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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대신 크리에이터로 불러달라”

멀티플레이어를 꿈꾸는 배우들

곽명동 마이데일리 기자

최근 충무로에 제작과 감독을 겸하는 배우들이 늘고 있다. 주식회사 스태넘을 설립한 손석구는 ‘스낵무비’라는 네이밍으로 마케팅을 펼치며 13분짜리 단편영화 <밤낚시>를 극장에서 개봉해 호평을 받았다. 마동석은 <범죄도시> 2, 3, 4편을 차례로 ‘천만 영화’에 등극시키는 괴력을 발휘하고 좀 더 업그레이드된 5, 6, 7, 8편을 준비 중이다. 2019년 영화제작사 하드컷을 설립한 이제훈은 단편영화 연출에 이어 본격적인 상업영화 제작과 감독 준비에 한창이다. <헌트>로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되고 청룡영화상 신인감독상까지 거머쥔 이정재 역시 차기작 각본을 쓰고 있다.

손석구, 가장 신선한 제작자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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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손석구가 제작과 주연을 맡은 영화, <밤낚시>

배우들의 연출과 제작 도전이 최근 들어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2012~2013년에도 스타 배우가 감독, 제작, 시나리오 등 겸업에 나서 영화계의 주목을 끌었다. <오로라 공주>로 데뷔한 방은진은 2012년 10월 두 번째 장편영화 <용의자X>의 메가폰을 잡아 호평을 받았다. 박중훈은 2013년 10월 감독, 각본, 기획, 제작 등 1인 4역을 맡아 <톱스타>를 선보였다. 유지태 역시 2013년 6월 감독, 각본, 공동투자로 <마이 라띠마>를 만들었다. ‘배우는 연기만 잘하면 된다’라는 선입견이 깨어진 지 오래되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내가 만든다’라는 자세로, 배우들이 직접 글을 쓰고 연출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바뀌는 중이다. 이들은 ‘배우의 틀’에서 벗어나 각본, 연출, 제작 등 멀티플레이어가 되기를 꿈꾼다. 한마디로 ‘영화 만들기’ 전반에 관한, 더 폭넓은 경험을 즐기고 도전하는 배우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손석구는 올해 상반기 가장 신선한 제작자의 등장을 알렸다. 그가 제작과 주연을 맡은 <밤낚시>는 어두운 밤 전기차 충전소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다룬 휴머니즘 스릴러인데, 13분의 짧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1000원의 관람료로 무려 4만 관객을 동원했다. 관객들은 “짧지만 강렬하고 신박하다”, “몰입감 장난 아니다”, “장편으로 만들어 달라”, “이런 시도가 많아야 한국영화가 발전한다” 등의 호평을 보냈다.

원래 현대자동차는 손석구에게 연기뿐 아니라 연출까지 권유했다. 손석구가 2021년 단편영화 <재방송>을 연출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석구는 동갑내기 친구인 문병곤 감독을 추천했다. 문병곤 감독은 2013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세이프>로 단편 경쟁부문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실력파 연출가다. <밤낚시>는 처음엔 영화제 출품용으로 기획했던 작품이었지만, CGV의 지원이 더해져 극장 개봉으로 이어졌다. 황재현 CJ CGV 전략지원담당은 “현대차의 투자, 손석구에 대한 팬들의 높은 관심, 문병곤 감독의 뛰어난 연출력이 어우러진 영화적 완성도가 높아 개봉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밤낚시>는 숏폼 시대 흐름을 적극 반영한 작품이다. 1분 이내의 짧은 영상을 소비하는 데 익숙한 관객이 부담 없이 즐기도록 13분 이내의 영화로 만들었다. ‘열린 결말’에 호기심이 생긴 관객은 후속작을 원하고 있다. 문병곤 감독 역시 “주인공 캐릭터가 다른 사건으로 엮이는 후속작도 나올 수 있다”고 여지를 남겼다. <밤낚시>는 온라인에 친숙한 젊은 관객에게 신선한 극장 체험을 제공했다는 측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황재현 담당은 “<밤낚시>를 관람한 관객 10명 가운데 2명은 극장에서 다른 영화를 봤다”면서 “숏폼 무비가 관객을 오프라인으로 끌어들이는 역할까지 했다”고 밝혔다.

