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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발전기금 부담금 폐지와
한국영화의 미래

박꽃(이투데이 기자)

정부가 영화표에 영화발전기금을 부과하던 현행 부담금 제도를 없애기로 했다. 연간 25조 원가량 걷혔던 법정부담금이 국민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지 검토하라는 윤석열 대통령 지시에 따라 정부가 전수조사에 나섰다는 발표 이후, 두 달 만에 빠르게 이뤄진 결정이다. 전체 91개 법정부담금 중 영화발전기금을 포함한 3분의 1가량의 부담금이 폐지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하반기 법 개정을 거쳐 2025년 1월 1일부터 전면 시행될 예정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부과금이 폐지된다고 영화발전기금까지 곧장 없어지는 건 아니라고 발표했다. “부과금은 없애도 정부의 다른 재원을 통해 영화발전기금은 유지한다”는 것이다. 국민과 기업의 부담을 줄이라는 정부 방침에 따라 영화표에 부과하던 3%의 부담금을 없애긴 했지만, 한국영화산업을 진흥하는 데 쓰이는 기금 자체는 어떤 방식으로든 유지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계에서는 구체적인 재원 마련 방안이 함께 언급되지 않는 현실에 우려를 표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다. 코로나19 이후 영화표 판매량이 급감하면서 이미 영화발전기금은 고갈 상태고, 그에 따라 한국영화 진흥 정책도 대폭 축소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적기에 새로운 재원이 확보되지 않을 경우 신진 창작자의 시장 진입 기회가 줄어들고 한국영화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영화표당 3% 부과한 영화발전기금
2007년 한시적 도입 뒤
두 차례 연장

법정부담금은 ‘부담금관리 기본법’에 따라 부과하는 돈이다. 모두가 내야 하는 세금과 달리 특정 사업과 이해관계가 있는 이들만 재정 책임을 진다. 산업이 부흥하면 그 수혜를 함께 입는 사람들이 있는 만큼, 그들에게 산업 발전을 위해 필요한 돈을 함께 부담하라는 취지이다. 2007년 법제화된 영화발전기금의 원리도 비슷했다. 한국영화가 발전하면 관객 역시 그 수혜를 입으니 부담금을 납부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관객은 영화라는 예술을 향유하는 동질성을 지닌 집단이고, 이들이 지불한 영화발전기금으로 경쟁력 있는 자국 영화가 제작되면 그 이득은 결국 영화 소비자인 관객에게 다시 돌아가 효용이 있다는 논리다.

영화발전기금 도입 배경엔 스크린쿼터제 축소라는 시대적 흐름이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영화의 위상이 지금만큼 높지 않았던 2006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기존 ‘146일 이상’이던 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가 ‘73일 이상’으로 준 것이다. 국내 영화인들은 당대 최고의 브랜드 가치를 지녔던 할리우드 영화를 상대로 최소한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강력한 지원책을 요구했고 이 같은 시대 분위기가 부담금 제도 신설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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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월 26일 ‘한미투자협정 저지와 스크린쿼터 지키기 영화인 대책위원회’가
주최한 기자회견에서 성명서를 발표하는 배우 안성기, 출처 한경DB

최초의 영화발전기금은 정부가 출연한 국고 2000억 원을 기초 기금으로 삼았다. 다만 이후 필요한 돈은 관객이 구매한 영화표 한 장에 3%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매년 추가 확보했다. 그러니 관객은 그동안 영화표 값이 1만 원일 때 300원, 1만 5000원일 때 450원가량을 자신의 주머니에서 떼어 한국영화산업 진흥을 위한 여러 정책에 투자해 온 것이다.

물론 부담금 도입에 반대하는 입장도 있었다. 어쩌다 영화 한 편을 본 관객의 경우 중장기적인 영화산업 진흥과 관련이 있는 집단으로 통칭할 수도 없을뿐더러, 특정 영화가 잘 팔린다고 해서 그 경제적 이득을 나눠 갖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발전기금 신설 당시 관련법인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이하 영비법)에 헌법소원이 제기된 이유이기도 하다.

