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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의 귀환과 넷플릭스의 부재

제81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이진주(씨네플레이 기자)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는 8월의 이탈리아, 베니스 동쪽에 위치한 리도섬에는 세계 영화인들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칸, 베니스와 함께 세계 3대 영화제이자 그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베니스국제영화제(Venice International Film Festival)의 문이 열리기 때문이다.

올해도 할리우드를 한가득 품은

2023년 열린 제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는 미국작가조합(WGA)과 미국배우·방송인조합(SAG-AFTRA) 파업의 여파로 휘청였다. 레드카펫을 수놓던 다수의 할리우드 스타는 조합의 규정에 따라 불참을 선언했고 원래 개막작이었던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영화 <챌린저스>가 출품이 취소되며 에도아르도 데 안젤리스 감독의 <더 커맨더>가 영화제의 막을 열었다.

칸이나 베를린보다 할리우드영화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베니스국제영화제의 특성상 어찌 보면 예견된 일이었다. 예술성이 짙은 작품을 위주로 라인업을 꾸리던 베니스국제영화제는 2000년대 이후부터 앞서가는 여타 영화제들 사이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친할리우드적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심화되었다. 미국 내 최고 권위의 영화 시상식인 아카데미 시상식과 그 궤를 같이하며 ‘아카데미 레이스의 전초전’이라는 비난의 화살을 맞기도 했지만 할리우드의 별들을 한데 모으고 상업성 짙은 작품의 첫 상영을 이끌며 흥행에 성공해 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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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비틀쥬스 비틀쥬스>

올해에도 베니스는 할리우드를 한가득 품었다. 오는 8월 28일부터 9월 7일까지 열리는 제81회 베니스국제영화제는 <비틀쥬스 비틀쥬스>를 개막작으로 선정했다. 1988년 팀 버튼의 대표작 <비틀쥬스>의 속편이다. 당시 제작비의 약 5배 흥행 수익을 올린 <비틀쥬스>가 마이클 키튼, 위노나 라이더 등 추억의 배우들과 함께 36년 만에 돌아온다.

베니스 기대작 TOP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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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강력한 황금사자상 후보로 떠오른 <조커: 폴리 아 되>, A24의 에로틱 스릴러 <베이비걸>,
이탈리아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의 연출작 <퀴어>

장편 경쟁 부문에는 총 21편이 초청되었다. 이 중 눈길을 끄는 네 작품이 있다. 앞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조커>의 속편 <조커: 폴리 아 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이후 또 한 번 두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만든 루카 구아다니노의 <퀴어>, 안젤리나 졸리가 전설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를 연기한 <마리아>, A24의 에로틱 스릴러 <베이비걸> 등이다.

제76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조커>는 그야말로 신드롬을 일으킨 2019년 최고의 화제작이다. 주인공 조커 역을 맡은 배우 호아킨 피닉스는 이 작품으로 제92회 아카데미, 제77회 골든글로브, 제25회 크리틱스 초이스 등 유수의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당연히 후속작에 대한 관심이 쏟아졌고 제작 확정과 함께 레이디 가가의 캐스팅과 뮤지컬 장르라는 예상치 못한 소식을 전하며 기대감을 높였다. <조커: 폴리 아 되>는 베니스국제영화제 예술감독 알베르토 바르베라가 호평을 남기기도 해 올해 강력한 황금사자상 후보로 떠올랐다.

미국의 작가 윌리엄 S. 버로스(William S. Burroughs)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영화 <퀴어>는 베니스국제영화제와 각별한 관계성을 지닌 이탈리아의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의 연출작이다. <챌린저스>는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의 개막작이 될 뻔(!) 했고 2022년 <본즈 앤 올>로 제79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그의 신작 <퀴어>는 1940년대 두 남성의 사랑을 담아냈다. 마약 사건을 피해 멕시코 시티로 도망친 미국인 리(다니엘 크레이그)가 해군 앨러튼(드류 스타키)에게 빠져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퀴어>가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대표작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영광을 이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앞서 여성 전기 영화 <재키>와 <스펜서>로 베니스를 찾은 파블로 라라인. 이번에는 대표적인 프리마돈나 마리아 칼라스의 인생을 담은 영화 <마리아>로 경쟁 부문에 초청되었다. 실존 인물에 대한 파블로 라라인 감독만의 영화적 재해석은 그간 꾸준히 할리우드의 인정을 받았기에 우여곡절이 많았던 마리아 칼라스의 삶을 이번엔 어떻게 담아냈을지 기대를 모으고 있다. 특히 3년 만에 복귀하는 안젤리나 졸리가 마리아 칼라스를 연기하며 더욱 우아하고 섬세한 캐릭터를 구현할 것으로 예상된다.(안젤리나 졸리는 아주 적은 분량으로 출연한 <쿵푸팬더 4>를 제외하고는 2021년 <이터널스>를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활동을 중단했다.)

