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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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Record

어린이, 골똘한 마음과 꿈틀대는 에너지

남다은(영화평론가)

History Record는 인물, 배경, 상황 등 다양한 키워드를 주제로 한국영화를
다각도로 조망해 보는 코너다.
이번엔 한국영화 속에서 ‘어린이’가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 들여다봤다.


‘어린이 영화’라는 용어는 왠지 개운하지 않다. 어린이를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어린이 영화’를 많이 겪어보지 못한 탓일까. 우리는 모두 한때 어린이였으므로 그 세계를 이미 다 안다고 가정하는 영화들의 안이함이 떠올라서일까. 가끔은 어린이들이 ‘어린이 영화’를 어떻게 정의할지 묻고 싶기도 하다. 알다시피 어린이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영화 중 정작 이들이 관람할 수 있는 작품은 드물다. 어린이 관객을 겨냥한 작품이라고 해도 영화가 상정한 ‘어린이 눈높이’가 오히려 상투와 편견을 무감하게 답습하는 경우도 많다. 어린이 감독이 어린이 배우들과 만든 영화라면 투박하더라도 진정한 ‘어린이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물론 평자로서 바라는 ‘어린이 영화’의 이상적인 상은 있다. 성인에게도 어린이에게도 각각의 방식으로, 혹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 발견의 희열을 주는 세계. 이를테면 어린이의 현실 감각을 확장하는 데 영감을 주는 영화라면 성인의 유년기 또한 깨워 그때는 볼 수 없었고, 잘 알지 못했던 작은 ‘나’를 뒤늦게 마주하게 할 것이다. 그 어린이가 어느 날 사라진 게 아니라, 나이 든 육체 어딘가에 내내 웅크려 있다는 사실, 실은 의식하지 못하는 새 불쑥 다른 얼굴로 튀어나오곤 한다는 사실, 그러므로 어린이는 누구에게나, 언제나, 현재라는 사실을 일깨울 것이다. 그런 영화를 기다린다.

안타깝게도 한국 영화사에서 이 소망을 실현한 사례를 찾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 어린이의 지평을 개척하기보다는, 한계 짓거나 수축함으로써 닫힌 서사 안에서 규격화된 감정을 찍어내는 작품들이 훨씬 많아 보인다. 그간 한국 영화들이 어린이들에게 허락한 화두는 다소 거칠게 구분해 두 부류다. 하나가 생존이라면 다른 하나는 동심이다. 우선 생존의 서사는 주로 유사한 토대에서 시작된다. 어린이들에게는 부모가 없거나, 있더라도 그 역할을 하지 않는다. 더러는 거주할 ‘집’조차 없다. 그리고 가난하다. 말하자면 이들은 선택의 여지 없이 삶의 기본 조건이 박탈된 자리에 내던져진 상태다. 결핍과 상실은 심리적인 차원만이 아닌, 물리적 차원의 문제가 되어 어린이들을 일단 벼랑 끝으로 내몬 다음, 묻는다. 자, 이 가여운 어린이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고난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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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용 감독의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

사회와 부모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아이들이 주인공이지만, 여기에 딱히 계급적 문제의식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보다 이 영화들의 초점은 빈곤한 현실에 무방비하게 내쳐진 어리고 약한 존재가 주어진 상황을 굳건히 받아들여 마침내 해결에 이르는 멜로드라마의 감흥이다. 극복의 서사가 이들의 목적지다. 실제 ‘소년소녀가장 수기’를 바탕으로 삼은 <구름은 흘러도>(1959, 유현목 감독)나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4, 김수용 감독)는 이 계열의 고전이라 할 만하다(삼십여 년이 지나 제작된 <혼자 도는 바람개비>(1991, 하명중 감독)도 수기 대상작이 원작이다). 부모는 부재하고 사회는 냉담하며 아이들이 생계를 떠맡아 동생들을 보살핀다는 설정이 이 영화들의 뼈대인데, 그들이 난망한 일상을 벗어나게 되는 계기 또한 공통된다. 그것은 아이들이 쓴 글이다. 그들의 일기가 책으로 출판되거나 세상의 주목을 받으면서 현실에도 빛이 들고 가족이 다시 화합하는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외부의 도움이 아닌 아이들의 지극히 사적인 언어가 가족을 구한 셈이지만, ‘소년소녀가장 수기’가 적극적으로 장려, 유통, 소비되던 시절의 한계가 영화들에도 적용된다. 사회구조의 책임과 어른의 몫을 고스란히 어린이 개인이 감당하게 만들고 그 부당한 희생을 숭고한 이야기로 각색해서 가난과 고통을 신파적 감상의 대상으로 미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근대적인 시선은 과거에 국한된 재현 방식만이 아니라, 오늘날 일련의 영화들이 하층계급 어린이들을 대하는 태도 저변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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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쓰백>, 출처 리틀빅픽쳐스

