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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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 감독 <탈주>
손경원 감독 <양치기>

이대로 보내기 아쉬운 작품의 심층 평론

김효정,
박예지(영화평론가)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주)마노엔터테인먼트
반대를 꿈꾸는 고통에 대하여

이종필 감독의 <탈주>

글 김효정(영화평론가)

북한의 식량난 해결을 위해 남파한 공작부 요원, 동네 바보로 위장한 북의 혁명 전사, 남북 정상회담을 막고자 남으로 내려오는 북한 고위 관리. 북에서 버림받고 남으로 망명한 최정예 특수요원.

이상은 1990년대 말부터 2010년대까지 제작된 한국 상업영화 – <간첩 리철진>(장진, 1999)<은밀하게, 위대하게>(장철수, 2013)<강철비>(양우석, 2017)<용의자>(원신연, 2013)<공조>(김성훈, 2017) - 속 북한 캐릭터(주인공)들을 간단히 서술한 것이다. 1997년에 개봉한 <쉬리>(강제규) 이후로 대중문화에서, 특히 한국영화에서 북을 그리는, 혹은 북에서 온 인물을 그리는 방법에서 큰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절대 악에서 판타지로

한국영화에서 북이 (비교적 활발하게)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은 1960년대 국책영화, 반공영화에서부터다. 이런 영화들에서 북한 혹은 북한을 대표하는 인물(북한군, 간첩, 관리 등)이 절대 악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반공 정책에 발맞춰 한국영화는 북을 최대한 악마적이고 원시적인 캐릭터로 설정하고 응당한 결과를 맞게 해야 했다. 이만희 감독이 그의 1965년 작품인 <7인의 여포로>에서 북한군을 인간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고초를 당했다는 사건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역사적 일화다. 특히 박정희 정권 20여 년간 정부는 영화 검열 정책을 통해 한국영화가 북을 묘사하는 것, 혹은 언급하는 것을 강력하게 통제했다. 그러한 이유로 1970년대 말까지 말 그대로 한국영화에서 북의 존재는 (악으로 그려지거나, 정권이 만족스러워 할 만큼 정형화된 경우가 아니라면) 씨가 마르게 된다.

박정희 정권 이후 전두환 정권에서도 북에 관한 소재나 묘사는 금기 사항 중 하나였다. 북과 관련한, 혹은 반공법과 관련한 소재가 중요하게 언급이라도 되는 최초의 영화는 80년대 중반에 개봉된 <칠수와 만수>(박광수, 1988) 가 아닐까 싶다. 주인공 중 한 명인 만수는 아버지의 용공 행위로 인해 연좌제로 고통받는 인물이다. 영화는 그가 받았던 삶의 상처와 고초를 처연하고, 공감 어린 시선으로 그린다.

이후 앞서 언급한 <쉬리>를 거쳐 한국 영화 속에서 북의 묘사는 비교적 자유로워진다. 조금 더 우호적인 관계로 그려진다는 것이 더 구체적인 표현일 듯하다. 특히 2010년에 개봉한
<의형제>(장훈)는 제목 그대로 북한의 간첩과 남한의 요원이 오랜 기간에 걸쳐 마침내 ‘의형제’가 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로 한국영화사에 있어서는 최초로 북을 남과 비교적 동등한 시선에서 동등한 관계로 품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10년대에는 이러한 기류를 가진, 남북 버디 무비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였다. 이 영화들 속 북한 측 주인공의 공통점은 모두 (남한을 대표하는 주인공보다) 미남이라는 것이다(남한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에게는 심심한 사과를...). 정우성이 연기하는 고위 간부, 공유의 특수요원, 김수현의 공작원, 강동원의 간첩 캐릭터 등 이들은 모두 과거 한국영화 속 절대 악으로 그려졌던 북한군 또는 북한 요원의 전형에서 정반대의 전형, 다시 말해 인간적인 캐릭터를 넘어선 신비롭고 판타지적인 인물들로 그려진다. 이는 한편으로는 북한 재현의 진일보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진일보’가 과연 북한의 인물을 현실적이고도 객관적으로 그렸는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 탄탄한 몸을 가진 빼어난 미남들로 보여지는 북한 캐릭터는 철저하고 완벽하며 도덕적이면서도 이성적이다. 이들은 지나치게 이상화된 남성 캐릭터들로서, 여전히 그들로서 대표되는 북한의 이미지는 판타지를 바탕으로 한 ‘미지의 그곳’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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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욕망은 북에도 있다

최근 개봉한 이종필 감독의 <탈주>는 이러한 맥락에서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다. 영화는 지난 한국영화에서 자주 등장했던 남파된 북한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닌, 북에서 남으로 탈출하려는 북한군, 그리고 그를 쫓는 북한 보위부 간부를 중심으로 하는 활주극이다.

