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Cinema
예술영화의 대중화를 꿈꾸는 에무시네마
- 글
- 강보라(한국경제매거진 기자)
- 사진
- 에무시네마
Art Cinema
복합문화공간 에무에 들어서면 ‘숲속의 오솔길에서 에라스무스를 만나다’는 글귀와 마주하게 된다. 16세기 유럽 인문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 '에라스무스(ERASMUS)'에서 이름을 따온 에무(emu)에는 최고의 인문 예술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최근 다르덴 형제, 크리스티안 페촐트, 하마구치 류스케, 미야케 쇼 등 세계적 거장이 방문하며 예술영화관 맨 앞에 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감만족(五感滿足) 복합문화공간독립·예술영화 전용 상영관인 에무시네마는 도심 속 고궁인 경희궁 옆 언덕에 위치한다. 광화문역에서도 20분 넘게 걸어야 하는 위치임에도 MZ세대들의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이곳은 복합문화공간 형태로 지하 2층부터 4층 옥상까지 차례대로 스튜디오 에무(B2), 공연장 팡타개라지(B1), 카페 에무(1F), 에무시네마 1관(2F), 에무시네마 2관(3F), 가르강 루프탑(4F)이 자리하고 있다.
에무시네마는 한 건물에 여러 문화 공간이 입주해 오감을 만족하는 입체적인 방식의 영화제로 명성이 높다. 영화 관람 후 지하로 내려가 춤을 배우는 '씨네댄스', 야외 루프탑에서 관람하며 밤공기를 즐기는 ‘별빛영화제’ 등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별빛영화제에서는 맥주, 커피, 핫도그 등 스낵 옵션을 비롯해 누워서 관람할 수 있도록 빈백도 제공된다. 이런 야외 상영은 실내 생활이 주를 이뤘던 코로나19 상황에서 각광 받았고, 예매 오픈 이후 1분 내 매진 행렬을 이어갈 정도로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또 코로나19 기획 중 하나인 ‘격조콘’은 사람들이 같은 주파수를 맞춘 헤드폰을 쓰고 원하는 위치로 이동하며 공연을 관람하도록 만든 형태의 행사로 이름이 났다. 관객을 건물 뒤편의 경희궁 숲길로 유도하면서 에무시네마만의 공간을 십분 활용한 점이 인상 깊다. 이토록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는 원천은 복합문화공간 에무의 철학 때문이다. 엘리트주의에 저항한 철학자 에라스무스처럼 누구나 공평하고 자유롭게 예술을 접하고 즐길 공간을 만들자는 신념이 에무만의 행사를 가능하게 했다. 에무시네마는 누구나 예술을 즐길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일깨워 주고 있다.
관람문화 전반이 위축된 상황에서도 에무시네마는 팬데믹 이후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독립예술영화관 지원금 외에 공기관 지원이 전무한 상황이지만, 관객 수는 팬데믹 이전인 2019년 대비 2배가량이 증가했다. 눈길을 끄는 부분은 주요 관객층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저력은 에무시네마만의 톡톡 튀는 기획에서 나온다. 에무시네마에서는 개봉작 선정과 기획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시네마팀이 영화의 제반 사항을 관리한다. 시네마팀의 주축인 양인모 프로그래머는 세대와 계절감을 반영한 기획으로 대박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에무시네마의 대표 프로그램인 ‘별빛영화제’는 야외 상영으로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계절감이 가장 중요합니다. 지난해엔 <펀치 드렁크 러브><애프터썬><비포 선라이즈>가 영화제 대표작이었는데요. 루프탑에서 감상하면 영화의 물리적 경험이 가장 극대화되는 만큼 한 편, 한 편, 신중하게 선정하고 있습니다.” -양인모 프로그래머
관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은 <프랑스> 관객과의 대화(GV)에서 언급된 <비브르 사 비>를 놓치지 않고 특별상영으로 발전시켰다. 양인모 프로그래머는 행사를 통해 창작자와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독립영화 창작자와 관객 간 거리가 예전보다 멀어진 느낌입니다. 부산국제영화제에 가도 이전처럼 어울리는 느낌이 없는데, 에무시네마에서 희미해진 접점을 찾고 싶습니다.”