A24의 세 번째 베니스 진출작 <베이비걸>은 성공한 최고경영자(CEO) 로미(니콜 키드먼)가 어린 인턴 사무엘(해리스 디킨슨)과 불륜을 저지르며 발생하는 이야기를 담는다. 영화는 A24와 2022년 공포영화 <공포의 파티>로 한 차례 합을 맞춘 네덜란드 감독 핼리너 레인이 연출을 맡았다. 지난 10여 년간 약 100여 편의 작품을 배급, 제작하며 ‘美 중소 영화사의 기적’이라는 별명이 붙은 A24는 2022년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의 <더 웨일>, 2023년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프리실라>로 경쟁 부문에 초청된 바 있다. 그중 <프리실라>는 주연 배우 케일리 스패니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겼다.

<아파트: 리플리의 세계>,
유일한 한국영화 초청작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 이머시브 경쟁 부문에 초청된 채수응 감독의 <아파트: 리플리의 세계>

한편, 2012년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룬 후 한국영화는 베니스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형국이다. 홍상수 감독이 꽉 잡고 있는 베를린국제영화제와 거장의 반열에 오른 봉준호•박찬욱 감독뿐 아니라 유재선•정주리 감독 등 신예 감독까지 고루 진출하는 칸국제영화제에 비해 베니스는 한국영화에 쉽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유일하게 이름을 올려 한국영화의 자존심을 지켜낸 작품이 있다. 채수응 감독의 <아파트: 리플리의 세계>다.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 이머시브 경쟁 부문에 초청된 <아파트: 리플리의 세계>는 기억 보존 시스템 ‘마인드 업로드’가 상용화된 2080년을 배경으로 한다. 2009년 미제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형사가 리플리 증후군을 겪는 소년의 왜곡된 기억 너머 진실을 찾는 과정을 그린 인터랙티브 영화다. 장혁이 주연을 맡은 이 작품은 관객의 선택이 서사에 영향을 주는 독특한 형태로 배우와 직접 소통하며 색다른 몰입감을 선사할 예정이다.

베니스국제영화제의 이머시브 경쟁 부문은 2017년 세계 3대 영화제 중 최초로 설립된 가상현실(VR) 경쟁 부문을 확장한 섹션으로 여러 창의적 수단으로 확장현실(XR)을 담은 작품을 선정한다. 지난해 김시연 감독의 <내 이름은 O90(MY NAME IS O90)>, 이상희 감독의 <원룸바벨(ONEROOM-BABEL)>과 김진아 감독의 <아메리칸 타운(COMFORTLESS)> 등 한국 VR 작품이 나란히 베니스로 향했다. <아파트: 리플리의 세계>의 채수응 감독은 이미 2018년 베니스에서 <버디 VR(BUDDY VR)>로 ‘베스트 VR 경험(Best VR Experience)상’을 수상해 한국 VR 기술력을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경쟁 부문에서 사라진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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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와 2021년 은사자상을 받은 <파워 오브 도그>.
모두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이다.

이번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넷플릭스 영화가 경쟁 부문 라인업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간 넷플릭스와 탄탄한 공생관계를 맺어 온 베니스국제영화제가 21편의 경쟁 부문 작품을 모두 극장 개봉 영화로 선정했다는 점은 다소 의아하다. 이에 예술감독 알베르토 바르베라는 “올해 넷플릭스 작품 중 상영에 적합한 영화가 없었을 뿐”이라며 넷플릭스와의 우호적 관계에는 변함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베니스가 넷플릭스를 받아들이기 전, 2017년 칸국제영화제는 봉준호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옥자>를 경쟁 부문에 초청하며 영화계에 큰 논란을 일으켰다. 전통적인 배급 방식을 주장해 온 프랑스극장협회(FNCF)와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다. 당시 <옥자>는 르미에르 극장에서의 상영 중 일부 반대 세력의 방해로 8분 만에 상영이 중단되기도 했다. 이후 이듬해 칸국제영화제는 ‘경쟁 부문에 출품하는 모든 영화는 프랑스 극장에서 반드시 개봉해야 한다’는 규정을 추가하며 사실상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경쟁 부문 진출을 막았다. 이에 넷플릭스는 칸국제영화제에 대한 보이콧을 선언하기도 했다.

바다 건너 칸국제영화제가 직면한 위기를 발판 삼아 베니스국제영화제는 넷플릭스와 함께 도약을 시도했다. 2018년을 기점으로 넷플릭스가 제작한 작품을 대거 수용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2018년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와 2021년 은사자상을 받은 <파워 오브 도그>,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의 <신의 손>이 있다. 이로써 베니스국제영화제는 세계 3대 영화제 중 가장 진보적인 영화제라는 이미지를 얻으며 이목을 끌었다.

<아파트: 리플리의 세계>
채수응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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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베니스국제영화제 초청을 축하드립니다.

A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이 작품이 선보이게 됨으로써 전 세계 관객들과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기쁩니다. 제가 만든 영화가 관객들과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는 장이 되길 꿈꿨는데, 이번 영화제에서 그렇게 된다면 비로소 이 작품이 완성될 것 같습니다.

이번이 저에게는 두 번째 초청인데요. 2018년 가상현실(VR)이라는 키워드가 영화제에 처음 선보였던 당시 <버디 VR>로 베스트 익스피리언스 상을 수상하며 이후 6년 동안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시상식 후 알폰소 쿠아론 감독님과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님과 한자리에서 VR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시간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네요.


