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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다시 짧아진다
- 글
- 장주연(일간스포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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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 극장가에 국내 주요 투자·배급사들이 심혈을 기울여 선택한 텐트폴 영화들이 모두 개봉했다. 장르도 메시지도 각기 다른, 저마다의 색이 분명한 작품들이지만, 이들 영화에는 하나의 분명한 공통점이 존재했다. 짧은 러닝 타임이다. 그렇다. 한국영화의 러닝 타임이 다시 짧아지는 모양새다. 140분을 향해 몸집을 불리던 한국 상업영화들이 100분 내외로 가벼워지고 있다. 짧은 영상에 익숙한 관객 성향에 따른 일종의 전략 수정으로, 이 같은 흐름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지난 7월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에서 선보인 이제훈·구교환 주연의 <탈주>와 CJ ENM이 내놓은 고(故) 이선균·주지훈 주연의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의 러닝 타임은 각각 94분, 101분이었다. 430만 관객을 돌파하며 올여름 최고 흥행작에 등극한 <파일럿> 또한 111분으로, 2시간이 채 되지 않는다. 8월 7일 개봉한 전도연 주연의 <리볼버>의 러닝 타임은 114분, 광복절 특수를 맞아 8월 14일 나란히 개봉한 조정석 주연의 <행복의 나라>(124분)와 이혜리 주연의 <빅토리>(120분)는 상대적으로 러닝 타임이 긴 편이었으나 역시 2시간을 크게 넘지 않는다.
이에 앞서 지난 6월 개봉, 여름 시장의 포문을 연 작품들의 러닝 타임은 더욱 짧았다. 하정우 주연의 <하이재킹>과 이성민 주연의 <핸섬가이즈>가 대표적으로, 두 영화의 러닝 타임은 각각 100분과 101분이었다. 상업영화, 특히 여름 개봉 작품에서는 보기 드문 독립·저예산 영화 수준의 러닝 타임이다.
과거 비슷한 시기 개봉한 영화들과 비교해보면 한국영화의 짧아진 상영 시간은 더욱 피부에 와닿는다. 지난해 여름 극장에 걸린 <밀수>(129분), <콘크리트 유토피아>(130분),
<더 문>(129분), <비공식 작전>(132분) 등의 러닝 타임은 모두 2시간이 넘었다. 이보다 한 해 먼저 선보인 여름 영화들의 러닝 타임은 더욱 길었다. 지난 2022년 6월에서 8월 사이 개봉한 주요 한국 상업영화는 <마녀 파트2. 디 아더 원(The Other One)>(137분), <헤어질 결심>(138분), <브로커>(129분), <한산: 용의 출현>(129분), <외계+인> 1부(142분),
<비상선언>(140분), <헌트>(125분) 등으로, 평균 러닝 타임은 134분을 웃돈다.
한국영화의 러닝 타임이 줄어드는 흐름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 상업영화의 상영 시간은 대부분 100분 안팎이었다. 당시 각 제작사 및 투자·배급사들은 관객이 물리적으로 피로를 느끼지 않아야 영화의 흥행에 승산이 있다고 판단, 러닝 타임을 2시간 안쪽으로 조절하는 경우가 많았다.
