>가 단편 부문에 진출해 황금종려상을 받은 이후 12년 만에 생긴 일이었다. 2019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것을 정점으로 한국영화 산업의 침체기가 왔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현상이라는 분석도 가능하다.
낭중지추, KAFA의 저력
이 암울한 흐름에 균열을 낸 게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작품이었다. 허가영 감독(정규과정 42기)의 <첫여름>이 학생경쟁 부문에 해당하는 라시네프 섹션에 초청, 1등상을 받았다. 2021년 <매미>(윤대원 감독), 2023년 <홀>(황혜인 감독)이 같은 섹션에서 2등상을 받았는데 1등상은 한국영화 사상 처음이었다. 이와 함께 ‘독립애니메이션계의 봉준호’라 불리는 정유미 감독의 <안경> 또한 비평가주간 단편 섹션에 초청받으며 아쉬움을 달랬다. 산업은 침체기지만 한국영화의 창작 에너지와 동력은 여전함을 방증한 사례였다.
이에 앞서 지난 3월 7일 메가박스 성수에서 그 에너지를 십분 확인할 수 있었다. ‘영화로운’이란 기치를 내세운 KAFA 졸업영화제 개막 당일이었다. 개막작으로 선정된 허가영 감독의 <첫여름>을 비롯, 총 39편이 영화제 기간 상영되었다. 개막식 당일엔 산업 현장을 목전에 둔 졸업생들을 위무하고 격려하는 영화인들의 발언도 있었지만, 오랜 기간 동고동락한 정이 쌓인 덕인지 서로의 작품 완성과 상영을 축하하는 말로 가득한 축제 분위기였다. <첫여름>의 주연 배우인 허진은 무대에 올라 “사실 우리 나이대의 배우가 영화 하는 게 쉽지 않다. 우리 허 감독을 응원해 달라. 자라나는 새싹을 밟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하려 했다”며 벅차오르는 감정을 누르며 말하기도 했다.
학생경쟁 부문에 해당하는 라시네프 섹션에 초청돼, <첫여름>으로 1등상을 수상한 허가영 감독. 다른 초청 감독들도 한 자리에.
<첫여름>을 비롯, 올해 KAFA 작품들은 국내외 영화제에서 변함없는 활약을 보였다. 허가영 감독의 또 다른 연출작인 <너를 심을 땅>은 북미 지역 장르영화제인 판타지아영화제에 초청되어 지난 7월 21일 현지에서 상영되었고, 조현서 감독(장편과정 17기)의 <겨울의 빛>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경쟁 부문 대상을, 김보솔 감독(장편과정 애니 12기)의 장편 애니메이션 <광장>은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각각 심사위원상과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 같은 흐름에 조근식 KAFA 원장은 “산업적으로나 환경적으로 큰 변화가 있는 중에도 한국영화의 씨가 마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쾌거”라고 자평했다. 조 원장은 “극장 산업이 침체일로이고 투자가 위축되며 새로운 영화 콘텐츠가 쉽게 나오지 못하는 상황에서 한국영화의 새로운 세대는 여전히 미래를 향해 가고 있다”며 KAFA의 존재 의의를 새삼 짚었다.
KAFA의 존재 의의를 증명한 영화 <첫여름>
변화에 대처하는 글로벌 협력
사실 대한민국 영화계에서 KAFA의 위상은 독특하다. 산업과 연계된 직업 영화인을 육성하고 교육하는 영화학교의 기능을 수행함과 동시에 국가 예산으로 운영되는 공기관이라는 점이 그렇다. 단순히 영화 이론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기획과 제작, 후반작업까지 전 공정에 참여하게 해 하나의 완성된 작품을 만들게끔 하고, 영화계 흐름에 발맞추기 위한 영화인의 재교육 등을 담당한다.
특히 지난 2021년부터 원장으로 부임, 4년간 살림을 맡아 온 조근식 원장 체제에선 기존 KAFA가 해 오던 역할에 더해 글로벌 협업 관련 교육과 인공지능(AI) 영화 제작 같은 신기술 교육에 힘을 주는 모양새다. 해당 사업과 관련해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기업이나 프랑스 CNC 같은 국립기관,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같은 국내 기업과의 협업도 돋보인다.
올 상반기 KAFA는 넷플릭스 협력으로 리부트 캠프를 진행했고(1월 13~18일), 같은 달 사우디아라비아 신진 영화인들 대상으로 한국과 영화 산업 교류를 확대하기 위한 마스터클래스를 진행했다. 또한 5월엔 프랑스 현지에서 한-프 영화아카데미를 진행했으며, 6월 중순 글로벌 공동제작 워크숍 교육을 시작했다. 참고로 글로벌 공동제작 워크숍은 올해 신설 사업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일본·베트남 영화인 등 총 4명과 국내 영화인 4명이 2인 1조가 되어 단편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이다.
