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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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그 자체로 말하다
<한국이 싫어서>

홍수정(영화평론가)
사진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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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재 감독의 신작 <한국이 싫어서>는 동명의 원작 소설을 떼어 놓고 보기 어려운 작품이다. 영화의 기반이 된 소설 <한국이 싫어서>는 장강명 작가가 2015년에 발표했다. 그러니까 소위 ‘헬조선(지옥을 뜻하는 영어 ‘Hell’과 조선의 합성어로, 지옥 같은 한국 사회라는 뜻을 담은 신조어)’ 담론이 들끓었던 2014~2015년의 풍경 한가운데서 탄생한 것이다. 와인이 생산 연도의 토양을 온몸으로 체화하는 것처럼 이 소설도 당대의 공기를 담뿍 머금은 채 태어났다.

원작과 다른 가능성으로부터

소설의 주인공 ‘계나’는 종합금융 회사 신용카드 팀 승인실에서 일하는 20대 후반의 평범한 여성이다. 집안이 힘든 탓에 과외를 마음껏 받아본 적 없고, 서울 소재 대학을 나온 뒤 자신을 받아주는 직장에 입사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아파트 경비원이고, 언니와 여동생은 아직 취업하지 않았다. 엄마는 계나가 그의 남자친구와 결혼하기를 원하지만, 막상 계나는 자신을 동정하는 듯한 남자친구 부모님의 시선을 견디기 어렵다. 지옥철을 견디고 퇴근한 어느 날, 유난히 추웠던 그 밤, 계나는 난방을 틀어도 도무지 따뜻해지지 않는 방에 누워 생각했다. 여기서 더는 못 살겠다고. 그렇게 시작된 대탈출기. 소설 <한국이 싫어서>는 한국과 호주를 오가는 계나의 일상을 따라간다.

영화 <한국이 싫어서>의 플롯은 소설과 대부분 흡사하다. 주인공 계나(고아성)와 남자친구 지명(김우겸), 이민 가서 만난 친구 재인(주종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다만 원작에서 계나는 호주로 떠났으나, 영화에서는 뉴질랜드로 향한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설정 외에도 영화가 소설과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다. 그것은 영화가 소설의 디테일을 상당 부분 생략했다는 점이다.

영화가 원작의 잔가지를 쳐낸 이유는 아마도 러닝 타임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또 텍스트로 설명 가능한 부분, 예를 들어 계나의 속마음이나 생각 등을 모두 영상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결과적으로 영화 <한국이 싫어서>는 이 같은 선택 때문에 원작 소설과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그러니까 줄거리는 같되 디테일은 생략된 그 투박함 덕분에 영화는 원작과 달리 새로운 가능성을 잉태하게 된 것이다.

계나가 한국을 떠난 이유는?

영화와 원작의 차이가 특히 두드러진 부분은 ‘계나가 한국을 떠나는 이유’와 관련한 부분이다. 소설에서 계나가 호주로 떠나는 이유는 여러 단계에 걸쳐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녀는 한국에서 처한 자신의 상황이 싫었고, 그런 감정을 드러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웠으며, 이런 괴로움이 앞으로도 나아지지 않으리라 예감했다. “내가 호주에 간 것은 내 신분이 오를 가능성이 있는 방향으로 한 일이야.” 계나는 이다지도 명확한 현실 인식에 기반해 타지로 향했다. 그것은 한국에서의 비참함을 피하고 싶은 동시에, 자신의 구체적인 현실을 조금이나마 뒤흔들어보겠다는 생각에서 온 결단이다. 감성과 이성이 함께 손잡고 내린 결정인 셈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계나가 한국을 떠난 이유가 선명하게 잡히지 않는다. 물론 계나가 처한 조건은 소설과 동일하다. 그러나 학벌주의에 치이고, 회사의 부당함에 시달리며, 어려운 가정 형편에 지치는 것은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이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는 그 이상의 뾰족한 이유를 관객에게 제시하지 못한다. 소설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된 ‘신분 상승의 가능성’이라거나, 텍스트로 느껴지는 계나의 사소하고도 잦은 낙담도 영화에서는 잘 전달되지 않는다. 그러니 관객으로서는 동일한 조건에서 다른 이들은 택하지 않는 길을 계나가 굳이 향하는 이유를 명확히 알기 어렵다. 그 때문에 계나의 결단은 일종의 ‘돌발 행동’으로,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얼룩으로 남겨진다.

영화의 공백은 원작과의 시간차 때문에 더욱 두드러진다. 소설 <한국이 싫어서>가 등장한 2015년에는 ‘헬조선’과 함께 ‘탈조선(탈출과 조선의 합성어로, 살기 힘든 한국을 떠난다는 뜻을 담은 신조어)’ 담론도 유행을 탔다. 헬조선을 피해 외국으로 탈조선하자는 자조 섞인 농담이 한바탕 한국 사회를 휩쓸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심히 외국을 향하는 계나의 선택이 2015년 당시에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의 비극을 짚는 담론의 양상이 바뀌었다. ‘탈조선’도 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제 청년들은 조국을 지옥이라 부르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대신, 방으로 숨어들고 일하지 않으며 사람 간의 관계를 끊어낸다. 2015년을 휩쓸었던 뜨거웠던 분노는 이제 고요한 좌절로 바뀌어 대한민국을 뒤덮었다. 10년 전 울려 퍼진 “탈출!”이라는 외침은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생소하고도 유별나게 들린다. 그러니 계나의 선택은 (소설이 발간될 당시와 달리) 영화로 개봉된 지금 우리에게 다소 어색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인가. 언론 시사회 이후의 기자간담회에서도 이 부분을 짚은 질문이 유독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참석한 기자들은 장건재 감독을 향해 “그래서 계나가 한국을 떠난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가?”, “뉴질랜드는 한국과 무엇이 다른가?”, “계나와 같은 선택을 하지 못하는 한국 청년들에게 이 영화는 어떤 의미인가?” 등의 질문을 던졌다. 아마도 10년 전이라면 동일한 질문이 이다지도 많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 예상한다. 이것은 관객들이 영화 속 계나에게 묻는 질문이자 같은 선택을 했던 10년 전 소설 속 계나에게 던지는 질문일 것이다. 한국이 싫어서 떠난 당신은 지금 무엇을 얻었느냐고.

