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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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하는 인간, 정박하는 영화

<흘려보낸 여름>

글 _ 홍수정(영화평론가)
사진 제공 _ 이선연 감독

2026-05-26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경쟁 부문 대상을 탄 <흘려보낸 여름>은 언뜻 보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한 가족의 일상을 담은 작품처럼 보인다. 딸 유영과 그녀의 엄마, 아빠로 이뤄진 단출한 세 식구는 허름한 봉고차 한 대에 몸을 싣고 충남 일대를 떠돈다. 하지만 안온해 보이는 그 운동이 어떠한 삶의 형태를 온몸으로 체화하고 있다는 것은, 영화를 유심히 보기 전까지 알기 어렵다.

<흘려보낸 여름>은 일차적으로 노동과 거주의 문제를 다룬다. 유영은 핸드폰 매장을 방문하며 신제품을 홍보하는 일을 짬짬이 하는데, 그 일은 불안정하여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게다가 봉고차 안에서 사는 이들의 열악한 환경은 거주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흘려보낸 여름>은 이렇게 선명한 논제보다는, 어슴푸레한 어떤 감각 하나를 단단히 붙잡고 숙고하는 또 숙고하는, 그런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흐르는 삶의 감각 <흘려보낸 여름>은 ‘흐르는’ 감각에 주목한다. 제목에 들어간 ‘흘려보낸’이라는 표현처럼. 영화의 첫 장면, 구성진 노랫가락이 흘러나온다. 가사는 이렇다. “조용하게 미소 짓는 입술은 지난날의 추억들이 너무도 행복했기 때문이라오.” 이 노래는 영화에서 여러 번 반복된다. 아름다운 지난날과 미소 짓는 오늘을 동시에 자각하는 이 노래의 화자는, 과거와 현재 사이 어딘가에서 자유로이 떠돈다. 그리고 노래를 배경으로, 한 대의 차가 도로를 달린다. 유영의 가족이 탄 차다. 평화롭다. 손가락 사이를 스르륵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그렇게 차도, 노래도 편안하게 흘러간다. 적어도 첫 장면에서 무언가 흘러가는 감각은, 적당히 자유롭고 얼마간 낭만적인 형태로 영화에 새겨진다.

하지만 평화로움도 잠시. 다음 장면에서 좁은 차 안에 생활하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그곳에서 앉고, 먹고, 몸을 뉘는 사람들. 그들의 등장이 충격적인 이유는 먼저, 그 삶의 형태가 낯설기 때문이다. 이들은 왜 차에서 지내는 것일까? 그리고 또 하나의 (더 중요한) 이유는 비좁은 차 내부에서 이뤄지는 그들의 뻣뻣한 움직임이, 첫 장면에서 도로 위를 미끄러진 차의 자유로운 움직임과 매우 상반되기 때문이다. 이 장면에 이르러 영화의 분위기는 확연히 반전된다. 아무런 수심 없이 밤공기를 가르며 부드럽게 내달리던 차를 밖에서 지켜보던 우리는 이제 한낮에, 제자리에 멈춘 차 안의 풍경을 목격한다. 이토록 훌륭한 반전을 통해 <흘려보낸 여름>은 흐르는 삶의 양면을 이쪽과 저쪽 모두에서 찬찬히 보겠다고 선언하는 것만 같다.

유영 가족을 실은 차는 때로 길을 잘못 들어 알 수 없는 곳에 멈춰 선다. 그들은 갈 곳을 모른다. 나는 중의적인 의미에서 이 말을 썼다. 그들은 당장 가야 할 곳을 모르고, 삶의 돛대를 어디로 펼쳐야 할지 알지 못한다. 이 순간 스크린을 적시는 답답함, 당황스러움, 약간의 좌절 그리고 이 모든 감정을 담은 세 사람의 무표정한 얼굴. 그들은 아무래도 지금 삶의 어떤 국면에 갇힌 듯하다. 아마도 이들이 봉고차를 타고 옮겨 다니는 생활을 벗어나기란 그다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차는 다시 달린다. 밤이고, 낮이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묘한 갑갑증이 올라올 때쯤 차는 다시 도로 위를 내달리며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간다. 그 운행의 종착지가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것. 비록 어디에 닿을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들이 숨 막히는 코너에 스스로를 버린 채로 자포자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흘러가는 삶’은 일견 유영 가족이 짊어져야 하는 괴로운 삶의 방식이다. 그들은 남들처럼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니까. 하지만 역설적으로 ‘흘러가는 것’은 그들이 자기 삶을 위로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수행하듯 걷는 자는 한곳에 멈출 수 없어 서럽지만, 그 아픔마저 소화하기 위해 다시 걷는다.



정박한 삶을 향한 갈망 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흘러가는 삶에 대한 지나친 낭만화일지 모르겠다. 지금도 따뜻한 방에 앉아 글을 쓰는 나는 그 삶을 머리로 상상하며 예쁜 수식어를 붙이지만, 자기 몸으로 겪어내야 하는 삶이라면 어떨까. 그래서 <흘려보낸 여름>에는 이 삶을 둘러싼 의견 대립이 등장한다.

유영의 아빠는 지금 삶에 별다른 불만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건 아마도 드러나지 않은 그의 잘못 때문일지도 모른다. 과묵한 그는 그저 수행자처럼 매일 갈 곳을 정해 충실히 차를 운행할 따름이다. 그에 반해 유영의 엄마는 더 적극적으로 이 삶을 긍정하는 것 같다. 그녀는 말한다. 만일 무슨 일이 생겨서 이별하게 된다면 다리 위에서 만나자고. 어디가 되었든, 물이 흐르는 다리 위에서. 이 말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유영의 엄마는 흐르는 물 위에 지어진 다리 같은 삶을 추구한다. 비록 떠돌아다니며 산다고 해도(흐르는 물) 그 위에서 견고한 삶(다리)을 영위할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인 것이다. 그런 삶에서도 가족이 함께할 수 있다고 그녀는 믿는다.