이런 글로벌 협업은 영화진흥위원회가 각국 기업이나 유관단체들과 양해각서(MOU)를 맺는 형식으로 진행 중이다. 사우디아라비아 프로그램의 경우 2023년 10월 사우디아라비아 네옴컴퍼니와 업무협약(MOU)을 체결해 ‘KAFA Masterclass in 사우디아라비아’를 지난해 12월 사전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올 1월 제다에서 진행했다. 지난 2022년 넷플릭스와도 MOU를 체결, 현재까지 예비 영화인과 현업인 포함, 500여 명 규모의 교육이 진행되었다.
이 밖에도 프랑스 국립영화영상센터(CNC), 국립영화학교(La Fémis), 일본 도쿄예술대와 일본 비영리 영화기구인 유니재팬 등과도 기획개발 워크숍, 마스터클래스 등의 행사를 이어가고 있다. 국내 기업 중에선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가 지난 2023년부터 KAFA 졸업영화제를 단독 후원 중이며, CJ 문화재단과 함께 ‘KAFA 인 베트남’을 3년 전부터 진행하고 있다.
이 같은 국제 교류와 협업 확대는 KAFA의 부산 이전에서 비롯된 위기의식과도 맞물려 있었다. 2018년 부산으로 내려온 KAFA는 그해 입학자 수가 급감했다가 서서히 증가세를 보였고, 2025년 현재 예년 수준을 웃도는 입학생 수를 기록하고 있다. 조근식 원장은 “국내만의 그리고 KAFA 안에서만 자족하는 게 아니라 글로벌 교류를 이어가는 게 중요했다”며 “올해 신설한 글로벌 공동제작 워크숍은 단순한 외부 교류를 뛰어넘어 함께 작업 결과물을 내는 것까지 경험해봐야 한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지난 5월, 15명의 영화인을 선발해 교육 중인 생성형 AI 활용 단편 제작 과정도 신설 프로그램이다. 그간 영화인을 대상으로 AI 관련 기술과 법제도 등의 강연을 기획하는 등 재교육 사업을 추진해 온 KAFA는 올해 AI 장편영화 제작 교육을 시작하기 위해 현재 교육생 선발을 위한 심사 중이다. 선발 후 10월부터 교육을 시작할 예정이다. 변화하는 영화 현장에 발 빠르게 대처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무자인 임아영 KAFA 팀장은 “그간 교육과 사업이 극장 중심의 설계였는데 막상 현장을 누비는 창작자들과 영화인들에겐 이미 극장과 OTT 같은 플랫폼 경계가 희미해진 것 같다”며 “올 1월 넷플릭스와 진행한 리부트 캠프에서도 넷플릭스와 작업한 창작자들, 할리우드를 경험한 해외 영화인들을 모시고 특강을 진행했다”고 전했다. 조근식 원장 또한 “OTT가 영향력을 키워 왔고, AI 기술이 다가오고, 한국 극장이 균열이 일고 있는 상황에서 KAFA가 급변하는 산업 환경에 바로 대응할 수 있는 인력을 키우는 것도 과제라고 생각했다”고 사업 배경을 밝혔다.
KAFA 조근식 원장
장기적 일관성 유지는 과제
이 같은 전략과 방향성에도 물론 과제와 한계점은 있다. 시스템 면에선 KAFA 내부에 이런 정책 변화를 꾸준히 담당할 교수진이 필요하다는 것, 공기관이기에 정책이나 정권에 따라 지원 예산의 변수가 크다는 점 등이다. 최근 조근식 원장의 연임이 결정되며 오는 2027년까지 정책의 일관성은 유지할 수 있게 되었지만, 영화진흥위원회의 순환 보직 특성상 실무자들이 크게 바뀔 가능성은 언제든 있다. 지도 교수들의 계약도 최장 4년이기에 교육기관으로서 가져가야 할 장기 정책 실현이 현실적으론 어렵다는 게 내부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한 관계자는 “외부 환경이 바르게 바뀌는 만큼 그에 대응하는 정책은 장기적 관점에서 뚝심 있게 가지고 가는 게 필요하다. 지금의 KAFA도 그런 부분을 고민할 때”라고 전했다.
