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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원 감독 <검은 소년>
임선애 감독 <세기말의 사랑>

이대로 보내기 아쉬운 두 작품의 심층 평론

원은정(한국청소년센터 대표), 정지혜(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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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트리플픽쳐스, (주)엔케이컨텐츠
‘자유의지’가 있으면 혼란은 질서로 가는 길이 된다

서정원 감독의 <검은 소년>

글 원은정(한국청소년센터 대표)

방황, 반항, 미성숙, 문제아, 비행청소년…. 이런 용어들은 누구를 위해 생겨났을까? 말은 만들어지고 쓰이면서 사회 안의 합의를 담고 있다. 어떤 말들은 특정 대상을 표현하는 데에 쓰이기도 한다. 위에 나열한 말들은 이 사회가 청소년을 향해 붙이는 이름표들이다. 특히, 사회에서 강요하는 일정한 틀을 벗어났을 때 더 여지없다. 말은 수평으로 오갈 때는 ‘대화’가 되지만 한쪽을 향해 일방적으로 나열하면 그것은 ‘편견’이 된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을 보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부터 대화가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은 사라지게 된다. 다시 희망을 찾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질문이다. 왜 그러는지, 어디가 아픈지, 어떻게 해주면 되는지, 지금 필요한 게 무엇인지 말이다. “왜 아무도 내가 뭘 원하는지 묻지 않아요?” 질문은 혼란에서 질서로 찾아가는 길의 이정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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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보통 전지적 시점으로 연출된다. 주인공 시선으로 영화를 이끌어 가는 ‘1인칭 주인공 시점’도 있지만, 많은 영화가 관객이 제3의 관찰자로서 사건과 관계를 지켜보며 그들이 왜 그러는지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전지적 시점 형태를 띤다. 반면, 전지적 시점 영화의 등장인물은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만 타인을 볼 수 있고 부여된 인격으로 관계하기에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각자의 삶처럼 보는 시각이 협소하다. 영화 <검은 소년>을 보며 내내 답답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관객인 나는 알겠는데, 훈(안지호)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는 것 말이다. 그들이 영화 내내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훈은 아무도 없는 적막 속에서 받을 가능성이 없는 전화를 걸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철저하게 홀로 남겨진다.

훈이 살고 있는 집은 검다. 불이 거의 켜져 있지 않아 어둡다. 그 집이 환할 때는 술을 마시지 않은 아버지(안내상)가 훈의 도시락을 챙기며 “사랑한다. 아들”이라는 말을 할 때뿐이다. 사랑한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다정한 아빠라고 생각하기엔 아직 이르다. 그런 아빠가 술을 마시는 순간, 작은 불이 켜져 있는 훈의 방도 더 이상 안도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술에 취한 아빠는 이내 훈의 방문을 두드리며 안정의 마지노선을 넘는다. 집을 나간 엄마(윤유선)를 빨리 데려오라고 말하는 아빠의 눈빛은 사랑한다고 말하던 눈이 아니다. 삶의 고단함과 분노가 고스란히 폭력의 빛을 내며 훈을 위협한다. 왜 항상 분노는 자신보다 더 약한 쪽으로, 약자 혹은 완전한 약자로 흐르는 걸까? 이때, 훈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버지의 분노 잔여물인 깨진 유리를 치우며, 그 분노를 겨우 누를 수 있는 말을 건네는 것이다. “내일 엄마가 올지도 모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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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동안 청소년을 만나오면서 이 사회가 (청소년은 정작 빠져 있는) 청소년을 전달하는 초간단하고 편협한 시각을 마주할 때마다 체념의 깊이가 커지고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에 ‘청소년’을 당사자의 시각으로 그려 낸 적이 최근에 얼마나 있었던가? 청소년이 주인공인 드라마와 영화도 별로 없거니와, 편견을 가중시키는 것에 동참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생각하고 있던 차라 이 영화 <검은 소년>의 개봉은 참으로 감사하다. 개봉관을 많이 만나거나(그래 주면 참 고맙겠다), 대흥행을 하는 것을 차치하고 이 영화가 세상에 말을 거는 방식이 반갑다. 폭력의 장면은 최소화하면서 폭력을 마주하는 감정은 최대한 전달하고, 사건을 극대화하지 않으면서 사건 속에 놓인 당사자의 감정을 공감할 수 있게 연출했다. 자극을 세게 넣을수록 관객이 쉽게 넘어온다는 사실을 서정원 감독도 알고 있을 테지만, 그것이 주인공 훈에 대한 교감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선택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극에 흔들리지 않고 주인공 훈의 감정 동선을 관객으로서 잘 따라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분명 관객들은 주인공 훈의 감정을 따라가면서 덜컹 걸림돌을 만날 것이다. 첫째, 아버지와 사는 집은 어둡고 공포스럽다. 언제 어떻게 돌변해 폭력이 날아올지 불안하며, 엄마와 연락하고 있다는 의심과 추궁으로 밀어 붙여지고 있는 상황을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 반면에 엄마 집은 햇살이 들어와 밝긴 하지만 언제 어둠이 닥칠지 몰라서 불안정하다. 도대체 왜 훈은 엄마와 멀리 떠나지 못하는가? 이 답답함은 빨리 훈이 검은 환경에서 나오기를 바라는 기대해서 비롯될 것이다. 훈은 아버지의 미성숙과 집착을 병으로 바라보는 연민을 가지고 있다. 엄마는 그저 아빠한테 들키지 않게 보호하면 되지만, 아빠는 신발 뒤축을 세워 줘야 할 정도로 혼자 살아갈 수 없는 걸 알고 있다.