새로운 도전을 즐긴 손석구는 어떤 자세로 제작에 참여했을까? 그는 기자간담회에서 “제작자마다 성향이 다르다. 저를 어떤 제작자냐고 스스로 물어봤을 때 영화의 실무적인 것보다는 배우로서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창의적인 부분에 주력했다”고 말했다. 이어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싶었다”면서 “사운드믹싱, 편집, 홍보 등 모든 일에 아이디어를 냈다”고 전했다. 손석구는 자신의 정체성을 배우가 아니라 “크리에이터”라고 규정했다.

마동석, 글로벌 제작자이자 아이디어 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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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마동석이 4년의 준비 끝에 완성한 <범죄도시>.
이후 <범죄도시> 시리즈는 4편까지 제작됐다.

크리에이터의 정체성으로 배우 겸 제작자로서 성공 신화를 연 배우는 마동석이다. 실제 마동석은 손석구에게 “너는 나와 재질이 비슷하기 때문에 연기, 연출, 제작을 다 해라”라고 조언했다. 그는 그동안 충무로에서 볼 수 없었던 유형이다. 기획, 제작, 각본, 연기에서 모두 성공을 거뒀다. 직접 제작하기 때문에 수익성도 높다. 배우가 개런티를 받는 데 그친다면, 제작자는 지식재산권(IP)을 갖는다. 영화가 히트하면 더 높은 수익 창출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실제 <범죄도시2>는 할리우드 리메이크 버전을 제작 중이다. 미국 유명 프로듀서가 제작을 맡았다. 마동석도 공동 프로듀서로 나선다.3편은 해외 2곳, 4편도 독일에서 리메이크 제안이 왔다.

마동석이 마블 히어로 무비 <이터널스>에 출연한 데서 알 수 있듯, 할리우드는 마동석 액션에 매료되었다. 마동석은 복싱에 기반한 타격감 높은 액션을 구사한다. 이는 할리우드에서 흔치 않은 액션이다. 복싱선수가 꿈이었던 마동석은 다친 이후 배우로 전업했다. 단역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커리어를 쌓았다.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2007년 드라마 <히트>였다. 당시 현직 형사들과 친해져 자료를 수집했고, 이를 바탕으로 <범죄도시> 시리즈를 만들었다. 강윤성 감독과 함께 1편을 만드는 데만 4년이 걸렸다. 그는 4편까지 만드는 동안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마동석은 “내가 원안을 쓰고 작가에게 넘겨 시나리오를 쓰면 다시 받아서 각색했다. 다시 감독에게 갔다가 다시 받아 각색한 뒤 전체 제작진이 모여 첫 신부터 엔딩 신까지 신 바이 신으로 검토한다. 하루 12시간씩 열흘 정도 걸린다”고 설명했다.

그의 제작자로의 변신은 피와 땀, 영혼까지 갈아 넣은 결과물이다. 그가 단순한 성공을 바랐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다. 마동석은 “촬영이 끝나면 녹초가 되는데 샤워하고 일단 누워 태블릿PC를 켜고 시나리오를 쓴다. 영화와 복싱, 이 두 가지는 좋아하지 않으면 이렇게 못할 거 같다. 정말 좋아서 하는 거다. 저한테는 즐거운 일이 그거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마동석이 액션만 좋아하는 건 아니다. <범죄도시4>의 허명행 감독은 “마동석이 머리가 비상하고 아이디어가 많다”고 귀띔했다. 실제 그는 주현영이 캐스팅되어 관심을 끈 영화 <단골식당>의 기획 총괄을 맡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이 인정과 믿음을 바탕으로 함께 모여 돌파구를 찾아 나가는 따뜻하고 유쾌한 미스터리 추적극으로, 마동석은 아이템 선정, 시나리오 기획, 개발 및 제작까지 참여했다. 한마디로 ‘팔방미인’이다.

