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iefing
트랜스하는 한국영화와 여성의 자리
- 글
- 김소희(영화평론가)
Briefing
2020년부터 시작해 매년 한국 콘텐츠 전반의 성평등과 다양성을 점검해 온 ‘벡델데이’가 올해로 5회째를 맞았다. 벡델데이는 벡델 테스트의 세 가지 기본 척도(이름을 가진 둘 이상의 여성 등장, 여성들 간의 대화, 그 주제는 남자 이외일 것)에 네 가지 자체 기준(제작 스태프 주요 분야 여성 포함, 여성 단독 주인공이거나 성별 비중 동등, 소수자 혐오나 차별 없을 것, 여성 캐릭터 스테레오 타입에서 벗어날 것)을 추가해 성평등 콘텐츠를 위한 일곱 가지 척도를 제시하고, 매년 개봉작 중 이에 해당하는 모범 작품을 선정해 소개하는 작업을 해 오고 있다. 벡델데이는 벡델 테스트가 가진 최소한의 기준에서 한발 더 나아간 기준을 제시하고 대상에 소수자를 포함하며, 사회에 만연한 차별적 인식 개선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분명히 드러내 왔다.
벡델데이로 확인되는 것들주최 측은 오는 9월 7일에 열릴 행사에 앞서, 2023년 7월부터 2024년 5월까지 공개된 작품 중 벡델데이의 취지에 맞는 영화와 시리즈 각 10편씩을 추린 올해의 초이스 선정작을 공개했다. 올해의 작품 중 상업영화는 <밀수><시민덕희><잠> 등 3편이며, 그중 여성 감독의 작품은 박영주 감독의 <시민덕희>가 유일하다. ‘벡델데이’가 시작된 해인 2020년에 선정된 여성 감독의 상업영화 역시 1편이었으니, 적어도 양적인 퇴보는 아니다. 하지만 이때 선정된 김도영 감독의 <82년생 김지영>이 오랜만에 페미니즘 논쟁의 불씨를 되살리며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냈음을 염두에 둘 때, 단순히 수치만 놓고 볼 일은 아니다. 그해는 또한 <벌새><아워 바디><메기> 등 ‘영화계 내 미투’ 이후 여성이 좋은 영화를 만든다는 사실을 증명하며, 상업영화를 견인하는 독립영화의 힘을 예견케 한 해였다. 이러한 흐름은 이듬해와 그다음 해 공개된 <앵커><연애 빠진 로맨스><내가 죽던 날><디바> 등 주목할 만한 여성 감독의 장르영화가 등장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이 더는 유효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지난해 벡델데이에서 선정된 상업영화 중 여성 감독의 작품은 <정직한 후보2>가 유일하다. 장유정 감독과 라미란 배우가 함께한 전작 <정직한 후보>(2020)가 그해 벡델데이에 언급되지 않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를 두고 후속작이 전작보다 월등히 나아졌기 때문이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벡델데이의 기준을 통과하는 상업영화를 찾는 일이 점점 힘들어지면서, 기준을 통과한 상업영화가 곧 선정작이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체감하게 된다. <정직한 후보2>와 올해 선정작 <시민덕희>는 배우 라미란이 주연을 맡은 코미디 영화라는 공통점이 있다. 작품과 배우의 훌륭함과는 별개로, 상업영화 진출 가능성이 특정 배우 이미지를 반복 소모하는 게 아닌지 의심케 한다. 내년 상반기 개봉작까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올해 하반기 공개 예정인 작품 목록을 보면 이언희 감독의 <대도시의 사랑법> 외에는 이렇다 할 여성 감독의 여성 주연 작품이 보이지 않으니, 내년에도 사정은 비슷할 전망이다.
