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한국영화의 ‘허리’, 중박 영화가 사라졌다
- 글
- 김희경(영화평론가)
Opinion
올해 들어 두 편의 영화에 연이어 축포가 터졌다. <파묘>와 <범죄도시4>가 천만 관객을 달성한 것이다. 두 영화 모두 기존의 한국영화 흥행 공식에서 벗어난 작품들이다. <파묘>는 비주류 장르인 오컬트 영화가 천만 기록을 달성했다는 점에서, <범죄도시> 시리즈는 ‘속편은 잘되기 어렵다’라는 통설을 깨고 ‘트리플 천만’의 IP(지식재산권)가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의미 있는 성과에도 전체 한국영화계의 시름은 깊어지고 있다. 축제 분위기가 아닌, 오히려 절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일부 ‘대박’ 영화 이외에 다른 한국영화들은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 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과거 300만~500만 명의 관객이 들던 ‘중박’ 영화는 아예 종적을 감췄다. 한두 편의 대작 영화에만 관객이 몰리는 현상이 심화하고, 그 외의 중예산 영화에선 관객을 찾아보기 힘들어진 것이다.
한국영화 3위가 100만?올해의 개봉작 순위와 관객 수를 비교해 보면, 그 심각성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1위 <파묘>, 2위 <범죄도시4>는 천만 관객을 동원했지만, 다음 순위를 잇는 작품들은 500명은커녕 300만 근처에도 잘 가지 못했다. 3위 <웡카>는 353만 명, 4위 <듄: 파트2>는 199만 명, 5위 <쿵푸팬더4>는 176만 명 수준에 그쳤다. 이마저도 다 외화에 해당하고, 한국영화로 범위를 좁혀서 보면 더 큰 격차가 나타난다. 전체 순위로는 6위, 한국영화로는 3위에 오른 <시민덕희>는 17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 1, 2위 한국영화들과 무려 7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 셈이다.
팬데믹 이전인 2019년과 비교하면 분위기가 급격히 나빠진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엔 <극한직업><기생충>이 나란히 천만 관객을 돌파한 데 이어 <엑시트>가 942만 명을 기록하며 한국영화의 전성기가 펼쳐졌다. 동시에 <백두산>(629만 명)을 필두로 <봉오동 전투><나쁜 녀석들: 더 무비><82년생 김지영><돈>이 300만~4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시장의 든든한 지지대 역할을 해줬다.
하지만 올 들어선 중박 영화가 아직 한편도 나오지 않았다. 배우 손석구, 김성철 등 인기 스타들이 출연한 <댓글부대>의 관객은 97만 명으로 100만 달성조차 실패했다. 이는 비단 올해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해에도 <서울의 봄>과 <범죄도시3>가 천만 기록을 달성했지만, 중박 영화에 해당하는 작품은 <밀수><콘크리트 유토피아><노량: 죽음의 바다>로 3편에 불과했다. 한 영화 제작사 관계자는 “영화엔 각자의 밥그릇이 있다고들 했지만, 이젠 다 옛말이 됐다”며 “제작비는 치솟는데 손익분기점 달성도 어렵다 보니 영화 제작 자체가 크게 위축되고 있다”라고 토로했다.
‘문화적 향유’에서 ‘소비’의이 같은 현상은 영화가 각 개인의 취향과 만족을 위한 ‘문화적 향유’의 대상에서 밀려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대신 대중적 ‘소비’의 대상이 되어 철저히 소비의 원칙을 따라가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밴드웨건(bandwagon)’ 효과가 두드러지고 있다. 밴드웨건 효과는 개인이 자신만의 독립적인 판단이나 신념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을 따라서 행동하거나 선택하는 심리적 경향을 의미한다. 소비 시장에선 유행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하는 소비, 또는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의 소비 행태를 무작정 따라가는 경향을 이른다.
이 같은 밴드웨건 효과는 소위 ‘극장용 영화’를 선택할 때 더욱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 번의 결제만으로 다양한 콘텐츠를 볼 수 있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통해 영화를 감상할 땐, 자신만의 취향과 만족을 더욱 중요시하며 작품을 선택한다. 하지만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는 이와 달리 다수가 선택한 작품을 똑같이 고른다. 예전처럼 극장을 자주 가지 않아도 충분히 영화를 볼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다 보니, 따로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 극장에 가게 되는 경우엔 개인의 만족보다 사회적 필요에 따른 선택만을 하는 것이다.
일반 제품을 살 때처럼 모험을 최대한 피하는 심리도 영화 감상에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 기존엔 낯선 장르나 소재의 영화라 해도 호기심을 갖고 과감히 관람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젠 대중의 반응 또는 전작의 흥행 성과에 기대어 최소한의 재미가 담보된 작품만을 선택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 역시 각기 다른 두 플랫폼인 극장과 OTT를 비교해서 보기 때문에 파생된 현상이다. 극장에서 비용과 시간을 투자해서 영화를 봤는데 별로 만족하지 못했을 경우, OTT로 봤을 때 동일 현상이 일어난 경우를 견주어 계산하는 것이다.
앞으로 더 큰 문제는 이런 쏠림 현상이 심화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극장 영화 관람이 가졌던 ‘희소성’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OTT가 영상 시장에서 명실상부한 핵심 플랫폼으로 자리하면서, 사람들은 수많은 영화를 일상에서 쉽게 접하게 되면서 일어난 일이다. 게다가 다양한 레저 활동까지 늘어나면서, 굳이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지 않아도 여가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게 됐다.
