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cover img

Festival

소박하지만 풍요롭고, 작지만 의미 깊은 무주산골영화제

ALL About 무주산골영화제

김현록(스포티비뉴스 기자)
사진
무주산골영화제

사방이 초록빛인 초여름 산골에서 4박 5일. 상상만으로도 긴장이 가라앉고 마음이 들뜬다. 이 아름다운 시공간과 엄선된 영화가 함께하는 대체 불가의 축제가 올해로 12회를 맞는다. 소박하지만 풍요롭고 작지만 의미 깊은 영화제, 무주산골영화제(Muju Film Festival, MJFF)다.

image

전라도와 충청도, 그리고 경상도가 맞닿은 전북의 산골 무주는 청정한 덕유산 자락에 반딧불이가 살아가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자랑한다. 2024년 현재 인구가 2만 3000여 명에 불과한 군(郡)이지만, 겨울이면 무주리조트에 스키어와 스노보더가 모여들고, 가을이면 반딧불축제로 들썩이는 관광도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주구천동 계곡에 본격 피서객이 모여들기 전인 6월, 이곳에 영화제를 새로 열겠다는 계획이 2013년 공개됐을 때 많은 이들이 갸웃거렸다. 이미 자리 잡은 타지역 영화제가 한가득이거니와, 인프라도 턱없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근본적 의문이 일었다. 영화관 하나 없는 시골에서 영화제를 한다고?

의심과 의문 속에 발을 뗀 무주산골영화제에게 '영화관 없는 영화제'란 약점이 아니라 가능성이자 마케팅 포인트였다. 뾰족뾰족 날서고 험한 '산'이 아니라 동글동글 포근한 '산골'을 내세우고, 무주의 자연과 인프라를 지붕 없는 극장으로 삼아 적극 활용했다. 첫 회엔 무주리조트에 야외상영장을 마련하고 기존 건물을 상영관으로 바꾸는가 하면 덕유산국립공원의 야영장을 활용했다. 디지털 대신 35mm 영사기로 튼 아날로그 영화가 고즈넉한 분위기를 살렸다.

빈 곳은 하나둘 채워나갔다. 2014년 2회부터는 상영관 두 곳을 갖춘 무주산골영화관을 새로이 열고, 고(故) 정기용 건축가가 설계한 무주읍 등나무운동장을 야외상영관으로 삼았다. 정재은 감독이 연출한 <말하는 건축가>(2012) 속 바로 그 건축가다.

까만 밤하늘엔 별빛이 가득하고, 풀벌레 소리 속에 반딧불이가 날며, 보라색 등나무꽃 향기가 그윽한 영화제는 곧 알음알음 입소문을 탔다. 야영장에 텐트를 치고 쉬다가, 삼삼오오 돗자리를 펴고 도란거리다가, 시간이 되면 영화를 보고 공연을 즐기는 코스도 감성을 자극했다. '준비는 우리가 할 테니 소풍 오듯 들러 보라'는 짧고 알찬 페스티벌은 시네필과 마니아를 제대로 사로잡았다.

image
image
무주산골영화제를 즐기를 관람객의 모습

닷새 동안 열리는 영화제 기간 방문객은 어느덧 무주 전체 인구수를 훌쩍 넘겼다. 기꺼이 무주행 버스와 기차에 오른 젊은 영화팬에다 가족 단위 방문객도 늘면서 남녀노소가 함께하는 축제가 되었다.

남다른 입지와 영리한 콘셉트가 이곳의 전부는 아니다. 무주산골영화제는 시작부터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베테랑 스태프가 주축이 돼 판을 짰다. 작은 규모에도 야심차게 경쟁영화제를 표방하며, 창(窓), 판(場), 락(樂), 숲 (林), 길(路) 다섯개 섹션을 뒀다. 이 가운데 한국영화경쟁부문인 '창'의 최우수 영화에게 주어지는 뉴비전상(대상)에 1000만 원이란 상당한 상금을 준다. 시상 부문은 더욱 묵직해져 이제는 뉴비전상과 500만 원이 주어지는 감독상 외에도 비컨힐 크리에이티브상, 영화평론가상, 무주관객상 등이 생겼다.

’설렘 울림 어울림‘을 슬로건으로 삼아 관객에게 ’영화 소풍‘을 제안한 2013년 제1회 무주산골영화제는 한국영화 31편을 비롯해 14개국에서 온 54편의 영화를 상영했다. 개막작은 실제로 볼 수 있는 한국영화 중 가장 오래된 영화이자 무성영화 시대의 대표작인 안종화 감독의 <청춘의 십자로>(1934)였다.

무주산골영화제는 월드프리미어나 인터내셔널프리미어 등 타이틀에 집착하거나 대형 화제작 유치에 힘 쏟기보다 '선구안'을 발휘하는 쪽에 역량을 집중했다. 이미 자리 잡은 여러 영화제들 틈에서 발을 뗀 작은 영화제의 현실적인 선택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관객을 스쳐가야 했던 수많은 개봉작과 영화제 초청작 가운데 의미있는 작품들을 골라 소개하는 진정성 있는 프로그래밍은 호평을 얻었다.

