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cover img

Reading

홍상수 감독 <여행자의 필요>
김성수 감독 <비트><태양은없다>

이대로 보내기 아쉬운 두 작품의 심층 평론

김소희, 구형준(영화평론가)
사진
(주)영화제작전원사, (주)싸이더스
새로운 매체로서의 배우를 위하여

홍상수 감독의 <여행자의 필요>

글 김소희(영화평론가)

홍상수 영화를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의 소요는 영화 비평 글쓰기를 결심한 이들에게 근원적인 두려움을 불러온다. 비평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어느 하나를 취하면서 다른 무언가에는 눈감는 일일 텐데, 무언가를 쥘 때마다 정작 중요한 대상을 놓친 것은 아닌지 필연적으로 의심하게 된다. 하나에 집중하다 보면 잠시 잊고 있던 무언가가 나타나 자신이 더 중요하다고 아우성친다. 나중의 것을 달래면서 먼저 것과 연결할 방도를 찾는 사이 어김없이 제 삼의 무언가가 나타나 애써 쌓은 것을 어그러뜨리기 일쑤다. 더군다나 붙잡은 하나를 명확히 파악하는 일조차 만만치 않다. 예를 들어 <여행자의 필요>에서 ‘시’에 관해 말한다면 시가 새겨진 돌을 생각할지, 시인을 생각할지, 번역을 생각할지, 관념으로서 시 자체를 생각할지, 아니면 하나의 덩어리로서 모든 것을 봐야 하는지, 그게 가능하긴 할지 난감해진다. 어느 하나를 맥거핀 삼아 밀쳐두면, 다른 어떤 것도 맥거핀이 될 수 있기에 무엇도 맥거핀이라 단언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영화를 복기하며 찬찬히 살피는 일을 반복하게 된다.

우리를 둘러싼 매체들

사소한 우회로에서 출발해 보고자 한다. 휴대전화와 스마트폰은 21세기를 배경으로 삼는 영화가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이다. 이러한 조건으로 인해 혹자는 기다림으로 요약될 멜로의 요소가 영화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고, 그 말은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 공교롭게도 작년에 공개된 최고의 멜로 영화로 꼽고 싶은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휴대전화가 없는 영화다. 주인공은 상대방에게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건네는데, 그 종이가 바람에 날려 유실되면서 멜로적 서스펜스가 발생한다. 현재의 매체를 삭제하고 거리감을 되살린 영화는 동시대와 과거가 혼재된 기이한 시공간을 창조한다.

<여행자의 필요>에서 이리스(이자벨 위페르)는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비평의 제재로 삼기에는 지극히 사소해 보인다. 휴대전화의 부재는 서사에서조차 이상하거나 불편한 일이 아니다. 물론 어떤 곤란은 휴대전화의 부재가 간접적으로 초래한 결과로 보인다. 이리스가 인국(하성국)과 함께 있을 때, 갑자기 인국의 모친 연희(조윤희)가 들이닥치면서 이리스는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온다. 휴대전화가 있다면 연락을 주고받으며 현재 상황을 간단히 공유할 수 있겠지만, 이리스는 다시 들어가지 못한 채 현관문 밖을 서성이며 귀를 대보거나,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냄새를 맡는다. 인국 역시 돌아오지 않는 이리스를 찾기 위해 집을 나서야만 한다.

image
image

휴대전화와는 대조적으로, 지금 활발하게 교류되는 것이 이상한 매체도 있다. 이리스는 가방에 카세트 플레이어를 가지고 다닌다. 한때 언어를 배우는 방법으로 카세트테이프 전집을 구입하는 것이 일반적인 시기가 있었지만, 음성 파일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된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리스는 테이프에 문장을 녹음해서 교환하는 방식을 고집한다. 그에게 불어를 배우는 인물들 역시 아무렇지 않게 테이프를 대한다. 반면 실제 녹음된 내용이 재생되는 장면은 없다. 테이프의 쓰임은 그것의 기능에 있다기보다 매체 자체를 보여주는 데 있는 것 같다.

