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s or No
<더 에이트 쇼>
더 짜릿하고
철학적일 수 있었던 이야기
정지은 서울경제스타 기자와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 진행
- 김혜선(웹매거진 한국영화 편집장)
- 사진
- 임익순
Yes or No
정지은 서울경제스타 기자와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한재림 감독의 새로운 도전이라 할 넷플릭스 시리즈 <더 에이트 쇼>는 호불호가 크게 엇갈리는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총 8부작으로, 8명의 인물이 비밀스러운 공간에 갇힌다. 1층부터 8층까지 무작위로 배치된 그곳에서 인물들은 ‘시간이 쌓이면 돈을 버는’ 쇼에 참가하게 된다. 쇼는 그들에게 기회일까, 악몽일까? 8부의 에피소드를 통해 인물들의 욕망과 좌절, 처절한 몸부림을 따라간 이야기는 여러 논의를 촉발할 만한 요소가 많았다. 2023년 여름, 영화 <비상선언>으로 아픈 경험을 했던 한재림 감독이 배우들과 힘을 합해 여러모로 절치부심한 흔적도 역력하다. 하지만 그 노력에 비해 <더 에이트 쇼>의 면면은 충분히 얘기되지 못했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와 정지은 서울경제스타 기자가 <더 에이트 쇼>를 꼼꼼히 들여다보고, 함께 짚어볼 필요가 있는 논점들을 찾아냈다.
<더 에이트 쇼>를 완주하기 수월했는가. 그렇다면 혹은 아니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언론 시사 당시 초반부를 먼저 봤다. 이후 넷플릭스에서 정식으로 공개되었을 때 후반부를 봤는데, 완성도의 낙차가 크다고 느꼈다. 초반부를 끌어가는 힘이 강한 것에 비해 뒷부분이 다소 허무했다. 시청자들도 그런 이유에서 아쉬운 반응을 보였던 것 같다. 전반적으로 뒷심이 부족했다. 완주하기 쉽지 않았다.
<더 에이트 쇼>가 공개되자마자 봤다. 아무 배경 지식이나 정보 없이. 넷플릭스의 화제작 <오징어 게임>보다 차별화되고 철학적일 수 있는 요소가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의외의 따뜻함도 있었다. 장애인을 배려하고 공동체 정신에 따르는 설정들 말이다. 약간 밋밋한 면이 있었지만 나름대로 화기애애했다. 그런데 중후반으로 넘어가면서는 영미권 생존 게임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인간 본성을 자극하는 방식들이 드러나면서 새로움이 퇴색되었다. 오히려 후반에는 <오징어 게임>보다 후퇴했다. 배성우가 연기하는 ‘1층’의 사적 복수를 보는 것이 특히 쉽지 않았다.
<더 에이트 쇼>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건, 1층부터 8층까지 무작위로 만들어진 수직 계급 구조다.
이 구조에 대해서 할 말이 많겠다.
8층으로 나뉜 계급을 봤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인간 군상이 다양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캐스팅이나 캐릭터 설정에 대한 제약과 한계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가 있는 캐릭터를 하나 끼워 넣고, 인간의 본성을 군집했다고 보긴 어렵지 않을까.
실제론 다 비슷한 인물들이다. 윤고은 작가의 장편소설 <밤의 여행자들>를 보면, 재난 투어를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행사에서 재난으로 폐허가 된 곳에 사람들을 데려가고, 관광객들이 그곳의 불행을 보면서 난 행복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주는 투어 프로그램에 대한 얘기다. <더 에이트 쇼>를 보는 느낌이 딱 그랬다. 가장 강력한 빌런은 나라는 느낌. <더 에이트 쇼>의 수직 계급에서 가장 위에 있는 사람은 이 쇼를 소파에 누워서 에어컨 쐬면서 편하게 보고 있는 나였다. 그것이 너무 슬펐다.