‘여성영화’를 재질문하자상업영화에서 여성의 존재감이 옅어진 것은 영화 산업 전반의 위기 신호와 무관하지 않다. 영화만이 아니라 한국 문화 전반에서 유행이나 흐름, 성공의 표본만을 성급히 반복하려는 경향이 있고, 제작비가 많이 투입되는 작품일수록 성공이 보장된 안전한 투자를 지향하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여성 감독, 여성 주연 작품이 성공적인 스코어를 기록해도 ‘예외’로 치부된다. 운 좋게 여성 감독의 작품이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더라도, 무력해질 때까지 특정 방식을 반복하는 상업영화의 현실 속에서 끝까지 유의미한 결과물을 유지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다른 한편 ‘여성영화’라는 개념에 관한 동상이몽이 존재한다. 여성은 여전히 표면적인 차원에서만 찾아진다. 주로 어떤 영화를 ‘여성영화’, ‘여성 서사영화’라고 말하는지를 검토해보자. 여성영화라는 지칭은 여성 감독이 주로 여성 캐릭터에게 가해지는 세상의 억압을 그리는 경우에 한정해서 쓰인다. 상업영화의 맥락에서 비판적이거나 논쟁적인 지점은 대개 뭉뚱그리거나, 장르적인 작동 아래에서 대중적인 화술로 풀이할 것을 요구받는다. 상업영화의 맥락을 통과한 뒤에는 ‘여성영화’라는 알맹이는 희석되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억압과 해방은 더는 여성을 위한 이야기인 것도 아니다. 여성 억압 서사는 본질적으로는 세계의 압력을 드러내기 위해 여성을 희생 제물로 삼아 온 유구한 남성 중심 영화사 속 여성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어떤 경우에는 장르적 판타지로 과도하게 채색해, 극 중 성취가 도리어 성취 불가능함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단지 여성 캐릭터가 죽지 않거나 승리하는 서사를 그리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벡델 테스트는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영화계의 남성 중심성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명징한 척도로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단지 그 기준을 통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런데도 그것이 최소한의 기준선처럼 여겨지며, 그 기준을 통과하는 것으로 성별 균형과 다양성의 몫을 다한 것처럼 여기기도 한다. 벡델데이가 여성 감독만이 아니라 여성 제작자나 촬영감독, 작가 등을 언급하고 장려하고 있음에도 배우와 감독을 제외한 주요 부분의 여성 스태프의 활약이 실제의 영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관해서는 제대로 말해지지 않는다. 벡델데이를 보다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단순히 벡델데이 리스트를 훑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되며, 제시된 기준에 관해 끊임없이 재질문하는 과정이 수반되어야 한다.
좋은 여성영화는 나쁜 영화일 수 있고, 반대로 나쁜 여성영화가 좋은 영화로 평가받을 수도 있다. 벡델데이는 온건함의 기준만이 아니라 불온함의 기준 혹은 좋음과 나쁨의 기준을 뒤집는 기준이기도 해야 한다. 벡델데이의 기준을 충족했음에도 선정할 수 없었거나, 몇몇 조건에 미달함에도 기꺼이 논의해볼 만한 작품까지 아우를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파일럿>과 <리볼버>, 묘한 궤적의 사례나는 2024년 현재 극장가에 성공적으로 착륙한 <파일럿>이 내년 벡델데이에 초대받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김한결 감독의 <파일럿>은 배우 조정석의 원맨쇼에 가깝다. 여성 단독 주인공이 아니거니와 여성 주인공의 역할과 비중이 남성 주인공과 동등하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여성 혐오 발언 사건의 가해 당사자가 여성이 된다(여성으로 변장한다)는 점에서 여성 서사로 보기에 충분하다. 물론 그 방식이 훌륭한가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장르 설정상 관객의 이해를 구하고 가볍게 넘어가는 부분도 많다. 영화의 방식에 여러 논평을 덧붙일 수 있지만, 적어도 영화가 여성성이나 여성의 삶을 피상적으로 묘사했다는 비판에는 동의할 수 없다. 피상적 묘사는 영화의 명백한 의도다. 얇고 높은 목소리, 프릴 원피스에 하이힐, 짙은 화장은 흔히 떠올리는 관념적인 여성성을 흉내 내고 있으며 실제 여성과 다름은 따로 부연할 필요가 없다. 여성은 여성이기 때문에 자신이 여성임을 과장되게 드러낼 필요가 없다. 그러나 남성 한정우(조정석)는 과장해서 연기해야만, 겨우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있다.
여성 감독에 대해서도 비슷한 변론을 할 수 있겠다. 여성 감독은 굳이 자신이 여성임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 상업영화만 놓고 보았을 때 올해는 여성 감독의 여성 서사가 거의 부재하고, 대신 남성 배우를 주인공으로 삼는 여성 감독의 작품들이 상대적으로 눈에 띈다. 앞서 언급한 <파일럿>을 비롯해 김희진 감독의 <로기완>, 김세휘 감독의 <그녀가 죽었다>가 그런 경우이며, 여기에 추후 공개될 김지현 감독의 <정가네 목장>, 이지원 감독의 <비광> 등 개봉을 준비 중인 작품을 더하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상업영화에 한정해서 말하면 여성 감독들이 여성 중심 서사를 버리고 남성 배우를 중심에 세운 일종의 트랜스를 시도 중인 것 같다.
