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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이렇게 충만할 수 있다
선호빈, 나바루 감독 <수카바티: 극락축구단>
- 글
- 지승학(영화평론가, 고려대학교 응용문화연구소 교수)
- 사진
- 영화연구소, (주)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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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호빈, 나바루 감독 <수카바티: 극락축구단>
자전적인 다큐멘터리 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세대 간 벽을 의미하게 된 호칭 ‘며느리’를 과감하게 격하시켜 보여주었던 선호빈 감독과 나바루 감독. 이번에는 FC안양의 서포터스 ‘A.S.U. RED’(이하 RED)를 다루면서 ‘극락의 세계관’을 격상시켜 보여주려 한다. 이를 위해서 영화 <수카바티: 극락 축구단>(이하 <수카바티>)은 힘을 잔뜩 뺀 채 원래 뜻 그대로 극락의 세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실체가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 ‘지역 축구 서포터스’와 그들의 활동을 무던하게 기록한다. 문제는 이 영화의 제목이 주는 생소함이다. 자칫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로 보이거나 현학적으로 보여서 아는 사람들만 알 것 같은 어려운 영화로 비칠 수 있지만, 그건 그냥 오해일 뿐이다. 게다가 이 영화를 봐야 할 이유는 바로 그 오해가 풀리는 지점에서 갑자기 ‘나’를 반추하게 되는 성찰의 순간에 있다.
나의 선택, 나의 진심, 나의 즐거움줄거리는 간단하다. 경기도 안양에서 프로축구단 LG 치타스의 갑작스런 연고지 이전으로 허한 삶을 살던 팬들이 새로운 홈팀 ‘FC안양’의 서포터스가 되기로 결심한 이후, 인생의 모든 것이 달라져 갔다는 이야기. TV에서 잠수부 손에 들려 있던 수중 연막탄 ‘홍염’을 보고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된 FC안양 서포터스 RED의 일원. 그는 안양에 사는 평범한 소시민이지만, 홍염을 서포터스의 응원도구로 삼고 FC안양을 위해 어느새 시의회에 난입하게 되기까지 격정적인 사연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이 사연은 한 명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서포터스’는 어디까지나 복수형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뜻 들으면, RED를 급진적인 심경의 변화를 겪은 비극 서사의 이름 모를 가련한 주인공들 혹은 통쾌함을 선사하는 영웅 서사 속 예명 뒤에 숨은 히어로들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면 <수카바티>의 매력은 축구에 빠져서 이른바 영웅적인 혹은 결기 있는 행동을 보여주는 비범한 인물들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한 가지 확실한 건 등장인물들은 적어도 그런 행동들을, 그러니까 응원하고 시의회에 난입하는 행동들을, 주인공처럼 혹은 영웅들처럼 자기 스스로, 다른 말로 하면 자립적으로 혹은 주도적으로 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의미에서만 한정하고 보면 그들은 모두 주인공이자 영웅이 맞다.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결국 우리는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스스로 이 질문을 던져보면 어딘지 모르게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의문. 과연 나는 주도적으로 자립적으로 어떤 행동을 기꺼이 진심으로 행동에 옮겨본 적이 있었던가? 누군가의 추천 없이, 누군가의 권유 없이, 누군가의 충고 없이, 누군가의 명언 없이, 심지어 어디서 왔는지 알 도리가 없는 알고리즘 추천 없이 오로지 나만을 생각하고 나만을 위해서 선뜻 결정을 내린 후 행동에 옮겨본 적이 있었던가? 적어도 <수카바티>의 등장인물들은 이미 자기 삶의 모든 것을 자기의 선택으로만 만들어 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때로는 엉뚱해 보이고 때로는 실패가 빤히 보이는, 소위 ‘오늘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도 그들은 항상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마침 그들은 축구에 빠져 있다. <수카바티>가 담고 있는 이야기의 전제는 바로 이거다. 나의 선택, 나의 진심이 모여 나의 즐거움이 된 사람들의 축구 이야기.
축구가 곧 아미타불그래서 나는 <수카바티>를 즐거움에 대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서 즐거움이란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닌, 오로지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에게로 끝나는 순수한 즐거움을 말한다. 이건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사랑이라는 말은 (적어도 영화 <수카바티>에서는) 무언가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의 좋은 말을 찾다 찾다 못 찾은 경우, 하는 수 없이 그 대안으로 사용하고 마는 느낌의 단어라면, 여기서 즐거움은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을 때 쓴다는 점에서 확실히 다르다. 게다가 ‘수카바티’라는 단어는 바로 그러한 즐거움이 함께하는 곳을 ‘지정학적’으로 정확하게 겨냥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마침 안양을 연고로 둔 FC안양 서포터스 ‘RED’의 응원구호가 ‘수카바티(सुखावती sukhāvatī)’다. 그래서 이 영화의 감독들이 맨 처음 주목한 것이 ‘안양’, 곧 순수한 즐거움이 있는 ‘장소’라는 뜻 아니었을까?