2019~2023년그래서인지 “어떤 영화가 성공을 거둔다면 일단 그것은 사회적인 사건이다. 영화의 질은 부차적인 문제다”라고 했던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얘기를 어느 때보다 실감하게 되는 시점이라 할 수 있다. 영화의 작품성과 수준보다는, 다양한 사회적 요인과 시장 구조의 변화 등이 복잡하게 맞물려 영화의 성패를 좌우하고 있으니 말이다.
한국영화 투자 동력도 잃었다상황이 이렇다 보니 개봉 첫 주에 최대한의 관객을 동원해야만 하게 됐다. 그렇지 못하면 오래 버티지 못하고 조용히 스크린에서 내려가게 된다. 좋은 영화를 발견한 관객이 입소문을 내고 더 많은 관객을 불러들일 수 있는 시간적 여유와 가능성이 사라진 것이다. 이에 따라 뒤늦게 해당 영화에 관심을 갖고 극장에 보러 간 관객은 다시 발길을 돌리거나, 대안으로 남들이 다 보는 대작 영화를 선택하고 있다.
중박 영화가 사라지면서 장르적 다양성도 무너지고 있다. 그동안 다양한 장르로 구성된 중예산 영화들은 관객의 선택지를 넓혀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이젠 이 영화들이 종적을 감추며 장르적 편중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지난해 기준 한국영화 시장에서 1~4위 장르에 해당하는 액션, 애니메이션, 드라마, 범죄 영화는 전체 관객 점유율의 80.5%를 차지했다. 반면 코미디, 스릴러, 공포, 판타지 등 나머지 장르들은 고작 20%를 나눠 갖는 것에 그쳤다.
이런 현상들이 총체적으로 맞물려 나타나며 한국영화에 대한 투자도 꽁꽁 얼어붙고 있다. 중예산 영화는 손익분기점조차 넘기기 힘들다보니, 투자 자체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2019년 기준 실질개봉작 중 순제작비 30억~100억 원에 해당하는 영화는 35편이었지만, 지난해엔 30% 이상 줄어 24편에 그쳤다. 한 영화 투자자는 “중예산 영화는 투자 포트폴리오에서 꽤 높은 비중을 차지해 왔으며, 투자를 지속할 수 있게 하는 동력이 되어줬다”라며 “하지만 이젠 중박 영화 제작이 힘들어지면서 한국영화에 대한 투자를 이어갈 요인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또 “결국 아예 규모가 큰 작품에 투자하거나 저예산 영화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하지만 대작은 리스크도 커서 부담이 되고, 관객 수 자체가 적은 저예산의 독립·예술 영화에 대해선 마땅히 투자를 할 만한 요인을 찾기 어렵다”라고 덧붙였다.
중박 영화가 사라지면서 시장 전체의 양극화 현상도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오직 대작 한두 편에만 관객이 쏠리면서, 독립·예술 영화도 직격탄을 맞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한국의 독립・예술영화 매출액은 전년 대비 6.4% 감소한 102억 원에 그쳤다. 관객 수 역시 8.6% 줄어든 114만 명에 불과했다.
“ 아예 규모가 큰 작품에 투자하거나 저예산 영화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지만
대작은 리스크도 커서 부담이 되고, 관객 수 자체가 적은 저예산의 독립·예술 영화에 대해선
마땅히 투자를 할 만한 요인을 찾기 어려운 현실이다.”
극장에도 이 같은 현상은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영화 한두 편의 흥행에 명운을 걸어야 하다 보니, 대작 개봉에만 촉각을 곤두세우는 양상이다. 이 같은 시점에 들려온 대한극장의 운영 종료 소식은 극장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대한극장은 충무로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지만, 관객 감소 등의 영향으로 결국 오는 9월 30일, 66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멀티플렉스는 대한극장과 다른 형태의 극장이라고 하더라도, 한국영화 위기에 큰 영향을 받는 것은 마찬가지다.
극장 외 시장에서도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극장 개봉이 모두 끝나고 VOD가 나온 후에도, 더 기다렸다가 OTT로 영화를 감상하는 경향이 강해지며 VOD 매출까지 크게 줄어든 것이다. 지난해 VOD 매출은 1270억 원으로 전년 대비 21.1% 감소했다. 심지어 성수기에 야심차게 개봉한 한국영화들마저 부진한 성적표를 거두면서 큰 폭의 감소세를 보였다.
중박 영화 부활과 함께어려운 시장 환경에 창작자의 부담은 더욱 커지고 있다. 현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관객들이 꼭 극장에 가서 봐야만 하는 이유를 가진 영화를 만드는 수밖에 없다. 감독만의 차별화된 영화 세계와 연출 기법을 자유롭게 펼쳐 보이기엔 작품의 생명도, 감독 스스로의 생존도 더 이상 담보할 수 없는 슬픈 운명에 처한 것이다.
뒤죽박죽 꼬인 실타래처럼 풀기 힘들어진 한국영화 시장을 되살릴 방법은 있을까. 어려운 상황이지만 무엇보다 중박 영화를 살려 허리를 되찾는 노력이 계속 이어져야 한다. 특히 다양한 장르적 시도를 통해 관객들에게 여러 선택지를 주고 이에 감화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여기에 중예산 영화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이 더해진다면 보다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백만 명의 사람들이 내 영화를 보았다면, 나는 그들이 백만 편의 다른 영화를 보았으면 한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얘기를 한국영화 시장에 똑같이 적용해 볼 수 있는 날이 다시 찾아올까. 지금은 거의 불가능하고 요원한 일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부단한 노력으로 중박 영화가 부활하고, 이토록 길고 긴 암흑의 터널에 끝이 찾아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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