러닝 타임이 본격적으로 길어지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중반 이후다. 그즈음 개봉한 영화들의 러닝 타임은 기본 120분을 넘겼고, 길게는 180분에 가까웠다. 제작 환경이 필름에서 디지털로 변화한 영향이 컸다. 디지털 제작 방식은 필름 영화 대비 촬영 회차에서 자유롭고 편집이 용이하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당시 전 세계적으로 늘어나는 영화의 상영 시간을 조명하며 “고도 기술의 디지털 편집 시스템 때문이다. 과거에는 편집할 때 필름을 실제로 자르고 조각을 잇는 작업을 해야 했다. 반면 디지털 방식은 한 장면에 숏을 추가하는 것이 너무나 쉬워졌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영화가 길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제작 환경의 변화는 감독들의 창작 활동에도 더 큰 자유를 줬다. 자연스레 서사의 깊이 혹은 복잡성에 집중하는 연출자들이 늘어났고, 러닝 타임이 긴 영화들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순환 구조가 형성되었다. 긴 영화를 접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관객들 사이에서도 짧은 상영 시간보다 복잡다단하거나 풍성한 내용을 선호 혹은 당연시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짧은 콘텐츠 선호, 전 연령층에서익숙함에서 비롯된 대중적 취향이 다시 변곡점을 맞이하게 된 데에는 코로나19 팬데믹 영향이 막대했다. 이 기간 오프라인 활동에 제약이 생기면서 극장 역시 문을 닫았고, 대중은 유튜브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온라인 플랫폼에서 제공하는 콘텐츠로 눈을 돌렸다. 여기에 국내외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진출까지 맞물리면서 콘텐츠를 즐기는 방식 자체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옮겨 갔다.
이에 따라 대중도 점차 짧은 영상에 익숙해졌다. 통상 유튜브 영상의 길이는 10분 안팎이 가장 많고, SNS 등 기타 플랫폼을 통해 소비되는 영상은 이보다 더 짧은 ‘숏폼’(Short-form: 1분 이내의 짧은 영상) 형태가 대다수인 까닭이다. 물론 OTT 콘텐츠는 기타 온라인 플랫폼 콘텐츠 대비 러닝 타임이 긴 편이지만, 영화와 비교하면 역시나 호흡이 짧은 편에 속한다. OTT 콘텐츠는 대개 회당 50분을 넘기지 않는 시리즈물로, 이조차 1.2배속, 1.5배속 등으로 속도를 올려 볼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내내 모두가 이 같은 환경에 노출되면서 1020세대에 밀집되었던 온라인 콘텐츠 향유는 전 연령층으로 확장되었다. 특정 세대의 취향으로 치부되던 것이 시대의 흐름으로 자리 잡은 셈이다.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작품을 부담스러워하는 성향은 보다 뚜렷해졌고, 급기야 OTT 시리즈마저 10분 안팎으로 요약해서 보는, 본연의 콘텐츠보다 축약본을 선호하는 대중까지 생겨났다.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유튜브, OTT 등으로 관객들이 짧은 영상에 익숙해지면서 길게 집중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너무 긴 상영 시간이 오히려 장벽이 되는 분위기다. 이러한 흐름이 짧은 영화를 선호하는 현상으로 이어진 것”이라며 “실제 최근 영화들을 보면 블록버스터급의 큰 작품들도 특정 몇몇을 제외하고는 빠른 편집으로 관객이 지루함을 느낄 틈을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달라진 관객 성향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사례도 있었다. 지난 6월 개봉한 영화 <밤낚시>의 성적이다. <밤낚시>는 현대자동차가 광고를 목적으로 배우 손석구와 의기투합해 내놓은 콘텐츠로, 약 13분 분량의 단편영화다. 이 영화는 당초 CGV에서 2주간 주말에만 상영하는 기획성 무비로 극장에 걸렸다. 하지만 개봉 첫주 3일간 좌석판매율(전체 좌석 중 실제로 관객이 앉은 좌석 비율)이 60%에 육박하는 등 뜨거운 인기를 누리면서 <밤낚시>는 개봉 4주 차까지 연장 상영을 이어 갔다. 누적 관객 수는 4.6만 명으로, 예상치를 웃돌았다. 짧은 러닝 타임에 대한 관객 선호도를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방증이었다.
