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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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카메라를 너무 붙이면 안 돼!

김도훈(영화평론가)

한국영화는 망했다. 맙소사. 대뜸 이런 강력한 문장을 집어던지며 글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쩔 도리 없다. 한국영화 리더들로 가득한 내 페이스북은 지난 몇 년간 곡소리로 넘쳐났다. 왜 사람들은 더는 한국영화를 보러 가지 않는 걸까? 모두가 하나의 강력한 이유를 찾아내려 애쓰는 중이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라는 새로운 강력한 플랫폼이 극장 산업을 집어삼키고 있는 걸까? 티켓값이 지나칠 정도로 강력하게 오른 탓일까? 사실 한국의 극장 티켓값은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다. 1인당 국민소득이 일본을 추월할 정도로 올랐으니 소비재의 가격도 오르는 건 당연하다. 평양냉면 가격이 1만5000원이 된 시대에는 영화도 비싸질 수밖에 없다. 내가 좋아하는 을밀대는 1만6000원이다. 곧 평양냉면은 2만 원 시대를 돌파하게 될 것이다. 어쩌겠는가. 그래도 당신은 평양냉면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은 볼 만해?
한국영화의 독창적 역량을 보여준 영화 <탈주>(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핸섬가이즈>(NEW), <콘크리트 유토피아>(롯데엔터테인먼트)

모든 것이 비싸진 시대에 사람들이 극장 앞에서 불평을 한다면 거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니다. 갑자기 한국영화가 재미없어진 건 아니다. 한국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좋은 영화를 만들어내는 국가 중 하나다. 2024년을 예로 들어보자. 나는 <탈주>와 <핸섬가이즈>를 보며 아직 한국영화에 작고 독창적인 영화를 제조할 충분한 역량이 있다고 확신했다.
<범죄도시 4>를 넘어선 <파묘>는 꽤 신선하고 신기한 데가 있는 장르적 도전이었다. 2023년은 또 어떤가. <범죄도시 3>를 넘어선 <서울의 봄>은 지나간 역사를 스크린에 재현하는 익숙한 한국 현대사 영화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이라 칭송할 만한 영화였다. 류승완의 <밀수>와 엄태화의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익숙한 거장의 도전과 새로운 명장의 탄생을 동시에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바닥 드러낸 상상력

여기까지다. 드문 성공 사례를 펼쳐냈으니 익숙한 실패 사례를 거론해야 마땅하다. 문제는 이거다. 중급 규모의 영화들은 여전히 괜찮은 수익을 올리는 중이다. 올여름 최고의 ‘슬리퍼 히트작’(예상치 못한 성공작을 일컫는 말)이라 할 만한 <파일럿>의 성공은 고무적이다. 그게 한국영화를 살릴 신호탄이 되어줄는지는 잘 모르겠다. 2010년 작 미국영화
<터커 & 데일 Vs 이블>을 리메이크한 <핸섬가이즈>와 마찬가지로 <파일럿>은 해외영화 리메이크다. 2012년 작 스웨덴영화 <콕핏(Cockpit)>을 한국적으로 변용한 영화다. 올해 두 편의 가장 독창적인 히트작이 해외영화 리메이크라는 사실은 꼭 지적하고 넘어가야 한다. 이건 어쩌면 ‘오리지널’ 한국영화의 상상력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증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슬리퍼 히트작만 나오는 것도 건강한 일은 아니다. 중요한 건 텐트폴 영화다. 텐트를 받쳐주는 기둥이라는 의미의 텐트폴 영화는 각 제작사가 그 해 흥행의 지지대로 예상하고 제작하는 대작을 의미한다. 작은 영화의 성공은 반가운 일이다. 텐트폴 영화의 성공 없이 영화 산업의 지속적인 성공은 힘들다. 텐트를 잘 치지 않으면 비가 조금만 내려도 무너지기 마련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한국 제작사의 텐트폴 영화에 대한 기대가 더는 없다. 아니다. 없다기보다는 내 마음속에서 기대를 지워 버렸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2025년에도 흥행에서 실패하는 텐트폴 영화들을 보며 낙담하고 싶지는 않다. 사람이 낙담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말이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 많은 문제가 있을 것이다. 제작사들의 변명은 일관적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 제작된 창고 영화들을 풀다 보니 팬데믹 이후 바뀐 관객들의 취향을 따라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이거 변명이다. 지금 관객이 텐트폴 영화들을 보러 가지 않는 이유는 오랜 실망의 누적에 더 가깝다.

클리셰 집약한 텐트폴 영화들

한국 텐트폴 영화는 어느 순간 클리셰의 집약이 되었다. 여기서 꼭 거론하고 넘어가야 할 클리셰 집약의 텐트폴 영화는 2023년 한국 박스오피스를 무너뜨린 김용화 감독의 <더 문>과 한재림 감독의 <비상선언>, 그리고 김성훈 감독의 <비공식작전>이다. 아, 나는 이 영화의 감독들이 이 글을 읽지 않기를 바란다. 아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여러 인터뷰를 종합해본 결과, 나는 여전히 이 영화를 제작한 제작사와 감독들이 아직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는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수백억 원을 투자한 내 새끼가 추락하는 꼴을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아는 감독은 이런 말을 몇 년 전에 했다. “영화가 실패했을 때 감독이 정확하게 이유를 파악하는 데는 적어도 5년 정도가 필요하지.” 감독이란 역시 쉬운 직업이 아니다.