이야기는 휴전선 인근 북한 최전방 군부대를 배경으로 시작된다. 10년 만기 제대를 앞둔 중사 규남(이제훈)은 오랜 시간에 걸쳐 남한으로의 탈주를 준비 중이다. 모두가 잠든 밤, 그는 몰래 일어나 도주 루트를 연습하고, 지뢰가 있는 곳을 체크하며 얼마 남지 않은 탈출의 ‘그 날‘을 꿈꾼다. 그러나 규남의 계획을 알아챈 하급 병사 동혁(홍사빈)이 규남의 지도와 나침반을 훔쳐 먼저 탈주를 시도하고, 말리려던 규남까지 졸지에 탈주병으로 체포된다. 탈주병 조사를 위해 부대로 파견된 보위부 소좌 현상(구교환)은 어린 시절 알고 지내던 규남을 오히려 탈주병을 체포한 노력 영웅으로 추대한다. 그의 탈주 계획을 눈치 채고 있던 현상은 그의 발목을 잡아두고자 자신의 장인인 사단장의 직속보좌로 그를 눌러 앉힌다. 그러나 규남은 가지고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기어이 탈출을 감행하고, 현상은 자신의 모든 병력을 동원해 그를 추격한다.

<탈주>의 서사는 놀라울 정도로 단조롭다. 마치 북에서 남으로의 로드 무비를 보듯, 영화는 규남이 산과 강, 늪지대와 군부대를 거쳐 남한에 당도하는 그 순간까지를 비교적 평이하게 따라간다. 물론 그의 탈주가 수월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를 쫓는 특수부대 요원들, 그리고 중간에 마주하게 되는 이주민까지 그가 넘어야 할 장애물은 즐비하다. 다만 영화는 매번 그가 극복해야 하는 순간들에 정교한 에피소드를 빚어 넣지는 않는다. 따라서 규남의 탈주와 추격은 영화 속에서 비교적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반복되는 것이다. 규남이 궁극적으로 남한 땅에 손을 뻗어 탈주에 성공하게 되는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그다지 짜릿하지 않은 이유는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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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앞서 언급했던 북한 인물 캐릭터 재현에 있어서 <탈주>는 주목할 만한 지점들을 보여준다. 이는 특히 주인공 규남보다는 그를 쫓는 북한 보위부 간부 현상이라는 인물을 통해서다. 현상은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나 러시아 유학까지 다녀온 북한 버전의 금수저다. 그는 러시아에서 피아노를 전공했으나 (그리고 현재도 매우 재능이 있는 것으로 보이나) 집안과 국가의 강요로 인해 고위직 군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비슷한 수준의 집안과의 정략결혼을 통해 현재의 아내를 만나 곧 아이의 아빠가 될 예정이다. 흥미로운 것은 현상이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며 살아가고 있는 퀴어로 보여진다는 사실이다. 그는 아마도 러시아에서 만난 연인(송강)을 잊지 못하고 있지만 그가 이 사회에서 그의 인생을 위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주지해야 할 것은 <탈주>가 현상의 퀴어적 정체성을 ‘공표’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현상의 피아노 연주를 바라보는 연인의 시선, 그리고 몇 년이 흘러 과거 연인을 연회장에서 만났을 때 현상이 그를 혹은 서로를 탐색하는 표정 등으로 그의 퀴어성(queerness)을 어렵지 않게 가늠할 수 있다. 적어도 현상의 이러한 캐릭터성을 기반으로 한다면
<탈주>는 한국영화사에서 처음으로 북한 남성 캐릭터를 퀴어, 즉 이상화된 마초 남성(지난 한국영화 속 북한 남성 주인공 캐릭터는 모두 액션에 능하고 남성적인 육체가 강조된 인물들이었다)이 아닌 지극히 인간적이고 서정적이면서도 모던한 캐릭터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현상의 퀴어성은 성소수자를 나약하거나 희화적으로, 또는 미개하게 그리는 지난 한국영화(특히 상업영화)의 고정관념적 재현 모드 역시 전복하며 새로운 캐릭터성으로 기능한다. 그는 상류층 자제의 이기적임과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성 정체성과 그의 사회적 위치로 인해 원하는 삶을 포기해야 하는 지극히 평범한 (규남과 다르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의 퀴어성은 그를 남들과 다르게 하는 요인이 아니라 오히려 보편적이고 평범한 (자유롭지 않은 삶으로 똑같이 고통 받는) 인물로 보이게 한다.