둘째, 엄마가 아빠한테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면서도 엄마에게 다시 돌아오면 안 되냐고 말한다. 엄마를 떠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여전한 그 모습의 아빠가 많이 변했다는 말도 한다. 그러면서 아빠한테는 엄마와 이혼하면 안 되냐고 말하는 건 뭘까? 이런 훈의 마음은 오락가락하며 혼란스러운 마음인 것처럼 보이지만 더 깊은 내면에는 이 상황을 종료할 엄마, 아빠의 이혼이라는 방법과 막연하지만 엄마가 돌아오면 아빠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간곡한 희망 때문일 것이다. 훈은 점점 더 처절하게 혼자가 된다. 유일한 친구는 망한 집안을 책임지기 위해 우정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유일한 영혼의 안식처인 문학동아리에서는 훈의 몸에 붙어있는 절망을 “무섭다”며 퇴출을 명하고, 유일한 햇살이었던 엄마는 지긋지긋한 어둠에서 벗어나 사람답게 살기 위해 떠난다. 훈에게 오라고 하는 곳은 타인의 굴욕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채우는 그 살기 어린 녀석이 서 있는 더 짙은 어둠뿐이다.

서정원 감독 역시 가장 신경 써서 연출한 장면이 주차장 신이라고 했는데, 가출하는 아들과 쫓아가는 아버지의 추격전은 공포 그 자체다. 가장 안전해야 할 대상인 아버지가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되는 것만큼 공포가 어디 있을까? 갈 곳이 없지만 벗어날 곳은 명확하기에 필사적으로 도망간다. 하지만 계속 잡히고, 이 반복 속에서 관객인 우리는 무엇을 바라야 할까. 잡히는 것? 잡히지 않는 것? 이 우매한 질문에 감독은 해답을 내놓는다. 분리! 아들에게서 맞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집착하고 있던 허울뿐이었던 ‘가족’에서 아버지는 벗어나게 된다. 물론 그 방식은 허무와 체념이었지만 말이다. 아버지가 훈에게 외쳤던 “제발 이러지마. 정신 차려. 너까지 이러면 안 돼”라는 말은 훈이 그동안 아버지에게 수없이 외쳤던 말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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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은 질서를 찾아가는 길의 모양이다. 영화 안에서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고, 영화가 그저 무겁고 어두워 보이지만 이 영화는, 분류하자면 해피엔딩이라 말하고 싶다. 훈은 여전히 갈 곳이 없지만 마음이 향하는 곳을 잘 알고 있다. 환경이 자신을 마구잡이로 흔들고 막다른 길에 몰아서 쌓였던 분노가 분출되지만 그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적어도 뭘 선택하지 않을지, 어디에서 안식하며 숨 고르기를 해야 할지 알고 있다. 역사의 변화는 늘 한 사람의 ‘자유의지’에서 비롯되었다. 한 사람의 지금을 보며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예측에는 누락된 것이 있다. 바로 ‘자유의지’다. 이 영화는 훈의 자유의지를 지지하고 있다. 허탈함, 외로움, 혼란스러움 등의 모든 감정을 담고 터덜터덜 걸어서 불이 켜져 있는 헌책방 안으로 들어서 주저앉는다. 혼자가 될수록 누군가 제시한 답이 아닌 자신만의 답을 찾을 수 있기도 하다.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해?’라는 절망 속에서도 계속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스스로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이 영화의 마지막이 마음에 든다. 물론 그 과정은 당사자나 지켜보는 관객이나 아프고 버겁고 쓰리지만, 그래도 낙천의 시선으로 보고 싶다. 이 낙천은 훈에 대한 신뢰이기도 하고 감독에 대한 신뢰이기도 하다.

