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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잃는다는 것
김록경 감독 <진주의 진주>

조영준 칼럼니스트

영화감독인 진주(이지현 분)는 경남 진주시로 향한다. 크랭크인을 일주일 앞두고 촬영을 약속했던 카페의 철거가 예정 되어서다. 예산도 빠듯하고 시간도 촉박한 상황이지만 어떻게든 영화를 찍어보겠다는 마음으로 선배 훈(허웅 분)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공간을 찾아보고자 한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오래된 카페다. 그저 옛날 형태로 지은 것도 아니고 막연히 옛 건물을 리모델링한 것도 아닌 말 그대로 오래된 카페. 진주를 돌아다니던 중 우연히 지역 예술가들의 모임 장소인 ‘삼각지 다방’을 발견하게 되지만, 이번에도 역시 곧 철거를 앞두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다. 이 소식은 지역 예술가들에게도 큰 충격이 된다. 진주는 이들과 함께 이 공간을 지켜내기로 마음먹는다.

공간의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

영화 <진주의 진주>에서 김록경 감독은 처음부터 공간의 상실을 경험하는 한 사람의 모습을 제시한다. 극 중 진주가 영화를 촬영하기로 약속했던 카페가 철거되는 장면이다. 그녀에게 이 공간은 단순한 촬영 장소 이상의 의미가 있다. 오래전의 소중한 기억이 남아 있는 장소이자 자신의 시나리오를 완성할 수 있었던 곳이다. 하나의 공간에 누군가의 추억이 새겨지는 과정과 달리 이제 사라지는 공간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항의하는 진주를 귀찮다는 듯이 밀어내는 카페 주인의 모습은 지나치게 화려하기만 하다. 소중한 공간에 대한 개인의 서사는 이처럼 무력하다. 추억만으로는 하나의 공간을 실질적으로 점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권리도 내세울 수 없어서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집단과 지역의 것으로 옮긴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 진주가 시장 한 켠의 작고 오래된 다방으로 향하게 되는 과정에는 그런 물음이 있다.

진주가 삼각지 다방을 처음 마주하는 장면에는 이 공간이 가진 시간의 의미와 현재의 상황이 함께 놓인다. 다방 곳곳에 놓인 오래된 물건과 벽면마다 부착된 지나간 공연의 포스터들은 지나온 시간의 의미에 해당한다. 그곳에서 만나게 되는 지역 극단 남강의 연출가인 준용(임호준 분) 또한 이 공간이 지역 예술인들에게는 영감을 주고 교류의 장소가 되며 지역 시민들에게는 휴식의 공간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20년이 넘게 다니고 있는 다방과 오 사장(오치운 분)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아 극을 만들기도 했다. 반면 손님이라고는 예술가 넷이 전부인, 누구도 찾지 않는 다방 운영의 현실적인 어려움은 현재의 문제에 속한다.(진주가 다방을 발견하기 전에 만난 시장 상인의 말에 따르면 근처에는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도 있다고 한다.) 예술을 한다는 사람들만 매일같이 와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몇 시간이나 죽치면서 시끄럽게 노래 부르고 담배나 태우는 게 이 공간의 현실이다.

가치를 바라보는 위치의 차이

이와 같이 영화는 공간의 문화적 가치가 시간의 의미와 현실의 문제 사이에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다. 공간이 갖는 시간적 의미를 알지만 현실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다방의 주인 오 사장도, 현실의 어려움을 알지만 공간에 쌓아 온 시간을 떠나 보낼 수 없는 예술인들도 양쪽 모두를 붙잡을 방법을 쉽게 찾을 수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 양측은 며칠 남지 않은 철거까지의 아까운 시간을 자신의 입장만 고수하면서 보낸다. 그 과정에서 오해는 더 커지고 만다. 결국 돈을 버는 일에만 목적을 두는 쪽과 그저 촬영만 중요하고 놀이터가 필요한 쪽으로 서로를 비난하게 되는 것이다.

얼떨결에 휩쓸리기는 했지만, 준용을 비롯한 극단의 단원들과 삼각지 다방을 지키는 일에 동참하기로 한 진주. 이들이 함께 술을 마시며 처음으로 의기투합하는 자리에서 그의 표정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이 흥미롭다. 공간 하나가 사라지는 일로 눈물까지 흘리며 서운해 하는 지역 예술인들의 감정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 모습을 담아낸다. 그 역시 아쉬움은 느끼고 있지만 그보다 더 나아간 감정까지는 잘 공감하지 못하는 듯하다. 사실 진주에게도 진주로 내려오기 직전에 카페의 철거를 바라보며 눈물을 쏟았던 기억이 있다. 그 공간이 자신에게는 중요한 의미가 있어서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다. 그들과 함께 울지 못한다. 나는 이 장면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제삼자의 위치에 대한 문제다.