Q

베니스국제영화제 ‘이머시브 경쟁 부문’에 초청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A

‘이머시브 경쟁 부문’은 2017년 ‘베니스 VR 확장 부문’이라는 명칭으로 설립되었습니다. 이후 2022년, 현재 명칭인 ‘이머시브 경쟁 부문’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단순히 VR 콘텐츠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터랙티브를 제공하고 보다 이머시브한 몰입형 콘텐츠들을 소개하는 섹션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 산업이 기술의 진보와 사회의 문화 소비 패턴 변화를 매개로 어떻게 진화해 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장이기도 하고요.

저는 ‘이머시브 경쟁 부문’이 다양한 디바이스를 활용해 관람 체험 형태가 다채로워진다 해도 결국 ‘영화라는 본질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장을 마련해준 섹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 초청은 저희 작품이 그 확장 가능성을 인정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VR과 인공지능(AI)과 같은 기술이 결국은 영화 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Q

<아파트: 리플리의 세계>는 어떤 작품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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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009년 미제 살인 사건의 유일한 증인이자 지금은 뇌사 상태에 빠진 소년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서 살인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야 하는 인터랙티브 스릴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저희가 VR 요소뿐 아니라 AI 캐릭터와 상호작용하면서 관객이 이야기를 주도할 수 있게 설계한 새로운 형태의 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선택을 통해 여러 가지 엔딩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어떨 땐 피로를 유발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관객을 아예 이야기 선택의 주체가 아니라 가상의 캐릭터로 역할 부여를 하게끔 만들었습니다. 관객 중 누군가는 영화와 연동되는 VR을 통해서 실제 주인공의 기억 속에 들어가 단서를 찾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영화의 흐름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진실을 보게 되는데 이때 등장 인물이 AI 기술로 재현이 되어서 관객과 상호작용을 할 수 있게 구성한 점이 이 작품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아파트: 리플리의 세계>는 이번 베니스국제영화제 ‘이머시브 경쟁 부문’ 26개 작품 중 유일한 한국 작품인데요. 감독님의 작품을 포함해 현재까지 한국 이머시브 작품이 보여주는 성과와 의미는 무엇일까요?

A

이번 작품이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초청된 것은 한국의 새로운 이머시브 장르와 영화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난이도 높은 AI 기술을 활용해서 제작했고, 그리고 그 안에서 새로운 문법을 발견하고, 같은 이야기더라도 다른 체험을 줄 수 있는 부분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뿌듯한 점입니다. <아파트: 리플리의 세계>뿐 아니라 한국의 VR 영화들이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현상은 매우 고무적인 일입니다.

대중문화에 있어서 매스미디어는 없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고리즘을 통해 개인화된 콘텐츠 큐레이션이 가능해지는 것처럼 앞으로 콘텐츠는 초개인화될 것으로 보고 있어요. 이미 그렇게 변화해 가고 있고요. 그런 미래가 도래했을 때,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영화 장르 안의 시네마틱한 체험 요소를 차용해서 내가 직접 참여해 가면서 만드는 형태가 새로운 미디어 장르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아시아 최초로 상호작용 스토리텔링 기법을 사용해 화제가 된 <버디 VR>과 신작 <아파트: 리플리의 세계>까지, ‘관객 참여’를 주요 키워드로 영화를 제작하는 이유가 있나요?

A

결국에는 생존 이슈예요. 관객과 함께 생존하고 싶은 이야기 콘텐츠. 미디어의 발전으로 인해서 저희가 어디에서든 무엇이든 다 연결되는 세상이 되었다고 하지만, 사실상 단절된 채 살아가는 면도 있습니다. 단절은 생존에 대한 위험입니다. 지금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양한 스트리밍 및 소셜 플랫폼도 마찬가지고, ‘참여’를 유도하는 인터랙티브한 콘텐츠들이 게임보다도 더 확장성이 있고 영향력이 있다고 봅니다.


Q

현재 세계가 주목하는 이머시브 영화 시장의 선두에 계십니다. 현재 이머시브 영화 업계의 흐름은 어떤가요? 앞으로 이 독특한 업계에 뛰어들 이들은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요?

A

최근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메갈로폴리스>(2024)에서 상영 도중 배우가 직접 스크린 밖으로 나와서, 영화 속 배우와 소통하는 식의 장면이 있었습니다. 이렇듯 제4의 벽을 깨고 프레임 밖으로 뛰어나오려는 시도는 관객과 상호작용하려는 체험형 콘텐츠가 활성화되고 있는 추세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스스로가 뛰어들어 더 많은 자신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어 하는, 그리고 어딘가 소속되고 싶거나 무언가를 직접 하고 싶어 하는 관객들에게는 이 이머시브와 인터랙티브 장르가 또 다른 흥미로운 분야일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감독은 스토리텔러로서 좋은 리스너가 되어야 합니다. 과거에 그러했듯 편집이 끝나서 그저 내보낸다는 느낌보다는, 관객과 같이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 가는 과정 속에 본인의 작품이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