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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과 더듬거림의 순간
<그녀가 돌아온 날>
글 _ 최은영(영화평론가)
사진 제공 _ 영화제작전원사
2026-05-11
홍상수 감독의 34번째 영화 <그녀가 돌아온 날>은 수많은 필모그래피를 통해 변화해 온 홍상수 감독의 새로운 경향의 한 정점에 놓여 있는 작품이다. 시공간의 정교하고도 어지러운 배치, 로드무비의 경향이 홍상수 영화의 초기부터 시작한 영화 여정의 특징이라면, 최근 들어 그의 영화는 특정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태도의 변화에 천착한다. 상황에 인물을 던져놓은 후 그들의 심경의 변화를 포착하는 홍상수의 시선은 늘 있어왔지만, “있는 그대로를 보고 싶다”는 작가의 방향성은 더욱 명징해졌다.
<그녀가 돌아온 날>의 주인공은 젊은 시절 아마도 규모 있는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며 대중적 인기를 누렸지만, 공백기를 가진 후 중년에 접어든 한 배우다. 결혼 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그녀가 이혼 후 12년 만에 컴백하여 자신이 출연한 독립영화의 홍보를 위한 인터뷰를 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세 번의 인터뷰와 한 번의 연기 수업으로 구성된 이 영화는 모두 5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녀가 돌아온 날>은 태도의 저변에 존재하는 실체를 포착하기 위해 인터뷰라는 소재를 선택했다. 의도적인 반복의 클리셰의 총화로서의 인터뷰들은 영화의 후반부 재연의 과정에서 남김없이 부서져 내린다. 단순하고 포멀한 인터뷰의 형식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그것을 파괴하는 과정을 통해 감독은 주인공의 감정적 실체를 드러내려 한다. 모든 클리셰가 무너진 후 찾아온 침묵과 더듬거림의 순간이 바로 그것이다.

반복과 변주
홍상수의 많은 영화들에서 보여지는 반복과 변주는 그의 영화의 트레이드마크이며, 영화 자체가 반복된 상황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에서 그러한 형식은 관객의 눈에도 두드러지게 보일 수밖에 없다. 영화 홍보를 위한 인터뷰는 대개 인터뷰어만 달리한 반복적 대답의 형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배우의 인터뷰라는 전제는 배우라는 직업이 담보하는 상상의 영역을 추가한다. 연기는 배우의 숙명이며, 많은 관계에서 바깥의 시선이 인식하는 자기 자신을 연기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상에서의 연기는 사실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관계의 특징이기도 하다. 일상이라는 무대 안에서 누구나 연기를 한다. 다만 그것이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송선미가 연기하는 여배우는 반복된 인터뷰 안에서 반복된 질문에 반복된 대답을 계속한다. 세 번의 인터뷰와 한 번의 연기 수업에서,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는 각기 다른 패턴의 변주를 통해 전개의 동력을 확보한다.
반복되는 인터뷰는 어떤 범주들로 요약될 수 있다. 이를테면 나이의 문제. 인터뷰어들은 인터뷰를 끝맺는 마지막 질문으로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묻고, 주인공은 동일한 대답을 반복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세요.” 그러나 늙음과 젊음이라는 주제에 관해 주인공의 태도는 모순적이다.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40대처럼 보이는 자신의 어머니를 거론하며 젊어 보이는 외모를 타고났다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나이 든 강아지의 천사 같은 모양새에 대한 묘사로 전이된다. 젊음에 대한 비관주의와 늙음에 대한 찬사는, 외모를 관리해야 하는 배우의 현재와 모순적인 대구를 이룬다. 살을 빼기 위해 운동을 해야 하고, 술을 줄여야 한다는 배우의 대답은 부침이 많은 젊은이들의 고민에 대한 충고, 나이 듦에 대한 찬사와 동경을 정면으로 배반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결혼과 이혼을 거치고 싱글맘이 된 배우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자기방어기제는 젊은 여성의 녹록지 않은 삶에 대한 비판적 시선, 나 자신을 사랑하라는 젊은이들에게 주는 고언을 통해 드러난다. 독일 맥주를 즐기는 배우의 취향이 인터뷰라는 상황과 부딪치는 동안,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하고, 참아내는 것도 멋진 태도라는 배우의 이야기가 이와 조응한다.