진주에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진주는 아직 이방인에 속한다. 이 작품 속에는 진주 외에도 삼각지 다방이라는 공간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이들이 여럿 등장한다. 다방의 철거를 중단하기 위해 극단의 단원들이 찾아가는 문화재단의 관계자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삼각지 다방이라는 장소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그 공간의 문화적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이 없다. 심지어 문화재단의 이사는 지역 사회 곳곳에 50년이 넘는 노포가 널려 있고 모두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응수한다. 개인 소유의 다방이 허물어지고 새로 지어지는 일에는 개입할 의지도 명분도 부족한 셈이다. 그나마 이들은 준용과 진주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라도 한다. 로터리 앞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현수막을 들고 홍보를 위한 시위를 해봐도 길을 지나가는 일반 시민들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

쉽게 사라지고 무너지는 시대의 반영

어느 공간이 누군가에게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곳을 직접 경험하고 향유하며 각자의 시간을 쌓아 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제 사라져 버린 카페에서 진주가 어린 시절에 그랬고, 지금 곧 사라지게 될 삼각지 다방에서 20년이 넘도록 지역 예술인들이 꿈을 키워 왔던 것처럼 말이다. 그저 시간만 오래 흐른다고 해서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제삼자는 이 과정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속하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깊이 공감하기 힘들고 적극적으로 관심을 두기 어렵다. 진주가 “삼각지 다방을 다시 만들 수 없다면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적극적인 태도를 갖게 되는 것 역시 조금 뒤의 일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양쪽 모두의 사정에 깊이 관여하게 된 다음이다.

한편, 영화는 극 중 인물 모두에게 공간이 사라지는 일로 인해 감내해야 하는 것들을 심어 놓는다. 준용에게는 9년 전, 지금과 마찬가지로 내쫓기듯 공간 하나를 잃어야 했던 경험이 있다. 처음으로 단원들과 연습하고 공연을 했던 소중한 곳이다. 진주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소중한 추억이 담긴 공간에서, 그와의 이야기를 담은 자신의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이제는 사라지고 없을 첫 장면의 그 카페다. 이는 삼각지 다방을 허물고자 하는 주체인 오 사장과 주환(문선용 분)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들이야말로 공간의 철거에 가장 큰 아쉬움을 느끼게 될 당사자다. 실제로 주환은 진주와의 대화를 통해 이 공간이 삼대에 걸쳐 운영되었으며 자신에게는 놀이터와 같은 곳이었다고 고백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삼촌인 오 사장이 물려받았지만, 사람도 없고 돈도 되지 않아 이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이다. 공간의 상실은 모두로부터 중요한 기억과 시절을 하나씩 빼앗는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이 같은 공간의 문제가 어느 하나의 장소나 한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경제적 가치만이 우선시 되며 쉽게 사라지고 또 무너지고 있는 시대의 반영과도 같다.

물리적인 사라짐만이 소멸은 아니다

공간의 문제가 삼각지 다방의 것이 되고 개인이 아닌 단체와 사회의 문제가 되더라도 뚜렷한 해결책을 찾기는 어렵다. 결정의 주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공간의 존폐에 대한 선택권은 여전히 다방 주인인 오 사장과 주환에게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가 시도하는 것은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있던 이들, 다시 말해 앞서 언급했던 제삼자에 속하는 이들의 참여를 촉구하는 일이다. 이 문제와 가장 가까이 있는 지역 예술인이나 개인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진주의 관여는 당연하다. 이제 그에게 영화 촬영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처음에는 관심을 두지 않던 문화재단의 이사와 담당자도 철거 당일 오전에 삼각지 다방을 찾겠다고 약속한다. 중요한 것은 첫 장면에서와 달리 공간의 상실 앞에서 진주가 더 이상 무력하지 않다는 것이며, 이 변화가 또 다른 변화를 이끌어내며 약간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다시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처음 진주시로 내려온 진주는 가이드 역할을 하는 주환을 따라 주요 명소를 구경한다. 영화 촬영 장소를 구하기 위한 목적이다. 이때 등장하는 곳이 망진산과 진주성이다. 지역 명소라고 소개되는 공간이 어쩐지 황량하고 쓸쓸한 구석이 있다. 찾는 사람도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는다. 공간의 소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오 사장은 냉소적인 어투로 문화적 가치를 누가 말하느냐고 물었고, 주환은 오래된 게 좋다지만 모두가 같은 마음은 아니라고 말한다. 물리적으로 사라지는 것만이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기억과 마음으로부터 멀어지는 곳에서부터 공간은 조금씩 허물어진다. 어쩌면 명소라고 알려진 이 공간들 역시 언젠가는 삼각지 다방의 문제를 똑같이 겪게 될지 모른다. 무언가를 지켜내는 과정은 지난하기만 하다. 쉽게 잊히고 사라지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제 삼각지 다방의 간판은 다시 켜질 수 있게 되었지만, 언제 어디에서 또 어떤 공간이 우리 모두의 기억을 삼키게 될지는 알 수 없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