하층에 떨어진 사람들만 모아놓은 것이 불편함을 줬던 것 같다. 시청자가 감정 이입을 할 수 있는 대상이 나와야 하는데, 1층부터 8층까지에서 감정 이입을 할 수 있는 캐릭터가 많이 없다. 류준열의 ‘3층’에 이입하기에는 캐릭터의 폭이 좁다. <오징어 게임>과 비교하자면 그 안에는 박해수가 연기하는 상우라는 인물이 있다. 상우는 최상위 대학을 나와서 최고 직장에 다녔는데 투자에 실패해서 절벽에 몰리는 상황이었다. 약간의 여유가 있었던 계층의 시청자는 충분히 감정 이입을 할 부분이 있었다. 그만큼 상우는 메인 캐릭터로서 대표성이 있었다. <더 에이트 쇼>는 그런 부분이 약했다. 예를 들어 ‘3층’과 같은 처지의 시청자가 이 쇼를 본다고 생각해보자. 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의 규모가 굉장히 좁아진다. 직업적 특성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확실히 각 층 캐릭터들의 대표성에 문제가 있다.
계급성을 통해 뭔가 이야기하려는 시도는 인정한다. 다만 위아래가 바뀌었어야 한다. 상층에 있던 사람이 1층에도 가보고, <오징어 게임>의 상우 같은 인물이 1층에 있었어야 한다. 랜덤으로 층이 선택되었을 텐데도 장애가 있는 ‘1층’이 왜 하필 1층인 것인가. 우리 사회를 더 색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고, 상류층도 밑바닥으로 될 수 있다는 사회적 메시지도 충분히 전할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전형 아닌 전형의 스타일로 가 버려서 흥미가 반감되었다.
1층부터 8층 사람들 사이에는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등장한다. 특히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는 방식이 눈에 띈다.
벤저민 프랭클린이 얘기했듯이 ‘시간은 돈’이다. 시간에 대한 부분이 <더 에이트 쇼>를 계속 보게 만든 지점이다. 특히 시간을 설정해주고, 그 시간의 연장 여부에 따라 받을 수 있는 돈의 액수가 숫자로 표기되는 장면. 시각적으로 매우 자극적이지만 함의하는 것도 많다. 진정한 부자는 시간을 지배하는 자라는 금언이 있지 않나. 그런데 극중의 쇼에 참여하는 8명은 돈도 없고 시간도 없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설정한 상황은 아니지만, 시간을 연장해야만 돈이 계속 주어진다. 그것이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우리는 모두 노동을 한다. 그중에는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을 하거나 다수가 원하지 않는 분야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결국에는 누군가 만들어준 틀 안에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 <더 에이트 쇼>의 시간 설정이다. ‘갑’의 돈을 더 받기 위해 시간을 연장하려고 별짓을 다 해야 하는 ‘을’, 즉 계약 관계에 있는 노동자들을 적절하게 표현했다. 이것은 확실히 <오징어 게임>보다 진일보한 부분이다. <오징어 게임>은 굉장히 단순했다. 상금을 두고 벌이는 일종의 경쟁 레이스였으니까. <더 에이트 쇼>는 설정 자체가 굉장히 신선했고, 이것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 보는 동안 궁금했다.
매력적인 설정이며, 철학적인 전제다. 하지만 그 매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각색에 한계가 있지 않았나 싶다. 더 전략적으로 갈 수 있었다. 시간을 기능으로, 일종의 규칙으로 이용한다면 각 층의 캐릭터들이 몰래 다른 층의 방에 들어간다거나 하는 식으로 규칙을 깨는 여러 생각을 할 수 있을 텐데 전혀 시도하지 않았다. 심지어 중후반부터는 각 캐릭터의 전사에 맞지 않고 이해하기 힘든 선택들을 하기 시작한다. 개연성이 떨어졌다.
<더 에이트 쇼>의 시간은 돈이 없고 기회가 없는 사람들에게 생기는 ‘시급의 격차’를 보여주기도 한다. 계급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는 독특한데.
장점과 단점이 교차한다. 1층부터 8층까지의 자리가 정해져 있다. 인물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행동하지만 이 위치는 누군가에 의해 구획된 것이다. 내가 내 선택으로 어떤 행위를 하고는 있지만 내가 어떤 가정에 태어난 것이 내 선택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듯이, <더 에이트 쇼>의 시간 설정이 시청자에게 그런 철학적 사고를 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그것을 위한 설명이나 이해를 돕는 팁이 충분하지 않았다. 불친절했다.
층을 바꿀 수 있는 방법에 돈을 쓰게 하지만, 그것이 원천적으로 좌절되지 않나. 반전을 시도했던 것은 좋았다. 왜 15억을 고집했는지에 대해서는 내적 구조 관점에서 설명이 되긴 하지만 결론은 똑같았다. 설정과 구성에 대한 노력과 고민은 했으나 반전이 좌절되면서 뒷심이 없어져 버린 결론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얘기다.
