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Record
의도에 따라, 시장의 필요에 따라,
전쟁영화의 경우
- 글
- 허남웅(영화평론가)
History Record
History Record는 인물, 배경, 상황 등 다양한 키워드를 주제로 한국영화를
다각도로 조망해 보는 코너다.
이번에는 한국영화가 한국전쟁을 다루는 방식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달라져 왔는지를 살펴봤다.
한국영상자료원이 기획하고 엮은 <1980년대 한국영화: ‘서울의 봄’부터 코리안 뉴웨이브까지> 책 작업에 참여했다. 내가 맡은 파트는 ‘에로물의 시대, 그래도 다양한 장르적 시도가 있었다’로, 1980년대 한국영화를 에로, 신파, 공포, 액션, 종교, 여성, 청춘, 사회물까지, 8개의 장르로 일별해 설명했다. 이를 가지고 이 책에 관심 있는 독자들과 북토크 시간을 가졌다.
그때 사회자가 질문한 내용 중 하나다. 1960~1970년대까지 활발하게 제작됐던 전쟁물이 1980년대 들어 급감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참석했던 독자들도 이에 흥미를 보여 관련한 질문이 더 나왔다. 책에는 없는 내용이라 중언부언했던 거로 기억한다. 이 지면에 정리해서 말하자면, 전쟁영화의 특성상 한국에서는 역사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고, 그런 맥락에서 1980년대 한국영화계는 이 장르를 크게 필요로 하지 않았다.
반공의 역사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종상에는 1987년까지 우수반공영화상 부문이 있었다. 1966년 5회 때부터 우수반공영화상과 반공영화 각본상이 신설됐는데 당연히 목적은 공산주의 사상을 반대하고 한국군의 영웅적인 면모를 찬양하는 작품의 제작을 독려하는 것이었다. 초대 우수반공영화상은 <8240 KLO>(1966)가, 반공영화 각본상은 이만희 감독의 <군번없는 용사>(1966)가 받았고 이후 유현목 감독의 <카인의 후예>(1968), 임권택 감독의 <짝코>(1980) 등이 이름을 올렸다.
관 주도로 진행된 대종상의 반공영화 관련 상의 노림수는 국민 계도였다. 남북의 이념 대립을 전제로 두고 주로 한국전을 배경으로 북한이 얼마나 괴물 같은 존재인지를 각인시켜 남한 체제와 이념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제목에서부터 북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작품이 심심치 않아서 <평양 폭격대>(1972) <국회푸락치사건>(1974) 등이 대표적이다. 애니메이션 <똘이장군>(1978)의 경우, 극 중 북한군은 여우, 늑대 등과 같은 동물로, 북한 최고 권력자를 나타낸 무리의 우두머리는 탐욕스러운 돼지로 묘사했다.
반공영화가 널리 퍼지는 계기를 마련한 작품은 이념을 달리하는 처남·매부 간의 비극적 운명을 그린 한형모 감독의 <성벽을 뚫고>(1949)였다. 한형모는 이 작품을 만든 의도에 관해 시나리오에 이렇게 적었다. ‘불타는 조국애와 민족과 국토를 사랑하는 강철 같은 신념의 일관된 국군정신을 찬양하며 애국 애족의 사상을 고취하려 함.’ 반공영화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이념의 대립을 골자로 삼아 대결과 분단의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그 내용은 주로 괴물로서의 간첩이나 북한군이 등장하고, 이를 무찌르고 승리하는 영웅으로서 국군의 위상은 높이는 것이었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한국전쟁과 민족 분단을 소재로 한 한국 영화는 300여 편에 달한다”고 영화평론가 박평식은 말했는데 (주간경향 #636 스크린에 넘실대는 남북 화해 무드)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1960년대였다. 1960년대 중반이 지나면서 당시 한국 정부는 개정 영화법을 통해 난립(?)하는 제작사와 수입업자를 12개 사로 압축하며 반공영화 제작을 반(反)강제적으로 의무화했다. 그러니까, 1963년 박정희 정권의 출범과 함께 반공영화는 일종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들의 입맛에 맞는 반공영화의 경우, 대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에서 김수용 감독 또한 <고발>(1967)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북한의 중앙통신사 부사장이었던 이수근의 북한 탈출을 다룬 내용으로, 김수용은 그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울며 겨자 먹기로 흥행성 없는 국책 영화를 만들면서 그 손실을 메우기 위해 정부의 보조를 기다리게 되었다. 보조는 끝내 외화 수입 쿼터로 변해 막대한 부를 그들에게 나눠주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의 유일한 반공영화 <고발>이 만들어진다.” (<나의 사랑 씨네마> 김수용 | 씨네21)