영화의 말미에서 현상은 군사분계선을 눈앞에 두고 있는 규남을 향해 겨눈 총구를 내려놓는다. 그는 “네가 원한 것처럼 그곳에서 실패라도 맘껏 해보라”며 규남이 원하는 삶을 추구하게끔 그를 놓아주기로 한 것이다. 규남을 그렇게 보내고 현상은 부대로 복귀한다. 그리고 규남이 놓고 간 책(자신이 오래 전에 선물한 책)을 펼쳐보며 미소를 짓는다.

다소 진부한 엔딩이지만 확실한 것은 현상이 규남을 풀어주기로 한 이유가 규남이 원하는 것이 본인이 원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주어진 삶 밖에 살 수 없는 사회에서 그 이외, 혹은 그 반대를 꿈꾸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우울한 일인지 현상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가 추격을 멈추고 규남이 남으로 넘어가는 데 일조하는 것은 (간접적으로나마) 그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함이기도 하다.

<탈주>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제까지 제작되었던 남북 버디무디와는 다르게 배경과 중심인물이 모두 북한 캐릭터들이다. 그러나 이 둘의 캐릭터, 그리고 이들이 겪는 딜레마와 갈등은 꼭 북한이라서 일어나는 일들은 아니다. 젊은 세대가 사회적 제약과 출신의 한계로 이미 미래를 저당 잡힌 삶을 살고 있는 것은 북한이나 이곳이나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현상 캐릭터는 특히 이러한 의미에서 탈주를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규남보다도 더 공감이 가는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가 타고 난 사회적 태생으로 인해 자신의 진짜 정체성과 점점 더 멀어지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비운의 인물이지만 친구를 위해 희생을 감수할 줄 아는 인간적이고도 감성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탈주>는 남북 혹은 북한 캐릭터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영화 중 가장 도전적인 방식으로, 그러나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공감적인 시선으로 중심 캐릭터를 재현한 영화다. 스토리의 단조로움, 큰 감흥을 주지 않는 엔딩 등의 영화적 결함을 기꺼이 눈 감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러한 영화의 괄목할 만한 성취 때문이다.

괴물이 된 아이와 거부하는
어른의 히스테리

손경원 감독의 <양치기>

글 박예지(영화평론가)

<양치기>는 신경 쓰이는 반 학생에게 사소한 친절을 베풀었던 초등학교 담임교사가 도리어 그 아이의 거짓말로 인해 피해를 입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교사 수현(손수현)은 등굣길에 비를 맞고 있는 반 학생 요한(오한결)에게 우산을 씌워준다. 요한에게 베풀었던 이 작은 호의는 가정폭력과 학교폭력을 당하며 기댈 곳 없이 살던 요한이 수현에게 과도한 기대를 품는 계기가 되고, 수현이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돌아오게 된다.

돌봄의 대상이었던 아이가 오히려 나에게 해를 끼칠 때, 어른은 어떤 식으로 반응해야 하는가? 아이의 거짓말로 인해 교사의 지위가 위태로워지면서 수현은 예민해진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간단히 해결되리라 믿었던 문제는 무수한 소문과 오해를 낳으며 수현의 사회적 지위를 흔든다.

아이의 거짓말로 교사라는 직업에 위협이 생기면서 수현은 결혼 준비에도 위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사실 예비 신랑과의 관계를 처음 흔들게 된 것은 아이의 거짓말이 아니라 수현 본인의 거짓말이다. 수현은 자신의 사회적 이미지를 생각해 곧 결혼할 남자에게 자신의 가정사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수현과 예비 신랑의 관계는 이 거짓말이 들키게 되면서부터 삐그덕거리게 된다.

수현의 입장은 최근 문제가 되는 교사의 교권 문제를 컨텍스트로 불러온다. 아이의 인권 보호라는 명목으로 교육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고, 학부모의 고발이 있을 때 사건의 진위를 제대로 조사하기보다는 아이의 말과 학부모의 입장에 우선해 교사를 처벌하는 문제. 하지만 이 영화를 교권의 위기를 다룬 영화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요한은 단순히 거짓말을 한 문제아가 아니라 심각한 가정폭력을 당하고 있는, 보호가 필요한 아이다. 그리고 수현은 요한에게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 주었던 존재이자, 요한이 자신의 폭력 상황을 말하고 의지하고자 한 존재이다. 이런 관계성 속에서 요한의 돌발적 거짓말로 인한 갈등은 둘의 소통으로 풀어낼 여지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영화에는 둘 사이가 점차 가까워지고 서로 소통하며 서로를 이해하는 장면이 빠져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갑작스럽게 거리감을 좁히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문제적 아이에 대한 어른의 공포다.