극중에서 1층부터 8층까지 계급의 수직 구조를 지녔지만 공금 사용을 통해 공동 구매가 가능하다는 설정이 있다. 그런데 중반 이후 공금 사용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과거의 한국 사회는 사회주의는 아니더라도 공동체 정서가 있었다. 이런 공동체적 낭만주의에 대한 한재림 감독의 질타가 있었던 것 같다. 특정 상황이 되면 그 공동체 정서가 어떻게 변질되는지 너희에게 알려주마.(웃음) 그래서 뒷부분을 그렇게 구성했던 게 아닌가 추측한다.
1층부터 8층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또 다른 중요 요인이 쓰레기, 즉 배변의 배출이다.
모순적인 사회를 보는 듯했다. 비장애인과 장애인을 위한 복지제도가 따로 존재하고 장애인을 위한 사회 안전망이 구비되어 있는 게 우리가 형성하고자 하는 민주주의 사회의 모습이지 않나. 그런데 다리가 불편한 1층이 먼저 내 몸이 이러하니 희생하겠다고 자진해서 나서게 하는 룰, 그렇게 돌아가는 상황이 의아하면서도 흥미로웠다. 1층이 결국 가장 흑화하는 캐릭터가 된다는 것도. 1층의 감정 변동의 폭이 가장 크지 않나. 이전부터 폭력을 쓰는 것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감정의 격차가 거의 없지만 1층은 딸과 아내도 있고, 많은 일을 겪은 캐릭터다. 마지막에 외줄타기까지 하면서 말 그대로 ‘외줄 인생’을 살아온 인물이다. 그런 캐릭터에게서 전해오는 감정의 격동이 분명 있었다. 그가 모든 층의 오물을 떠맡았을 때, 그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과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온도 차가 극명하다. 지금 뉴스에도 나오는 많은 문제들과 이어져 있다.
배변에 초점을 맞춰서 말해보자면 이건 의미가 있다. 우리가 음식을 먹고 화장실에 가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하다. 현재 서울국제환경영화제 조직위원장이기도 한 환경운동가 최열 씨가 1990년대에 환경운동을 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다. “아무리 맨션이 좋아도 화장실이 엉망이면 가치가 없다.” 현대 사회에서 아무리 질 좋은 서비스가 운영되더라도 환경 문제, 쓰레기 배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집은 가치가 없다. 즉, 도시 자체가 가치가 없다는 얘기를 이미 오래전에 강조한 것이다. 배변 문제는 정말 중요하고, 그걸 다뤘다는 것은 <더 에이트 쇼>의 매우 긍정적인 부분이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무려 456명이 나오는데 그 사람들이 화장실을 어떻게 이용했을까. 화장실과 배변은 기존의 영화와 드라마에서는 대개 주목하지 않는 설정이다. 언급 자체가 안 된다. 예능이나 이런 생존 게임 방식의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도시어부>는 출연진들이 낚시를 한다. 그런데 여성 출연진은 나오기 어렵다. 화장실 문제 때문이다. 화장실을 갖춘 배를 사용하더라도 배설물이 바로 바다에 가느냐 아니면 정화조에 모이느냐는 다르다. 그런 배설의 중요성을 착안했다는 점은 호평할 만하다. 배설 문제가 결국 갈등의 요인이 된다는 것도.
배설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는 개인을 넘어 도시에 대한 문제로도 확장된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그냥 수세식 변기 레버를 내리기만 하면 되지 않나. 그걸 누가 처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대부분 생각하지 않는다. 스스로 처리해본 경험은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류준열이 연기하는 ‘3층’이 그래서 처음에 난감한 상황을 겪지 않나. 그 부분은 정말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그런데 갑자기 1층이 손을 들고 “제가 쓰레기라도 치워야죠”라는 식으로 가는 부분은 지나치게 아름답다. ‘그래, 각자 할 일을 해야지’라는 식으로, 사회 안전망에 대한 고민이 없는 설정이나 시도로 흘러간다. 이 시리즈가 뒷심이 부족하다는 것이 배변 처리 문제에서도 드러난다.
