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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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efing

함께, 평등하게, 당연하게

‘2023년 한국 영화 산업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
결과로 살펴보는 과제

정성조 (영화계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 연구팀 연구원)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한국 영화계가 다양한 변화와 도전을 겪고 있는 가운데, 내부적으로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바로 성희롱·성폭력 문제이다. 이는 영화계의 창의성과 다양성을 저해하는 심각한 장애물로 지적되어 왔다. 2016년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시작으로 영화계 내 성희롱·성폭력 문제가 가시화되기 시작했고, 2018년에는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이 설립되었다. 영화진흥위원회는 2017년과 2020년 두 차례에 걸쳐 영화계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를 벌여 정책 수립의 근거를 마련했고, 2021년에는 영화 촬영 전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을 의무화하는 법 개정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고질적 병폐로 지적되어 온 영화계 내 성희롱·성폭력 문제는 과연 얼마나 개선되었을까?

성폭력 문제의 구조적 원인

성희롱·성폭력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으로 연구자들은 오랫동안 권력 관계에 주목해 왔다. 이때 권력 관계는 조직 내 위계질서와 사회문화적 위치가 교차하면서 만들어진다. 일반적으로 한 조직 내에는 직책, 직급, 고용 형태 등에 따른 위계질서가 존재하는데, 이때 어떤 개인들이 놓이게 되는 위치는 그들의 사회문화적 위치와 아주 무관하지는 않다. 가령 성별, 인종, 계급, 나이, 장애 유무, 성적 지향, 국적 등에 따른 사회적 위계질서는 교차하면서 개인의 지위를 구성한다. 이렇게 형성된 개인의 사회문화적 위치는 다시 조직 내 지위 격차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이러한 다층적 위계질서가 젠더와 결합할 때, 여성은 성희롱·성폭력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영화계 내 미투(#MeToo) 운동은 영화계 역시 이러한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드러내 왔다. 다만 영화계만의 특수성으로 인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직군별 권력 차이와 직군 내 위계질서가 공존하고, 특수 고용 형태와 프로젝트 단위의 근로 환경 등 영화 산업 특유의 구조적 문제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실시한 ‘2023년 한국 영화 산업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가 최근 마무리되었다. 최근 2년간 영화 현장에서 일한 1124명이 참여한 이번 조사 결과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영화 제작 환경에서 성희롱·성폭력 문제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미투 운동과 성희롱·성폭력 관련 제도의 변화는 물론 팬데믹과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등장으로 인한 제작 환경의 변화 속에서 무엇이 바뀌었을까? 혹은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며 새롭게 나타난 문제는 무엇일까? 이 글에서는 조사 결과를 간략히 제시해 영화계 내 성희롱·성폭력 문제의 현주소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다만 이번 조사의 경우 설문조사만으로 진행되어 성희롱·성폭력 문제의 구체적 양상과 심층적 원인을 깊이 있게 살펴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미리 전한다.

성 불균형 조직, 남녀 불문 피해 높아

이번 실태조사에 따르면, 최근 2년간 영화계 종사자의 51.5%가 성희롱·성폭력 피해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9년 조사 결과(36%)에 비해 크게 증가한 수치로, 특히 남성의 피해 경험 비율이 18.5%에서 49.6%로 30%포인트 이상 급증한 점이 주목할 만하다. 여성의 경우에도 피해 경험 비율이 50%에서 53%로 소폭 증가했다. 이는 최근 문화예술계를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된 미투 운동과 영화계 내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 및 성평등 전담 기구의 운영 등으로 성희롱에 대한 인식이 제고된 결과일 수 있다. 또한 성희롱·성폭력 문제가 단순히 젠더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권력 관계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피해 비율은 20대(55.2%)와 30대(56.2%), 4년제 대졸자(62.6%)에서 높게 나타났으며, 직군별로는 촬영·조명(64%), 분장·헤어·의상(60.3%), 동시녹음(59.4%), 미술·소품(58%) 순으로 높았다. 이들 직군은 촬영 현장을 중심으로 일하는 스태프이자 성별 분리가 뚜렷하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또한 남초 직군 내 여성과 여초 직군 내 남성의 피해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는데, 이는 성 역할 고정관념에 기반한 ‘정상성’의 규범이 성적 차별과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OTT 오리지널 영화·시리즈 작업에서의 피해 비율은 상대적으로 높지 않았지만, 3rd 이하의 경우 해당 작업에서 피해를 경험한 비율이 29.6%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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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유형으로는 ‘음담패설 및 성적 농담’(33.5%), ‘외모에 대한 성적 비유나 평가’(30.7%)와 같은 언어적 성희롱이 많았으나, ‘원치 않는 신체 접촉’(9%)이나 스토킹(2.8%)과 같은 신체적 폭력도 간과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특히 ‘성적 요구에 대한 불응을 이유로 고용, 평가 등에 불이익을 주는 행위’도 2.3%를 차지해, 성희롱·성폭력이 단순히 개인 간 문제가 아니라 조직 내 권력 관계와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가해자의 대부분은 남성 상급자였으며, 피해의 63%가 반복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영화계 내 위계적 구조와 젠더 불균형이 성희롱·성폭력의 온상이 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성희롱·성폭력 발생 조직의 여성 비율을 살펴보면, 성평등한 인적 구성이 성희롱·성폭력 예방에 중요한 요인임을 알 수 있다. 실태조사 결과, 여성의 비율이 10~30% 미만인 조직에서 피해 발생 비율이 58.6%로 가장 높았던 반면, 여성의 비율이 50% 이상인 조직에서의 피해 비율은 4.1%에 그쳤다. 이는 여성이 소수자로 존재하는 조직일수록 성희롱·성폭력 발생 위험이 높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조직 내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여성 참여 보장, 성별에 따른 직군 분리 해소 등 성평등한 인적 구성을 위한 적극적 조치가 요구된다.