마동석에게 충무로는 좁다. 그의 무대는 이제 할리우드로 넓어졌다. <범죄도시> 시리즈 리메이크 외에도 영화 <언차티드> 등을 만든 제작사 아라드 프로덕션과 함께 영화
<헬 다이버> 제작과 주연을 맡았다. 제3차 세계대전 발생 200년 후를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 SF 액션물로, 마동석은 전설의 다이버 ‘자이버’를 연기한다. 이 밖에도 할리우드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훈, 영화와 극장에 올인한 제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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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이제훈이 연출한 <블루 해피니스>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고민을 마주한 채 평범한 삶을 꿈꾸는 취준생의 이야기다.

마동석이 손석구를 응원했다면, 손석구는 이제훈을 지지한다. 이들은 같은 배우 겸 제작자로 함께 호흡을 맞출 때도 있고, 고민을 나누기도 한다. 이제훈은 최근 <밤낚시>의 모더레이터를 맡았다. 앞서 손석구는 2021년 이제훈이 제작한 왓챠 오리지널 숏필름 프로젝트 <언프레임드>에 참여했다. <언프레임드>는 이제훈, 손석구, 박정민, 최희서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단편 옴니버스 프로젝트다.

이제훈이 연출한 <블루 해피니스>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고민을 마주한 채 평범한 삶을 꿈꾸는 취준생 찬영이 아무리 애써도 쉬이 잡히지 않는 행복을 좇아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손석구는 결혼식장에 동행하게 된 이모와 조카의 성가시고, 애틋한 하루를 담은 로드무비 <재방송>을 선보였다. 손석구는 씨네21과 인터뷰에서 “나는 영화 만드는 일에 그냥 올인했다”는 이제훈의 말을 거론하며 “나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제훈은 “연기를 시작한 이유도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였고 영화를 평생 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상상했을 때 영화 제작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제훈은 영화와 ‘극장’을 사랑한다. 유튜브 채널 <제훈씨네>를 만들어 전국의 독립영화관과 독립영화를 소개해 호평받고 있다. 이제훈은 최근 JTBC 뉴스룸에 출연해 “그 어느 때보다 가장 행복하고, 지친 어떤 일상에서도 극장에 가서 좋은 작품을 보면 에너지가 막 솟구쳐 오른다”면서 “개인적인 바람으로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 마음껏 볼 수 있는 극장’을 만들어보고 싶다, 그런 상상으로 지금 살고 있다”고 밝혔다. 그가 영화에 올인 하는 이유다.

이정재, 차기작 준비 중인 감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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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트>로 국내외 각종 영화상을 휩쓸어 감독으로도 역량을 인정받은 배우, 이정재

<오징어 게임>으로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이정재는 연기뿐 아니라 감독으로도 역량을 인정받았다. <헌트>는 근래 들어 가장 뛰어난 한국영화 장편 데뷔작 중 하나로, 국내외 각종 영화상을 휩쓸었다. 이정재는 각본, 연기, 연출, 제작에 이르기까지 1인 4역을 뛰어나게 소화해냈다. 2022년 <헌트> 개봉 이후 너무 힘들어 다시는 감독을 하지 않겠다고 손사래 쳤지만, 그는 최근 또 다른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이정재는 지난 7월 17일 아티스트 컴퍼니 유튜브에서 “감독 이정재의 차기작 언제쯤 만나볼 수 있나”라는 질문에 “내년에는 좀 촬영을 들어가고 싶어서 열심히 글을 쓰고 있다”고 답했다.

제작자 마고 로비, 할리우드의 새로운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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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마고 로비가 배우 겸 제작자로 참여한 영화, <바비>.
마고 로비는 2014년 제작사 럭키챕 엔터테인먼트(LuckyChap Entertainment)를 설립했다.

