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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대세 된 인기 IP 활용, 고민은 없을까

박꽃(이투데이 기자)

네이버웹툰이 지난 6월 미국 주식 시장 나스닥에 상장했다. 우리 기업이 나스닥에 상장하는 사례는 더 이상 이례적인 일은 아니지만, 국내 영화와 드라마의 주요 지식재산권(IP)으로 활용되어 온 웹툰 대다수를 보유한 네이버웹툰의 미국 주식 시장 진출은 영상 콘텐츠 업계에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간 국내 영상 콘텐츠의 ‘원재료’로 활용되어 온 웹툰이 이제는 전 세계 투자자의 돈이 모여드는 미국 주식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확보할 만큼 몸값을 높였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 자신감의 기저에는 최근 수 년 사이 국내 제작사는 물론이고 넷플릭스, 디즈니+ 등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까지 경쟁적으로 웹툰이라는 인기 IP를 영상 제작의 토대로 활용해 온 현상이 자리 잡고 있다.

맨땅서 창작보다 선호
넷플릭스가 지난해 공개한 오리지널 시리즈
14편 중 절반이 웹툰 원작이다.
<마스크걸><D.P. 2><스위트홈2>
출처 넷플릭스, 스튜디오드래곤

최근 몇 년 새 국내에서는 인기 웹툰을 IP 삼아 제작된 영화와 드라마가 물밀듯 공개되었고 흥행에도 끊임없이 성공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오리지널 드라마를 제작•공급하는 글로벌 OTT 사업자 넷플릭스의 선택만 봐도 흐름은 명확히 드러난다. 지난해 한국에서 공개한 오리지널 시리즈 14편 중 절반(<스위트홈2><마스크걸><이두나!><택배기사><사냥개들><D.P. 2><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이 웹툰 원작이다. 국내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디즈니+의 체면을 한 차례 세워준 드라마 <무빙>도 강풀 작가의 동명 웹툰이 원작이었다.

흐름은 올해도 이어지는 중이다. 넷플릭스가 상반기 공개한 <더 에이트 쇼><살인자ㅇ난감><닭강정><선산><기생수: 더 그레이>는 물론이고 하반기 선보일 <스위트홈3>도 웹툰에서 시작한 작품이다. 최근 제작을 확정한 연상호 감독의 스릴러 <계시록>(류준열, 신현빈 주연, <그래비피><로마>의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프로듀서로 참여)을 비롯해 <악연><캐셔로><돼지우리> 등 장르성 짙은 신작들의 출발점도 모두 같다. TV 드라마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변우석 신드롬’을 일으킬 만큼 큰 인기를 구가한 tvN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 역시 카카오 웹툰 <내일의 으뜸>을 원재료로 삼았다. 네이버 웹툰에 따르면 2024년 한 해 동안에만 웹툰을 토대로 총 30개의 작품이 영상화될 예정이다.

해외 시장으로 시선을 넓혀도 창작보다 원작을 선호하는 추세가 감지되는 건 마찬가지다. 전 세계적인 마니아층을 형성한 드니 빌뇌브 감독의 SF물 <듄> 시리즈는 프랭크 허버트 작가의 동명 인기 소설이 원작이고, 지난해 할리우드 박스오피스를 휩쓴 <바비> 역시 마텔사의 IP 바비를 활용한 실사 영화였다. 중국에서는 한국 웹툰 <문유>를 토대로 만든 <독행월구>가 2022년 자국 영화 시장 흥행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지난 3월 발간한 '2023 해외 콘텐츠 시장 분석'에 따르면 <독행월구>는 2022년 중국 영화 예매 사이트 마오옌(猫眼)에서 약 31억 위안(약 5860억 원)의 흥행 수입을 올려 그해 개봉 영화 중 2위에 올랐다. 워너브러더스가 판타지 영화사에 획을 그은 <해리 포터> 시리즈를 TV 시리즈로 제작하고, 글로벌 창작자인 박찬욱 감독 역시 미국 라이언스게이트 텔레비전과 함께 <올드보이> 드라마 버전을 제작하는 등 인기 IP를 활용한 영상화 작업의 추세는 한동안 지속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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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공개됐거나 제작 중인 작품들도 웹툰 기반이 대세다.
<기생수: 더 그레이> <스위트 홈 3> '출처 넷플릭스'
위험성 줄여 투자에 유리