리얼리즘 서사에서 고립되고 방치된 어린이들이 부모와 사회의 짐을 짊어진다면, 장르물에서는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까. 정서적, 신체적으로 학대당하고 온갖 위험에 노출된 어린이의 위태로운 이미지는 필수적이다. 어린이들에게는 앞선 영화들에서 서로를 염려하던 형제자매조차 없다. 대신 투명 인간 취급을 받던 아이들의 외로움과 아픔을 단번에 알아채는 ‘아저씨’(<아저씨>, 2010, 이정범 감독)와 ‘미쓰백’(<미쓰백>, 2018, 이지원 감독)이 있다. 그들은 이 불쌍한 아이들에게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본다.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철저히 닫아버린 상처투성이 성인들이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아이들을 폭력에서 구한다. 이 영화들에서 어린이들은 삶에 체념한 성인들을 구원자의 위치로 변모시키고, 극악한 세계를 장르적으로 세공하기 위해 가장 헐벗고 연약한 이미지로 전시된다. 아이가 이야기의 중요한 동력으로 나오지만, 당연하게도 이것은 어린이 서사가 아니다.

생존이 절박한 어린이의 현실이 시대 불문하게 용이한 소재로 다뤄질 때, 다른 편에서는 동심의 세계가 그만큼이나 손쉽게 동원된다. 동심을 단순히 순진무구함과 동일시하는 영화들은 그 마음을 시험하기 위해, 혹은 증명하기 위해 타락한 세상, 나쁜 어른을 대립 구도에 두거나 가혹한 사건을 마련한다. 할머니와 어린 손자, 단 두 사람의 이야기만으로 극장가에 의외의 돌풍을 일으킨 <집으로>(2002, 이정향 감독)는 좀 다를까? 엄마 손에 이끌려 할머니 집에 맡겨진 아이는 도시와 달리 놀거리가 없는 시골에도, 대화가 안 되는 할머니에게도 짜증만 난다. 그런 소년이 결국 할머니와 깊은 정을 나누게 된다는 이야기의 흐름 자체는 평범하지만, 할머니가 말하지 못하고 글을 쓸 줄 모른다는 설정은 눈여겨 볼만하다. 할머니의 무한한 애정, 헌신, 선의 앞에서 언어는 소음에 불과한 것이다. 기존 영화가 어린이에게 부여하는 순수함은 여기서 할머니, 그리고 그가 사는 무공해 시골에 주어지며 신비화된다. <마음이>(2006, 박은형, 봉수 감독) 같은 영화에서 동물이 아이의 속성을 공유하거나 대리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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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집으로>, 출처 CJ ENM

동심은 무언가의 반대말이 아니다. 동심은 박제된 가치나 감정이 아니라, 기존의 감각과 생각의 틀을 꿈틀꿈틀하게 만드는 무형의 에너지다. 어떤 영화는 그 에너지로 성인이 강제한 금기를 유희로 전환하고야 만다. <막걸리가 알려줄거야>(2024, 김다민 감독)에서 어린이는 막걸리 통에서 들리는 발효 소리를 신기하고 은밀한 언어로 인지하며 골똘해진다. “한국어도 아니고 영어도 아니고 러시아어, 일본어도 아닌” 이것은 무엇일까. 어린이는 술을 마시지 않고도 알코올의 표면과 대화하는 방법을 터득해 낸다. 영화는 사교육에 시달리는 어린이의 현실을 섣불리 판단하거나 함부로 동정하지 않는다. 대신, 세파 한 가운데서도 엉뚱하고 유쾌한 활로를 찾아낸 동심의 상상력과 모험심을 힘껏 긍정하는 길을 택한다.