홍상수 감독도 매료된 공간의 매력에무시네마만의 독특한 매력은 홍상수 감독의 눈에도 포착됐다. 독립·예술영화를 향유 하기 좋은 최적의 장소로 알려지며 홍상수 감독의 스물네 번째 장편영화 <도망친 여자>의 촬영지로 선정된 것이다. 영화에서는 주인공 감희(김민희)가 등장하는 배경으로 시네마팀의 사무실과 카페 에무를 사용했다.
<도망친 여자>는 2020년 제70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 감독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홍상수 감독은 수상 후 기자회견에서 “우선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고, 장소를 정하고, 배우를 만나고, 촬영일을 정한다. 그리고 배우들과 장소에 가서 첫 장면 정도를 생각한다. 그때부터는 나 스스로를 믿어야 한다. 그렇게 2, 3일이면 전체적인 구조가 잡히고 그렇게 엔딩까지 간다”며 그만의 독특한 작업 방식을 전했다. 이처럼 촬영 장소를 이야기로 풀어내는 홍상수 감독의 스토리텔링을 생각하면 에무시네마는 촬영 장소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과거와 현재, 도시와 자연이 만나는 에무시네마는 현대인들에게 휴식과 영감을 주는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 당대의 권위와 모순을 날카롭고 유쾌한 언어로 풍자한 에라스무스의 철학이 영화 프로그램에도 이어져 시네필의 발길이 이어지는 것이다. 동시대와 호흡하며 새로운 신을 만들어 가는 에무시네마의 행보가 앞으로도 계속되길 바라본다.
Mini interview
에무시네마의 상영작 기준이 궁금합니다.
에무시네마 프로그램을 짤 때 가장 큰 고려 대상은 역시 관객입니다. 국내외 영화제에서 동시대 창작자들의 영화를 볼 때, 개봉작을 검토할 때 항상 떠올리는 가상의 관객이 있습니다. 약간은 추상적이면서 구체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데 조금씩 바뀌기도 합니다. 날씨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에릭 로메르가 해변에서, 숲에서 영화를 만들 때처럼 극장 프로그램도 늘 날씨와 밀접하게 연관합니다. 단순히 계절감이 맞는 영화가 아닌, 그 시기 그 공기의 무게감이 때마다 다릅니다. 영화관에 들어오면 휩싸이는 특유의 예감이 있는데, 그것이 약간의 긴장감을 동반한 '기대'이길 바랍니다.
주요 관객층이 알파세대와 Z세대인 10~20대라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젊은 세대에게 어필할 수 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앞서 말한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떠올리는 가상의 관객이 그 세대와 닮았고, 그 시기에 영화관에서 경험하는 '예감', '기대'의 진폭이 가장 크기도 합니다. 이들은 국내에 소개가 적었던 크리스티안 페촐트, 미야케 쇼 등 동시대 감독들에 근사한 환호를 보낼 줄 압니다. 그리고 늘 노트북 들고 카페를 찾는 창작자이기도 해서 장 뤽 고다르, 키에슬로프스키, 짐 자무시 감독과 거리낌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극장의 프로그램은 이들의 기대, 환호, 대화를 조명하고 영화 그리고 창작자들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할 때 더 많은 기회가 있는 것 같습니다.
팬데믹 이후 빠르게 흑자 전환에 성공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상황 타개를 위한 비결이 궁금합니다.
극장이 잘해서 그런 것보다는 필연적으로 도착하는 영화, 창작자들이 있고, 아직 관객들이 영화라는 공동의 경험을 귀중하게 생각하고 있어 가능한 것 같습니다. 팬데믹 상황에선 할 수 있는 것들이 제한적이라 상영 한 번, 행사 한 번 한 번이 어렵고 소중하게 다가왔습니다. 당시 루프탑 야외 상영을 매주 상영으로 확대하며 관객들이 호응해 줬는데, 그게 프로그램에 강한 동기 부여가 됐지요. <드라이브 마이 카>를 개봉하던 때가 팬데믹이 점차 희미해질 때였던 것 같습니다. 영화, 극장의 비전을 보여주는 이 영화가 상징적으로 다가옵니다. 팬데믹 이후 다르덴 형제, 하마구치 류스케 등 세계 거장 감독이 에무시네마에 다녀갔는데요. 극장이 곧 현대 예술영화의 현장이라고 생각하며 기획하고 있습니다.