조근식 원장은 보다 본질적 고민을 털어놨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엔 학생들에게 상업영화를 가르쳐야 할지 독립영화를 가르쳐야 할지 고민했다면, 이젠 글로벌 환경이 열림으로써 기존 공식이 아닌 자신만의 개성을 살리면서도 공동제작을 생각하게끔 하는 게 중요해졌다”며 “창작자로서 가져야 하는 기초 교육이 물론 중요하지만, 여기에 더해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기술과 철학, 그리고 예술의 적절한 융합, 여기에 실험성과 창의성을 녹일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게 현재 KAFA가 품고 있는 도전 과제다. 조근식 원장은 “그간 한국영화엔 왜 봉준호, 박찬욱 다음은 없느냐는 질문들이 이어져 왔는데 그건 감독 중심의 시스템에서 자본 중심의 시스템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라며 “<플란다스의 개> 실패 후 봉준호가 <살인의 추억>을 만들게 했고, <3인조>의 실패 후 박찬욱이 <공동경비구역 JSA>로 재기할 수 있게 한 관용이 사라진 지금의 산업 시스템이 바로 세대교체를 막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진단했다.
그럼에도 조근식 원장은 낙관론을 펼쳤다. “한국영화 산업이 붕괴되며 재편될 때 새로운 재능이 나타났듯이 지금이 오히려 절호의 기회일 수 있다”며 그는 “그런 재능이 여전히 한국에 많다고 본다. 새로운 창작자들로 한국영화가 부활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임아영 팀장 또한 “창작하는 사람들이 본인들 본거지와 동떨어진 부산에 와서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게 쉽지 않을 텐데 허가영 감독의 사례도 그렇고 지리적, 물리적 장벽을 넘어 뭔가 도전을 할 수 있게끔 조력한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전했다. 현재 KAFA의 의의가 바로 이 지점에 있지 않을까? 창작자들의 세계를 지지하며 변화를 직시하고 대응을 위한 예비 훈련의 장이 될 이곳에서, 신진 창작자들은 여전히 분투하고 있다.
“KAFA에서 매섭게 배웠다”
<첫여름> 허가영 감독
허가영 감독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던 허가영 감독은 연극부 친구들과 카메라를 빌려 첫 영화를 찍던 경험을 강렬하게 간직하던 비전공자였다. 청소년기에 잠시 함께 살았던 외할머니와의 기억을 오래 품고 있던 그는 시민단체 활동도 하는 등 바쁜 20대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30대가 오기 전 내 영화를 찍고 싶어 KAFA에 들어갔다”며 허 감독은 기자에게 운을 뗐다.
허 감독은 KAFA 과정을 밟으며 2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중 <첫여름>이 칸영화제에, <너를 심을 땅>이 캐나다판타지아영화제에 초청받은 것. 고등학교 재학 중 자퇴를 선택했던 그에겐 여성의 삶이라는 오랜 과제가 있었다. 실제로 청소년기 잠시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허 감독은 자신보다 남자친구에게 더 관심이 컸던 외할머니를 20대가 되어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첫여름>은 그 이해를 바탕으로 탄생한 작품이다. 70대 노년기에 접어든 영순(허진)이 손녀의 결혼식을 뒤로 하고 고인이 된 남자친구의 49재에 참석하기까지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의 선택은 가부장제에 억압받던 여성의 해방이면서 자신의 내면과 감정에 솔직했던 순수한 태도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30분 분량의 졸업 작품으로 내놓았지만 “언젠가 장편으로 꼭 만들고 싶다”는 허 감독은 이 이야기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Q 외할머니와 단둘이 6개월간 살았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대학교 수업 과제로 외할머니를 직접 인터뷰하며 지금의 이야기를 구상했다던데, 구체적으로 어떤 감정들을 느꼈나.
A 할머니 댁에 살 때 내게 가장 안 좋은 방을 주셨다. 바퀴벌레가 나와 혼자 잡았는데 그걸 보고 모른 척하시기도 했다. 내게 용돈을 달라시거나 당신의 남친 얘기를 하시기도 했던 분이다. 서러워서 울고, 할머니가 미워 욕하며 잠든 적도 있다. 언젠가 엄마와 크게 다툰 일이 있었는데 할머니께서 “내 딸 괴롭히는 사람은 손녀라도 싫다”고 하시더라. 나와 엄마에게 관심도 없어 보였는데 그 말씀이 흥미롭게 들렸다. 대학교 학부생 때 노인복지론 과제로 할머니를 인터뷰하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아, 할머니가 그런 마음이었구나’ 이해는 했지만 막상 나도 바쁜 20대를 보내느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49재에 갔는데 절의 대웅전에서 흘러나오던 불경소리가 마치 콜라텍 음악처럼 들리고, 할머니가 춤추는 모습이 그려지더라. 알 수 없는 강렬한 감정이 밀려왔던 기억이 있다.
Q 경영학을 전공했고, 노동 관련 시민단체 활동도 했다. 그러다가 꼭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마음이 들었던 건가.