1층에게 모든 배설물을 보내는 건 사회적 문제와 크게 연관되어 있다. 님비(NIMBY) 현상과 마찬가지다. 혐오시설이 제일 열악한 곳에 배치되는 게 자연스럽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물론 그런 상황을 은유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결국에는 그 메시지가 옅어졌다. 극중에 나오는 대사처럼 서로를 배신하고 강탈하고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악의 짓까지 한 사람들이 장례식에서 웃고 떠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나의 인간적 감정으로는 이해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부분이 후반부에 편중되어 있다. 극강의 허무주의로 연결되는 결말이 너무 아쉬웠다. 하지만 전반부의 내용을 따지고 보면, 이야기의 빌드 업은 상당히 잘 되어 있다.
한재림 감독은 전작 <관상><더 킹> 등에서 현실 비판의 주제를 스타일리시한 이미지에 담았다. 그런 감독의 연출적 특성이 <더 에이트 쇼>에서는 어떻게 구현되었다고 생각하나.
세트의 배경이나 캐릭터들의 의상에서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1층부터 8층까지의 인물들이 입고 있는 옷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옷을 실물로 보게 됐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주머니가 가짜였다. 이게 무슨 장난인가 싶었는데, 공개된 <더 에이트 쇼>를 봤더니 어떤 의미인지 이해가 갔다. 쇼가 이루어지는 세트에 나오는 음식도 가짜, 넓고 좋아 보이지만 수영장도 가짜. 세트에서 화사한 느낌을 주면서 인간의 악랄한 모습을 계속 쨍한 컬러로 표현하는 연출이 무척 좋았다. 하나하나 숨어 있는 디테일이 있어서 그 부분에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더 에이트 쇼> 자체가 말 그대로 쇼다. 도입부에 캐릭터들의 전사가 나올 때는 TV 비율의 화면을 보여주고, 오히려 현실 세계에 나오거나 캐릭터들이 쇼에 참여할 때는 그냥 현실처럼 보여준다. 화면 비율이 바뀌는 것 또한 은유다. 이 쇼 자체가 어떻게 보면 현실이고,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게 어떻게 보면 쇼라고 말하는 것 같은 연출. 그리고 에피소드마다 1층부터 8층까지 캐릭터들의 전사가 번갈아 나오는데, 매우 작위적으로 보이게 연출된다. 특히 1화 오프닝에서 ‘3층’이 된 진수가 어떻게 사기를 당해 한강까지 갔는지에 대한 부분을 보여줄 때, 그 작위적인 톤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 부분은 인정한다. 생존 게임이 벌어지는 과정에서의 연출은 아쉽지만, 전사 부분의 연출이나 한 장면에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때, 쇼에서의 특정 설정들에 대한 연출은 역시 한재림 감독답다. 그런데 <더 에이트 쇼>가 과연 한재림 감독이 자신의 역량을 다 발휘할 수 있는 장르였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더 에이트 쇼>는 공개 전후로 <오징어 게임>과 많이 비교되었다. 결국, <오징어 게임>과의 차별화에 성공했을까.
차별화의 성공과 실패를 말하기보다, <더 에이트 쇼>는 <오징어 게임>과 아예 다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적으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멜로디가 나올 때 외국인들이 갑자기 횡단보도에서 멈춰서는 플래시몹을 하는 기현상까지 만든 이유는 아이코닉한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한테는 익숙해서 통했고, 해외에서는 기발해서 통했다. 예능 프로그램으로 만든 <오징어 게임: 더 챌린지>까지 얘기하자면, <오징어 게임>에서 나온 게임들만 주구장창 할 줄 알았는데 배틀십 게임을 차용하기도 하고 달고나 게임으로 사람의 심리를 이용한 트릭을 넣어 자기 팀을 배신하게 했다. 그게 너무 흥미로웠다. 생존 게임물로 성공을 하려면 중간 중간 서서히 긴장을 불어넣는 전략이 필요하고. 어떤 인물의 심경 변화가 개연성 있게 짜여야 한다. <더 에이트 쇼>는 그게 너무 부족했다. 게임이랄 게 없다. 그래서 아예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인물들이 자기들끼리 먹방(먹는 방송)을 하고 갑자기 19금 장면이 나온다. 극 중에서 그 쇼를 보면서 시간을 연장해준다고 설정된 보이지 않는 대상들과 시청자가 동질화되는 느낌이었다. 결국 후반에는 “너희들이 먹방을 해도, 고문을 해도 이제 더 이상 흥미가 없는데? 이제 뭐 할 건데?” 이렇게 물어보고픈 심정이 되었다.
