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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식 감독 <삼식이 삼촌>
임찬익 감독 <다우렌의 결혼>

이대로 보내기 아쉬운 작품의 심층 평론

정덕현(칼럼니스트), 이보라(영화평론가)
사진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주)트리플픽쳐스
허기의 시대, 시대의 허기

신연식 감독의 <삼식이 삼촌>

글 정덕현(칼럼니스트)

미군 물건을 빼돌리다 붙잡혀 특무대에 끌려간 부하들 때문에 서대문파 한수(노재원)는 박두칠(송강호)을 찾아온다. 그런데 어딘지 한수가 떨떠름한 태도를 보이자, 박두칠은 대뜸 그에게 자신을 ‘삼식이 삼촌’이라 불러보라고 한다. 삼촌이라는 지칭은 우리가 음식점에서 아주머니들을 부를 때 익숙하게 쓰는 ‘이모’만큼 편하게 쓰는 말이다. 남이지만 친근한 관계를 드러내는 호칭. 한 조직을 이끄는 우두머리인 한수에게 삼촌이라고 불러보라는 그 말은 황당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왜 그래야 되냐고 묻자 박두칠은 그렇게 하면 너희들에게 밥을 주겠다고 한다. 여기서 이 삼촌의 별명이 ‘삼식이’인 이유가 드러난다. 그는 전쟁 통에도 자기 식구, 친구, 친척 그 누구도 굶기지 않고 하루 세끼 다 먹였다고 해서 삼식이 삼촌이라 불린다. 그런데 삼식이 삼촌이 한수에게 주겠다는 밥은 그 하루 세끼 밥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건 이권이다. 그는 서대문파 한수에게 윤팔봉이 장악하고 있는 동대문파의 영역을 넘겨주겠다고 한다. 즉, 표현은 먹는 밥으로 하고 있지만, 그 ‘밥’은 먹고 사는 생계는 물론이고 나아가 돈과 권력을 쥐는 성공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짤막한 도입 부분은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삼식이 삼촌>이라는 시대극이 가진 색깔을 분명히 한다. 사실 좋은 시대극에는 그 시대를 대변하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삼식이 삼촌>은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까지의 격동기 한국을 바로 ‘삼식이 삼촌’ 박두칠이라는 캐릭터를 통해서 소개한다. 하루 세끼 챙겨 먹는 일조차 어려웠던 ‘허기의 시대’에 하루 세끼를 배불리 먹게 해주겠다는 삼식이 삼촌의 말은 강력한 유혹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삼식이 삼촌이 시키는 일을 한다. 그의 영향력은 정권을 쥐려는 정치인부터 외자를 끌어들여 공단을 세움으로써 그 이권을 챙기려는 재계까지 뻗어 있다. 삼식이 삼촌은 그들의 일을 처리해주기도 하지만 때론 그들의 약점을 쥐고 뒤에서 조종하기도 한다. 목적을 위해서는 그 누구와도 손을 잡고 움직이게 만드는 막강한 로비력을 발휘하는데, 그 힘의 원천은 바로 상대에게 하루 세끼 ‘먹고 사는 문제’로 접근한다는 점이다.

이는 박두칠이 일하는 공간이 사무실이 아니라 빵집이라는 데서도 나타난다. 배고프던 시절 단팥빵이 너무나 먹고 싶었던 박두칠은 돈을 벌어 빵집을 아예 사버리고, 그곳을 사무 공간으로 활용한다. 정보를 물어오는 아이들에게는 단팥빵을 쥐어주고, 한수처럼 부탁을 하러 오는 이들에게는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먹고 살게 해주겠다’는 말로 그들을 수족처럼 끌어다 쓴다. 또한 ‘청우회’라는 대한민국에서 손 꼽히는 재계 인물들의 모임에서도, 박두칠은 그들이 꿈꾸는 공단이 가져올 청사진 역시 빵(피자)에 비유해 설명한다. “미국 사람들은 매일 그런 빵을 먹어. 심지어 먹다가 남겨. 우리도 공단만 완성이 되면 그런 빵을 먹다가 남기고 버릴 거야.”