영화 제목 <검은 소년>의 ‘검은’은 소년을 설명하는 수식어가 아니라 이 사회와 어른이 소년을 몰아넣었던 환경을 의미할 것이다. 그 안에서 소년은 자신과 모두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이제 자신의 길을 향해 다시 나아갈 것이다. 책방에서 훈의 눈길이 머문 곳은 어디였을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었을까?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였을까? 어떤 책을 선택하든, 그 책에서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리라 다소 무책임한 응원을 보낸다.

이상하고 사랑스러운 것은 어디서 오는가
<세기말의 사랑>의 여자들

임선애 감독의 <세기말의 사랑>

글 정지혜(영화평론가)

임선애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세기말의 사랑>(2024)을 둘러싼 평가와 감상 가운데 눈에 띄는 말이 있다면, 그 하나는 ‘이상하다’가 아닐까. 통상의 것과는 어딘가 다른, 지금까지의 경험이나 지식이 아닌 별나거나 색다른 무엇, 그리하여 의심스럽거나 알 수 없는 구석이 있는 인물과 상황을 이르는 말, ‘이상하다.’ 독특하고, 특이하고, 신기하고, 수상쩍으며, 어쩌면 괴상할지도 모를 의미까지도 포함하는 ‘이상하다.’ 그러니까 이 표현은 비교될 만한 일군의 것과 모르긴 몰라도 뭔가 꽤 ‘다르다’는 데 그 의미의 방점이 찍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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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영화를 평하는 수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많은 경우 또 하나의 말과 이어진다. ‘이상하다’에 짝패처럼 붙어 함께 오는 그것은 ‘사랑스럽다’가 아닐지. ‘이상하고 사랑스러운 미쓰 세기말’이라는 영미(이유영)의 캐릭터 카피만 해도 그렇다. 적어도 이때만큼은 이상함과 사랑스러움은 불화하지 않고 나란히 붙어 인물의 매력을 압축적으로 설명하는 주요한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통상 이상함과 사랑스러움 사이에는 행간의 의미가 있지 않았던가. 이를테면 ‘이상한데, 사랑스럽다’라거나 ‘이상하게도, 사랑스럽다’라거나 ‘이상해도, 사랑스럽다’와 같은 문장들일 것이다. 이상함과 사랑스러움 사이에 쉼표를 찍어 놓고 보니 그사이 생략된 것, 그 간극이 조금 더 선명하게 전해진다.