전혀 다른 작품이라는 말에 매우 공감한다. <오징어 게임>과 똑같은 지점은 단 하나밖에 없다. 돈을 두고 뭔가를 한다는 것. 그런데 사실은 그 방식도 다르다. <오징어 게임>은 룰이 분명했다. 게임의 룰이 정해져 있고 참여한 사람이 미션을 수행하지 못하거나 부적절한 행동을 하거나 게임을 완료하지 못하게 되면 죽는 형태였다. 즉, 생존 게임 다큐에 가깝다. 그런데 <더 에이트 쇼>는 관찰 예능에 가깝다. 어떤 상황을 주고 1층부터 8층까지 어떻게 하는지 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룰도 불분명하다. 쇼의 참가자들이 시간을 늘리기 위해서 아이디어를 내면서 쇼를 만들어 가는 형태다. 그러니까 예측이 잘 안 된다. 그게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단점으로 더 많이 인식되는 이유는 우발적이고 인과관계가 도저히 성립을 안 하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딱 맞아 떨어지지 않으니 몰입감이 떨어진다. 인물 군상의 다양성도 부족하다. 관찰 예능 스타일로 생존 게임을 시도했다는 것은 좋은 차별점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런 예능의 전제조건들을 충족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계속해서 언급되듯 <더 에이트 쇼>가 이른바
‘생존 게임’ 류의 시리즈들과 궤를 같이 한다는 생각은 공통된 것 같다.
생존 게임의 측면에서 <더 에이트 쇼>가 한층 날카롭게 다루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놓치거나 외면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사람 사는 게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사실을 구현하려는 의도였다고 추측한다. <더 에이트 쇼>는 ‘에이트 쇼’라는 자체가 예능이다. 그럼 희극이지 않나. 하지만 인물들이 처한 상황 안으로 들어가 보면 그 쇼를 만드는 사람들 사이에 별의별 욕망과 음모와 배신과 이합집산과 권력 행사가 벌어진다. 문제는 부조화다. 생존 게임인데 어떤 때는 화기애애하게 음식도 같이 먹고 지내다가 어떤 상황에서는 갑자기 서로 폭력을 행사하고 괴롭혀야 되는 상황으로 확확 전환된다. 정지은 기자도 말씀하셨듯이 얼마 전까지 저렇게 행동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행동하는 상황이 될 수 있다는 게 맞는 건가, 잘 공감이 안 되었다. 그런 부분을 공감시키려면 굉장히 디테일하게 인물들의 심경 변화를 다뤄줘야 한다. 그런데 한국 콘텐츠의 한계점 중에 하나가 내러티브를 배치하는 데 급급하다는 점이다. 먼저 완벽하다 싶은 구조를 짜고 거기에 내러티브를 그냥 맞춘다. 그 안에 있는 구성원들의 심경 변화는 외면한다. ‘어떻게 저런 상황에서 갑자기 울다가 웃는 게 가능해?’ 하는 상황들이 그래서 벌어진다. <더 에이트 쇼>는 그것이 최극단화된 사례다.
김헌식 평론가의 지적이 <더 에이트 쇼>가 가장 많이 비판 받았던 부분이다. 더불어 도덕성이 많이 결여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룰 때, 인간이 가장 많이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이 배신이다. 지략적인 배신. 그 짜릿한 배신이 없었다는 게 사실 기존 생존 게임 시리즈가 취하는 전략과 달랐던 것 같다. 너무 훈훈했다. 시청자들이 배신에서 오는 짜릿함을 즐기기 때문에 <피의 게임><더 지니어스> 같은 예능 프로그램도 나오게 된 것 아닌가. ‘팀을 이뤄서 다 같이 잘 삽시다’ 하는 것을 보려는 게 아니라 그냥 서로를 배신하는 걸 보는 시청자층에게는 거기서 오는 짜릿함이 덜했다.
생존 게임에서 배신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누군가 배신을 하려면 그 배신의 과정을 매우 디테일하게 묘사해줘야 한다. <더 에이트 쇼>는 그냥 일이 이렇게 되었다, 끝! 이렇게 넘어가는 불친절함이 많았다.