박두칠이 독특한 건 경제적 이권이든 정치적 권력이든 목적을 위해서라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무서운 인물이면서도 영화 <대부>의 돈 꼴레오네 같은 비정한 해결사와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는 점이다. 삼촌이라는 호칭에 걸맞게 어딘가 친숙하다. 그가 저지르는 부정한 일들조차 인간적인 느낌이 더해진다. 적어도 그런 짓을 먹고 살기 위해 했다는 것에 어느 정도 고개가 끄덕여지던 당대의 시대 정서가 투영된 인물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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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를 채우는 꿈과 욕망

삼식이 삼촌이 가난에서 벗어나고픈 시대의 허기를 삼식이의 캐릭터성을 통해 대변한다면, 김산(변요한)은 그 허기를 채워줄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꿈을 제시하는 인물이다. 삼식이 삼촌은 하루하루의 치열한 생계 전선에서 부딪치며 입지전적인 위치에까지 오른, 현실적이면서도 출세지향적인 인물이다. 반면, 김산은 “하루 세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나라”를 얘기할 정도로 이상적이면서 개인을 뛰어넘어 국가의 성장을 추구한다. 삼식이 삼촌이 피자 이야기에 빗대 이제 “총칼이 아니라 경제”를 부르짖는 김산에게 단박에 매료되는 건 눈앞의 현실과 출세만을 쫓아서 살아가던 삼식이 삼촌에게 그가 하나의 비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루 세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나라를 위한 국가재건계획의 청사진을 가진 김산과, 사람들이 가진 허기들을 툭툭 건드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하는 배후 조종자 삼식이 삼촌의 의기투합이 이뤄진다.

마치 도원결의 하듯이 새로운 미래를 그려 가기 위한 이들의 행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와 맞물려서 호기심과 기대감을 만들어낸다. 시청자들은 이미 50년대 말 60년대 초에 벌어졌던 실제 사건들을 알고 있다. 이승만 정권 말기, 3·15 부정선거가 치러지고 결국 들끓는 민심에 의해 4·19혁명이 일어나며 다시 5·16 군사 쿠데타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그것이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예측하는 가운데, 드라마 속 인물들이 그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어떤 역할을 해낼지, 어떤 좌절을 맛볼지 기대하며 바라보게 된다.

이 부분은 현재를 살아가는 시청자들이 1960년을 전후한 격동기를 매력적으로 보게 만드는 지점이기도 하다. 당대는 가난했지만 김산 같은 인물이 세상을 바꿔 나가는 꿈을 꾸는 것이 가능했던 시대다. 시대의 허기를 짚어내고, 그걸 채울 수 있는 꿈을 꾸며, 또 그걸 이뤄내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진짜 변화를 만들 수 있었던 시대. 이제는 태생부터 삶의 미래까지 결정되어 제아무리 노력해도 끊겨 버린 성장의 사다리를 오를 수 없는 현실을 염두에 두고 보면, 삼식이 삼촌이 그려내는 시대극의 설렘이 바로 그 간극에서 비롯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루 세끼는 먹고 살게 되었지만 고착화된 양극화로 인해 신분 상승의 꿈 자체를 꾸지 않게 된 현재와 달리, 배는 고팠지만 치열한 노력을 통해 얼마든지 신분 상승이 가능했던 과거에 대한 향수 같은 것이 <삼식이 삼촌> 안에 공기처럼 떠다닌다.

<삼식이 삼촌>은 시대를 바꿔 나가는 인물들에 대한 설렘과 기대감을 세워 놓고, 그 실현을 지연시키거나 혹은 좌절시키는 방식으로 드라마의 동력을 만든다. 좌절과 지연은 다른 욕망을 가진 이들과의 갈등에서 빚어진다.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려는 강성민, 세상을 변혁시키기 위해 군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한민(서현우), 청우회를 이끌어 온 아버지를 옆에서 바라보며 자신이 세상을 바꿔 나가겠다고 욕망한 안기철(오승훈), 폭력으로라도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무장테러조직 ‘신의사’의 차태민(지현준), 여기에 미국 측 로비스트 레이첼 정(티파니 영)과 더 큰 야망을 숨기고 있던 장두식(유재명) 같은 인물들의 욕망이 겹쳐지면서 이야기는 당대에 실제 벌어졌던 부정선거, 혁명, 쿠데타 같은 사건들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또한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던 삼식이 삼촌과 순수할 정도로 이상적이었던 김산은 얻는 것만큼 잃는 게 있다는 걸 경험한다. 삼식이 삼촌이 김산과 뜻을 같이 하면서 강성민과의 관계에 균열을 겪게 되고, 김산은 정치판으로 들어오면서 보다 현실적인 인물이 되어 간다. 김산과 삼식이 삼촌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변화가 일어나듯이, 김산 같은 개인이 꿈꾸고 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세상의 변화는 실상 이 무수히 많은 이들의 욕망들이 교차되면서 생겨난 결과들이라는 게 드라마 후반부에 가면 드러난다.