약간의 해석을 덧붙여 보자면, 이상함 때문에 어리둥절하거나 난감하지만, 바로 그 이상함 때문에 사랑이 샘솟는다거나, 이상하지만 그럼에도 받아들이게 되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이 사랑이 아니겠느냐는 정도가 아닐까. 이때의 사랑은 필시 이상함을 동반하며 발생하고 일어나거나, 이상해도 기어코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으로서 받아들이게 되는 무엇에 가까워 보인다. <세기말의 사랑>이 제목에서부터 드러내 놓고 그리고 싶은 건 다른 무엇도 아닌 사랑이 아니던가. 그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사랑스러움에 따라붙는 이상함부터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상함과 사랑스러움 사이, 그 둘의 조합과 조화에 ‘세기말의 사랑’이란 무엇일지 얼마간 가늠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상한가. 그 이상함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영화에서 직관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건 주요 캐릭터들이다. 유전 질환의 발현으로 얼굴 아래쪽이 마비된 유진(임선우)은 육체적 움직임과 이동에 결정적인 제약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육체의 조건이 그녀를 심리적으로 움츠러들게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얼마간은 그로 인해, 또 얼마간은 그럼에도, 또 얼마간은 그것과는 무관하게도 그녀는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지랄맞다’ 싶을 정도로 가탈스럽고, 날카로우며, 적나라하고, 극성스럽게 제 목소리를 낸다. 움직일 수 없는 몸과 대비돼 훨씬 더 긴요하고 날카로운 자기 수단이 되는 그녀의 입말은 특히나 인상적이다. 주류, 중심, 정상성이라 칭해지는 구분 바깥에 있는 인물들에게 종종 투사되곤 하는 연민과 비감 같은 건 되바라진 유진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심지어, 그런 유진이 예쁘다면? 사랑받는다면? 누군가의 질투를 불러일으킨다면? 혹 장애가 있는 여성은 뭔가를 할 수 있기보다는 없는 쪽에 가까울 것이라거나 사랑과 관심의 대상에 해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면, 이 영화는 그것을 단호하게 저버리며 시작한다. 그런 유진이 누군가에게는 낯설게, 또 누군가에게는 통쾌하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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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 ‘면상이 세기말처럼 혼란스럽다’고 해서 ‘세기말’이라는 멸칭이 따라붙은 영미가 있다. 알코올 중독이 의심되는 큰엄마를 오랫동안 돌봐왔고, 자신을 무시로 일관하는 사촌 오빠에게 돈까지 빌려줬고, 심지어 짝사랑하는 도영(노재원)의 공금횡령 사실을 알고도 모른척한 데 이어 그를 돕기까지 한다. 자처해 기구한 운명에 올라탄 그녀를 보며 누군가는 한심하고 무모한 인간의 전형이라 평가할 수도 있겠다. 영미는 그런 인간이다. 마음이 가는 쪽으로 움직이고 그 마음을 끝까지 다 쏟아내는 게 후회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저돌적 헌신이 엿보인다. 자칭, 타칭 ‘이상한 여자’ 영미는 유진의 그것과는 또 다른 자기 안의 힘을 지녔다.