논쟁은 당시 헌법재판소에 9명의 재판관 중 4명이 합헌 의견을, 5명이 위헌 의견을 내면서 일단락됐다. 위헌 의견이 한 명 더 많았지만 재판관의 3분의 2인 6인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만 헌법소원이 인용된다는 헌법 규정을 충족하지는 못해 최근까지 유지돼 왔다. 도입 초기 잡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발전기금은 입법부를 통해 그 필요성을 지속해서 인정받으며 생명력을 유지해 왔다. 한국영화산업을 경쟁력 있게 키우는 데 필수적인 기초 기금이라는 점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당초 2014년까지만 한시적으로 부과하기로 했던 영화발전기금은 영비법 개정을 통해 2014년과 2021년 두 차례 그 기한이 연장되었고, 2028년까지 부과될 예정이었다.

영화발전기금 주된 역할
‘신진 영화인 육성’
기회 독식 막고
장르 다양성 확보도

영화발전기금이 그간 실제로 어떻게 집행돼 왔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기금의 효용을 판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다. 시장에서 이미 성공한 극소수의 상업 영화인이 대부분의 투자금을 선점하는 현실에서, 영화발전기금은 가능성 있는 신진 영화인을 지원하고 장르 다양성의 주축이 되는 독립·예술·다큐멘터리 영화에 주력해 진흥시켜 왔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매년 상·하반기 전개해 온 ‘독립예술영화 제작 지원’ 정책이 대표적 사례다. 예술적 가능성을 지녔다고 평가할 만한 수준이거나 그럴 가능성이 엿보임에도 상업자본의 투자를 끌어내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영화를 대상으로 편당 3000만 원에서 1억 5000만 원의 제작비를 지원해 완성을 뒷받침했다.

영화 <벌새>,
출처 (주)엣나인필름
영화 <비밀의 언덕>,
출처 (주)엣나인필름
영화 <다음소희>,
출처 트윈플러스파트너스(주)

제69회 베를린영화제 제너레이션14+ 부문 대상 수상을 포함해 전 세계 60여 개 영화제의 러브콜을 받으며 한국 독립영화의 위상을 다시 쓴 김보라 감독의 <벌새>(2018), 제75회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폐막작으로 선정돼 전 세계 영화비평가들의 선택을 받은 정주리 감독의 <다음 소희>(2023), 제72회 베를린영화제 제너레이션K 부문에 초청돼 어린이 영화로서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받은 이지은 감독의 <비밀의 언덕>(2023) 등이 이 제작 지원을 거쳐 전 세계 관객과 만났다. <벌새>와 <비밀의 언덕>이 단편영화 연출로 영화 일을 시작한 김보라, 이지은 감독이 10여 년간 뼈를 깎는 노력 끝에 내놓은 데뷔작이라는 점, <다음 소희>가 <도희야>(2014) 이후 고군분투하던 정주리 감독이 무려 9년 만에 선보일 수 있었던 두 번째 장편영화라는 점을 고려하면 영화발전기금의 역할은 명확하게 드러난다. 제대로 된 연출 기회를 얻기 쉽지 않은 업계 여건에서 가능성을 지닌 신진 감독들이 창작 활동을 멈추지 않고 지속하도록 장려한 것이다.

작품이 사장되지 않고 시장으로 나가 그 확장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에 개봉 기회도 주선했다. 배우 윤여정의 출연으로 독립영화 팬들의 사랑을 받은 김초희 감독의 <찬실이는 복도 많지>(2020), 지난해 6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최근 다큐멘터리 시장에서는 이례적일 정도로 많은 관객의 발걸음을 끌어낸 황윤 감독의 다큐멘터리 <수라>(2023)가 영화진흥위원회의 ‘독립예술영화 개봉 지원’ 사업의 도움으로 관객 앞에 섰다.