변화, 지구의 자전과 공전 같은

<삼식이 삼촌>은 오프닝에 ‘본 드라마는 픽션’이라고 못을 박고 시작한다. 하지만 ‘특정 스토리 요소는 실제 역사적 사건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여지를 남겼다. 실제로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는 실제 역사와 겹쳐지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승민은 이승만 대통령을, 민주당 장민은 장면을, 주인태는 조봉암을, 장두식은 박정희를 떠올리게 만든다. 게다가 극중에서 벌어지는 3·15 부정선거, 4·19 혁명, 5·16 군사 쿠데타 같은 사건들도 실제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미 알고 있는 실제 역사가 스포일러가 됨에도 불구하고 <삼식이 삼촌>이 흥미로웠던 건, 몇몇 중요 인물의 행적 위주로 기록되는 역사서가 다 채워주지 못하는 일을 했다는 점이다. 바로 다양한 인간 군상에게 움직이는 생동감을 부여했다는 점이다. 이런 생동감을 통해 우리는 그저 단순한 도식처럼 암기하곤 했던 역사적 사실들이 실은 당대를 살아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욕망이 부딪치며 생겨난 결과라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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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식이 삼촌이 특별한 또다른 이유는, 많은 이들의 욕망과 연결되는 캐릭터라는 점이다. 그는 김산에게 묻는다. “장관님은 세상 돌아가는 원리를 아십니까?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꽃이 피고 꽃이 지는.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세상 돌아가는 원리.” 김산이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말하는 거 아니냐고 되묻자 삼식이 삼촌은 끄덕이며 말한다. “근데 지금 느껴져요?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 예, 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에요. 지구의 자전과 공전.”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빗대어,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 대목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 그건 삼식이 삼촌이 무수히 많은 이들의 욕망과 연결되어 세상을 돌아가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세상의 변화란 결국 어느 한두 명이 아닌 무수한 이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걸 에둘러 말하는 게 아닐까? 현재의 우리를 만든 역사적 사건들 속에는, 기록되지 않았던 많은 이들의 욕망과 열망, 그리고 좌절이 부딪치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1950년대 말 김산이 그토록 꿈꿨던 국가재건계획은 쿠데타로 인해 바뀐 정권 하에서 실현된다. 1968년 경부고속도로 기공식에서 세계를 향해 뻗어 나가는 국가의 경제적 비전을 알리는 김산의 모습은 그 후에 만들어낼 변화들을 예고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을 꿈꿨으나 다 같이 먹고 사는 문제로 나아가지 못한 결과가 양극화라는 또 다른 문제를 낳았듯이, 세상은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만들고 그 허기는 삼식이 삼촌과 김산이 보여준 것처럼 변화를 낳는 씨앗이 된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처럼. 아무런 변화 없이 그저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고 피부에 바로 느껴지진 않지만. 결국 함께 욕망하고 꿈꾸는 이들이 있는 한, 분명한 변화는 오고야 만다고 <삼식이 삼촌>은 말하는 듯하다.

1950년대 말, 허기의 시대를 그린 <삼식이 삼촌>은 이제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허기를 생각하게 한다. 시대의 허기는 아마도 무수히 많은 삼식이 삼촌과 김산을 움직이게 만들고 변화를 꿈꾸게 만들 게다. 물론 꿈꾸는 대로 이뤄지는 것처럼 보이진 않더라도 그 변화는 일어나고 있다. 마치 지구의 자전과 공전처럼.

순진함의 잉여

임찬익 감독의 <다우렌의 결혼>

글 이보라(영화평론가)

여러모로 간소한 영화지만 그럼에도 <다우렌의 결혼>에 관해 말할 필요가 있다면, 문제의 시발점부터 돌아봐야 할 것 같다. 다큐멘터리 제작 업체에서 일하는 주인공 승주(이주승)는 케냐 난민촌을 취재한 영상의 완성본을 넘기기 직전, 인터뷰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을 자막에 넣지 못해 초조해한다. 이름을 정리한 노트를 잃어버렸고 마감 기한은 지켜야 하는 터, 누가 알겠냐는 심산으로 그는 가나 축구대표 선수들의 이름을 자막으로 단다. 물론 얼마 못 가 들통이 난다. 회사 대표는 승주에게 지원 사업을 완수하기 위해 촬영해야 하는 ‘세계의 결혼식’ 특집을 맡긴다. 카자흐스탄으로 가 고려인들의 결혼 풍습을 찍어올 것. 위기에 봉착한 그에게 배당된 중요한 미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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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에서 시작된 일이다. 케냐인들의 얼굴에 제 마음대로 가나인들의 이름을 붙인 행위가 촉발한 그의 여정은, 그래서 이름의 문제에 관해 깨닫는 여행이기도 하다. 타자를 어떻게 부를 것인가? 누군가를 명명하는 일에는 합의가 필요하다. 물론 이름이 아니라 관계에서 발생하는 호칭, 개인이 스스로 결정한 정체성 등 다른 명칭들도 선택지가 될 수 있겠지만, 개별적 존재를 증빙하는 조건이자 성원권의 보장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구별’의 언어로서, 공동체에 존재한다면 모두에게 마땅히 약속 되어야 하는 것으로서의 이름의 위치를 생각해보자. 이 점에서 <다우렌의 결혼>은 제목이 일종의 (다소 심심한) 맥거핀이기도 한데, (영화가 이를 객관식 유형처럼 넷 중 마음이 가는 하나를 찍는 식으로 심상하게 눙쳐 버리긴 했으나) 이는 혼인 상대인 카자흐스탄 여성 아디나(아디나 바잔 분)의 것이 아니라 바로 승주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다우렌의 결혼>은 결국 승주가 다우렌이 되는, 그가 다른 인물로서 구성되는 여정이기도 하다.