검열의 역사1950년대를 대표하는 전쟁영화를 꼽으라면 단연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1955)이다. 지리산의 피아골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는 빨치산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이를 두고 내부에서 갈등이 생기는 등 결국에는 토벌된다는 내용을 다룬다. 결국, 모두 사망하고 여자 주인공만 살아남아 산에서 내려오는데 이를 두고 문제가 생겼다. 남한으로 귀순하는 건지 그 의도가 불분명해 상영을 앞두고 검열에서 비판이 제기돼 태극기 장면을 삽입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그럼에도 <피아골>은 반공법 위반에 걸려 상영이 금지되고 마는데, 빨치산을 인간적으로 묘사했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 한국의 전쟁영화는 공산주의 반대를 내세우면서 유신 체제를 강화하는 통치 수단이자 이에 저항하는 세력의 비판적인 태도를 공격하는 도구로 활용됐다. 이만희 감독은 해병대원 3천 명 규모의 군사 지원을 받으며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을 만들어 전쟁이 야기하는 비인간성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냈다.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한 해병대원의 활약상을 다루면서 이만희는 주적을 중공군으로 삼고 무엇보다 동맹국 미국에 대한 반감도 은근히 드러내고 있어 반공영화이되 기존 반공영화의 틀을 벗어나는 시도로 걸작의 지위에 올랐다. 이만희처럼 반골 기질을 가진 감독에게 전쟁영화는 정부를 위한 선전물이 아니라 휴머니즘을 짓밟는 폭력에 관한 비판물이었다.
북한을 적으로 삼은 <돌아오지 않는 해병>과 다르게 <돌아온 여군>(1965)의 경우, 이만희는 용공 시비로 구속되는 지경에 이른다. 포로가 된 국군 간호장교와 북한군 장교의 인간적인 만남을 부각했다는 게 이유였다.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던 이만희는 무자비한 구타 속에 “당신들이 나를 평양에 보내주시오. 나는 김일성 앞에서 <7인의 여포로>를 틀겠소. 영화를 본 그가 나에게 훈장을 주나 총살을 시키나 후세에 전하시오.”(<나의 사랑 씨네마>)라고 외쳤다고 한다.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나왔지만, 이만희 감독의 의사와 상관없이 원제 <7인의 여포로>는 북한을 중심에 둔 것이라며 <돌아온 여군>으로 변경되고 문제가 된 부분이 삭제, 수정되어 상영이 이뤄졌다.
겉보기에는 검열 문제없이 개봉하고 흥행에 성공한 신상옥 감독의 <빨간 마후라>(1964)는 1952년, 즉 한국전쟁이 배경이다. 한국 공군의 전면적인 지원을 받은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당연히 공군. 신상옥은 한국영화 최초로 공중전을 촬영하며 전투기 시점으로 극 중 미군도 하지 못한 다리 폭파의 임무 수행을 스펙터클하게 담아낸다. 고공비행 전투를 역동적으로 담아내는 것에 초점을 맞춰 아군과 적군이 구별되지 않는 상태로 전쟁을 묘사한 것. 반공 메시지는 담지 않으면서도 정부에게 전혀 트집 잡히지 않은 <빨간 마후라>는 어떻게 검열을 피해 갈 수 있었는지에 관한 사례라고 할만하다. 검열에 걸리든 걸리지 않든 이 시기의 전쟁영화는 검열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80년대의 경우1980년 우수반공영화상영상을 받은 <짝코>는 이듬해인 1981년 반공영화작품상으로 다시 한번 호명됐다. 반공영화 관련 부문으로 동일 영화가 2회 연속 수상한 건 초유의 일로, 반공영화가 부족한 상황에서 <짝코>는 임권택 감독의 의사와 상관없이 반공영화의 선봉장이 됐다. 빨치산 짝코와 그를 쫓는 경찰 송기열 간의 추격전을 다루는 이 영화를 통해 남북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려던 의도와 전혀 배치되는 결과였다. 심지어 이런 메시지가 문제가 되어 특정 장면이 삭제된 채 개봉이 된 상태였다.