산스크리트어로 극락정토(極樂淨土)를 뜻하는 수카바티는 공교롭게도 안양(安養)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품고 있는 안양정토(安養淨土)라는 말과 같은 맥락을 갖는다. 극락이든 안양이든 모두 지극한 즐거움의 풍성함이 서려 있다는 ‘깨끗한 땅’을 뿌리로 두고 있다. 바로 이 땅에서 즐거움을 찾는다는 뜻은 축구의 즐거움과 묘하게 겹치면서 ‘극락’의 의미를 더 힘 있게 강조해준다. 수카바티에는 아미타불이 주재하고 있다. 아미타불은 스스로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존재를 위해서 존재한다. 그래서 영화 <수카바티>를 보고 축구를 통해 즐거움을 깨닫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메시지를 읽어내게 된다면, 그건 ‘축구가 곧 아미타불’이라는 뜻을 이해한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강렬한 홍염을 폭발시키듯
우리는 즐거움으로 삶을 채워야 하는가? 아니면 우리의 삶은 이미 즐거움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하는가? 영화 <수카바티>는 후자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삶이 나의 선택으로 충만하다면, 나의 선택은 즐거움으로 곧바로 연결될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것. 하지만 삶이 공허하다거나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는 식의 좌절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이 말이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할 수 있다. 그러면 앞서 말했듯이, 허한 ‘나’의 빈 곳을 충만함으로 반추해보면 성찰의 순간이 다가올 수 있다는 말을 떠올려보자. 그건 허함을 충만함으로 바꿔 이해해보라는 뜻이다. 나의 삶이 허함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것은 허하게 비어 있는 공간을 어떤 힘겨운 무게가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무언가로 충만해서 그 압력이 높아져 있는 탓에 마치 외부의 힘에 짓눌려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만든 것이라고.
<수카바티>는 내 안의 충만한 무언가는 ‘순전히 나에 의한 선택’이라고 말해준다. 이때 즐거움은 그 선택의 힘을 폭발시키기만 하면 된다. FC안양 서포터스의 응원용 연막탄인 홍염은 이런 폭발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므로 여기서 정말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홍염의 위험성보다 오히려 그들의 충만한 선택이 하나의 즐거움으로 제대로 폭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실제로 증명이라도 하듯 RED는 축구장에서 강렬한 홍염을 서슴지 않고 피워 올린다. 그때마다 부과되는 500만 원의 벌금이 그들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오로지 자신들의 충만한 선택임을 느끼고 있어서일지 모른다. RED가 FC안양 지원 철회를 시도하는 시의회에 난입한 일을 두고 ‘난동’이라고 낙인찍어 매도하는 것은 그래서 동의하기 어렵다. 그들의 행동이 과하다면 그건 FC안양을 지켜내려는 그들의 자립적인 선택과 그로 인한 실천의 압력이 충만한 탓일 것이다.
요컨대 <수카바티>는 줄곧 비어 있는 줄 알았던 삶에 허망해하던 관객들, 그러함에도 그저 이를 담담하게 견뎌 오거나 이미 무감각해진 채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말해주려는 영화처럼 보인다. 사실 우리 모두의 삶에는 어떤 힘이 가득 담겨 있는데 그게 사실은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 ‘즐거움’일 수 있다고. 선호빈 감독과 나바루 감독은 그런 즐거움을 FC안양 서포터스의 모습을 통해서 선보인다. 그들은 오로지 축구를 선택함으로써 즐거움을 깨닫고 있다. 삶의 충만함에 대한 깨달음은 먼 데서 오는 것이 아니고 어렵게 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 경쟁 스포츠인 축구를 투쟁 관계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투쟁 관계의 부작용은 살벌한 갈등 구조 속에서 자립적 존재 방식을 극단적으로 바꾼다는 데 있다. 생사를 건 투쟁은 투쟁 이후의 변화된 삶이 전제될 때 의미가 있다. <수카바티>에서 포착하는 안양 시의회 난입 사건은 이른바 FC안양 존폐 위기에서 보여준 서포터스들의 투쟁이 소위 살벌한 ‘인정투쟁’으로 비칠지언정, 서포터스의 삶이 극적으로 변화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임을 보여준다. 조금 과장하면, <수카바티>를 본 이후엔 적어도 난동을 부리는 유별난 사람들이 사실 삶의 즐거움으로 충만한 사람들이라고 뒤바뀌어 이해해볼 수 있을 정도다. 서포터스끼리 만나 결실을 이룬 결혼식 장면과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축구선수를 응원하는 모습 등은 ‘안양정토에서 누리는 행복함’으로 이해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안양정토에서의 깨끗한 즐거움은 그렇게 그들의 삶을 가득 채운다.
진심 어린 선택이 극락정토우리가 사는 땅에는 이미 모든 즐거움이 주어져 있다. 이를 깨닫고자 한다면 스스로 결단하는 선택들로 나의 삶을 가득 채우려고 노력하기만 하면 된다. “나의 선택들을 아웃소싱 하는 삶에서 벗어나 스스로 결단하려는 용기를 주저 없이 내보인다면 모든 선택은 행복한 즐거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삶은 즐거움으로 충만해질 것이다”라고 영화 <수카바티>가 말한다.
이 영화는 즐거움이 채워지는 순환의 과정을 때론 웃기게, 때론 촌스럽게 보여준다. 그 과정 어딘가에 바로 ‘나’의 일상을 겹쳐 놓으면, 영화를 보고 난 후의 즐거움과 즐거움에 대한 깨달음이 더없이 충만해질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이 <수카바티>의 관람을 추천한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 영화에 대한 자립적 선택을 방해할 수밖에 없는 추천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나는 이 글의 잠재적인 이해충돌을 깨닫는다. 이 모순은 영화평론이 자주 부딪치는 장벽이기도 하다. 다만 자립적이고 주체적인 선택이 항상 더 올바른 선택이나 이득이 되는 선택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며, 그걸 알고 있음에도 기꺼이 내리는 선택에는 순수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일단 두 가지 상황을 통해 이 글의 의미를 정리할 수는 있다. <수카바티>라는 영화가 있는지조차 몰랐는데 이 글을 통해 알게 된 상황과 <수카바티>라는 영화를 알긴 알지만 볼지 말지 고민하는 와중에 이 글을 접했을 때의 상황. 어느 상황이든 이 글 때문에 최소한 내가 가진 선택의 진심을 발휘해볼 수는 있다는 것. 그러면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진심 속에서 ‘즐거움’은 ‘수카바티’, 즉 극락정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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