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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향을 끌어내는 그만의 방식

오승욱 감독 <리볼버>

주성철(영화평론가, 씨네플레이 편집장)
사진 출처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리볼버>가 위스키로 시작해 소주로 끝나는 영화라면, 초반부에 출소한 하수영(전도연)이 마치 줄스 다신의 <리피피>(1955)나 장 피에르 멜빌의 <형사>(1977)에서 범죄 장면을 길게 보여주는, 최동훈 감독의 <범죄의 재구성>(2004)을 비롯해 이후 다른 범죄 강탈 영화들에 엄청난 영감을 불어넣었던 장면처럼, 적정한 온도의 미지근한 물을 수고스럽게 만들어서 위스키에 타 먹는 장면을 꽤 길게 보여주는 것이 꽤 인상적이다. 이전 범죄 누아르 영화의 남성들이 어쨌거나 남의 돈을 훔치고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썼던 그 러닝 타임 소진 방식을, 하수영은 믿을 놈 하나 없는 세상에서 고단한 삶을 스스로 위로하기 위한 단 한 모금을 만들기 위해 쓴다. 그처럼 위스키에 미지근한 물을 몇 방울 떨어뜨리면 숨어 있던 향이 확 살아난다. 어쩌면 그게 <리볼버>라는 영화의 목표 그 자체이자, <무뢰한>(2015)을 끝내고 전도연 배우와 8년 만에 다시 만난 오승욱 감독의 (영화에 여러 번 등장하는 중요한 단어인) ‘각오’처럼 느껴진다. 이미 뭘 더하고 말 게 없는, 이미 완성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배우 전도연에게서 기어이 다른 ‘향’을 끌어내고야 말 것이라는 오승욱 감독의 (역시 영화 속 중요한 대사인) ‘약속’이랄까.

‘약속’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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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들어간 전직 경찰 하수영. 그의 목표는, 7억 원과 새 아파트라는 ‘약속’한 것들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턴 프라미스’의 이사 앤디는 모른 척한다.

<킬리만자로>(2000)와 <무뢰한>에 이은 오승욱 감독의 세 번째 영화 <리볼버>는, 바로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치 하수영이 자기만의 한 모금을 만드는 섬세하고도 치밀한 방식의 세공술로 서사를 쌓아 간다. 그 서사는 지극히 굵고 선명하다. 연인이자 동료 경찰인 임석용(이정재)과 함께 저지른 비리를 혼자 뒤집어쓰고 감옥에 들어간 전직 경찰 하수영의 목표는, 그저 7억 원의 돈과 입주 예정이었던 새 아파트라는 ‘약속’한 것들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2년 후 출소하는 교도소 앞으로 찾아온 사람은 생전 처음 보는 정윤선(임지연)뿐이고, 당연히 주어지리라 생각했던 그 모든 것들이 단숨에 없던 것이 된다. 감옥에 들어가기 전, 그 보상을 제안했던 ‘이스턴 프라미스’라는 회사의 이사 앤디(지창욱)를 찾아가지만 그 또한 모른 척한다. 흥미롭게도 그 영화 속 회사 이름에도 약속(Promise)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 그렇게 <리볼버>는 받기로 약속한 것을 받으러 다니는 하수영의 이야기다. 더불어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입에 담은 이에게 용서를 받으러 다니는 이야기다.

서사의 중심에는 어떤 유려한 비평의 언어로 묘사하고 가두기에는 부족한, 말하자면 한국영화계에서 어떤 초월적 이미지로 다가오는 전도연이라는 배우가 있다. 이번에도 오승욱 감독은 전도연을 밑바닥까지 하드보일드하게 몰아붙인다. 나이가 들어 변두리의 유흥업소로 밀려나고 여러 번의 배신을 당한 <무뢰한>의 김혜경과, 경찰이라는 이유로 교도소에서 매일 끔찍한 일을 겪은 데다 출소 후 약속한 것마저 받지 못한 <리볼버>의 하수영 모두 삶의 밑바닥을 경험한 인물들이다. 가령 <무뢰한>에서 가장 보기 힘들었던 장면을 꼽으라면, 형사 문기범(곽도원)과 민영기(김민재)가 호텔로 김혜경(전도연)을 불러내 방에 가두고 이른바 ‘돼지발정제’를 이용해 취조하려는 장면이었다. <리볼버>에서는 초반부에 ‘하수영이 모든 것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가야 한다’라는 것을 심지어 아군 남자와 적군 남자들이 합심해 다 정해 두고, 자동차 안에 하수영을 포함한 4명이 꽉 차게 앉아 그 계획을 전할 때의 폐소공포증이 <무뢰한>의 그 장면과 닮았다. 영화에서 하수영과 초면인 남자이자 사건의 원흉인 앤디가 조수석에 앉아 안경 아래로 시선을 깔며 별다른 미안함도 없이 돌아볼 때,
그 숨 막힘이 최고조에 달했다.