테이프는 교환되는 과정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물질이지만, 재생할 도구가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반면 영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글자를 새긴 비석은 테이프와는 대조적인 매체다. 이송(김승윤)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진 마을의 머릿돌, 윤동주의 <서시>가 새겨진 시비, 윤동주의 <새로운 길>이 새겨진 도서관의 외벽 등은 매체와 그 내용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연결된 형태를 띤다. 그렇다고 그 자체로 완전한 매체로 추앙되는 것은 아니다. 시비를 바라보는 장면에 등장한 스마트폰은 비석이 이를 읽거나 보는 사람을 필요로 함을 보여준다.

이리스가 해순(권해효), 원주(이혜영)와 함께 윤동주의 <서시>가 새겨진 시비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이리스는 두 사람에게 시의 제목이 무슨 뜻인지를 묻고, 해순은 스마트폰으로 번역된 내용을 보여준다. 이리스와 도서관 근처에서 우연히 만난 란희(하진화)는 도서관 외벽에 새겨진 시를 궁금해하는 이리스에게 자신의 스마트폰을 통해 번역한 내용을 이리스에게 보여준다. 이리스는 란희의 요청에 따라 그 시를 불어로 번역해 들려주며 타인의 친절에 답한다. 스마트폰에 의한 번역은 바위 위에 고정되어 움직일 수 없는 글자를 움직이게 만드는 작업이다. 이동 가능한 도구로서 휴대전화의 기원에 걸맞은 쓰임새다. 테이프에 담긴 내용이 플레이어를 통해 재생되듯, 시비에 담긴 시는 휴대전화를 매개로 얽힌 사람들을 통해 다른 언어로, 일본 형무소에서 죽었다는 시인의 역사로, 영원히 젊은 얼굴로 기억되는 시인의 아름다움으로 풀이되고 재생된다.

image
아이리스, 이리스, 이자벨 위페르

이리스는 누구일까. 이 질문은 매체에 관한 질문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는 한국인에게 불어를 가르치는 개인 교사 일을 한다. 그가 한 달 전에 개발한 독특한 교수법은 곧 질문법이다. 이리스는 상대방이 무심결에 한 행위에서 스스로 무엇을 느꼈는지 반복해 질문하면서 상대의 내면 깊숙한 곳에 가닿고자 한다. 그 대화를 바탕으로 일인칭 형식의 짧은 문장을 즉석에서 만들어 인덱스카드에 적은 뒤 테이프와 함께 상대에게 전달한다. 학생은 일주일간 그 문장을 익힌 뒤 다시 만나 같은 방식으로 새로운 문장을 만드는 행위를 반복한다. 그의 교습법에 동의한다 해도, 이리스를 교사라거나 교육자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이리스의 교습법은 불과 1개월 전 그가 우연히 떠올린 것에 불과하며, 이전에는 누구를 가르치거나 교육법을 배운 경험이 없다. 관객이 마주하는 건 교육의 성과나 진위가 아니라 다만 누군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문장을 만들어 내는 이리스의 행위다.

이리스가 학생의 답변을 바탕으로 짓는 문장들은 차라리 한 편의 시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인상은 이리스의 낭독하는 순간 등장한 풍경 인서트숏을 통해 강화된다. 해순이 윤동주 시비 앞에 절하자, 이리스는 그런 해순을 보는 원주의 감정에 관해 묻는다. 원주는 해순에게서 아버지를 떠올리고, 집을 떠난 아버지와 끝내 화해하지 못했던 과거를 밝힌다. 이리스는 그 내용을 바탕으로 문장을 만든다. 이리스의 목소리로 문장이 들려올 때, 화면은 초록색으로 흔들리는 무성한 나뭇잎들을 화면 가득 비춘다. 그 장면은 서늘한 위로를 준다. 한 편의 시도 남기지 못하고 떠난 이들에게 그래도 사는 동안 아름다웠다면 괜찮다고 노래하는 시는 초록의 스크린을 마주하는 이들에게 가장 개인적이고도 내밀한 저마다의 말로 번역된다.

image
image

문장을 위한 가장 적절한 심상을 자극하는 초록색은 단지 자연물에 그치지 않고 영화 속에 반복해서 제시된다. 첫 장면에서 이리스는 이송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테이블에 놓인 모나미 볼펜에 연두색 테이프를 감는다. 이리스의 외출복은 초록색 카디건이고, 이리스가 인국의 집을 빠져나와 담배를 피던 건물 옥상은 온통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다. 여기에 인국의 집에 있던 초록색 전등과 연두색 커튼도 언급할 수 있겠다.

