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cover img

History Record

한풀이에서 사회고발,
한국 공포영화의 확장

김봉석(영화평론가)

History Record는 인물, 배경, 상황 등 다양한 키워드를 주제로 한국영화를 다각도로 조망해 보는 코너다.
이번에는 한의 정서를 중심으로 한국 공포영화의 계보를 살펴봤다.


이 한 몸 다 바쳐 한풀이

정창화의 <장화홍련전>(1956) 원작인 고전소설은 한국의 귀신과 한풀이의 원형이다. 계모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장화와 홍련 자매는 억울하게 죽는다. 한을 풀기 위해 원귀로 나타나지만, 겁 많고 놀란 관리들만 죽어 간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준 관리 덕에 화목한 가정을 망친 계모를 고발하고 한을 푼 장화, 홍련은 다시 태어나 행복하게 살아간다. 한국 공포영화의 고전에 속하는 권철휘의 <월하의 공동묘지>(1967)와 이혁수의 <여곡성>(1986)은 <장화홍련전>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월하의 공동묘지>는 억울하게 죽은 부인 월향이 귀신으로 돌아와 자신을 모략하고 후처가 된 난주에게 복수한다. <여곡성>은 양반의 아이를 임신해 살해당한 월아가 저주를 내려 아들들이 차례로 죽는 가문에 들어온 셋째 며느리의 이야기이다. <월하의 공동묘지>는 묘가 양쪽으로 열리면서 귀신이 나오는 장면, <여곡성>은 지렁이로 변한 국수를 먹는 장면과 불교의 힘으로 귀신과 싸우는 장면이 유명하다. 지금 보면 유치하고 웃음도 나오지만.

image
image
한국 공포영화의 고전으로 꼽히는
이용민 감독의 <살인마>, 김기영 감독의 <하녀>

<월하의 공동묘지>와 <여곡성>은 한국 공포영화의 대표작이지만 걸작으로 꼽기에는 아쉽다. 선악 구분이 명확하고 사적 원한을 푸는 방식이 너무나 전형적이기에 장르영화로서 충실한 정도이다. 귀신이 나오지 않지만 공포 스릴러 장르인 김기영의 <하녀>(1960)와 비교하면 한계가 명확하다. 부유한 가정에 입주한 하녀는 위로 올라가기를 원한다. <하녀>에서 계단 장면의 상징은 범죄나 원한이 단순한 개인의 일탈이나 악행을 넘어 사회적, 계급적 모순에서 시작됨을 드러내는 강력한 표현이다.

고영남의 <깊은 밤 갑자기>(1981)는 <하녀>의 영향을 받은 영화다. 곤충학자인 강 박사의 집에 미옥이 가정부로 들어온다. 아내인 선희는 미옥의 젊음에 질투심을 느낀다. <깊은 밤 갑자기>는 선희의 불안과 공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악녀가 욕망에 따라 악행을 하는 것을 넘어, 불안에 사로잡힌 부유층 사모님이 스스로 추락해 간다. 토속 신앙과 서구 문명의 대립도 한 몫 한다. 할리우드 공포영화의 클리셰를 따라가지만, <깊은 밤 갑자기>는 한국적인 공포영화의 총합판이라 할 만한 수작이다. 한국 최초의 좀비영화인 강범구의 <괴시>(1980)를 비롯해 1980년대 한국 공포영화는 이처럼 할리우드 호러의 공식을 베끼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image
한국형 서스펜스 호러 <깊은 밤 갑자기>

한국적 공포와 할리우드 호러를 융합하며 꾸준하게 공포영화를 만든 감독으로 <살인마>(1965)의 이용민이 있다. <살인마>는 시어머니와 친척 동생의 배신으로 비통한 죽음을 맞은 애자가 고양이 귀신이 되어 복수하는 이야기이다. 복수로 한을 푸는 전형적인 한국 귀신을 내세우지만 캐릭터가 개성적이며 감각적인 플롯과 장면들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남자관계가 복잡한 시어머니와 탐욕스러운 친척 동생의 조합도 신선하고, 일본과 유럽 공포영화의 흔적이 드러나는 장면들도 이색적이다. 한국 공포영화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손색없다. <살인마>는 1985년 <목없는 여살인마>(김영한 감독)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되었지만, 졸작이다.

