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cover img

Trivia

소설 속의 삶, 이렇게 움직인다

<한국이 싫어서><딸에 대하여><대도시의 사랑법>

곽명동(마이데일리 기자)
image

영화팬의 즐거움 중 하나는 소설 원작과 영화 각색을 비교하면서 감상하는 것이다. 활자가 영상으로 어떻게 옮겨졌을까를 상상하는 것만큼 시네필을 흥분시키는 일도 없다. 원작의 감흥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담아내기만 해도 성공이다. 그러나 감독은 자신만의 개성과 의미를 녹여내고 싶어 한다. 관객은 감독이 원작의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것을 살렸는지, 또는 기존에 없던 새로운 것이 어느 장면에 들어갔는지 궁금해하면서 영화를 관람한다. 중력처럼 잡아당기는 원작의 무게감을 이겨낸 감독의 상상력을 관찰하는 일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예술 행위다.

<한국이 싫어서>
서울에서 인천, 호주에서 뉴질랜드로
image
image
장강명 작가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한국이 싫어서>
((주)디스테이션 )

장강명 작가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는 2015년 5월에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헬조선, N포세대, 각자도생 등 청년들의 절망을 담은 키워드가 만들어지던 순간에 도착했다. 이런 글로 표현되어 있다.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무턱대고 욕하진 말아줘. 내가 태어난 나라라도 싫어할 수는 있는 거잖아.”(p10) 소설에서 호주로 떠나는 주인공 계나의 용기에 젊은 독자는 격하게 공감했다. 영화사는 출간 이듬해인 2016년에 판권을 계약했고,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지난 8월 28일 개봉했다. 원작은 개봉 이전까지 총 7만 부가 판매되었다. 매월 200~300부 가까이 판매되다가 개봉 이후 현재까지 2000부 이상 더 판매되었다. 9년 전이나 지금이나 청춘들의 현실은 여전히 막막하다는 방증이 아닐까?

고아성이 받은 시나리오는 ‘35고’였다. 그만큼 각색이 쉽지 않았다. 초고는 판권을 계약한 해인 2016년에 나왔다. 그 뒤 3명의 각색 작가가 투입되었다. 2022년까지 모든 펀드와 투자에서 탈락했다. 거의 포기할 때쯤, 고아성이 캐스팅되었고 투자도 탄력을 받았다. <항거: 유관순 이야기><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등에서 알 수 있듯, 고아성은 부당한 현실에 맞서 싸우는 이미지와 어울린다. 여기에 더해 장건재 감독은 “(고아성을 통해) 정의 내리지 않고 찾아가는 불확실성, 묘한 쓸쓸함이 표현되길 원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극중 계나(고아성)의 거주지와 떠나는 국가도 바꿨다. 영화에서 계나는 서울 아현동이 아닌 인천에 산다. 소설에선 2호선을 타고 한 번도 갈아타지 않는데, 영화에선 두 번 환승하고 출근 시간도 1시간 더 늘어 2시간이 되었다. 아현동에서 인천으로 바꾸면서 장거리 출퇴근 직장인의 고통이 더욱 생생해졌다.

그렇다면 호주에서 뉴질랜드로 변경한 이유는 무엇일까? 장 감독은 “뉴질랜드가 특히 여성 인권이나 자연의 생명권을 소중히 한다는 데 깊은 인상을 받았다. 또 영화에 은유적으로 쓰인 동화 <추위를 싫어한 펭귄>의 주인공 파블로가 떠나는 남쪽의 따뜻한 나라의 이미지에도 뉴질랜드가 적합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고아성은 따뜻한 나라에 사는 설정을 위해 태어나 처음으로 태닝까지 하며 캐릭터 싱크로율을 높였다.

원작에서 계나의 남자친구는 모두 5명이 등장하지만, 영화에선 3명으로 압축해 이야기의 집중도를 높였다. 소설에서 약대 입시에 올인하던 경윤은 여자 동기였는데, 영화에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남자 동기로 바뀌었다. ‘행복 전도사’가 KTX에서 어떤 사고를 겪는 것도 원작에는 없는 설정이다. 뉴질랜드의 지진과 교민 가족의 참사 등 소설에 없는 비극적 사건들은 계나의 선택에 결정적 계기로 작용한다. 영화의 결말에서 장 감독은 계나의 용기와 모험에 방점을 찍는다.