이 같은 기조는 12회를 맞은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다섯 개 섹션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영화의 지평을 넓힌 작품들에 주목하는 '창', 독창적 시선으로 영화의 미학적 지평을 넓힌 국내외 영화를 소개하며 세계영화의 흐름을 담아내는 '판', 싱그러운 여름밤의 야외 상영 '락', 덕유산 중턱의 숲속 극장에서 무주의 매력을 발산한 '숲', 무주군민을 대상으로 한 이동영화관으로 출발한 '길' 등이다.

image
image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과정 16기 작품으로 제12회 무주산골영화제 '판' 섹션에 초청된 <딜리버리>와 '창' 섹션 초청작 <은빛살구>

시간이 흐르며 그 면면은 더욱 풍성해졌다. 3회부터는 영화전문가와 영화에 대해 깊이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산골토크'가 신설됐다. 6회 영화제부터는 동시대 영화 미학의 최전선에 있는 해외 감독 1인을 선정해 조명하는 '무주 셀렉트:동시대 시네아스트'가 만들어졌다. 7회 영화제부터는 다채로운 스펙트럼의 배우 한 명을 오롯이 조명하는 '넥스트 액터'가 추가됐고, 어린이와 가족 관객이 늘자 무료 프로그램인 '키즈 스테이지'도 생겼다. 2022년 10주년부터는 토크 프로그램 '토킹 시네마'를 론칭해 영화계의 이슈를 관객과 나눴다. '길' 섹션은 4회부터 무주 문화콘텐츠를 함께 소개하는 섹션으로 확장돼 군민과 호흡하고 있다.

무주산골영화제가 꽃길만 걸었을 리 없다. 나라를 발칵 뒤집었던 2015년 메르스 사태에 방문자가 급감하는가 하면, 전 세계가 뒤집힌 코로나19와 팬데믹의 풍파도 맞았다. 급변하는 매체 환경, 운영 기반과 동력의 부재를 맞은 영화제들의 크고 작은 위기가 이어지는 요즈음이다. 그럼에도 무주산골영화제는 한 번의 중단 없이 작고 단단한 발걸음을 이어왔다. 어느덧 6월이 다가오면 싱그러운 초록색에 둘러싸인 이 남다른 영화축제를 기대하게 한다.

오는 6월 5일 개막하는 무주산골영화제는 21개국 96편의 영화로 관객과 만난다. 무주의 정체성을 살린 다양한 실내외 상영 공간에 맞춰 작품을 배치했다. 여러 공연, 토크, 전시, 체험 프로그램도 풍성하다. 개막작은 고아성이 주연을 맡은 장건재 감독의 영화 <한국이 싫어서>다. 엄밀히 말하면 이 작품이 주축이 된 융복합영화공연 '한국이 싫어서:라이브'가 개막작으로, 개성있는 세션들이 영화 속 음악을 라이브로 들려주고 영화 속 내레이션도 현장에서 직접 라이브로 진행된다. '넥스트 액터'로 배우 고민시가 무주를 찾으며, '무주 셀렉트:동시대 시네아스트'로 <행복한 라짜로><키메라>의 이탈리아 감독 알리체 로르바케르를 소개한다. 공연도 풍성해 영화제 기간 이무진, 애니멀다이버스, 신지훈, 10센치, 김수영, 구원찬, 카더가든, 나상현, 신승은 등이 무대에 오른다.

image
제12회 무주산골영화제 개막작 <한국이 싫어서>,
출처 (주)디스테이션

여유가 있다면 영화제 바깥에도 즐길거리가 가득하다. 산 좋고 물 좋은 무주는 그 자체로도 매력적인 관광지이자 휴양지다. 덕유산국립공원, 구천동 계곡이야 두말하면 입이 아픈 절경을 자랑한다. 가을 반딧불축제에 앞서 영화제 즈음엔 생태탐사도 이뤄진다.

무주반딧불장터는 1919년 3.1만세운동도 열렸던 유서 깊은 5일장이다. 올해 영화제 기간 중에는 현충일이기도 한 6일에 장이 서니 방문해보는 것도 좋겠다. 무주 대표 음식인 어죽을 비롯해 영화제 기간 더 풍성해지는 먹거리는 평이 좋은 편인데, 지방축제 바가지를 근절하기 위해 군이 나서서 영화제 기간 물가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여유가 된다면 꽃그늘이 우거진 등나무운동장 외에도 무주 곳곳에 있는 고 정기용 건축가의 건축물을 살필 수 있다, 낮엔 완연한 여름날이어도 무주의 6월 밤엔 기온이 뚝 떨어지니 경량 패딩이나 점퍼 하나는 챙겨 밤공기를 만끽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