이용민은 한국의 흡혈귀가 나오는 <악의 꽃>(1961)으로 첫 공포영화를 만들었고, <살인마> 이후 <목없는 미녀>(1966), 3D 공포영화 <악마와 미녀>(1969), 전통적인 호러 <사녀의 한>(1970), 매드 사이언티스트와 원혼을 뒤섞은 <공포의 이중인간>(1975)<흑귀>(1976)까지 7편의 공포영화를 만들었다. 공포영화만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공포영화를 일관되게 만든 최초의 감독이다. 또한 할리우드와 일본, 유럽 등 세계의 호러영화 흐름을 어느 정도 수용해 독특한 한국 공포영화를 만들어낸 성과도 있다.

대체로 20세기 한국의 공포영화는 인기 장르가 아니었다. 꾸준히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조잡한 특수효과와 부실한 캐릭터, 개연성 없는 스토리의 문제점은 언제나 존재했다. <엑소시스트>(1973)로 정점에 올랐던 할리우드의 호러영화는 1980년대 <할로윈>으로 시작된 하이틴 슬래셔 호러가 한동안 인기를 끈 후 침체기에 들어갔다. 한국 공포영화는 <구미호>(1994, 박헌수 감독) <피아노맨>(1996, 유상욱 감독)처럼 멜로, 코미디, 스릴러 등 타 장르와 복합된 공포물로 명맥을 이어 갔다.

사적 원한에서 사회적 공포로

1996년 웨스 크레이븐의 <스크림>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하이틴 호러는 다시 할리우드의 인기 장르가 되었다. 이 즈음 한국 공포영화의 맥을 다시 뛰게 한 영화는 박기형의 <여고괴담>(1998)이다. 또한 1980년대 말 PC통신이 보급되면서 1990년대 중반 이후 이우혁의 호러 판타지 <퇴마록>과 유일한의 <어느날 갑자기> 등의 공포 소설이 인기를 끌었다. PC통신을 중심으로, 비디오로 볼 수 있게 된 <깊은 밤 갑자기><여곡성><목없는 여살인마> 등 1980년대 한국 공포영화의 재발견도 이루어졌다. 한국적 공포의 원형이면서 새로운 스타일로 다듬어진 <여고괴담>이 나올 만한 시대적 상황이었다.

<여고괴담>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애증을 가지고 있는 ‘학교’라는 공간을 하이틴 호러의 주요 무대로 끌어들였다. 한국의 학교는 입시제도라는 폭력, 친구들 간의 육체적·정신적 폭력, 교사의 폭력 등 갖가지 폭력으로 얼룩져 있었다. 특히 1990년대까지는 물리적인 폭력이 난무한 공간이었다. <여고괴담>은 학교라는 폭력적 공간에 존재하는 아이들의 갈등과 분노를 예리하게 포착했다. 또한 ‘여고’라는 공간은 페티시적 분위기가 있었다. 교복을 입은 여고생이 한밤의 교사(校舍)에서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니는 광경은, 그 자체로 공포스러운 이미지였다. <여고괴담>은 일본의 J-호러를 이끈 <링>(1998)과 <주온>(2000) 시리즈에 뒤처지지 않았다. 시기도, 작품성도.

1편의 성공 이후 6편까지 제작된
<여고괴담> 시리즈, 출처 (주)씨네2000

<여고괴담>의 성공 이후, 한국 공포영화의 미래는 창창할 것만 같았다. 현실적인 두려움을 초자연적인 귀신이라는 존재를 통해 풀어낸 <여고괴담>은 이후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폭력’을 다룬 공포영화를 속속 끌어냈다. 김태용과 민규동의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1999)는 성적 소수자를 통해 우리 사회의 소통 단절을 이야기한다. 윤종찬의 <소름>(2001)은 오로지 성공만을 외치며 약자들을 짓밟은 한국 근대화 과정의 폭력성을 파고든다. 안병기의 <가위>(2000)와 <폰>(2002)은 공포영화 장르의 기본적인 쾌락을 잘 살린 영화이다.

김지운의 <장화, 홍련>(2003)은 한국의 전통적인 이야기를 변주하며 내면의 폭력을 응시하고, 처절한 아름다움으로 묘사한다. 관객 314만 명으로 공포영화 최다 관객 기록을 세운 <장화, 홍련>은 해외에서도 절찬을 받았다. 김성호의 <거울 속으로>(2003)는 거울이라는 기제를 통해 인간과 문명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야심적인 시도를 보여주었다. <장화, 홍련>과 <거울 속으로>는 각각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 되었다. 이수연의 <4인용 식탁>(2003)은 가족이라는 사적 공간에 내재하는 사회적 폭력을 심리적으로 잘 그려냈다.