뉴질랜드로 떠나는 계나가 여행 가방에서 짐을 덜어내는 영화의 첫 장면((주)디스테이션)

마지막 장면을 보고 나면 영화의 첫 장면이 떠오른다. 계나는 뉴질랜드로 떠나는 여행 가방에 짐을 너무 많이 실어 일부를 덜어내야 했다. 계나는 책 몇 권도 집어넣었는데, 그중 하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였다. 감독은 일부러 클로즈업까지 동원하며 이 책을 강조했다.

계나는 내면에서 들리는 북소리를 따라 긴 여행을 떠났다. 아니, 어쩌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디아스포라(이산민족)의 삶을 살아갈지도 모른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보니 어디선가 북소리가 들려왔다.
아득히 먼 곳에서, 아득히 먼 시간 속에서 그 북소리는 울려왔다.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왠지 긴 여행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 <먼 북소리> 중에서
<딸에 대하여>
사회적 약자들이 만드는 ‘가족의 탄생’
image
image
김혜진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딸에 대하여>
(찬란, 스튜디오 에이드 )

김혜진 작가의 <딸에 대하여>는 2017년 9월 출간되었고, 영화 계약은 출간 이듬해인 2018년에 이뤄졌다. 9월 4일 영화 개봉 전까지 모두 7만7000부가 판매되었는데, 매월 약 100~200부 판매되다가 개봉을 전후로 800부가량 더 팔렸다.

김혜진 작가와 이미랑 감독의 만남은 운명처럼 느껴진다. 이들은 서울예전 학보사 활동을 함께했다. 이미랑 감독이 2학년 편집장, 김혜진 작가가 1학년 신입 기자였다. 이미랑 감독은 원작을 훼손시키고 싶지 않아 각색 과정에서 원작 소설을 필사했다.

image
image
<한국이 싫어서>에서는 계나의 엄마로,
<딸에 대하여>에서는 주인공으로 나온 오민애 배우와
딸 ‘그린’ 역의 배우 임세미
(찬란, 스튜디오 에이드 )

영화 <딸에 대하여>와 영화 <한국이 싫어서>는 연결고리가 있다. 바로 오민애 배우다. 독립영화계에서 잔뼈가 굵은 오민애는 <한국이 싫어서>에서는 계나의 엄마로, <딸에 대하여>에서는 주인공으로 나온다. <딸에 대하여>의 경우, 원작 소설은 엄마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데, 엄마의 독백을 영화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오민애는 표정과 몸짓과 리듬만으로 소설 속 ‘1인칭 독백 세계’를 스크린에 펼쳐냈다. 이미랑 감독은 “겉으로는 고요하고 침착해 보이는 엄마지만 불의한 상황을 만나면 뜨거워지는 엄마의 모습은 오민애 배우만의 해석이고, 이는 원작과도 닮은 듯 닮지 않은, 영화만의 엄마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딸 ‘그린’ 역의 배우 임세미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린은 극 중에서 대학 측의 부당한 해고에 맞서 싸우는 인물인데, 실제 임세미는 제로웨이스트, 동물보호 및 비거니즘 등을 실천하고 있다. 실생활의 적극적 행동이 영화에서도 느껴질 정도로 그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그린 역을 자연스럽게 소화했다.

image
삶의 무게를 나눠 지는 장치로 보여준 언덕을 오르는 장면.
image
요양원 어르신 레크리에이션 장면은 영화에만 있는 설정이다(찬란, 스튜디오 에이드 )

엄마가 홀로 큰 수박을 들고 언덕을 오르는 장면은 책에 없는 내용이다. 잠시 후에 그린과 그의 여자친구 레인(하윤경)은 둘이 함께 수박을 든다. 엄마가 혼자 드는 것보다 둘이 드는 것이 더 가벼워 보이는데, 이는 삶의 무게를 나눠서 지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로 해석된다.

레크리에이션 강사가 신나게 요양원 어르신들을 운동시키는 장면도 영화에만 있는 설정이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어르신 제희(허진)를 계속 신경 쓰는 엄마의 마음 씀씀이가 드러난다. 엄마와 제희가 사탕으로 친밀감을 쌓아 나가는 모습도 원작에는 없다.