제목과 포스터만 먼저 접한 관객이 쉬이 가질 만한 고정관념은 다우렌이라는 이름이 바로 여성 주인공 아디나의 이름으로 예상된다는 사실이다. 포스터 속 아디나의 ‘이국적인’ 외모와 의상은 그러한 해석을 강화한다. 박찬욱의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 또는 신동일의 <반두비>처럼 각각 네팔인의 이름과 방글라데시의 단어를 가져온 경우를 기억한다면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로직일 테다. 그러나 <다우렌의 결혼>에서 다우렌은 승주가 자신을 위해 고른 카자흐스탄 이름이다. (적어도 한국 관객에게) 이 이름은 성별도 지위도 분간되지 않는 미지의 단어이다. 우리는 다우렌이라는 이름이 ‘여성적’으로 느껴져서 이 이름을 아디나의 것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두 명의 인물이 제시될 때 상대적으로 그보다 더 어울리는 외관에 이를 ‘갖다 붙이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자연히 배제적인 선택이 수반된다. ‘한국인’에 덜 가까워 보이는 이에게 ‘외국인’의 이름표를 부착하는 것. 그래서 제목과 영화의 서사가 갖는 시차는 다소 기이하다. 달리 말해 인물을 얼마간 무성적인 존재로 비치게 만드는 기능까지 있는 이 이름 그 자체에는 사실 문제가 없다. 다만 이 이름의 주인을 낯선 타자에게 거의 선험적일 정도로 쉬이 부여하는 우리의 행위는 기실 승주가 극중에서 처음 벌인 일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여기서 <다우렌의 결혼>이 지니는 이름의 역학은 (급진적이거나 미학적으로 가치 있다고는 말할 수 없어도) 꽤나 유효한 시도로 읽힌다.

결혼식장에 늦게 도착했던 승주가 몇 안 남은 하객 중 소통이 되는 어르신들을 향해 “한국말 아세요?”라고 반가워하는 장면에서 노인은 “한국말 아니고 고려말 한다”라며 정정한다. 그러자 승주가 대수롭지 않게 응수하는, “그게 그거죠”라는 말은 타자를 마주할 때의 실수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사이다. 그 말이 들린다고 해서 그 말을 온전한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는가? 이러한 착오는 시종 반복된다. 승주의 동료 영태(구성환)가 게오르기 삼촌의 어머니를 보고 “우리 할머니 같다”며 감동하는 데는 한국인이 한국 안에 있을 때든 밖에 있을 때든 섣불리 시도하는 가족의 오류가 내장되어 있다. 할머니에게 정감이 드는 이유는 그녀가 만들어주는 국시와 당근 김치가 ‘집밥’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를 경유해야만 친밀감을 허용하고 나의 삶 안으로 포섭할 수 있다는-그러나 역설적으로 ‘나’는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 태도다. <다우렌의 결혼>은 주로 예능 프로그램에서 외국인들이 다뤄지는 방식, 그들을 안락하고 다정한 공동체 내부로 수용하면서도 모종의 불편함이 가시지 않는 일종의 ‘친밀감의 서사’를 소박하게 토로한다.