한편 유난히 인물의 이름이 생략되거나 지워진 영화 속에서 이리스의 이름이 불리던 순간은 또렷이 강조된다. 마치 천국의 음성처럼 외화면 상단에서 들려오는 원주의 목소리는 이리스를 ‘아이리스’라고 잘못 부르는데, 이는 ‘아이리스’라고 통용되는 조리개의 명칭을 떠올리게 한다. 이를 바탕으로 이리스의 존재와 정체성에 대해 인간/비인간의 맥락을 넘어 영화 매체를 대체하는 존재로까지 상상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녹색은 배경을 합성할 때 쓰이는 크로마키를 연상시킨다. 크로마키는 홍상수의 전작은 물론, 점점 단출해지는 현재의 영화 세계와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마치 크로마키로 촬영된 것 같다는 시각적 착각을 불러오는 장면이 있다. 이리스가 이송과 헤어져 뒷모습을 보이며 앞으로 걸어가는데, 유난히 쨍한 빛과 특유의 걸음걸이가 겹치면서 이리스가 실제의 길이 아닌 합성된 이미지를 향해 걸어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이자벨 위페르와 홍상수 감독이 처음으로 협업한 작품인 <다른 나라에서>에서도 이자벨 위페르의 걸음걸이는 인상적인 자국을 남긴 바 있다. 그의 걸음걸이는 카메라로부터 멀어지기를 지연하면서 카메라 밖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을 유예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번 작품에서 그는 모든 곳을 걸어서 이동하며, 때론 뒷모습을 보이며 카메라로부터 멀어지지만, 카메라에서 완전히 빠져나가지는 않는다. 공원에서 해순과 원주가 천천히 걸어가던 이리스가 증발하듯 사라졌음을 지적하는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한눈을 팔면서 이리스가 완전히 빠져나가는 순간을 생략한다. 이리스가 인국과 함께 사라지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그는 완전히 빠져나갔다기보다는 숲으로 몸을 숨기는 것처럼 보인다.

이리스는 걸음을 통해 배경과 대상 사이의 거리 감각을 자유자재로 늘이고 줄이는 존재처럼 보인다. 그 거리는 관객과의 심리적인 거리와도 무관하지 않다. 이리스가 혼자 밥을 먹다가 화면에는 잡히지 않은 누군가와 눈인사하거나, 해순에게 윙크하며 혼자 웃음을 터뜨릴 때, 윤동주 시인의 죽음을 기리며 시비에 절하는 해순 옆에서 마치 춤을 추듯 손가락을 움직이며 시비 쪽으로 가까이 다가갈 때의 그는 엉뚱하고 유머러스하다.

image

반면 인국과 연희가 이리스에 관해 대화를 나눌 때 등장한 인서트숏 속 이리스는 두려움을 불러올 정도로 낯설어 보인다. 절벽에 걸터앉은 이리스는 몸을 옆으로 비스듬히 기댔다가 아예 드러누워 버린다. 이것이 실제 이리스의 행위인지 누군가의 상상인지, 시를 위한 배경으로서의 인서트인지 모호하다. 이리스를 찾던 인국이 이리스와 똑같은 차림과 모양으로 벤치에 앉은 뒷모습의 피리 부는 여자를 지나칠 때, 이것이 과거의 재현인지, 인국의 현재 기억인지, 실제인지 허구인지 모호한 것과 유사하다.