<알포인트>(2004)는 <하얀 전쟁>의 시나리오를 썼던 공수창의 연출 데뷔작이다. 반세기 전 베트남전쟁의 혼령이 불러오는, 우리가 저지른 ‘역사적 폭력’의 공포를 다룬다. 우리의 내면을 돌아보고 우리가 사는 세계를 헤매던 한국의 공포영화는 <알포인트>를 통해 마침내 역사를 바라보게 됐다. <여고괴담>은 부드럽고 따뜻한, 곱고 착한 것들로만 가득해야 할 여고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괴담을 통해 우리를 지배하는 폭력을 들여다보게 했다. <알포인트>는 나아가 자유와 정의를 위해 전쟁에 뛰어들었다고 믿는 한국인의 오만과 착각을 돌아보게 한다. 어떤 전쟁도 행복할 수 없다. 전쟁은 폭력의 극단적 형태이고 개인에게 전쟁은 최악의 공포이다.

image
image
2000년대 초반을 대표하는 공포영화 <장화, 홍련>
<알포인트>, 출처 영화사청어람(주), (주)시네마서비스

한국의 공포영화는 이후에도 꾸준히 수작을 만들어냈다. 호러와 코미디를 절묘하게 엮은 신정원의 <시실리 2km>(2004), 한국형 페이크 다큐를 시도한 윤준형의 <목두기 비디오>(2005), 슬래셔 호러 장르를 묵직하게 파고든 임대웅의 <스승의 은혜>(2006), 괴담의 기묘한 세계를 탄탄하게 보여준 정식과 정범식의 <기담>(2007), 섬뜩한 공포를 한계까지 밀어붙인 김진원의 저예산 호러 <도살자>(2007), 절대적 믿음의 폭력을 비판하는 이용주의 <불신지옥>(2009), 극단적 폭력의 허무를 추구한 김지운의 <악마를 보았다>(2010), 아이돌 산업의 어둠을 기괴하게 포착한 김곡과 김선의 <화이트: 저주의 멜로디>(2011), ‘피리 부는 사나이’ 설화를 섬뜩하게 변주한 김광태의 <손님>(2015) 등. 정범식, 김곡, 김선 등이 참여한 옴니버스 공포 <무서운 이야기>(2012)도 3편까지 이어지며 비교적 무난한 완성도를 보였다. 하지만 관객이 만족하면서 작품성도 뛰어난 공포영화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일본 귀신이나 할리우드 유령을 적당히 베끼면서, 깜짝 놀라는 충격 효과에만 의존했던 공포영화들이 주류였다. 좋은 아이디어를 장르적으로 구현하지 못하고, 공포가 아닌 드라마로 빠지거나 이도 저도 아닌 영화로 되어 버린 경우도 많았다.

현대적 오컬트의 세계가 열린다

하지만 <곡성>(2016)과 <파묘>(2024)가 나왔다. 2015년 <검은 사제들>로 데뷔한 장재현은 연이어 <사바하>(2019)와 <파묘>로 한국을 대표하는 공포영화 감독으로 등극했다. 장재현은 전통적인 공포영화의 소재를 다루면서도 장르에 매몰되지 않고, 그렇다고 이야기만을 빌리는 것을 넘어 ‘오컬트’의 세계를 깊게 파고들어 관객을 끌어들인다. 나홍진의 <곡성>이 넘치는 에너지로 관객을 현혹해 불안과 두려움에 떨게 했다면, <파묘>는 전형적인 공포영화의 ‘파이널 걸’을 초월하는 활기찬 무당을 활용해 장르적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한국적 공포의 다양한 형태를 성공적으로 제시한 장재현의 영화는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image
image
오컬트 소재로 흥행에 성공한 <곡성>과 <파묘>,
출처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주)쇼박스

할리우드의 A24가 아리 에스터의 <유전>과 <미드소마>, 로버트 에거스의 <더 위치>, 타이 웨스트의 <엑스 X> 3부작 등 작품성과 상업성을 모두 만족시키는 호러영화로 성공을 거둔 사례는 이제 한국에서도 유효하다. 장재현의 성공적인 필모그래피는 한국의 공포영화가 새로운 길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적당히 무서운 장면 몇 개를 나열해 흥미를 끄는, 적당히 만들어낸 공포영화로 돈을 번다는 공식은 폐기되어야 한다. 개인적인 원한과 저주를 넘어 폭력적인 근대의 악몽을 성공적으로 퇴치한 한국 공포영화는 이제 모든 악마와 원귀를 동서의 엑소시즘과 굿판으로 장악할 수 있는 판으로 나아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