왜 이런 흐름이 생긴 걸까. 업계에서 입을 모으는 이유는 ‘검증된 IP를 활용해 흥행 실패 확률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원작 판권을 구입하는 등 기존보다 비용이 더 들 수는 있지만, 그만큼 안정적인 결과를 담보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본격적으로 치열해진 글로벌 OTT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넷플릭스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실패 확률을 줄일 수 있는 콘텐츠를 동시다발적으로 여럿 확보하는 게 중요했고, 그 과정에서 이미 독자를 한 차례 사로잡은 흥행 웹툰이라는 인기 IP를 영상의 근간으로 활용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개별 제작사 입장에서도 인기 IP 활용은 매력적인 선택지다. 웹툰을 원작으로 다수의 흥행작을 선보인 제작자 A씨는 “원작 자체가 지닌 잠재 수요층, 충성 고객층을 영상으로 곧장 연결할 수 있기 때문에 마케팅 측면에서 용이하다”는 점을 주된 이유로 꼽았다.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원작을 좋아한 팬이 영상을 좋아하는 팬으로 쉽게 이어질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다”는 것이다. 상업영화의 경우 제작비와는 별개로 개봉 과정에서 작품을 알리기 위해 사용하는 마케팅 비용만 30억 원대에 이르는데, 이미 대중에게 인지도가 높은 원작에서 작업을 시작하면 출발 단계부터 홍보에 유리하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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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높은 원작을 활용해 출발 단계부터 인지도 확보한 넷플릭스 영화 <계시록>과 시리즈 <캐셔로> '출처 넷플릭스'

그는 “투자를 받아내는 게 더 용이하다는 점이 웹툰 원작 영상화를 선택하는 더 큰 이유가 될 수도 있다”는 말도 했다. “웹툰은 시나리오와 달리 이미지화된 자료이기 때문에 투자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는 설명이다. 글로 구성된 시나리오는 투자자가 ‘알아서’ 추후 영상화될 이미지를 상상해야 하는 어려움과 한계가 있는 반면, 그림으로 구성된 웹툰 원작을 참고 자료로 제공할 경우에는 그 상상력을 구체적으로 자극하는 것이 훨씬 쉽다는 얘기다. 이 경우 “투자자가 원작이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 기대할 만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직관적으로 알게 된다”는 게 핵심이다.

판권 경쟁, 원작자 협상은 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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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웹툰의 대표 인기작 IP <유미의 세포들>을 기반으로 한 동명의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와
3D 애니메이션 <유미의 세포들 더 무비>