어쨌든 두들기고 넘어가야 할 건 두들기고 넘어가야 한다. 모두가 이미 두들기고 또 두들겨 팬 김용화 감독의 <더 문>을 먼저 예로 들어보자. 이 영화는 지난 10년간 한국 거대 제작사와 배급사가 양산해 온 텐트폴 대작의 클리셰를 모조리 껴안고 있다는 점에서 가히 상징적인 실패다. 2009년 윤제균 감독의 <해운대>가 천만 관객을 기록한 이후, CJ ENM은 ‘이것이 바로 우리의 길이다’라는 자신감으로 비슷비슷한 대작을 양산해 왔다. 2013년 작 <타워>, 2015년 작 <히말라야>, 2019년 작 <백두산>은 박스오피스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CJ만 이런 것도 아니다. 롯데엔터테인먼트의 <신과 함께> 시리즈, 쇼박스의 <싱크홀> 등 각 거대 배급사를 대표하는 텐트폴 대작들도 같은 전략을 내세운 영화들이다. 그렇다면 <더 문>도 당연히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어야 마땅하다. 그렇지 못한 이유는 내가 보기에는 하나다. 관객들이 그 익숙한 포맷으로 만들어지는 한국 텐트폴 영화의 공식에 질려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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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특수효과를 이용한 스펙터클로 기대를 모았던
<더문> 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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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후반부의 전개에 비판을 받았던 <비상선언> (주)쇼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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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후반부의 전개에 비판을 받았던
<비상선언> (주)쇼박스

<더 문>은 지난 10년간 한국영화가 해 온 모든 것을 다 해내는 영화다. 디지털 특수효과를 이용한 스펙터클을 무기로 삼고, 재난 상황에 연관된 각 캐릭터의 고군분투를 펼쳐내고, 마지막에는 관객을 울릴 신파와 감동 코드를 마구 쏟아낸다. 익숙한 포맷이다. 한때는 통했다. 나는 신파에 아주 나약한 관객이다. <해운대>에서 박중훈이 “내가 니 아빠다”라고 울부짖을 때 같이 울었다. 고백하기 부끄럽기는 하지만 나는 감독이 울라고 요구하면 쉬이 울어주는 쉬운 관객이었다. <타워>의 여의도 소방서 구조대장 설경구가 아내에게 “못난 놈 만나가지고 고생 많이 했지? 여보,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합니다”라는 음성메시지를 남기는 장면에서 울지 않는 건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울릴 수 있는 최상의 무기는 역시 ‘가족애’다. 김용화 감독의 <신과 함께>가 말 못하는 어머니 캐릭터를 등장시키는 순간…. 아, 그만하자. 나도 울고 여러분도 울었다.

울기도 지쳤다

신파가 꼭 나쁜 건 아니다. 오히려 해외 관객들은 한국적 신파를 꽤 흥미롭게 받아들인다. <오징어 게임>의 구슬치기 에피소드를 보며 “셰익스피어 비극에 맞먹는다”고 눈물 흘리며 외치던 해외 유튜버를 떠올려보시라. 연상호의 <부산행>이 해외 관객에게 그토록 잘 통했던 이유 중 하나도 그들에게 익숙한 좀비 장르 영화를 부녀의 신파로 마무리하는 신기함 덕분이었다. 해외 관객이 한국영화를 먹여 살리는 건 아니다. 나는 <더 문>의 후반부에 감정적으로 완전히 지쳐 버렸다. 영화는 이미 울 준비가 된 관객의 뺨을 때리고, 때리고 또 때린다. 설경구는 좋은 배우지만 20년째 감정 과잉으로 울부짖어야 하는 건 배우도 할 일이 아니다. 지난 몇 년간 개봉한 대부분의 텐트폴 영화들이 비슷한 전략을 내세웠다. 나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만큼 <비상선언>을 싫어하지 않지만 후반부에서 감독이 구사하는 감정적 시퀀스들의 과잉에 숨이 막혔다. 죽음에 직면한 승객들이 가족과 영상통화를 하며 우는 장면은 통째로 덜어내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뭐, 내가 제작자는 아니니 너무 쉽게 하는 소리일 수도 있다만. <비공식작전>은 익숙한 신파를 빗겨 나가려 갖은 애를 쓰다가도 결국 한국 외교부 공무원들의 결의에 찬 표정을 보여주며 기어이 신파의 덫에 빠지고야 만다.

최종 병기 이젠 포기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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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히어로 더 스타디움>(CGV ICECON, 씨제이포디플렉스 주식회사)과 <안녕, 할부지>(㈜바른손이앤에이)

그래서 이 모든 신파의 클리셰를 어떻게 피해 나갈 것인가. 한국인에게 잘 통하는 감동의 코드를 완전히 제거하지 않고도 과잉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것인가. 사실 상당히 쉽고 간단한 방법이 하나 있다. 익스트림 클로즈업을 포기하는 것이다. 신파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에서 나온다. 눈물 흘리는 인간의 얼굴을 확대해서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한국적 신파의 최종 병기다. 모두가 질릴 대로 질린 구식 병기다. 설경구, 송강호, 이병헌, 하정우, 황정민은 훌륭한 배우다. 뒷모습만으로도 이야기를 건넬 줄 아는 놀라운 사람들이다. 그들의 눈물 젖은 얼굴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 순간 모든 것은 과잉이 된다. 그러니 포기하자. 익스트림 클로즈업을 포기하자. 설경구의 클로즈업을, 송강호의 클로즈업을 포기하자.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한국 박스오피스를 점령하고 있는 두 영화는 <아임 히어로 더 스타디움>과 <안녕, 할부지>다. 임영웅과 푸바오의 얼굴을 이길 수 있는 얼굴은 2024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배우의 얼굴 바로 앞에 위치한 카메라를 뒤로 조금 빼야 할 시기가 마침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