이것과 관련해 가장 인상 깊은 대답을 한 이는 고아성 배우였다. 그녀는 “계나는 왜 한국을 떠나려고 한 것 같냐?”라는 한 기자의 질문에 ‘그 점에 대해 열심히 생각했지만 정확히는 모르겠다’라는 취지로 답했다(기억의 문제로 표현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그녀의 투명한 대답이 외려 이 영화의 핵심을 관통했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가 제시되었지만, 사실 영화 속 계나가 한국을 떠나야 하는 뚜렷한 이유는 없다. 누군가는 그녀와 비슷한 삶을 한국에서 살아내고 있을 것이다. 계나가 뉴질랜드에서 무엇을 얻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영화의 마지막, 계나는 미소를 짓고 있지만 그것이 이국의 땅에서 온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므로 계나의 탈조선이 성공인지 실패인지 혹은 그녀가 찾은 행복이 한국을 벗어난 곳에서만 얻을 수 있었던 것인지 여부는 알 수 없는 상태 그대로 영화에 남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관객은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선명하지 않다고 느낄 수도 있다.

‘헬조선’ 담론에 대한 2024년의 대답

그러나 이 같은 공백의 결과로 더욱 선명해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계나의 ‘선택’, 그 자체다. 뉴질랜드에 간 이유도 결과도 명확히 정의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계나의 선택은 결단으로 굳어져 우리 앞에 제시된다.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벗어나기 위한 결정을 했고, 그뿐이다. 그것이 잘된 선택인지의 여부에 대한 가치 판단은 이 영화의 범주를 벗어난다. 인생을 바꾸고 싶다면 무엇인가 하여야 한다고, <한국이 싫어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영화는 계나의 선택에 어떠한 의미도 덧붙이지 않고, 그것을 투명하게 남기려는 노력을 한다. 그중 하나가 영화에 등장한 행복 강연자(정이랑 분)의 죽음이다. 영화에 종종 등장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행복뿐”이라고 설파하는 이 강연자는, 무자비한 경쟁과 평가로 인해 한국 사회 곳곳에 쌓인 독소를 성실하게 제거하는 청소부다. 하지만 그녀의 강변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탓에 무책임하고 냉정하게 느껴진다. 마치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조차 개인의 탓이라는 은근한 압박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하지만 계나와 그녀의 친구는 행복에 대한 정의를 다시 세운다. 그들이 생각하는 행복은 무척 단순해서 오히려 행복이라는 거대하고 추상적인 개념을 해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과정을 통해 <한국이 싫어서>는 계나가 행복을 찾아 뉴질랜드를 향한 것 또한 아니라고 다시 한번 강조한다.

결국 계나의 긴 여정을 통해 남은 것은 ‘탈출’이라는 하나의 선택뿐이다. 스스로 만들어낸 하나의 사건.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확실치 않고, 그에 대한 평가는 관객 각자에게 주어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지금의 한국 사회에 제법 잘 어울리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10년 전의 분노도 사그라들고, 어떤 담론도 파동을 일으키지 못한 채로 고요히 경직된 지금의 한국. 이곳에서 선택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말만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을까? 그것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 장담할 수 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성과가 장건재 감독의 의도로 만들어진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한국이 싫어서>는 10년 전 ‘헬조선’ 담론 사이에서 탄생한 원작 소설에서 출발해 2024년 한국 사회의 핵심을 건드리는 작품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유효한 고민과 선택

다만 이 영화에서 하나 아쉬운 부분이 있다. 영화에서 다른 이들과 무척 결이 다른 한 명의 인물이 있다. 수험 생활만 거듭하는 계나의 친구인데, 그는 소설 원작에서는 없던 인물이다. 그는 괴로운 수험 생활 끝에 결국 안타까운 선택을 하며 한국 사회의 어려움을 온몸으로 드러낸다. 그의 모습은 한국을 떠난 계나와 공명하며 이야기의 결을 만든다.

하지만 내게는 이것이 과도한 설정으로 느껴진다. <한국이 싫어서>의 장점은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을 경직된 유형으로 환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현실에 있을 법한 고난을 모두 우려 넣는 방식으로 이야기의 개연성을 부여하지 않기 때문에 이 작품이 진솔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수험생 친구의 예상 가능하면서 극단적인 상황은 영화의 결을 해치고, <한국이 싫어서>만의 장점을 지운다. 이런 설정은 보다 다듬어졌으면 좋았을 것 같다.

때로 영화는 자신의 몸을 지우고 공백을 끌어안으며 더 많은 이야기를 건넨다. 소설이 세상에 나온 후 긴 시간을 지나 우리 앞에 나타난 <한국이 싫어서>는 원작의 상당 부분을 지우며 오히려 그것과 다른 성취를 해내었다. 그러므로 인상 깊게도, 이것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다. ‘인생은 여행’이라는 식상한 진리를 생각한다면, 계나의 고민과 선택도 오늘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