문제 제기 어려운 조직 문화

지난 수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희롱·성폭력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적절하게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감은 오히려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2019년 47.7%에서 이번 조사에서는 32%로 감소했는데, 특히 여성의 경우 24.6%에 그쳐 남성(41.1%)에 비해 상당히 낮은 수준을 보였다. 이는 영화계 내 성희롱·성폭력 문제 해결에 대한 신뢰도가 전반적으로 하락했음을 의미한다. 문제 해결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하는 이유로는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조직 분위기(42.6%), 문제 제기로 인한 촬영 중단이나 제작 차질에 대한 우려(41.7%), 인맥과 소문이 중시되는 조직 문화(41.7%) 등이 지목되었다. 이는 영화계 내 성희롱·성폭력 문제가 단순히 개인 간의 문제가 아닌, 조직 문화와 구조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성희롱·성폭력에 대한 문제 제기를 어렵게 만드는 영화계 특유의 조직 문화는 이번 조사에서도 반복적으로 확인되었다. 피해자 중 참고 넘어가거나 주위 동료에게만 하소연한 경우는 93%에 달했다. 행위자에게 사과를 요구하거나(20.6%) 상급자에게 보고하는 등(6%) 적극적으로 대응한 사례는 소수에 불과했다. 이유를 물으니 ‘당시 큰 문제로 여기지 않아서’(38.2%), ‘주변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아서’(29.2%), ‘해당 인물과 잘 알고 지내서’(25.8%) 순으로 꼽혔다. 문제 제기가 어려운 조직 문화와 관행이 팽배함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피해를 목격하거나 전해 들은 동료 역시 64%가 피해자 위로 외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2차 가해와 불이익이 두려워 모른 척 했다는 것이다. 방관자 효과라고 불리는 이런 집단적 침묵 속에서 성희롱·성폭력 문제는 체계적으로 비가시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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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이 꾸려지고, 2021년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이 의무화되는 등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음에도 피해자들이 여전히 ‘공정한 사건 처리가 어려울 것’이라 전망하는 이유를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성희롱·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 방지와 실질적인 지원이 시급하다. 조사에 참여한 이들은 영화계 내 성평등 전담 기구의 기능 강화(44.1%)와 더불어, 피해자에 대한 업무상 불이익 방지 및 치유 지원 확대(41.9%), 가해자 처벌 강화(37.4%)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나아가 조직 내 성비 불균형 해소를 위한 적극적 조치 등 성평등한 조직 문화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여성 감독에 대한 지원 확대(41.9%)와 여성 참여 할당제 도입(33.1%)에 공감하는 이들도 상당수이다. 결국 성평등이야말로 성폭력을 예방하는 근본적인 해법임을 인식하고, 이를 위한 제도적·문화적 기반을 다져나가야 할 때이다.