인국이 이리스를 발견하는 장소는 인서트숏에 등장한 장소에서 좀 더 들어간 곳이다. 카메라는 눈을 감고 누운 이리스의 얼굴 앞에 초점이 맞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 놓여 있다. 확대된 존재는 차라리 클로즈업된 시의 형상처럼 느껴진다. 상상하건대 이리스, 이자벨 위페르, 혹은 배우라는 존재는 한 편의 시가 적힌 바위에 비견된다. 그는 자연물이자 인공물이다. 그의 존재는 명확하지만, 거리감을 조절하는 것만으로 얼마든지 신비롭게 흐려질 수 있다. 그는 단단하지만 시처럼 흐를 수 있다.

위태로운, 그래서 아름다운

김성수 감독의 <비트><태양은 없다>

글 구형준(영화평론가)

20세기로 돌아가며

지난 세기의 끝 무렵, 감독 김성수와 배우 정우성, 그리고 이정재를 어떤 궤도에 올려놓은 두 작품이 다시 극장 개봉했다. <비트>(1997)와 <태양은 없다>(1999)다. 비슷한 듯 다른 두 영화. 말하자면 오토바이와 육상의 영화라고 할까. 혹은 솔로와 듀오의 영화. 아니면 밤과 낮의 영화라고 해도 되겠다. 하여간 일탈과 방황이 하나의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시절의 애틋함과 메마름을 처연하게 그린 두 영화가 다시 우리 앞에 불려 왔다. 왜 지금 이 두 편일까. 물론 표면상으론 <서울의 봄>(2023)의 흥행이 새삼스레 김성수와 정우성이란 이름을 다시 주목하게 만들어 주었고, 그 결과 두 영화를 다시 우리 앞에 소환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서울의 봄>의 이태신(정우성)에게 감화된 2024년의 우리는 20년도 훌쩍 지난 1990년대의 정우성이 비틀대면서도 앞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그에 관해 말해보려 한다.

image
image
밤의 영화와 낮의 영화

잠깐 어떤 순간으로 가보자. 늦은 밤, 미묘하게 느긋하면서도 을씨년스러움이 서린 서울. ‘나에겐 꿈이 없었다'로 운을 떼며 밤거리를 휘젓는 맑고 깊은 눈의 고독한 남자가 있다. 그는 싸움과 만취를 번갈아 일삼다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밤늦게 입시학원을 나서는 연인을 오토바이로 데리러 간다. 수줍으면서도 기뻐하는 여자 친구를 뒤에 태운 채 시작된 한밤의 질주. 커다란 배기음. 아스라한 가로등의 노란 불빛. 아찔하고 아릿한 밤들. 하지만 반짝이는 만큼의 야속함이 뒤를 따른다. 둘의 끝은 정해져 있고, 연인은 애달프고도 서글픈 사정으로 인해 헤어진다. 그리고 전화기에 남아 있는 음성 메시지. 뒤늦은 타이밍. 뒤늦은 감정, 뒤늦은 말, 무수하게 수많은 뒤늦은 것들…

삼류 소설의 축약본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철 지난 로맨스 소설의 한 대목이 아니라 <비트>의 몇몇 장면을, 나아가 이 영화 전체를 강하게 감싸고 있는 정서를 나름의 언어로 느슨하게 풀어본 것이다. 물론 언어는 이미지와 다르다. 또 나는 딱히 그럴듯한 작가도 아니다. 당연히 위의 촌스럽고 구태의연한 문장들이 <비트>를 오롯이 대변하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 <비트>를 (다시)본 사람이라면 최소한 양자 사이에 특정한 감성이 공유되고 있음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20세기 말 무렵의 한국영화는 ‘낭만'이란 정서에 어떤 식으로든 도취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유명한 장면, 고속으로 오토바이를 타며 양손을 놓고 두 눈을 감는 민(정우성)에게 서려 있는 아련함과 아름다움에 달리 어떤 수식어를 덧붙일 수 있을까. 나는 의도적으로<비트>를 촌스럽다고 말하고, 또 삼류소설로 비유하며 글을 시작했지만, 이건 영화에 대한 사후적 폄하가 아니다. 그보다 스마트폰이 도래한 시대엔 도저히 체화할 수도, 느낄 수도 없는 특정한 시대적 감각과 정서에 대한 뒤늦은 질투를 에둘러 말하며 툴툴댄 것에 가깝다.