세 번의 인터뷰는 비슷한 상황을 반복하지만, 인터뷰가 바뀌는 동안 배우의 마음가짐은 변화한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배우가 인터뷰에 임하며 가졌던 생각의 고리는 조금씩 흩어지고, 인터뷰하는 내내 자신을 사로잡고 있었던 불안과 현재의 삶에 대한 심상이 그 사이로 스며든다. 첫 번째 인터뷰에서 주인공의 방어기제는 최대치에 있다. 사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자제하고, 영화에 집중하려는 그녀의 태도는 불안의 또 다른 표현이다. 첫 번째 인터뷰를 끝내고 그녀는 흘리듯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을 너무 많이 한 거 같애” 독일 맥주를 마시며 진행된 두 번째 인터뷰에서, 배우처럼 아름다운 외모에 자신의 감정을 비교적 가감 없이 내보이는 기자의 태도에 주인공의 방어기제는 느슨해진다. 인간에 대한 비관적 시선을 피력하고, 이혼 과정에서 상처 입은 자신을 내보이며 울먹이고, 기자를 포옹하며 감정적으로 반응한다. 인터뷰가 끝난 뒤 담배를 피우고 들어가던 주인공은 저 멀리 육교 난간에 혼자 서 있는 기자를 발견하고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낸다. 사뭇 쓸쓸하고, 솔직하고 감정적인 그 모습이 마치 젊었을 적 자신의 모습 같다. 그리고 진행된 세 번째 인터뷰에서 주인공은 인터뷰가 녹음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자신을 추스른다. 멋진 여자가 되고 싶다, 연기를 하기 위해 연기 수업을 듣고 있고, 진짜 사랑을 위해서라면 하기 싫은 것도 참고,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다짐의 말을 뱉어낸다. 사실상 그녀의 말은 언제든 불쾌한 질문에 맞닥뜨릴 수 있는 인터뷰라는 상황에 맞서고 있는 자신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인터뷰와 인터뷰 사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투샷이 아닌 배우의 원샷이 등장하는 구도는 흥미롭다. 첫 번째 인터뷰가 끝나고 난 후 배우는 카메라를 거의 등지고 앉아 담배를 피운다. 두 번째 인터뷰가 끝난 후 배우가 담배를 피우는 행위 자체는 같지만, 카메라는 약간 구도를 달리하여 그녀의 옆모습을 비춘다. 그리고 마지막 인터뷰가 끝나고 자리를 떠날 때 카메라는 그녀와 매니저의 정면을 롱숏으로 비춘다. 배우와 카메라의 구도, 숏과 인물의 거리가 달라지는 것은 이 세 개의 인터뷰가 거의 비슷비슷한 구도로 흘러가는 동안에도 인물의 심리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터뷰 막간에 등장하는 이 세 번의 숏에는 공통점 역시 존재한다. 배우는 야외에서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운다. 주저앉은 그녀는 주변 인물들과 명백히 거리를 둔다. 그들은 펜스 너머에 있거나, 자동차 뒤에 서 있다. 구도를 통해 보여지는 심리적 고립감은 현재 그녀의 상태를 대변한다. 인터뷰가 모두 끝난 후, 그녀는 가장 감정적으로 임했던 두 번째 인터뷰에서 했던 남편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사람은 예쁘지 않다는 자신의 말을 인터뷰에서 지워달라고 요청한다. 세 번의 인터뷰는 표면적으로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지만, 사실상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상태와 투쟁하고 있다. 그리고 뒤를 잇는 4장과 5장에 걸쳐 이어지는 인터뷰의 재연에서, 주인공은 체험을 되새기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고 마침내 인터뷰의 실체가 드러난다.

재연, 그리고 실재
영화의 말미, 4장과 5장은 인터뷰가 아닌 인터뷰의 ‘재연’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앞선 세 개의 챕터와 다른 결을 지닌다. 연기 수업 강사는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바라보는 연습이 연기에 도움이 될 거라며, 오늘 했던 인터뷰에서 오갔던 말을 주인공이 직접 대본으로 써서 재연하게 한다. 기억을 떠올려 다시 쓴 대본을 가지고 상대 배우와 주고받는 재연의 과정에서, 주인공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대사를 연기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인터뷰어를 연기하는 상대 배우는 다른 인터뷰어가 하지 않았던 질문들을 던진다. 이는 주인공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이야기는 느려지고 집중은 흩어지며, 주인공은 자꾸만 자신의 말을 잊어버리고 대본을 들여다본다. 내가 했던 말과 상대방이 했던 말은 뒤섞이고, 그 경계는 점점 흐려진다. 주인공은 그 상황을 통해 자신이 했던 인터뷰의 실체를 깨닫게 된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 속에서 침묵이 길어진다. 이 길어진 침묵의 시간은 앞선 인터뷰에서 주고받은 말의 무용함을 거침없이 폭로하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은 이 과정에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게 된다. 말하자면 재연을 통해 실재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첫 번째 인터뷰에서 주인공은 모든 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오히려 실재에서 멀어지는 상황들에 대한 불만을 피력한다. 설악산에서 홀로 있을 때 일어났던 찰나의 체험, 있는 그대로를 보고 있다는 자각은 영화의 주제를 관통하는 거대한 깨달음이기도 하다. 인터뷰는 기사를 전제로 하는 가상의 대화 형식이다. 엄밀히 말해 일대일 대화와는 다른 인터뷰의 속성 때문이다. 배우의 말은 인터뷰를 통해 불특정 다수의 해석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감독은 범람하는 해석의 총화로서 인터뷰라는 형식을 가져왔다.
홍상수가 자주 사용하는 클리셰들은 현실의 조각들이지만 그 조각들의 합이 진실이 될 수는 없다. 홍상수의 영화들은 해석이라는 불순물 너머에 있는 실재의 형상을 포착하기 위해 클리셰라는 질료를 사용한다. 주인공이 경험한 찰나의 실재에 대한 감각은 분명히 거기에 있지만 해석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인간의 의식을 넘어서는 실재에 대한 체험은 영화라는 매체의 숙명이기도 하다. 현실의 일부를 보여주는 프레임은 역설적으로 보이지 않는 바깥의 우주를 경험하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영화 속에서 전개되는 인터뷰라는 닫힌 형식은 재연을 통해 부서지고 흩어진다. <그녀가 돌아온 날>에서 있는 그대로를 보고 싶다는 주인공의 간절한 바람은 홍상수가 추구하는 영화의 본질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