A 그렇다. 막연하게 다큐멘터리나 글의 형태로 더 많은 노인의 이야기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졸업 시기가 되어 진로를 정하려는데 내가 갈망했던 영화를 30대 전에 꼭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세계관이 무너질 정도로 격동적이었던 할머니와의 경험이 있는데, 살아계실 때 왜 더 자세히 묻거나 교류하지 못했는지 싶더라. 내게 보였던 할머니의 춤을 영화로 남기고 싶었다.
Q 제목 자체가 상징적이다. 본래부터 이 제목이었나? 아니면 시나리오 집필 과정에서 결정된 것인가.
A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제목이다. 시놉시스 제출을 앞두고 새벽 5시엔가 떠오른 것이다. 내가 그리고 싶었던 여성이 빼앗긴 무언가가 있는데 그게 여름이라고 생각했다. 마음껏 땀 흘리고 느낄 수 있는 열기, 충만한 마음을 우리 할머니가 빼앗겼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걸 되찾아 드리고 싶었다. 내 할머니가 특별하기도 했지만, 한 시절을 통과하며 보편적인 여성으로 살아왔으니까.
<첫여름> 스틸컷
Q 배우 허진, 정인기 등 기성 배우들이 학생 중편에 참여한 것도 흥미롭다. 설득의 과정이 어렵진 않았는지.
A 두 배우님도 노년의 로맨스라는 걸 독특하게 생각하신 것 같다. 내가 비록 신인이지만 캐스팅 과정이 감사하게도 어렵진 않았다. 참고로 허진 선생님 남편 역을 하신 분은 KAFA 기숙사 앞 편의점 사장님이다. 전문 배우가 아닌데 워낙 영화적으로 생기셨기에 출연을 제안 드렸고 흔쾌히 참여하셨다. 현장에서 너무 연기를 잘하셔서 놀랐다.(웃음)
Q 허진 배우의 콜라텍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 장소의 분위기와 캐릭터의 정서가 녹진하게 담겨 있더라. 취재에도 공을 꽤 들인 것 같다.
A 영화에 나오는 소품 중 상당수가 실제로 엄마가 입던 것, 할머니가 쓰던 것들이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수차례 카바레에 들러 어르신들과의 대화를 채록했고, 직접 춤도 춰봤다. 어느 할아버지가 춤을 청하셔서 해봤는데 몸이 단단하신 게 신기하더라. 얼굴이 가까이에 있으니 체취와 숨소리가 다 느껴지는데 춤이라는 게 이처럼 교감이 강한 것이구나 알게 되었다. 오랜 파트너들이 합을 맞춘다는 게 큰 감정을 나누는 일이라는 걸 체감했다.
Q 칸영화제 상영에서도 관객들 호응이 상당했다고 들었다. 어떤 평이 기억에 남는가.
A 여러 소감을 말해주셨는데 “할머니를 기억하는 가장 특별한 방법 같다”는 말이 가장 기억난다. 문화와 사회적 맥락을 초월해서 캐릭터의 마음과 내가 전하고 싶었던 진심을 알아주신 것 같았다.
Q 영화감독의 꿈을 KAFA를 통해 이루게 되었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결심했는데 해당 교육 과정이 작품 세계를 구현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되었나.
A 막연하게 영화감독을 꿈꿨지만, 선생님도 동료도 없었기에 내겐 아주 먼일 같았다. 운이 좋게 KAFA에 입학해 현장에 던져지며 모든 걸 매섭게 배웠다. 입학 전과 후 내가 다른 사람이라 느낄 정도로 창작자의 정체성을 쌓아 간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스태프를 구성할 때도 KAFA 친구들과 하게 되는데 촬영 구도를 함께 고민하고 내 머릿속 장면을 구현해주는 기술력을 갖춘 동료들이 있었다. 나와 아주 다른 시선, 능력, 경험을 가진 동료들을 보며 때론 그 강점을 훔치며 작품 세계를 넓혀 갔다. 영화 안에서 헤맬 때는 기꺼이 조언을 구할 선생님들도 만났다. KAFA는 영화인으로서 자질을 확인하고 증명할 기회를 주었다. 졸업 작품을 찍는 과정과 각종 지원은 영화를 갈망하던 내게 너무도 귀했다.
Q KAFA가 아니었다면 외부에서 <첫여름> 같은 작품을 만들 수 있었을까? 신진 창작자로서 KAFA의 중요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A 비전공자지만 이야기를 쓰려는 갈망이 있는 감독 지망생들에게 영화라는 장벽은 높다. 부산이라는 낯선 공간에서 KAFA가 제공하는 1년간의 환경과 교육 과정이 있었기에 쏟아지는 멘토링과 피드백, 비평을 견디며 나만이 할 수 있는 질문과 이야기를 찾는 작업을 해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괴롭기도 했고, 인생의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는데, 그만큼 행복했고 충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