한국영화의 중요 작품을 만들어 온 중견 감독들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시리즈를 만드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앞으로도 종종 만나게 될 텐데, <더 에이트 쇼>는 어떤 사례로 여겨질 만한가.
이미 영화 연출로 명성이 있는 분들이 한국 드라마, 시리즈의 속성을 잘 구현해낼 것인가에 대해서 약간 물음표가 있다. 시리즈는 호흡을 가지고 다음 회를 기다릴 수 있도록 이끌어 가야 한다. 여러 가지 요소와 구성이 그렇게 가야 한다. 그런데 편집에서 너무 생략을 하는 경우가 많다. 드라마는 회상 장면을 통해 정보를 계속 환기시켜주는 특징이 있고 설명도 해줘야 한다. 감성의 매체이기 때문에 보는 이의 감성을 건드려줘야 하는 것이다. 그걸 다 은유와 상징으로 다루고 중간 설명 없이 확확 넘어가고 편집해 버리면 시청자가 이해를 못하거나 공감을 못하는 부분들이 많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 부분을 고민했으면 좋겠다.
동감이다. 캐스팅 면에서도 고민이 필요하다. 8명의 주요 배우가 다 한재림 감독의 전작에 나온, 인연이 있던 배우들이다. 새로운 얼굴의 발굴에 대한 노력도 요구된다.
<더 에이트 쇼>가 ‘훨씬 대중적인 방향을 지향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 초반에 현실의 면모들을 잘 보여준다 하더라도 뒤에서 힐링할 수 있는 요소를 줬어야 했다. 시청자들이 장르물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건 낭만적인 현실인데 세상의 진실을 알려주마 하는 흐름은 이미 지나간 흐름이 아닌가 싶다.
가장 돋보이는 캐릭터를 꼽는다면.
코로 리코더를 부는 ‘코코더 연주’를 해낸 ‘7층’ 박정민을 꼽고 싶다. ‘7층’은 한재림 감독이 본인을 투영한 것 같은 캐릭터이긴 한데, 배우 자신의 매력이 더 돋보였다. <더 에이트 쇼> 공개 후 박정민을 인터뷰했었는데, 굉장히 열심히 준비했다고 하더라. 배우로서의 프라이드가 느껴졌다. 그 연기가 밈으로 생성되는 것에 걱정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웃음) 그리고 한 명 더 뽑는다면 누가 뭐래도 역시 ‘3층’의 류준열.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는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8층’의 천우희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미친’ 결의 연기를 보여주었지만, 행위예술가를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게 맞나 하는 의문이 있다.
그게 한재림의 감독의 세계관인 것 같다. 그러니까 천우희라는 배우의 연기력과는 상관없이 그가 만든 세계관에 동의할 수가 없다. 여성을 그리는 방식, 장애인을 그리는 방식에 대해서도. 8층의 좌절감을 자꾸 윤리적으로 문란한 어떤 행위로 묘사하는 것을 어떻게 동감할 수 있나. 반면, 이주영 배우의 ‘2층’ 캐릭터는 굉장히 아깝다. ‘6층’인 남성과 직접 대결을 벌여서 이기는 캐릭터로, 그 설정이 의미가 있다. 그런데 서사가 약해서 부각이 안 되었다. 천우희의 ‘8층’과 확연히 대비되는 캐릭터였는데, 천우희 배우는 엄청나게 많이 부각되고 ‘8층’에 심혈을 기울인 반면, 이주영 배우의 ‘2층’은 다소 기계적으로 배치한 게 아닌가 싶다. 요즘 코드로 하면 여성들이 한 번쯤 뭉쳐서 층을 뒤집어야 되는 거 아닌가? 이주영과 천우희의 워맨스 같은. 한 번 엮을 것도 같은데, 엮지를 않더라.(웃음)
천우희 배우의 ‘8층’에 대한 호불호가 갈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캐릭터가 여성으로서 성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역할이었다는 생각은 한다. 매우 극단적이긴 하지만, 자신이 선택해서 그런 자유로움을 만끽하면서 사는 인물이니까. 캐릭터로서 주어진 설정을 다 소화했다고 본다. 한편으론, 김헌식 평론가의 의견처럼 여성들의 워맨스가 없는 게 아쉽긴 했다. 어쩌면 갈등을 심화시키기 편한 구조로 지금 공개된 형태를 택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더 에이트 쇼>를 YES or NO로 표현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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