그 사이 여성 감독의 상업영화 진출보다 상업영화에서 존재감이 뚜렷한 여성 배우들을 찾는 것이 더 희박한 일이 되었다. 오승욱 감독과 배우 전도연이 <무뢰한> 이후 다시 뭉친, <리볼버>가 도드라져 보일 정도다. 아쉽게도 <리볼버>는 예상보다 부진한 성적을 기록 중이다. 직접 시나리오를 집필한 오승욱 감독을 비롯해, 제작자와 촬영감독이 모두 남성이기에 내년 벡델데이에서 언급될 확률도 높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여성 주연의 하드보일드 누아르 장르를 시도한 점과 배우 전도연과 임지연이 연기한 캐릭터가 예상보다 흡족한 케미스트리를 발산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여성이 장르 안에 들어왔을 때 장르의 판 자체가 흐트러지거나,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가 다른 여성 캐릭터와 나란히 존재할 때 변주되는 부분들이 직진하는 총알의 궤적에 묘한 굴곡을 만든다. 노파심에서 말하자면 나는 지금 내년 벡델데이에 <파일럿>과 <리볼버>를 선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벡델데이의 의미를 더하기 위해 선정작 상영과 언급으로 끝나는 것 외에 다른 방향의 흐름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말하기 위해 두 영화를 사례로 제시한다.
역전에 역전을 기다리며최근 한국 상업영화의 경향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다. 실제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실화영화라는 의미만은 아니라, 성공한 원작이 있는 작품에 기대는 면에서도 그렇다. 물론 실제의 역사나 허구의 역사를 다시 쓰는 작업은 필요하고, 계속 다시 쓰여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다시 쓰는 작업에서 필수적이라 할 새로운 시선, 특히 여성적 시선의 개입이 대부분 배제된 채라는 점이다. 이는 여성영화나 여성 서사영화의 의미가 지나치게 협소하게 쓰이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종의 트랜스를 시도 중인 여성 감독들의 상황은 젠더 문제를 다루는 방식의 현주소와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잠시 돌아보자면 한때 남성 캐릭터가 전담해 온 형사 캐릭터를 여성 주인공으로 전환하는 것으로 손쉬운 젠더 크로스를 시도하는 상업영화가 줄을 이었다. 이제 그런 방식이 거의 시도되지 않는다. 대신 상업영화에서 남성이 되기를 염원해 온 여성의 자리를 역전해 여성이 되려는 남성이 등장했다. <파일럿>에서 남성 캐릭터는 여성이 되려 한 대가로 한 번은 한정우로, 마지막은 한정미로 두 번의 사과를 해야만 했다. 중복된 권한을 누렸다면, 그에 따른 책임 역시 한 번에 그칠 수 없다. 부재에 가까운 상업영화 속 여성은 실은 잠복하며 자리를 찾는 중이라고 말하고 싶다. 크로스에 크로스를, 역전에 역전을 더해 때가 오기를 여전히 기다리면서.
1. 영화 부문
<교토에서 온 편지> 김민주 감독
<너와 나> 조현철 감독
<물비늘> 임승현 감독
<밀수> 류승완 감독
<비밀의 언덕> 이지은 감독
<소풍> 김용균 감독
<시민덕희> 박영주 감독
<정순> 정지혜 감독
<지옥만세> 임오정 감독
<잠> 유재선 감독
2. 시리즈 부문
<남남> 이민우 연출
<무인도의 디바> 오충환·소재현 연출
<밤에 피는 꽃> 장태유·최정인·이창우 연출
<사랑한다고 말해줘> 김윤진·김문교 연출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이재규·김남수 연출
<졸업> 안판석 연출
<킬러들의 쇼핑몰> 이권·노규엽 연출
<피라미드 게임> 박소연 연출
<힘쎈여자 강남순> 김정식·이경식 연출
1.영화 부문
감독상 | <비밀의 언덕> 이지은 감독
작가상 | <교토에서 온 편지> 김민주 감독
배우상 | <시민덕희> 라미란 배우
제작자상 | <밀수> 강혜정 제작자
2.시리즈 부문
감독상 | <LTNS> 전고운·임대형 감독
작가상 | <졸업> 박경화 작가
배우상 | <밤에 피는 꽃> 이하늬 배우
제작자상 | <힘쎈여자 강남순> 백미경 제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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