한편, 유영은 다르다. 그녀는 자기 삶에 결핍된 한 가지를 갈망한다. 그것은 바로 ‘어딘가에 정박하는 것’이다. 그녀가 이 갈망을 드러내기 시작할 때, 영화는 변하기 시작한다. 정박하는 삶을 향한 소망이 커지며 유영은 자신의 짐을 찾고 싶어 한다. 이들 가족의 짐은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아마도 봉고차에 짐을 모두 실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짐은 말 그대로 ‘삶의 짐’과 맞닿아 있다. 그것은 무겁고 거추장스럽지만, 현실에 발붙이고 살기 위해 꼭 필요하다. 우리는 형언할 수 없이 많은 짐을 끌어안고 살지만, 그건 역설적으로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흔적이다.

짐을 되찾고 싶은 유영은 하나의 장소를 자주 생각한다. 그것은 짐을 맡긴 창고다. 이곳에 보관료를 내야 짐을 맡길 수 있다. 유영이 창고를 찾아가고 싶어 하는 것 역시 상징적이다. 그녀는 자기 삶의 흔적을 보관한 장소에 가고 싶은 것이다. 짐을 모두 창고에 둔 채로 이리저리 이동하는 이들의 삶은 가뿐하지만, 삶의 체취, 삶의 거스름 같은 것들이 축적될 여지가 없다. 반면 짐은 비록 무겁지만, 묵직한 안정감을 선사한다. 어쩌면 유영이 찾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나의 집은 어디인가 후반부에 이르며 <흘려보낸 여름>은 새로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유영 가족에게 잠시 멈춰 쉴 곳이 있느냐고. 있다면 어디냐고. 차에서 사는 꿈 같은 상황은 이제 집이 없다는 무서운 현실로 바뀌어 우리 앞에 내던져진다. 우리는 이들에게 결핍된 것을 직시하기 시작한다. 바로 ‘집’.

그렇다면 집 없는 이는 어디서 숨을 돌릴 것인가. 영화는 유영의 가족이 잠시 머무는 곳을 보여준다. 이곳은 그들만의 쉼터, 그러니까 집을 대체하는 공간이다. 사람 없이 버려진 집에서 살자는 엄마에게 유영은 짜증을 낸다. 하지만 그곳에서 엄마와 함께 잠들었다 깼을 때,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며 잠자코 앉아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누추한 집조차 이들에게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만은 눈에 들어온다.

유영이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지친 그녀는 이곳에 멍하니 앉아 있다. 하지만 이곳은 그녀의 집이 아니다. 다음 장면에서 그녀는 버스 좌석에 앉아 있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이곳도 그녀의 집이 아니다. 이제 그녀는 자기 짐이 맡겨진 창고에 도착한다. 그러나 창고도 집이 아니다. 이 모든 걸음은 유영의 심상한 행로로 그려지지만, 내게는 자신에게 결핍된 ‘집’을 대체할 공간을 찾으려는 몸부림으로 읽힌다.



흘려보내겠다는 결심 영화의 후반, 유영의 가족에게 시련이 닥친다. 남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유영의 가족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는, 사소하고도 묵직한 사건이다. 이후 이들 가족은 하나의 결말을 맞는다. 의식하지 않으면 이 결말은 그저 우연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하나의 행동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그건 유영의 달리기다. 이건 <흘려보낸 여름>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다. 이 장면에 이르러 영화는 이례적으로 유영을 정면에서 바라보며, 어딘가를 향해 뛰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본다. 영화 전체에서 거의 유일하다 싶은 달리기 장면.

객관적으로 이 달리기는 어떠한 의미도 갖지 않으며, 서사의 진행과 무관해 보인다. 하지만 <흘려보낸 여름>의 세계 안에서는 그렇지 않다. 유영은 어딘가에 정박하지 못하고 말 그대로 유영하며 삶을 살아왔다. 자기 짐조차 어딘가로 흘려보내야 해서 괴로웠다. 그 삶은 위기를 맞아 코너에 몰렸다. 바로 그 순간 그녀는 달리기를 통해, 자기가 디딘 땅을 있는 힘껏 뒤로 흘려보낸다. 이 장면에서 그녀는 자기가 감당해야 했던 삶의 방식을 감싸 안는다. 이 간단한 동작은 그녀의 삶을 충만하게 긍정한다. 주위의 많은 것을 흘려보내야 해서 괴로웠던 삶의 한 챕터는 그렇게 그녀의 뒤로 흘러간다.



이것은 영화가 떠도는 삶을 긍정한다는 뜻도 아니고, 유영이 계속 그렇게 살겠다고 결심했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그러한 삶의 깊이를 우리가 함부로 재단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 삶이 불행한지, 행복한지 우리는 감히 알 수 없다. 또한 유영은 자기 힘으로 코너에서 빠져나오며 자기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다. 그래서 노을 진 하늘을 배경으로 유영이 뛴 그 짧은 순간은 소중하다.

유영의 아빠는 말한다. 나는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이곳에 있으면 안 될 것 같다고. 그리고 우리도 종종 삶의 어느 순간에, 모두가 단단히 정박한 그 바다에서 나 홀로 유영하고 있음을 깨닫고는 한다. 몸이든, 정신이든, 정체성이든, 한곳에 뿌리내리지 못한 채 떠돌아야 하는 숙명적인 순간은 꽤 있다. 그럴 때 이 영화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유영이 끝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가 탄 봉고차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은 분명 아름답다.

흘려보낸여름 전주국제영화제 이선연감독 이주영 이봉하 김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