한국 영화사에서 동심의 최고봉이라면 <우리들>(2016, 윤가은 감독)의 한 대목을 이길 장면이 아직은 없는 것 같다. 소녀의 장난꾸러기 남동생은 친구와 어울리다가 늘 상처를 입고 집에 온다. 동생은 속상해하는 누나에게 자기도 맞서 때렸지만, 친구가 다시 때려서 같이 놀았다는 알쏭달쏭한 대답을 한다. 이에 누나가 “너 바보야? 너도 다시 때렸어야지!”라고 열을 내자, 동생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상한 반응이라는 듯 대꾸한다. “그러면 언제 놀아? 친구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또 때리고 또 때리고 그러면 언제 놀아. 난 놀고 싶은데.” 이 순간, 동심의 완벽한 승리를 감동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복수, 용서, 반성 따위의 거창한 동기가 아니라, 함께 놀기 위해 싸움을 그만두는 세계. 우리가 싸움을 멈춰야 할 다른 이유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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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들>과 <우리집>, 출처 (주)엣나인필름

그러나 어린이들의 난관이 동심으로 모두 해결되는 건 아니다. 어린이들은 분투한다. 질투, 욕망, 외로움, 배신감, 인정욕구가 어린이들을 자꾸 힘겹게 만든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이들은 적응하고 살아내기 위해, 아니, 조금 더 나아지고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들>에서 소녀는 친구 무리에 끼고 싶어서 곁눈질하며 최선을 다해 이리저리 움직여 보지만, 애타는 바람과 달리 자주 화면 안에 고독한 섬처럼 남겨지곤 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학교는 그저 귀엽게 ‘작은’ 사회생활이라는 말이 편히 나오지 않는다. 그뿐만일까. 애초 부모를 택할 수 없는 어린이들에게 이 어른들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무거운 숙제다. <우리집>(2019, 윤가은 감독) 속, 한 집은 부모가 이혼을 앞두고 있고, 다른 집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전자의 딸은 정다운 가족 풍경을 꿈꾸며 아무도 반기지 않는 저녁 식사를 차리고, 후자의 딸들은 집주인의 이사 요구에 맞서 버틴다. 소녀 셋이 낯선 곳, 우연히 발견한 텐트에 딱 붙어 누워 “여기가 우리 집이면 좋겠다”고 말하는 대목은 진짜 집의 소란함과 달리 더없이 평온하고 아름다워서 애잔하다. 영화는 결말에 이를 때까지도 이들 집에 별다른 변화의 가능성을 심어두지 않는다. 이제 어린이들이 그 현실을 수용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이것은 성장일까, 체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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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비밀의 언덕>, 출처 (주)엣나인필름

이 어린이들은 가족을 바꾸지 못할지라도 객관화하는 방법을 어렵게, 아주 조금씩 배워나갈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비밀의 언덕>(2023, 이지은 감독) 속 어린이는 시장에서 젓갈 가게를 운영하는 억척스러운 엄마, 백수 같은 아빠가 어찌나 부끄러운지 가짜 가족 앨범을 만들 정도다. 그에게 창작은 현실의 허물을 감추고 누가 봐도 그럴듯한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나타난 전학생이 집안 사정을 낱낱이 밝히는 글로 글짓기 대회에서 대상을 거머쥐며 알려준다. 솔직하게 쓰면 사람들은 상을 준다! 전학생에게 솔직한 글쓰기는 일종의 생존 전략이다. 결국 주인공 어린이가 공모전에 제출한 두 개의 글 중 누가 봐도 무리 없는 글은 입선작에, 가족에 대한 정직한 마음이 담긴 글은 대상작에 선정된다. 하지만 글이 신문에 공개된다는 사실을 안 어린이는 가족이 받게 될 상처를 걱정하며 대상을 포기하고 입선에 만족한다. 그리고 그 원고를 언덕에 묻는다. 어린이의 시점에서 글쓰기의 도덕성을 성찰하면서도 답을 열어두는 영화의 태도는 사려 깊다. 어린이가 가족관계 조사서 뒷면에 자유롭게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며 더없이 신나 하는 얼굴도 영화의 결말로서 미덥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와 <구름은 흘러도>의 어린이는 힘겨운 가정사를 고백하는 일기를 쓰고, 어른들은 가난한 어린이의 착한 마음에 감읍해 그 글을 세상에 공개하고, 영화는 행복한 결말에 도달한다. <비밀의 언덕>의 어린이는 다른 길을 간다. 그는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혼란한 내면을 서술한 뒤, 그 글을 세상에 보여주지 않기로 한다. 그 결정은 온전히 어린이의 것이다. 자신의 서사에 대한 주인의식과 자의식을 당당히 표명하는 어린이의 힘을 우리는 비로소 만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