이해하지 않으려는 태도의 공포

<양치기>의 장르는 드라마, 스릴러로 분류되어 있지만 사실 공포에 가깝다. <양치기>는 왜 어른과 아이의 관계를 공포영화의 문법으로 그리는가? 스릴러가 미스터리한 인물과 예상치 못한 전개로 긴장감과 긴박한 상황을 조성한다면, 공포영화는 철저히 타자화 된 어떤 존재나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는 두려움과 불안을 강조한다. <양치기>를 전반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정서는 바로 긴장감이 아니라 공포와 불안이다. 수현은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에 압도되어 신경이 날카로워진 채 불안에 떨고, 공포에 휩싸여 평소의 자신답지 않은 폭력적인 언사와 행동을 벌인다. 수현이 보이는 것은 미스터리한 존재에 대한 호기심과 그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안정을 위협하는 공포스러운 존재를 자신의 일상에서 몰아내기 위한 발버둥이다. 그리고 이런 수현의 반응으로 인해 요한은 철저히 타자화 된다.

하지만 <양치기>는 요한을 공포영화의 문법 아래에서 시종일관 타자화된 존재로만 그리지는 않는다. 공포영화에서 공포의 대상이 초반부터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제시되는 반면,
<양치기>에서는 요한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 상황을 자세히 보여주며 관객이 감정을 이입을 하게 한다. 요한이 본격적으로 타자화 되는 것은 그가 수현에 대한 거짓말을 하고, 그 뒤에도 나아지지 않은 가정폭력을 견디다 못해 집을 떠나면서부터이다. 그는 수현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해서 생활하며, 돈을 훔치고, 수현이 성생활을 할 때조차 바로 곁에서 그 소리를 듣는다. 요한은 더 이상 불쌍한 학대의 피해자가 아니라, 수현의 삶에 침입해 그녀의 일상을 훔쳐보고 위협하는 공포스러운 존재가 된다. 그리고 영화는 이후의 러닝타임 내내 요한에 의해 파괴되어 가는 자신의 삶 앞에서 무력함을 느끼는 수현의 불안을 그린다.

왜 <양치기>는 수현과 요한의 소통이나 관계를 포기하고 요한을 공포의 대상으로 그렸을까? 영화 초반에 요한에 대한 감정이입이 가능하도록 보여준 폭력 장면 때문에 감독의 이 선택은 더욱 의아해진다. 엄마의 성행위를 그대로 목격할 수밖에 없는 환경, 엄마와 같이 사는 남자가 자신을 때리는데도 보호해주지 않는 엄마와의 관계, 심지어 아이가 쓰레기봉투 안에 들어가 구타를 당하는 지나치게 폭력적인 장면까지 노골적으로 보여주며 영화는 요한이 피해자임을 강조한다.

의아한 건 암시만으로도 묘사할 수 있는 폭력 장면은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반면, 요한에게 이입하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요한의 심리상태 묘사는 통째로 생략한다는 것이다. 요한은 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고 집을 떠나 수현의 집에서 살 수밖에 없었는가? 이 부분을 이해하는 건 적극적인 관객의 상상력에 맡겨진다. 관객을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건 수현이 느끼는 공포와 신경이 과민해진 그녀의 히스테리이다.