백재호 한국독립영화협회 신임 이사장은 “지금 유명한 감독들도 처음에는 영화발전기금으로 지원받아 영화를 만들었고, 그 기금이 지원한 영화제에서 데뷔해 경력을 쌓아 국가가 바라는 인재상이 된 것”이라면서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면 지난 몇 년간 국가 위상을 드높여 준 K-컬처는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영화 발전의 근간이 되는 기금 부과금을 없애는 게 맞는 정책인지 의문스럽다”는 것이다.

“ 유명 감독들도 처음에는 영화발전기금으로 지원받아 영화를 만들었고,
그 기금이 지원한 영화제에서 데뷔해 경력을 쌓아 국가가 바라는 인재가 됐다."

영화발전기금을 대체할 재원이 적기에 마련되지 않으면 신규 인력의 한국영화산업 유입에도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백 이사장은 “영화를 좋아해서 공부한다고 해도 실제로 영화를 만들 기회가 있어야 업계 진출의 꿈을 꿔볼 수 있다”면서 “영화발전기금으로 이루어졌던 각종 지원은 신인들의 데뷔 무대로 기능했는데 이걸 줄인다는 건 다가올 미래를 내다보지 않는 정책”이라고 평가했다.

코로나19 이후 이미 급감한
영화발전기금
중소 제작·배급사
계획도 덩달아 위축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지난 3년간 영화발전기금의 몸집이 크게 줄어든 상태라는 점에서 현재 상황은 더욱 위태롭다. ‘영화진흥위원회 2023년 결산서’에 따르면 2019년 546억 원이었던 영화발전기금은 2020년 105억 원으로 폭락했다. 관객 수가 급감하면서 영화표 판매량도 극도로 쪼그라들었고 자연스럽게 영화발전기금도 5분의 1 토막 난 것이다. 팬데믹 기간 일부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지만, 그와 별개로 전체 시장은 회복하지 못하는 흐름이 지속되었다. 2021년<모가디슈>가 감염병 우려에도 300만 관객을 동원했고 2022년 <범죄도시2>가 팬데믹 이후 최초로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저력을 보여줬음에도 그해 영화발전기금은 각각 171억, 179억 원에 그쳤다.

지난해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울의 봄>이 1300만 명, <범죄도시3>가 1000만 명을 돌파하며 큰 호응을 받았지만 한 해간 모인 영화발전기금은 263억 원에 불과했다. 여전히 2019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규모이다. 팬데믹 이후 특별한 상업영화 1~2편만 예외적으로 생존했을 뿐 생태계 전반을 구성하는 다양한 규모와 장르의 작품은 대부분 고사한 셈이다.

영화발전기금이 줄었다는 건 그 기금을 근간으로 집행하는 영화진흥위원회 지원 정책도 줄어들게 된다는 걸 의미한다. ‘저장’하는 돈이 아니라 매년 가능성 있는 영화를 제작하고 개봉하는 데 ‘소진’해 온 성격이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기금이 바닥나 이미 정책 집행에 빨간불이 들어왔다는 사실도 그리 이상하지 않다. 올해 초 열린 '2024년도 영화진흥위원회 사업설명회'에서 박기용 전 영진위 위원장은 정부의 긴축 재정과 함께 올해 안에 준조세 성격의 영화 입장권 부과금 손질에 따른 영화발전기금 체계에 변화가 있을 것으로 전망했고, "2023년 말 기준 영화발전기금 잔액은 40억 원으로 영진위의 재원 다각화가 절실하다"고 언급했다.