“…내가 제일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짝코>에서 거의 주제와 닿고 있는 데가 잘려 나갔단 말이오. (중략) 사실은 서로 원수처럼 알고 쫓기고 했는데 그 대상이 아니었다는 거를 비로소 알아차리고 탈출을 하게 되는데, 그 대목이 시나리오 검열에서는 통과가 됐다고. 그런데 영화가 나와서는 그 대목을 검열에서 삭제해 버렸다고.”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정성일 | 현실문화연구소) 진한 아쉬움을 드러낸 임권택의 말은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정권의 수장이 바뀌었어도 영화를 국민 계몽의 앞잡이용으로 삼는 태도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낸다.
달라진 게 있다면 반공을 위한 전쟁영화에 대한 필요가 정권을 향한 불만을 희석하기 위한 극장용 에로물로 장르를 갈아탄 것. 민주화를 향한 국민의 열망을 5.18 민주화 운동과 같은 피의 폭력으로 억압한 전두환 정권은 스포츠, 섹스, 스크린으로 대변되는 3S 정책을 통해 지지받지 못하는 체제를 향한 비판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했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돈이 많이 들어가고 지원이 없으면 만들기 힘든 전쟁영화 대신 적은 돈으로 많은 수익을 올리고 해외영화 수입 쿼터도 얻을 수 있는 에로물에 집중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한국 전쟁영화에 대한 공급이 줄자 할리우드의 <킬링필드>(1985)와 <플래툰>(1987) 같은 영화들이 빈자리를 메웠다. 이에 한국 전쟁영화에 대한 요구가 생기면서 1980년대 중후반 전쟁영화 제작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기도 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암호명을 따온 <블루하트>(1987)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의 양민 학살에 맞선 마을 청년대원의 저항을 그린 <독불장군>(1987)이 바로 그 예다. 하지만 할리우드 영화에 비해 떨어지는 완성도와 철 지난 반공 메시지로 <독불장군>이 대종상의 마지막 반공영화상을 받은 것을 빼면 별다른 반응을 이끌지 못했다.
대작의 역사1960~70년대에 전성기를 보낸 전쟁영화는 ‘반공’이 우선순위였다면 2000년대를 전후해 만들어진 작품들은 ‘규모’가 가장 필요조건이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역사를 연 <쉬리>(1999)의 등장은 한국영화가 산업으로써 출발한다는 신호탄이었다. 산업은 곧 막대한 돈을 들여 더 막대한 이득을 뽑는 시장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전쟁영화의 부활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거대한 예산이 투입되는 전쟁영화는 전 연령대를 포괄할 수 있는 장르기 때문에 최대치의 관객을 동원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 <태극기 휘날리며>(2004)는 형제간 이산의 아픔을 분단의 비극에 담아 천만 영화에 이름을 올렸다. 반공에만 몰두해 소재의 차용과 전개의 방식이 단조로웠던 과거와 다르게 현대의 전쟁영화는 다양한 접근으로 결이 다른 작품을 선보이며 장르의 층위를 두껍게 쌓았다. <공동경비구역 JSA>(2000)과 <웰컴 투 동막골>(2005)은 ‘남북이 대립해도 우린 하나’라는 한 핏줄의 서사로 흥행에 성공했고 <강철비>(2017)는 북한의 쿠데타로 북한 1호가 남한으로 내려온다는 가정 하에 대담한 상상력을 선보였다.
한국영화의 산업화 이후 전쟁영화는 이념에서나 메시지 면에서 진보했지만, 반공의 의도를 담은 영화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한국영화가 북한을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전쟁으로 등을 돌린 역사가 있어도 한민족이라는 기치 아래 인간적인 감정을 교류할 수 있는 관계가 하나요, 인간적인 감정 따위 이념 수호를 위해서는 거추장스럽다며 죽음의 표적으로 삼는 주적 관계가 또 하나다. 전자의 영화로 <고지전>(2011)이 있다면, 후자는 <인천상륙작전>(2016)<연평해전>(2015) 등을 들 수 있다. 요는 분단 상황이 현재진행형의 역사인 까닭에 아무래도 그 어떤 장르보다 현실의 영향을 좀 더 직접적으로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전쟁영화의 역사를 살피는 건 표현과 관련해 한국 사회가 어떤 분위기에 처했는지를 밝히는 것이기도 하다.
함께 읽으면 좋은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