그러니까 <비트>는 1990년대라는 시간이 지닌 청춘의 어떤 단면, 예컨대 자아도취와 허황된 망상, 순진함과 순수함의 동거에 관해, 특히나 그것의 순간적인 반짝임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비트>가 그런 시절을 담은 밤의 영화라면, 2년 후 개봉한 <태양은 없다>는 같은 것을 다루는 낮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내리쬐는 햇살 아래 남루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지닌 두 남자가 압구정 여기저기를 누빈다. 그들은 사기를 치고, 경마를 하고, 연애를 했다가 헤어지고, 거들먹거리며 허풍을 떨고, 싸운다. 그러다 얻어맞거나 도망다니기도 한다. 때론 쏟아지는 비를 맞고, 또 심지어는 서로에게 사기를 치기도 한다.

image

얼핏 보면 유사한 청춘의 방황인 것 같지만 그럼에도 <태양의 없다>는 <비트>와 달리 낮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 우선 물리적으로 <태양은 없다>가 <비트>에 비해 낮 장면이 월등히 많긴 하지만, 단순히 그 때문에 <태양은 없다>가 낮의 영화라는 건 아니다. 그보다도 이 영화엔 <비트>에 없는 대책없는 낙관이 있기 때문이다. 도철(정우성)과 홍기(이정재)는 각자 복싱선수와 부동산 부자라는 꿈이 있다. 하지만 사실 주변인들과 관객 모두, 심지어 본인들조차 그 꿈이 실현 불가능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도철과 홍기는 그걸 알고도 자신들의 허황됨을 절대 놓지 않는다. 도철은 아무리 펀치 드렁크가 와도 다시 링에 올라서려하고, 홍기는 사채업자들에게 숱한 괴롭힘을 당하고도 언제 그랬냐는 듯 일확천금을 노리며 경마장에 간다. 그리고 둘은 또다시 술에 취하고 배회한다. 즉 <태양은 없다>엔 끈질길 정도로 무지막지한 낙관이 있고, 도철과 홍기 듀오는 모든 것에 실패한 뒤에도 기어이 바닷가에서 일출을 보며 그 낙관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이 낙관이 <태양은 없다>를 (제목과 반대로) 낮의 영화로 만들어 준다.

말하자면 <비트>와 <태양은 없다>는 세기말의 청춘에게 서려 있던 비관과 낙관, 비장함과 무모함, 그리고 무엇보다 낭만의 초상을 각각의 방식으로 그려낸 짝패 같은 영화다. 그 시절의 우리는 뭐가 그리 매사 심각하고 또 왜 그렇게 사소한 로맨틱에 취약했을까? 두 영화는 그 질문에 두 가지 얼굴로 답한다.

과거와 현재의 사이에서

<비트>를 좀 더 자세히 생각해 보자. 사실 2024년에 이 영화를 다시 보면 복잡미묘한 감흥이 든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간이 20년 넘게 흘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20년의 시차는 다소 애매하다. 20년 전이 그리 먼 과거가 아니기에 그렇다. 이 영화에 등장한 배우들은 대개 현재도 활동하고 있고, 그 속의 풍경과 지금의 현실 또한 얼마간 유지되고 이어져 있다. 그래서 <비트>는 동시대를 오롯이 표상하기엔 조금 오래됐지만, 그렇다고 우리와 완전히 떨어져 있지도 않은 모호한 시대에 걸쳐 있다. 그래서 미묘한 기분이다. 뭐랄까. 오래된 사진첩을 열었을 때 추억에 깃든 아련함이 풍기면서도, 동시에 (디지털이 아니라) 현실의 물질로 현상된 사진의 물성에서 오는 이물감 같은 것이 함께 다가오는 느낌. 그런 것이 이 영화에 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위태롭고도 찬란한 방황의 여정은 단순히 아름답지도, 그렇다고 지독하게 리얼하지도 않은 미묘함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현재의 우리는 이미 <아수라>(2016)와 <서울의 봄>의 정우성을 지나왔다. 현재의 정우성은 더 이상 단순한 미남 배우가 아니고, 방황과 청춘의 상징도 아니다. 그는 이제 배신과 암투와 비굴함의 동굴을 지나와 산전수전을 다 겪어 잔뼈 굵은 (미남) 아저씨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그는 여전히 미디어에서 우리에게 얼굴을 비춘다.