일각에서는 상영 시간 축소가 최근 개봉한 영화들의 장르적 특성에 기인한 변화라는 분석도 나온다. 올여름 개봉작들을 비롯해 최근 영화관에 걸린 작품을 살펴보면 긴 러닝 타임을 요하는 역사극, SF물보다는 단순 재미를 추구하는 코미디, 서스펜스 구축이 중요한 스릴러 등이 주를 이룬다. 그러다 보니 전반적으로 러닝 타임이 줄었다는 게 관련 영화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러닝 타임 다이어트 계속된다한국 상업영화들의 러닝 타임 축소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당장 9월 추석 대목을 겨냥해 개봉하는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2>는 러닝 타임이 118분으로 2시간이 채 되지 않는다. 전편인 <베테랑>(123분)보다도 줄었다. 10월 기대작으로 손꼽히는 류승룡 주연의 <아마존 활명수>와 김고은 주연의 <대도시의 사랑법>도 각각 코미디, 멜로 장르로 상영 시간이 길지 않을 것으로 예측된다.
이 같은 전망이 가능한 건 앞서 짚었듯 짧은 영상을 선호하는 관객 취향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산업 불황이 계속되면서 블록버스터급 대작의 기획은 줄고 있는 데 반해 코미디, 스릴러 등 짧은 시간 내 풀어낼 수 있는 장르물 제작은 늘어나고 있다. 인건비 상승 등에 따른 제작비 증가로 대작 기획이 어려워지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한 제작사 관계자는 “요즘 작품 회의를 할 때마다 늘 러닝 타임 이야기가 나온다. 대작 영화 제작이 쉽지 않기도 하고 관객 취향, 흐름을 고려해서 보통 2시간을 넘기지 않으려는 분위기”라고 귀띔하며 “제작비 상승 영향도 없지는 않다. 제작사, 투자사 모두 공정을 최소화하려고 한다. 편집 이전 단계에서부터 임팩트 있게, 라이트하게 가려는 실용주의적 측면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투자·배급사 입장도 다르지 않다. <핸섬가이즈><행복의 나라> 등을 투자·배급한 NEW의 김민지 커뮤니케이션 팀장은 “보통 연출자(감독)의 특별한 의도가 있지 않는 이상 구간이 늘어지는 긴 호흡, 장황한 설명은 지양하려고 한다. 블라인드 시사(사전 정보를 알려주지 않은 채 진행하는 시사회) 때도 어떤 구간에서 지루함을 느꼈는지를 중점적으로 캐치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특히 장르적인 색깔이 강한 영화라면 속도감을 놓치지 않게 초 단위의 타이트한 편집점까지 고려하는 분위기”라며 “올여름 영화들처럼 모든 구간에 군더더기 없이 경량을 하면서 120분 안에 들어오게 만들려는 추세다. 투자·배급사 입장에서도 속도감을 잃지 않기 위해 다양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고 있다”고 부연했다.
일각에서는 러닝 타임 축소가 침체한 한국영화 산업과 극장가를 모두 살릴 수 있는 묘안이 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도 나온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여전히 정상화되지 못한 시장 상황을 돌파하는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이다.
극장 입장에서는 러닝 타임이 짧을수록 상영 회차를 더 많이 확보할 수 있어 수익 측면에서 득(得)이다. 예컨대 롯데시네마에 따르면 최근 3년간 가장 러닝 타임이 길었던 <아바타: 물의 길>(192분)의 경우, 1개 관에서 하루 평균 4.5회 차가 재생되었다. 통상 140분짜리 영화의 평균 상영 회차가 6회 차인 것을 고려하면, 상영이 약 75%만 가능한 셈이다. 상영 회차는 관객 수 및 매출과 비례하는 수치로, 관객 회전율이 좋아지는 만큼 극장과 투자·배급사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 당연히 인기작일 경우 효과는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극장이나 투자·배급사 입장에서도 짧은 러닝 타임 영화를 배치할 때 더 유리하다. 스크린 수를 떠나 하루에 더 많은 타임을 배치할수록 (매출에) 도움이 된다”라며 “물론 이것을 위해 러닝 타임을 조절하는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일종의 부가적 효과가 발생한다. 효과적인 변화 중 하나로 산업에 긍정적인 효과를 줄 수 있지 않을까”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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