죄의식과 속죄

오승욱 감독 영화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직업이 ‘경찰’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킬리만자로>의 해식(박신양)은 한때 범죄 세계에 몸담았던 동생 해철(박신양)의 죽음으로 인해 승진을 코앞에 두고 정직을 당하고는, 동생의 유골을 들고 고향인 주문진으로 간다. 박신양 배우가 1인 2역을 맡아 연기한 해식은 자신을 쌍둥이 동생 해철로 오해하는 번개(안성기)와 종두(김승철) 패거리들을 만난다. 범인을 잡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뢰한>의 경찰 정재곤(김남길)은 살인범 박준길(박성웅)을 잡기 위해, 정체를 숨긴 채 그의 애인인 김혜경(전도연)이 일하고 있는 마카오 단란주점에 ‘이영준’이라는 가명을 쓰고 영업상무로 들어간다. <리볼버>의 하수영은 <킬리만자로>의 해식처럼 전직 경찰이긴 한데, 공통점이라면 일찌감치 경찰직을 떠나 ‘현재 경찰이 아니다’라는 조건이 주인공의 이후 일상에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직업 설정은 오승욱 감독이 세 편 모두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죄의식’이라는 문제와 직결된다. 경찰은 온몸으로 범죄를 막아내는 사람들이기에 범죄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처럼 여겨지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범죄의 세계와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그처럼 알게 모르게 범죄의 세계에 물든 주인공을 통해 ‘더 이상 죄를 짓고 싶지 않다’, ‘오늘은 어제보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주인공의 심리, 혹은 오승욱 감독이 세 편에 걸쳐 다루고자 하는 주제의식이 더욱 강화된다. <킬리만자로>의 해식은 범죄 조직을 떠나 가족을 부양하며 열심히 살고자 했던 동생 해철을 오해했던 스스로를 반성하고자 주문진에 머무르고, <무뢰한>의 정재곤은 자신을 조건 없이 믿어준 김혜경을 속였다는 죄책감 때문에 그녀가 자신의 몸 깊숙이 찔러 넣은 칼을 빼내지 못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승욱 감독의 (다른 이름을 찾고 싶지만 아직은 딱히 찾지 못한) ‘속죄’ 3부작 중 세 번째 영화인 <리볼버>는 정반대 상황에 놓여 있다. 어쩌면 그게 가장 중요한 것일 텐데, 같은 경찰이라도 <킬리만자로>의 해식과 <무뢰한>의 재곤이 가해자의 자리에 서 있는 반면 <리볼버>의 하수영은 철저히 피해자다. 바로 그 자리에서 전도연이라는 현실의 배우가 지닌 존재감, 그리고 전작 <무뢰한>과 상반된 캐릭터를 연기한 그 역할 전도가 픽션을 넘어 극대화된다.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한 리볼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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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뢰한>의 김혜경과 <리볼버>의 하수영. 닮은 듯 다른
두 캐릭터는 오직 전도연이기 때문에 성립 가능하다.
출처 CGV아트하우스