<세기말의 사랑>은 서로 다른 듯한 두 여자에서 출발한다. 이때 ‘다르다’는 것은 단지 인물의 성격과 기질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인물들의 장신과 치장이라든지 영화의 미술과 소품의 문제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그보다 더 복잡하고 미묘하며 어쩌면 논쟁적이기까지 한 문제와 이어진다. 영미와 유진이 서로에게 느끼는 열등감과 질투심, 경계하는 마음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갔을 때 고려되는 요소들이다. 즉, 장애와 비장애, 여성의 외모, 호감과 비호감을 둘러싼 사회적 기준, 평가, 편견의 적용과 그 작동 말이다. 장애인이지만 예쁜 여자와 비장애인이지만 전혀 예쁘지 않은 여자. 누가 더 호감이고 비호감일까. 여성 캐릭터를 그릴 때 일부러라도 피하거나 에둘러 가거나 모른척하거나 아닌척하고 싶어 할 질문을 이 영화는 오히려 적나라하다 싶을 정도로 투명하게 드러내고 대립시켜 뒀다는 점에서 과감하다. <세기말의 사랑>이 불러일으키는 이상함에는 일종의 낯섦과 불편함이 있는데 그것은 영미와 유진의 이와 같은 복합적인 조건들을 영화가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발설하면서 만들어 내는 당혹스러움에서 오는 것 같다. 그녀들 앞에서 섣불리 어떤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주저하거나 조금 더 지켜보게 되는데 오히려 그럴 수 있음이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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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두 여자가 도영이라는 남자 때문에 만나게 된다. 사랑하는 한 남자를 두고 벌이는 두 여자의 경합일까. 그로 인한 세 사람 간의 어지러운 정분일까. 표면상으로는 얼마간 그런 뉘앙스를 풍기지만, 정작 영화는 여기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심드렁해 보이기까지 한다. 두 여자를 대면하게 만든 장본인인 도영은 영화 내내 뒤로 물러나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두 여자가 어째서 그를 사랑하게 됐는가, 그러니까 그의 치명적인 매력은 무엇인가에 관해 구체적으로 알 길이 없다. 도영과 삼각관계 같은 건 일종의 맥거핀처럼 보일 정도이고 영화가 주력하는 건 도영을 징검다리 삼아 만난 두 여자 영미와 유진이다. 이상한 방식으로 그녀들은 동거하고, 의도치 않게 서로의 저간 사정을 알게 되며, 각자의 필요로 서로에게 의탁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 펼쳐진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건, 두 여자가 꽤 닮았고 실은 같은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유형의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이 여자들은 하나 같이 제 주제를 넘어서서 무리하면서까지 도영을 구하고 싶어한다. 물론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자신은 자기 자신조차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런 자신이 누군가를 구하겠다고 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고 무모하고 미련한지를. 그럼에도 그녀들은 사랑에 열중한다. 치정의 치(癡)가 이 모든 것을 포괄한다는 것을 상기하면, <세기말의 사랑>이야말로 그 말의 깊이를 가늠하게 하는 진정한 치정일지도 모른다. 이때의 치정은 불순하고 불온한 감정의 난장이나 도덕극은 아니다. 그보다는 사랑 앞에서 순진무구하다 싶을 정도로 자기희생적 면모를 아낌없이 보여주는 두 여자의 순정 멜로에 가까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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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멜로드라마는 또 하나의 중요한 플롯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바로 돈이라는 문제다. <세기말의 사랑>은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으로 인물의 관계를 그려나간다. 그 이어짐을 만들어 내는 중요한 고리에 사랑만큼이나 중요한 게 돈이다. 유진과 영미가 사랑하고 보호하고 가까이 두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크고 작게,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녀들과 금전적으로, 경제적으로 맞물려 있다. 사랑과 돈, 거짓과 위장, 사기와 속임, 침묵과 비밀이 오고 가고, 극단적 경우 파산과 범법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 어지러움의 한가운데에 사랑이 있다. 설핏 필름 누아르의 외피를 두른 듯 보일 정도다. 잃을 것을 알면서도, 속는 줄 알면서도 구하고 싶은 사랑에 자신을 거는 건 전적으로 여자들이다. <세기말의 사랑>의 박력은 바로 이 여자들에게서 오며 사랑으로 돈을 넘어서 보겠다는 여자들의 야심에 이 영화의 낭만이 있다. 지구 종말론이 팽배하고 패배와 허무, 우울과 몽상의 감각이 지배적이던 세기말에 낭만주의적 사랑이 피어나는 건 전혀 어색하지 않다. 반면, 영화 속 남성들은 자신을 향한 누군가의 진심과 사태의 진의를 한참 뒤에나 파악하거나 끝끝내 알아채지 못한다.

다행스럽게도, 신기하게도 순애보의 주인공이 된 듯한 그녀들은 안쓰럽거나 멍청해 보이지 않는다. 그건 그녀들이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으며 비교적 자기 객관화에 능한 깨어 있는 인간들이기 때문이리라. 제 뜻에 따라 불구덩이에 뛰어들었으니 감당도 제 몫이며, 빌려준 돈뿐만 아니라 사과도 받아내야겠다 싶을 땐 치고받을 줄도 알며, 자신이 구질구질해지는 것만은 참을 수 없고, 사랑 앞에서 눈물 콧물 흘려가며 촌스러워지는 자신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주제넘지만, 주제를 아는 그녀들은 쉽사리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고, 누구를 원망하며 허송세월할 생각도 없으며, 연민의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이것은 두 여자 사이의 연대나 각성으로 가능했다기보다는 영미와 유진의 인간적인 면모 혹은 제 식의 품위로 보인다. 이 여자들, 그리고 이 영화가 이상하고도 사랑스러울 수 있다면, 그건 전적으로 여기에서 오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