영어 자막을 지원하는 유일한 극장인데요, 영어 자막을 지원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에무시네마는 영어 자막 상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지 연구합니다. 극장 주변엔 대사관들이 많이 있고, 외국인들의 영어 자막 문의는 늘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요 관객이며, 영어 자막은 한국영화의 관람 경험을 확대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기생충><미나리> 상영으로 영어자막 상영관으로 크게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는데요. 관심작이 개봉하는 날이면 카페부터 상영관까지 외국인들이 많습니다. 이들 커뮤니티에서 '영어 자막 틀어주는 극장'으로 소문이 나 있는 모양입니다. 인기작들이 있지만, 주로는 <너와 나><물 안에서><다섯 번째 흉추> 등 한국 독립영화를 중심으로 영어자막 상영을 하고 있으며, 현재는 비영어권의 해외 예술영화도 한영자막 상영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괴물><어파이어><조이랜드>의 한영자막 상영을 한 바 있으며 영어로 하는 씨네토크도 진행했습니다.
즐거운 영화 관람을 위해 숨겨놓은 디테일이 있다면?
에무시네마는 역에서 물리적인 거리가 있지만 오가는 길을 '영화의 길'이라 부를 만합니다. 물론 상영 시간에 늦으면 고역이지만 그 길에서 영화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극장 도착 전 언덕에서 기대를 품을 수 있고, 영화를 보고 내려가는 길에선 머릿속에서 영화가 다시 상영됩니다. 또 같이 온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도 있고, 늘 우연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관람 경험을 다채롭게 하기 위해선 매주 굿즈 이벤트를 챙기고, 영화와 어울리는 음료를 만드는 '시네마&카페'를 진행합니다. 물리적 매체가 적은 요즘이라 영화 볼 때 받는 포스터가 더 소중해지는 것 같습니다. 관객들이 집에 걸어놨다고 인증을 할 때가 많습니다. <패왕별희> 개봉 때 장국영이 자주 가던 카페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장국영 원앙차'는 상영이 끝난 후로도 찾는 관객이 많아 카페의 고정 메뉴가 되었습니다.
프로그래머로서 가장 보람을 느낀 순간은 언제였나요?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이 극장에 방문하던 날이 생각납니다. 프로그래머로 일을 시작하고 얼마 안 돼 개봉한 영화가 <트랜짓>이었는데요. 당시 페촐트는 거의 영화제를 통해서만 국내에 소개된 감독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약간 미지근했는데 행사만 하면 반응이 컸습니다. 당시 진행한 영화모임은 신청자가 많아 카페에서 공연장으로 내려와 진행해야 했고, 영화를 수입한 엠엔엠인터내셔널 이마붑 대표와의 씨네토크는 예상과 달리 매진, 영화에 대해 긴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운디네> 개봉, 이듬해 <피닉스> 개봉과 '페촐트 감독전'까지, 점차 이름은 알려졌지만 '우리끼리만'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파이어> 개봉과 함께 페촐트 감독이 이례적으로 한국, 그리고 에무시네마에 방문한다고 해서 관객들과 함께 좋아하고, 그가 도착한 날 관객들과 함께 웃으며 시간을 보내면서 생각한 것은 영화의 프로그램이, 이 일이 우리를 어딘가 멀리 데리고 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독립예술영화를 향유하고 누릴 때 어떤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극장에서 다른 관객들과 함께 영화를 보는 공동 경험은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오가는 길, 의자의 패브릭, 입김이 만져지는 것만 같은데요. 더구나 독립예술영화를 본다면 창작자가 한 컷 한 컷 세공한 장면 속에서 어떤 진동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우연과 상상> 영화 초반에 두 배우가 대화를 나누는 씬은 좁은 자동차에서 10분이나 지속되지만 사랑을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의 표정, 주고받는 기대와 농담이 섞이면서 온도가 말랑해집니다. 보는 사람마저 미소가 번지고, 반면에 자주 덜컹거리는 자동차에서 어떤 암시를 느끼는데요. 영화의 진동은 신체와 밀접하게 연관하고 그것은 극장에서 그리고 더 감각을 동원해야 하는 독립예술영화에서 가장 극적으로 기분 좋게 느낄 수 있습니다. 영화관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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