그런 상황에서 <비트> 속 아무것도 모르고, 한 치 앞도 계산하지 않은 채 무턱대고 치기 어리기만 한, 민의 얼굴을 보는 것에는 이 영화와 현재의 시차만큼 복잡함이 새겨져 있다. 나는 당연히 정우성이 아니지만 <비트>를 보고 있노라면 왠지 그 시절의 정우성에게서 지나 버린 나의 어떤 시절을 투사하고 싶게 만드는 힘이 이 영화에는 있다.

결국 <비트>는 뮤직비디오다운 시각적 과잉으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적인 과거 한구석을 정확히 자극하는 기이한 감수성을 지닌 영화가 되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이 영화를 다시 대면하면서 그 힘은 더 강해진 것 같다.

image
낙관의 힘

그렇다면 <태양은 없다>는 어떨까? 이 영화는 듀오의 영화이기에 <비트>처럼 어느 한 인물에게 강하게 이입되진 않는다. 그 대신 앞서 말한 것처럼 <태양은 없다>엔 대책 없는 낙관이 있고 또 그걸 기어코 설득하는 힘이 있다. 생각해 보면 도철과 홍기, 그러니까 정우성과 이정재는 <태양은 없다>를 통해 1990년대 이전까지 한국영화계에서 나타난 적 없는 청춘의 어떤 전형을 창조해 냈다. 이 듀오는 마냥 마초적이거나 강인하지도 않고, 딱히 정의롭지도 않다. 그렇다고 도드라지게 풋풋하거나 청초하지도 않으며, 조금 얄개같은 면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순수하진 않다. 그보다 이들은 어딘가 지독하게 삐뚤어져 있거나 마비되어 있으며 도착적인 면도 있고 도덕적으로 결여되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양은 없다>를 보고 이 비틀거리는 도철과 홍기가 반짝거리는 청춘이 아니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정말 독특한 듀오다. 이들은 그다지 건강하지 않은 출세욕이나 부에 집착하고 있으며, 심지어 매사 그 욕망을 성공시키지도 못하고 고꾸라지기 일쑤다. 이제껏 이렇게 불건전한 청춘의 얼굴이 있었을까? 하지만 결국 우리는 도철과 홍기에게 설득되고 만다. 우여곡절 끝에 나간 복싱시합에서 곤죽이 되도록 쥐어터진 도철과 도저히 수습하기 어려운 사고를 한가득 치고 돌아온 홍기가 자기 집도 아닌 미미(한고은)의 집 옥상에서 투닥대며 웃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내 그들의 대책 없는 낙천성에 마음을 나눠주게 된다. 이렇게 일그러진 인물들에게 기어코 감화되고 마는 것이 <태양은 없다>가 지닌 낙관의 힘이다.

그리고 다시 지금으로 돌아오며

돌아보면 이제와서 <비트>의 민이나 <태양은 없다>의 도철과 홍기를 마주하는 일은 마냥 아름답지도, 그렇다고 온전히 남일 같아서 시큰둥하지도 않은 양가성을 띠고 있는 것 같다. 한편으론 그들이 속한 1990년대의 아날로그에 모종의 노스탤지어를 느끼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그들이 아직 살아 보지 못한 21세기를 알고 있기에 씁쓰레한 기분이 함께 드는 것이다. 어쩌면 <비트>와 <태양은 없다> 이후의 김성수 감독도 비슷한 느낌을 지니고 있지 않았을까. 두 영화를 만든 이후, 결국 비루하고 풍파에 찌든 <아수라>의 한도경과 정의와 윤리의 영웅이지만 실패하고 마는 <서울의 봄> 속 이태신이 정우성이라는 한 배우의 얼굴을 빌리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쩔 수가 없다. 누구라도 과거는 미화하고 현재를 초라하게 여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뒤를 되돌아보기에 우리의 남루한 현재를 조금 더 긍정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비트>와 <태양은 없다>를 보며 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