소설 초반, 엄마가 죽은 동료의 장례식장에 찾아가거나, 2층 귀퉁이 셋방에 살던 여자가 고독사한 묘사 등은 영화에 담지 않았다. 원작의 어두운 톤을 덜어내고, 2층에 단란한 가족이 사는 것으로 바꾸었다. 그린은 이층집 아이들과 놀이를 즐기며 재미있게 지낸다. 아마도 엄마는 동성애자인 딸이 보통의 사람들처럼 그렇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미랑 감독은 “문학이라는 매체가 하지 못하는,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시청각적 언어로 관객의 체험 문제에 집중하기로 각색의 방향을 잡았다”고 말했다.

엄마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이제희재단’을 찾는 장면을 보자. 소설에 없는 이 장면에서 엄마는 왜 가족도 아니면서 제희를 챙기냐는 사무장의 의심에 속상한 마음을 드러낸다. 감독은 이를 위해 곧바로 국수를 먹는 장면을 붙였다. 청각이 도드라지는 엄마의 ‘후루룩’ 소리에는 죽음을 앞둔 제희에 무관심한 세상을 향한 불만이 담겨 있다.

이미랑 감독은 1년의 후반작업을 마친 뒤, 에필로그를 따로 찍었다. 보수적이었던 엄마가 세상을 한층 성숙하게 바라보는 장면인데, 관객도 엄마의 시선에 공감하게 된다.

이 영화는 단순히 엄마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린, 레인, 제희, 그리고 우리 모두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4명이 모두 모여 음식을 먹는 장면에선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이 떠오른다. <딸에 대하여>는 노약자, 무연고자, 성소수자, 비정규직 등의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가족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대도시의 사랑법>
김고은과 노상현의 역대급 티키타카
image
image
박상영 작가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대도시의 사랑법>(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은 2019년 6월 출간되었고 이듬해 영화사와 계약이 체결되었다. 현재까지 10만 부가 팔렸다. 창비 출판사 관계자는 “영화 개봉 전부터 판매량이 증가하고 있다”면서 “10월 1일 개봉 이후에는 더 많은 판매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세계적 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에 올랐을 만큼 세계적 화제를 모았다. ‘재희’, ‘우럭 한점 우주의 맛’, ‘대도시의 사랑법’, ‘늦은 우기의 바캉스’까지 4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영화는 이 가운데 ‘재희’를 다룬다.

image
image
<대도시의 사랑법>은 자유로운 영혼 재희와 세상과 거리두기에 익숙한 흥수의 동거동락을 그린 영화이다(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이 작품은 눈치 보는 법이 없는 자유로운 영혼 재희(김고은)와 세상과 거리 두는 법에 익숙한 흥수(노상현)가 ‘동거동락’을 하며 펼치는 그들만의 사랑법을 그린다. 이언희 감독은 기자간담회에서 “이 책 안에서 던지는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나보다 나를 잘 알고, 나를 믿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재밌게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연출에 도전했다”고 밝혔다.

소설은 박상영 작가의 유머러스한 문체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어제는 오징어바다에서 술을 먹다가 테이블을 엎어 버렸지 뭐니”, “철구 미친 새끼가 나한테 자자고 하는 거 있지. 얼굴과 마음이 골고루 역겨운 새끼” 등의 대사가 김고은의 연기로 어떻게 펼쳐질지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 소설의 핵심 문장은 “재희는 나를 통해서 게이로 사는 건 때론 참으로 좆같다는 것을 배웠고, 나는 재희를 통해 여자로 사는 것도 만만찮게 거지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다. 과연 이러한 소설의 감성이 스크린에 어떻게 그려질지 호기심을 자극한다.

“재희는 나를 통해서 게이로 사는 건 때론 참으로 좆같다는 것을 배웠고,
나는 재희를 통해 여자로 사는 것도 만만찮게 거지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화사 관계자는 “소설에 비해 대학 시절의 디테일이 더 풍성해졌고, 새로운 에피소드가 더 많아진 것도 특징”이라면서 “두 배우의 찐친 케미가 관람 포인트인데, 영화를 보고 나면 나도 저런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image
image
image
image
<한국이 싫어서><딸에 대하여><대도시의 사랑법>의 주인공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한국이 싫어서><딸에 대하여>와 연결하면, <대도시의 사랑법>의 주인공 재희는 계나처럼 호주를 다녀왔고, 흥수는 그린처럼 성소수자다. 출간 연도가 모두 다르지만, 세 작품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까 2024년 8~10월에 나란히 개봉하는 세 영화 <한국이 싫어서><딸에 대하여><대도시의 사랑법>은 비주류, 여성, 성소수자의 현실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의 단면을 드러내는 청춘 3부작으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