할리우드는 오래전부터 배우들이 제작자로 겸해 활동했다. 저 멀리 클린트 이스트우드부터 요즘의 조지 클루니, 브래드 피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등에 이르기까지 할리우드에서 톱배우들이 제작에 발휘하는 영향력은 크다. 할리우드는 전통적으로 스튜디오가 힘을 과시해왔다. 과거엔 배우를 직접 고용해서 물건 찍듯이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다 1980년대부터 배우의 파워가 커지면서 점차 공동제작의 형태를 띄기 시작했다. 최근에 가장 두드러진 성과를 낸 배우 겸 제작자는 영화 <바비>의 마고 로비다. 그는 2014년 현재 남편인 톰 애커리, 친구인 조시 맥나마라, 소피아 카와 함께 제작사 럭키챕 엔터테인먼트(LuckyChap Entertainment)를 설립했다.

럭키챕은 <아이, 토냐> <버즈 오브 프레이><프라미싱 영 우먼> 등을 제작해 호평을 받은 데 이어 <바비>로 대박을 터뜨렸다. 이 영화는 한국에선 외면 받았지만, 전 세계에서 14억 45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버라이어티는 “<바비>의 비평적, 상업적 성공은 원작을 선택하고 그레타 거윅과 노아 바움백에게 각본을 맡긴 럭키챕의 6년 간의 노력의 결정체”라고 평했다. 마고 로비는 이름만 올린 프로듀서가 아니다. 모든 이메일에 참조를 요청하고 촬영 일정과 예산 관리에 관여했다. 심지어 바비랜드 세트에 필요한 분홍색 페인트의 양을 모니터링하기도 했다. 그는 <바비>의 주연과 프로듀서를 겸했는데, 그레타 거윅 감독에게 “이제 저를 배우가 아니라 프로듀서로 봐주세요”라고 요청하며 언론 투어를 시작했다고 말한 바 있다. 자기 역할을 확실하게 구분하며 일한 것이다. 럭키챕에는 현재 13명의 직원이 모두 20개의 프로젝트를 개발 중이다. 마고 로비는 “사무실은 집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5분 거리에 있다”고 전했다. 그만큼 제작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콘텐츠 완성도를 책임지려는 자세로

그렇다면 한국의 배우 겸 제작자는 어느 나라와 유사할까? 인하대 연극영화과 노철환 교수는 “한국은 할리우드와 프랑스의 중간 단계에 있다”고 설명했다. 노철환 교수는 “할리우드는 스튜디오가 편집 권한을 갖고 있지만, 프랑스는 감독이 반드시 편집에 참여하는 구조”라면서 “감독의 작가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많은 배우가 감독이 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이어 “과거 박중훈, 방은진, 문소리 등이 프랑스 스타일에 가까웠다면, 최근엔 할리우드 스타일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치열하고 냉정한 영화 시장에서 배우의 이름값이 흥행을 완전히 보장하지 않는다. 완성도와 흥행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성공은 불가능하다. 마동석은 ‘엔터테이닝 무비’라는 확실한 목표를 세우고 <범죄도시> 시리즈를 제작해 관객의 호응을 얻었다. 이정재는 <헌트>로 첩보 스릴러 장르의 진수를 선사했다. 손석구는 단 13분 안에 흥미로운 볼거리를 담아냈다. 영화계 관계자는 “직접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배우 특혜는 거의 없다”면서 “일단 콘텐츠가 재밌어야 하는 것이 첫 번째 덕목이다”라고 강조했다.

시대가 변했다. 유튜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등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창의력을 발휘할 공간이 넓어졌다. 이러한 환경에서 관객에게 호감을 살 수 있는 아이디어와 재미를 갖춘 콘텐츠를 발굴하기 위한 배우들의 노력은 계속될 전망이다. 한 관계자는 마동석, 손석구, 이제훈에 대해 “배우이기도 하지만 콘텐츠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그리고 굉장히 호기심도 많고 부지런한 성향을 가진 것 같다”면서 “연기를 시작할 때부터 한 편의 콘텐츠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파트의 현장 팀과의 교류로 영감을 받고, 그것을 제작으로 구현하는 자질을 가졌다”고 전했다. 노철환 교수 역시 “배우가 책임감을 갖고 제작에 더 몰두하는 자세는 충무로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제 한국에서도 ‘배우 겸 제작자’ 혹은 ‘크리에이터’의 타이틀이 자연스러운 시대가 도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