그렇다면 폭력 장면은 혹시 관객이 요한의 상황에 이입하게 하기 위한 게 아니라 사실 요한을 더 공포스럽게 만들려는 장치가 아니었을까? 애정에 굶주린 아이가 나의 사소한 호의로 인해 나에게 과도한 집착을 하게 된다면? 가벼운 선의를 베푼 대상이 내 예상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고통 받고 있었다면? 집안에서 폭력을 당하다 결국 집을 뛰쳐나온 아이가 기댈 곳이 나밖에 없다면? 영화의 대부분은 사소한 호의가 과도한 책임감으로 돌아오는 상황에서 느껴지는 불편함과 그것이 내 일상에 지장을 줄 거라는 점에 대한 과도한 히스테리 반응으로 채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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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현은 이혼가정에서 자라나 간신히 얻은 자신의 정상성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곧 결혼할 남자친구 옆에서도 편안해 보이지 않고 계속 긴장하면서 자신을 숨긴다. 그녀에게 있어 요한은 자신의 정상성과 사회적 지위를 위협하고 자신의 삶에 침범하는 가난한 계급의 아이이다. 요한이 수현의 가슴을 만진 것은 영화 초반에 그가 어머니에게 안겨 가슴을 만진 장면과 연결된다. 그는 엄마에게 받지 못한 보호를 수현에게 받으려고 하다 수현을 엄마처럼 느껴 무의식적으로 그런 행동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수현은 그 행동에 대해 과도하게 반응한다. 남자아이의 갑작스러운 신체접촉이 위협적으로 느껴질 수는 있지만 키가 얼굴 아래로 오는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에게 보이는 반응으로는 과도한 감이 있으며, 요한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 조금도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이상한 것은 요한이 아니라 수현이다. 요한은 심각한 폭력 상황 안에서 학대받는 피해자이자 영악함을 갖고 있는 아이이지만 수현은 이런 아이의 상황을 인식하고 도움을 주려 하는 어른치고는 그 어떤 영화에 나왔던 인물보다 도덕심이 희박하고 방어적이며 이기적이다. 수현은 자기 집에 따라온 요한이 하고 싶다는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는다. 그녀가 요한에게 해 준 것은 우산을 빌려주고 학교폭력 상황을 의심해 편을 들어준 것뿐이다. 이후로 그녀는 더 이상 요한에게 마음을 내어주지 않고, 그 이상을 책임지려 하지도 않는다. 요한을 괴물로 만드는 것은 수현이다.

분리된 세계가 주는 공포

최근 아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들에서 이상한 경향이 보인다. 그건 아이와 어른의 세계 간의 소통 불가와 완전한 단절이다. <양치기>는 그중에서도 아이를 타자화하는 경향성이 가장 극단에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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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괴물>(2023)에서 시점의 전환으로 어른의 세계와 아이의 세계를 분리하고 마지막에 어른들의 시점이 결코 침입할 수 없는 아이들만의 세계를 제시했다면, <여기는 아미코>(2024)에서는 자폐 스펙트럼 선상에 있는 아이가 주변의 무관심 속에서 성장하지 못하고 자기 내면에 갇혀버린다. <막걸리가 알려줄 거야>(2024)에서는 어른들에게 질문하는 것을 포기하고 막걸리와 대화하다가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버리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 영화들은 공통적으로 내용으로나 미학적인 측면에서 아이들과의 소통을 포기하고 아이들의 세계를 그저 온전히 인정하는 데에서 이야기의 결말을 내버린다는 것이다.

<괴물>(2023)은 학교폭력 문제와 학부모의 고발에 의한 교사의 직권박탈을 다룬다는 점에서 <양치기>와 가장 많이 겹친다. <괴물>에서 어른의 세계와 아이의 세계는 시점의 전환으로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어른은 일탈적 행동을 하는 아이의 사정을 이해하려고 애쓰지만, 결코 그들의 세계에 다가갈 수 없고, 모호한 단서들만을 갖고 주변을 맴돌 뿐이다. 그럼에도 <괴물>은 마지막 시퀀스에서 아이들이 사실 괴물이 아니었음을, 그들만의 사정과 세계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양치기>는 끝까지 아이의 세계를 깊이 있게 묘사하지 않고 교사 수현의 시점 샷으로 영화를 끝낸다. 요한은 <괴물>의 주연들처럼 밝게 웃으며 뛰어 놀지만, 수현의 눈에 비친 그 모습은 여전히 불가해하다. 언제 또 자신에게,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지 알 수 없는 괴물 같은 모습이다.

<양치기>는 아이를 비추는 샷에서 시작해 아이의 모습으로 끝나지만, 그것은 항상 어른의 시점 샷이며 아이의 시점에서 보이는 세상에 대한 설명을 생략한다. 어른과 아이의 세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개별 샷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같은 샷에 담길 때조차 거리감이 있다. 이 거리감은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가? 왜 이제 어른은 더 이상 보호받지 못하고 학대 당하는 아이에게 <도희야>(2014)에서 영남(배두나)이 보여줬던 포용력과 용기를 발휘하지 못하는가? 학대를 당하는 상황에서 영악하게 비뚤어진 아이들은 언제나 있다. 달라진 것은 그들을 대하는 어른들과 카메라의 태도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게 가장 공포스럽게 느껴졌던 건 요한의 존재가 아니라 요한을 대하는 수현과 이 영화의 태도였다. 기댈 곳 없는 학대 가정의 아이를 철저하게 타자화해 자신의 삶을 방해하는 괴물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감각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걸까? 왜 최근의 한국-일본영화들에서 어른들은 아이에 대한 이해를 쉽게 포기하고 서로의 세계를 분리해 버리는가? 이 지점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