예방교육 참여 보장과 전문성 강화

그렇다면 성희롱·성폭력 예방을 위한 교육 체계는 어떻게 작동하고 있을까? 2021년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이 의무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조사에서 예방교육 이수율은 46.2%에 그쳤다. 이는 2019년 조사 결과(75.9%)에 비해 크게 하락한 수치로 팬데믹에 따른 영향을 무시하기 어려우나 예방교육이 목표한 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직군별로는 미술·소품(21.9%), 분장·헤어·의상(23.8%), 촬영·조명(32.8%), 동시녹음(37.5%) 등에서 이수율이 저조했다. 직급별로는 2nd의 경우 현장에서 예방교육이 진행되었음에도 본인이 이수하지 못한 비율이 58%에 달했다. 제작 유형별로는 장편(독립·예술)영화(70%)와 배급사·마케팅사 등 사업체(80%)의 이수율은 양호했으나, 단편영화(38.2%), 장편(상업)영화(31.1%), OTT(42.5%) 현장은 낮은 편이었다. 성희롱·성폭력 사건 발생 비율이 높은 직군과 제작 현장에서 예방교육 이수율이 낮다는 점은 시급히 개선되어야 할 과제이다

예방교육을 이수한 경우에도 교육 방식에 따라 효과성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현장이나 실시간 온라인으로 외부 강사의 강의를 들은 경우 교육 효과가 있다는 응답이 80% 내외로 높았던 반면, 강사 없이 비디오 시청 등으로 진행된 교육에서는 효과가 없다는 응답이 많았다. 특히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소속 전문 강사의 교육은 효과가 있다는 응답이 83.3%에 달해, 영화계 맥락에 적합한 교육 내용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반면 교육 효과가 없다고 응답한 이들은 매번 동일한 내용(38.4%)이나 비효과적인 교육 방법(24.1%)을 그 이유로 꼽았다. 향후 예방교육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제작자, 배우 등 모든 구성원의 교육 참여 보장(40%), 전문적이고 실효성 있는 교육 내용 구성(33.6%) 등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영화계 사정에 밝고 전문성을 갖춘 강사진의 대면 강의를 확대하고, 다양한 사례와 내용으로 교육을 고도화해야 할 시점이다.

평등한 문화 정착이 관건

이상으로 ‘2023년 한국 영화 산업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의 전반적인 결과와 개선 과제를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실태조사의 방향성과 관련해 몇 가지 제언을 덧붙이고자 한다. 첫째, 대표성 있는 표본을 기반으로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가 정례화되어야 한다. 이는 영화계의 성희롱·성폭력 양상의 변화를 파악함으로써 문제 해결 및 예방 정책 수립의 핵심적인 토대가 된다.

둘째, 최근 OTT 산업 확장으로 인한 영화계 환경 변화가 성평등 수준과 성희롱·성폭력 양상에 미치는 영향을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 이번 조사에서 OTT 오리지널 영화·시리즈 제작 현장의 하위 직급 종사자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피해율을 보이고, 예방교육 참여는 저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OTT 제작 현장의 노동 환경과 조직 문화, 예방교육 실태 등을 점검하고, 이에 기반한 구조적 개선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후속 논의가 요청된다.

셋째, 영화계 성희롱·성폭력의 전반적 실태와 추세를 파악하는 양적 조사와 더불어, 종사자들의 경험과 인식을 보다 깊이 있게 탐구하기 위한 질적 연구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개인이 처한 조직과 직군, 직급 등의 특성, 그리고 영화계 고유의 노동 조건과 문화적 맥락 속에서 성희롱·성폭력 경험이 구성되는 방식을 심층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산 삭감으로 인해 이번 실태조사가 설문조사로만 간소하게 진행된 점은 크게 아쉬운 부분이다.

“평등한 문화 정착을 위해
첫째, 대표성 있는 표본을 기반으로 한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 정례화
둘째, OTT 산업 확장이 성평등 수준에 미치는 영향 분석
셋째, 종사자들의 경험과 인식을 보다 깊이 있게 탐구하기 위한 질적 연구 병행이 이뤄지길...”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과는 더디고 과제는 산적해 보인다. 영화는 다양한 주체들의 협업으로 완성되는 예술이다. 영화인들의 절반가량이 성희롱·성폭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은 영화계가 직면한 심각한 도전이다.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것은 영화계 전반에 ‘평등한 문화’가 확산되는 일이다. 그 어떤 폭력도 용인되지 않는다는 원칙이 당연한 규범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현장의 고립성을 해소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며 공정한 조사와 처벌이 담보되는 시스템을 정착시켜야 한다. 나아가 성차별적 관행을 청산하고 젠더 평등 감수성을 내면화하는 인식의 전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독창적이고 뛰어난 영화를 제작하는 일은 영화인 개개인의 인격과 다양성이 온전히 존중받는 안전하고 평등한 영화 현장을 함께 만들려는 노력과 결코 별개로 이루어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