오승욱 감독의 세 편의 영화에서 전도연이 연기한 <무뢰한>의 김혜경과 <리볼버>의 하수영이야말로 유일하게 ‘배신’하지 않는 캐릭터였다. <무뢰한>에서 박준길이 체포되는 그 순간, 박준길이 김혜경에게 느낀 오해의 배신감보다 김혜경이 정재곤에게 느낀 각성의 배신감이 더 컸을 것이다. 그런데 <리볼버>의 전도연은 <무뢰한>의 김혜경이 아니라 역할을 바꿔 마치 정재곤처럼 경찰의 자리에 서 있다. 그리고 자신을 배신한 사람을 찾아가 받을 것을 받아내는 것이 목적인 인물이다. 그처럼 <무뢰한>과 서로 다른 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 전도연이라는 현실의 배우가 중요하다. 아니, <리볼버>의 주인공은 오직 전도연이기 때문에 성립 가능한 이야기다. 여느 남성 주인공이라면 폭력적인 징벌과 회수를 통해 끝낼 수도 있는 이야기를, 오승욱 감독은 다시 또 8년을 기다리더라도 <무뢰한>의 김혜경 혹은 전도연을 불러내어야 만들 수 있는 이야기가 바로 <리볼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런 결정이 <리볼버>의 장르적 재미를 반감시킬지라도 오승욱 감독은 결코 물러설 생각이 없다.

<리볼버>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는 바로, 앞서 여러 번 불려 나온 단어 ‘약속’이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2022)의 ‘추앙’이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2)의 ‘다정’, 그리고 <헤어질 결심>(2022)의 ‘붕괴’처럼 <리볼버>의 상징과도 같은 대사로 느껴졌다. 영화에서 하수영은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도 ‘각오’하고, 감옥에서 출소해서도 ‘각오’를 해야 하는, 말하자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변 남성들로 인해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기에 “약속한 돈을 받는데 무슨 각오가 필요해”라는 하수영의 대사가 주는 울림이 강렬하다. 하지만 그 어떤 순간에도 하수영은 중심을 잃지 않는다. 상대의 인격을 무너뜨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폭력일 테지만, 하수영은 철저히 자기만의 방식으로 상대를 대한다. 돈과 아파트로 대표되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만이 목표의 전부가 아니라, 어떻게든 맨정신의 상대로부터 받아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하수영에게, 그리고 세 편째에 다다른 오승욱 감독에게 ‘약속’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여기서 하수영이 ‘전직 경찰’이라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변성현 감독의 <길복순>(2023) 혹은 앞서 출연한 박흥식 감독의 <협녀: 칼의 기억>(2015)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전직 경찰이라는 설정으로 인해 <리볼버>를 전도연의 새로운 액션 장르영화라고 기대했을지도 모를 시선을 완전히 뒤엎는다. 평소 한국의 시네필들 사이에서 장철 감독으로 대표되는 홍콩영화를 비롯해 장 피에르 멜빌 감독의 프렌치 누아르 영화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열광하는 장르영화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고백한 바 있는 오승욱 감독이기에 나름대로 예상 가능한 지점일 수 있겠으나, 감독은 냉정하리만큼 그에 관심이 없다. <킬리만자로>와 <무뢰한>에도 분량이 적긴 해도 꽤 인상적인 액션 장면이 있었다. 그런데 <리볼버>에서는 사실상 아예 찾아볼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볼버>의 클라이맥스는 사찰 화종사 시퀀스다.
화종사로 향하는 산길 장면에서 벌어지는 밤의 액션이 이곳에서 벌어진다.

하수영이 택한 복수의 방식은 관습적인 장르영화 주인공의 폭력이 아니다. 그것이 비록 장르적 쾌감을 배신하는 것이긴 하나,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껏 보지 못한 전도연의 새 얼굴과 감격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서두에서 얘기한 것처럼, 위스키의 숨은 향을 끌어내기 위한 하수영의 방식은 그렇게 영화 전체에 걸쳐 완성된다. 출소와 동시에 항공 점퍼와 블랙진으로 갈아입은 하수영은 아파트라는 현대의 공간에 은둔한 것 같은 무당의 집, 그리고 신비로운 사찰 화종사를 지나 도시와 숲의 경계, 더 나아가 마치 시간의 벽을 뛰어넘은 것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동시에 영화는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전도연 배우와 오승욱 감독이 두 번째 영화로 만나 던져 놓은 그 서두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눈팔지 않고 나아간다. 영화 속 하수영이 보여주는 자기만의 복수의 약속과 과작(寡作)의 영화감독 오승욱의 장르를 지향하되 그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작가적 약속은 그렇게 전도연이라는 배우의 몸을 빌려 황홀하게 완성된다. <리볼버>는 여전한 장르영화의 혼전 속에서 그야말로 눈부시게 빛나는, 2024년 한국영화의 가장 중요한 성취로 기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