지난해 114억 원을 편성했던 ‘독립예술영화 제작 지원’ 예산은 올해 70억 원으로 60% 넘게 삭감되었다. 영화 112편을 제작 지원한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그 절반도 안 되는 49편만 지원할 수 있다는 뜻이다. ‘독립예술영화 개봉 지원’도 지난해 23억 원(34편)에서 올해 15억 원(20편)으로 줄었다. 지역 영화 생태계 구축을 위해 강원, 광주, 부산 등의 영화단체를 지원하던 예산 12억 원은 완전히 폐기됐다. 뿐만 아니라 신인 영화감독, 제작자, 작가, 배우 등 영화인의 등용문으로 기능했던 영화제를 지원하던 금액 50억 원도 24억 원으로 반 토막 났다. 당장 부산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영화제에 배정될 예산이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난 5년간 <욕창>(2019)<비밀의 정원>(2021)<신세계로부터>(2023) 등 한국 독립영화를 꾸준히 배급해 온 백다빈 필름다빈 대표는 “1년에 3~4편 한국 독립영화를 개봉하던 회사들이 올해는 개봉작을 딱 1편으로 정했다고 한다”면서 “영화는 관객을 만나야 진정한 의미가 있는데 독립예술영화의 경우 개봉조차 하지 못한 상태에서 공중으로 날아가는 사례가 갈수록 많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현장 책임급 프로듀서가 모여 있는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PGK)의 걱정도 적지 않다. 이하영 PGK 신임 운영위원은 “영화발전기금은 제작자에게는 연구·개발(R&D) 비용이고 신규 진입자에게는 디딤돌”이라면서 “팬데믹 이후 관객 수, 한국영화 점유율, 영화인 복지 등이 모두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이전보다 지원이 더욱 필요한 상황인데, 이렇게 가다 보면 한국 영화는 (돈을 버는) 상업 부분만 남고 (다양성을 담당하는) 독립예술 부분은 낙후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우려를 표했다.

“대체 재원 마련 힘써 달라”
주문 나오지만
어디서,
얼마나…구체적 대책은 ‘안갯속’

기금 확보에 난항을 겪던 영화진흥위원회는 지난해 처음으로 국민체육진흥기금 300억 원과 복권기금 54억 원, 총 354억을 외부에서 긴급 수혈했다. 다만 어려운 사정을 읍소하며 일시적으로 전입해 온 돈인 만큼 지속가능성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따라붙은 상황이다. 복권기금의 경우 사용처가 장애인, 청소년 등 문화 소외계층을 위한 정책 집행에 한정돼 있어 산업 진흥을 위해 자유롭게 투자할 수 없다는 점도 한계로 꼽힌다.

당장 올해부터 절반가량 삭감된 지원금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이는 부산국제영화제의 남동철 수석 프로그래머는 “영화산업 기초를 다지는 데 필요한 돈은 결국 부과금이 아닌 다른 데서 가져와야 하는 상황인데 그 자금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투자를 비롯한 모든 것이 위축된 상황에서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를 비롯한 정책하는 사람들의 의지가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또 “영화산업 진흥은 국가의 기본적인 문화 정책과도 관련된 일이고 여기에는 반드시 재원이 필요하기 마련”이라고 강조하면서 ”지금은 완전히 논의가 중단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영화발전기금 납부를 진행하든, 국고에서 별도의 예산을 투입하든 구체적인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구체적이고 지속적인 영화발전기금 재원 확보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여러 영화인의 의견이 같았다. 이하영 운영위원도 “영국, 프랑스, 독일 등 많은 나라가 영화에 기금을 투입하는 건 영화에 공공재 성격이 있기 때문”이라면서 “OTT에 영화발전기금을 부과하든 문화예술진흥기금 등 다른 재원을 전입금 형태로 가져오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부과금 폐지가 영화계에 우려만 안기고 실상 관객에게도 별다른 경제적 이득이 되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는 취재 이후 다수 영화인 입에서 공통으로 나온 이야기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영화표 1만 5000원의 3%는 450원 정도가 될 텐데 과연 정부가 이 돈을 부과금으로 걷지 않는다고 해서 영화표 값이 낮아지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이게 정말로 국민을 위한 일인가 싶은 생각이 드는 게 솔직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업계에서 다양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영화발전기금 부과금 폐지 발표가 난 날 문체부는 곧장 보도자료를 내고, “재정 당국과 협의해 부담금 외 다른 재원을 통해 영화산업을 차질 없이 지원할 방침”이며, 대체 재원을 어디에서 얼마만큼 확보할지에 대한 계획을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K-콘텐츠 성장의 핵심인 영화의 재원 다각화를 위해 영화진흥위원회를 포함한 관계부처와 영화계가 모두 그 어느 때보다 함께 노력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