한편 승주가 촬영해야 하는 것이 다큐멘터리라는 점도 중요하다. 다큐멘터리란 진실을 담아야 한다고 믿었던 그는 부득이하게도 이 ‘조작’의 기록에 참여하게 된다. 진짜는 아니지만 진짜인 척함으로써 이웃들에게 진짜를 선물하고 퇴장하는 일. 다우렌이라는 이름이 의미하듯 ‘행복한 시간’을 만든 후 아름다운 기억을 남기는 일. 새로운 이름에 이어 또 하나의 계약이 성사된다. 사실을 기록하고 실제를 반영하는 다큐멘터리의 역량을 역으로 이용해, 그것의 진실 여부를 현장에 존재하는 관객들의 믿음에 맡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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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동네 사람들이 이 결혼식이 가짜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식의, 포스트 트루스를 싱겁게 소화해 버리는 결말로 향하면 어떡할까 하고 우려했는데, 다른 의미에서 영화의 결말은 더욱 단순하게 봉합된다. 일단 다큐멘터리가 지닌 모호한 층위에 대한 논의는 금세 사라지고 만다. 궁극적으로 <다우렌의 결혼>은 다큐멘터리의 진실 혹은 허구라는 대당, 그리고 그 사이의 기묘한 위상을 활용하는 데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보다는 미심쩍게도 여기에 승주-그는 다우렌에서 다시 승주로 돌아왔다-라는 주체가 이 영상을 방송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윤리적’ 선택으로 일단락되고, 이에 더해 그의 조언에 감화된 아디나와 한국에서 재회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렇듯 어설픈 지점이 많은 이 영화에 간단히 불만을 표하기보다는, 이 영화에서 내내 묘사되는 ‘순진함’이 얼마간 의도된 것일 수도 있겠다고, 믿어보기로 할 참이다. 왜냐하면 결혼식을 모두 마친 후 저녁이 되고 게오르기가 운전하는 자동차에 올라탄 두 남녀의 상황을 보여주는 후반부의 시퀀스에서 파생된 이상한 잔여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디나의 어머니와 작별의 인사를 나눈 뒤, 두 남녀는 자동차에 올라타 떠난다. 이 모든 과정을 촬영하고 있던 영태는 고된 일을 마친 후 한숨을 내쉬며 카메라를 내린다. 차량을 운전하던 게오르기는 조금 가다가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며 두 남녀에게 묻는다. “이제 돌아가도 되겠지?” “알겠다”고 대답하는 둘, 왔던 길로 다시 향하는 자동차. 다음 장면은 여전히 남아 잔치 중인 이웃 주민들의 즐거운 모습이다. 그런데 언제 자동차에서 내렸는지 모를 두 남녀가 들판에 서서 진짜 작별 인사를 나눈다. 서로 약속했던 시간이 끝났다. 둘에게도 분명 행복했지만 기필코 끝나야만 하는 시간이다. 그렇다면 집으로 돌아와 화장을 지우는 아디나는 이제 이 후속 사태를 어머니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승주는 한국에 가면 그만이라지만 앞으로도 이 마을의 일원이어야 할 아디나는 자신을 기혼자로 알 이웃들에게 어떤 식으로 진실을 지킬 수 있을까? (여기서 그녀가 꿈을 좇아 한국으로 오지 않았느냐는 반문은 무용하다.)

그러니까 이웃들은 이 잔치에서 ‘정말로’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까? 거의 마스터숏으로 주어지는 이 잔치 장면에서 이들 사이에는 실상 어떤 말이 오가고 있는 걸까? (달리 말해, 불쑥 한국에서 찾아온 이 다우렌이라는 남자와의 결혼을 어떻게 이렇게 쉽게 믿는 걸까?) 아디나의 아픈 어머니는 어째서 자신의 유일한 식구이자 가장인 아디나에게 한국에 가라고 종용하는 걸까?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양궁을 가르치고 말을 돌보고 식당에서 일하는 등 홀로 가장을 맡아 왔던 아디나에게, 어머니는 결혼 후 반드시 다우렌을 따라가라고 애틋하게 말한다. 거의 이 사태를 빌려 아디나에게 기회를 주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가 이들의 입체적인 이면을 묘사하길 거의 ‘순진하리만큼’ 차단하고 있기 때문에 과도한 해석을 들이밀 필요는 없더라도, 실상 <다우렌의 결혼>에서 주조가 되는 순진함이란 ‘가짜’를 이용하는 이가 반드시 카메라를 든 쪽에만 있지는 않으리라는 작은 전언을 우리는 조금은 얻을 수 있다. 결혼식은 하루면 가능하지만 결혼식이 촉발하는 사태란 하루의 일을 넘어선다. 약속된 시간을 초과하는, 사건이라는 진실의 무게를 깨닫는 것이 <다우렌의 결혼>의 방점이 찍히는 대목일 테다. 나는 이렇듯 애매하게 서사를 봉합하는 방식이 불만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영화가 자신의 이야기를 냉큼 유월해 버릴 때의 이상한 순진함을 반길 수는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