인기 IP를 활용해 영상을 만드는 과정에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대표적인 어려움으로 손꼽히는 게 판권 구매 경쟁에 따른 비용 증가 추세다. 몸값이 높아진 웹툰이나 유명 소설의 영상화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업계의 눈치싸움이 치열해지는 것이다. 유명 작가의 경우 웹툰이 정식 연재되기도 전에 판권 판매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생기고, 이제 막 1화를 공개한 시점부터 영상화 권리에 관한 구매 문의가 쇄도하는 식이다. 대중에게 잘 알려진 <이태원 클라쓰>(2020) <스위트홈>시리즈(2020~) <유미의 세포들>(2021~2022) 등 앞서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작품 모두 웹툰 연재가 종료되기 전 영상화가 결정되었다.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영상 제작자가 수용해야 할 조건은 까다로워진다. A씨는 “과거에는 ‘3년 계약에 얼마’ 식으로 판권 계약을 맺고 영상화에 관한 모든 권한을 다 얻었다면 요즘에는 ‘백핸드’라고 불리는 ‘최종 수익의 몇 퍼센트’에 대한 조건까지 따라붙는다”면서 “’작품은 딱 한 편만 만들 수 있고 프랜차이즈 형식으로 진행할 때에는 금액이 배가된다’는 식의 상세 조건이 많아졌다”고 했다. 인기 IP를 보유한 원작자 입장에서도 영화화, 드라마화 계약에 대한 경험치가 누적되는 만큼 요구사항이 보다 많고 세심해졌다는 것이다. 영상 제작자로서는 작업 과정의 경제적 부담이 한층 배가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원작자와의 소통 문제에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성소수자 딸을 둔 어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장편소설을 원작 IP로 <딸에 대하여>(개봉 예정)를 만든 제정주 아토 프로듀서는 “<딸에 대하여>의 경우 다행히 그런 문제가 없었지만, 원작자가 개발된 시나리오를 보고 ‘내 원작을 훼손했다’며 반발하는 건 업계에 익히 존재하는 사례”라고 했다. “원작자가 영화화 계약을 맺은 뒤 드라마, 연극, 뮤지컬 계약을 별도로 맺는 경우도 많고 이미 투입한 기획 개발 비용과는 상관없이 계약을 연장해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인기 IP 소유자의 권한이 막강해질수록 제작 과정에서의 협상력은 떨어진다는 이야기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지옥>의 최규석 작가, <D.P.> 시리즈의 김보통 작가처럼 영상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원작자를 만나 작품을 흥행시키는 것 역시 ‘제작자의 운인 동시에 능력’으로 평가하는 분위기다.

제작 자율성 확보가 중요

일각에서는 인기 IP에 대한 의존이 커지고 원작자의 권한이 막강해지는 시장 분위기 안에서 영화와 드라마만의 개성이 발휘될 여지가 점차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일본영화 시장의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진격의 거인>(2017) <강철의 연금술사>(2017) 등 흥행과 비평 면에서 모두 성공한 만화 수작이 실사영화로 만들어졌지만 전방위적인 혹평을 면치 못했는데, 넷플릭스가 제작하고 존 조가 주연한 <카우보이 비밥>(2021)에 이르러서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위 분석에 따르면 일본 만화의 시장 규모는 2022년 51억6300만 달러(약 7조1200억 원)로 영화 시장의 16억900만 달러(약 2조3300억 원)보다 3배 이상 크다. 일본 시장의 경우 원작 만화에 대한 충성도 높은 팬이 많아 영상화 과정에서도 주요 장면이나 캐릭터의 대사 등이 1:1로 맞아떨어져야 한다는 이른바 ‘싱크로율’에 대한 요구가 큰 편이다. ‘움직임이 있는’ 영상으로 구현해야 하는 과정에서 적절한 각색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진격의 거인>의 경우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조사병단의 공중 레이어 액션을 무리하게 실사영화로 대칭시키는 과정에서 허술한 컴퓨터그래픽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는데, 단순히 원작 만화의 인기만으로 영상화를 결정할 것이 아니라 ‘영상으로 구현 가능한 특성을 지닌 작품인지’부터 제대로 판단해야 한다는 선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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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강정>은 박지독 작가의 웹툰을 원작으로 넷플릭스 시리즈로 제작됐다.

다만 취재 과정에 목소리를 들려준 현업 제작자 대부분은 국내 시장과 일본의 사례를 비교하는 건 적절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한국에서 인기 IP를 영상화하는 과정에서는 제작자가 원작을 얼마만큼 바꾸려고 하는지, 왜 그런 변화를 주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동의를 받는 일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얼마만큼의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지에 따라 최종적으로 억대를 넘나드는 판권 구매 결정이 이뤄진다는 의미다.

도리어 인기 IP를 활용한 좀비물, 크리처물 등이 평가할 만한 성공 사례를 남기면서 업계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는 입장도 있다. 웹툰 <신의 나라>를 원작으로 한 <킹덤>(2020)을 시작으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기존 공중파 방송이나 일반적인 영화 투자 논리만으로는 성사되지 않았을 장르와 수위의 작품이 다채롭게 영상화되었다는 것이다. 작업 과정이 고도화되면서 고민스러운 지점도 생겨난 건 분명하지만, 인기 IP를 활용하는 제작 방식으로 취할 수 있는 이점은 여전히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