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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혜 감독 <정순>
이돈구 감독 <미지수>
이대로 보내기 아쉬운 두 작품의 심층 평론
- 글
- 이수향, 박동수(영화평론가)
- 사진
- (주)더쿱디스트리뷰션, (주)인디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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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보내기 아쉬운 두 작품의 심층 평론
정지혜 감독의 <정순>
글 이수향(영화평론가)
‘정순 이모’는 어쩌다영화의 사연을 뒤집어 보자. 박스가 쌓여있고 컨베이어 벨트가 뱉는 대로 물건을 박스에 쌓아 테이프를 붙이는 공정으로 돌아가는 일사분란한 공장에서 갑자기 한 중년 여성이 픽- 웃더니, 위생모를 벗어던지고 머리를 풀어헤치면서 단 위로 올라가 허리를 흔들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모두들 당황하는데도 아랑곳 않고 노래를 부르던 그녀는 중년 남자가 다가오자 증오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곧 달려들어 죽일 듯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이 꼴이 기가 막힌 젊은 남자 관리자는 “X발”이라고 욕설을 퍼붓는다. 그리고 사실 여성이 이 난동을 시작하기 전에 그는 이미 ‘X랄’과 ‘또라이 같은 X’이라고 그녀를 지칭했었다. 그녀가 떠나고 난 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남은 이들은 그 ‘이모’ 완전히 맛이 갔다고, 미친 여자같았다고 수근댈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정순’, 곧 결혼을 앞둔 딸의 엄마이자 이 공장의 베테랑 직원인 그녀가 어쩌다 미친 여자가 되어버린 걸까.
미친 여자의 역사는 유구하다. 가령, 길버트와 구바에게 19세기는 감금과 해방, 불안과 분노, 광기와 이성, 복종과 반항, 속박과 자유가 서로 길항하면서 전복적인 여성 상상력이 표출된 시기로,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 속 다락방에 갇힌 여자 ‘버사 메이슨’에 주목해 설명하고자 했다.1) 그녀는 미친 여자이기 때문에 작품 속에서 불온함과 재앙, 저주의 상징처럼 감춰져야 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길버트와 구바는 버사 메이슨을 제인의 여성적 불안과 분노와 광기를 대리 표현하는 분신(alter ego)으로 상정하며 다시 읽기를 주장한다. 요컨대 미친 여자들은 그냥 미친 게 아니라 분노를 광기로 보여줄 수밖에 없던 사연이 숨어 있었던 것인데, 대개 ‘마녀’로 프레임이 씌어진 당대 여성들이 그랬듯 차별과 혐오의 대상으로서만 대상화될 뿐 그 사연과 진의에 대해서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1) 산드라 길버트·수전 구바,『다락방의 미친 여자』, 박오복 역, 이후, 2009, 참조.
영화 <정순>에서 별안간 미친 여자처럼 되어버린 정순 역시 모두를 불편하게 한다. 그녀가 공장에 등장하면서부터 다들 그녀의 눈치를 본다. 너무 공고하게 구축된 일상과 현실의 압력으로 자신의 억울함과 피해가 소거되는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이성을 놓은 반항적 광기의 돌출 행동밖에 없었다. 미쳐서 날뛰어야지만 비웃음과 조롱의 재밋거리로 그녀의 사연을 보는 사람들에게 적어도 웃음기를 거둔 채 눈치를 보게 할 수는 있었다. 그녀를 광기에 차게 한 사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정순은 작은 공장의 노동자로 일하며 딸과 함께 사는 중년의 여성이다. 어느 날 다리를 다쳐 공사장 일을 그만두고 공장에 들어오게 된 영수라는 중년 사내를 알게 되는데, 공장 직원들끼리의 등산 모임을 계기로 그와 애정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던 중 자신의 내밀한 모습을 찍은 촬영물이 사람들 사이에 퍼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수가 공장의 젊은 관리자인 도윤 일당의 단톡방에 영상을 공유한 것을 알게 되고 분노하며 정순은 딸 유진과 함께 경찰에 사건을 의뢰하게 된다.
정순이 자신의 피해 사실을 알게 된 장면과 딸 유진 역시 이를 알게 되는 장면, 그리고 유진이 급히 집으로 와 엄마의 상태를 확인하는 장면은 과도한 설명이나 감상을 배제한 채 쇼트가 매우 경제적으로 짜여 있어 몰입도를 높인다. 이 영화에서 피해자로서 정순이라는 인물을 구축하는 데에 있어 그녀가 대한민국의 표준적인 중년 여성의 성적 규범을 지닌 시니어 세대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는 딸인 유진과 세대론적으로 갈라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가령, 영화의 초반부에 화장도 하지 않고 시커먼 옷만 입으며 결혼식 준비도 인터넷으로 대충하려는 딸에게 정순은 불만이 많다. 자신이 나서서 유진의 회사에 음식을 해서 갖다주겠다고 하거나, 딸이 좀 더 ‘나긋나긋’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가부장제의 남성중심주의적인 젠더 규범을 무리 없이 답습하고 있는 전형적인 중년 여성의 모습이다.
기본적으로 계산적이지 않은 성향의 정순은 다소 둔감한 성격으로 푼수처럼 젊은 애들에게 훈수를 두기도 하고, 도윤이 ‘이모’라는 사적 친근함을 가장한 호칭으로 부르면서도 반말로 하대하며 윽박질러도 그저 사람 좋게 웃고 만다. 사회규범에서도 크게 벗어나지 않게 행동하려고 하는 편이어서 밤에 영수가 묵는 모텔에서 같이 지내고 나올 때 얼굴을 가린다든지, 딸의 결혼을 앞두고 이래도 되는 것인지 조심스러워하며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평판을 의식한다.
특히 사실에 대한 시비 관계나 자신의 이익을 따지는 대신 비교적 온정주의적인 태도로 매사에 임한다는 점도 특징적인데 이는 곧 불행의 씨앗이 된다. 즉, 처음엔 영수가 사적 관계에서 자신의 몸을 촬영하려는 것을 막았지만, 곧 그가 자신의 불행한 처지에 대해 한탄하며 화를 내자 이를 안쓰럽게 여겨 촬영에 응하게 된 것이다. 즉, 영수에 대한 동정심과 애정에 기반해 그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촬영을 허락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사건 발생 이후 영수가 찾아와 경제적 어려움과 육체적 한계에 대해 읍소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성범죄의 피해자로서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상대의 어려운 처지를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곧 결혼을 앞둔 딸과 좁은 지역 사회에서 살아내야 할 자신의 상황에서 오는 판단으로, 더 이상 일상성의 궤도를 벗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이유일 것이다. 소문과 얘깃거리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피해를 황급히 봉합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피해를 겪고도 차마 단죄하지 못했던 선량한 마음은 도리어 ‘수치심’이 되어 되돌아온다. 수치는 명예와 자존감의 기초를 상실했음을 의미하며 불승인에 대한 반응으로,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경멸) 또는 기피(혐오)와 같은 징벌적 행위를 이끌어낸다.2) 정순은 자신의 온정적인 해결 방식이 전혀 가해자들의 반성을 이끌어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일상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점을 깨닫고 분노한다. 피해자가 수치심과 혐오감으로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거나 경멸을 받을 때 가해자의 연대는 공고해서 전혀 손상되지 않고 도리어 피해자에게 자기증오의 증후군으로 남고 마는 것이다.3) 왜 늘 피해자가 사회적 낙인에 대한 두려움과 수치심에 시달리는 것이며 제대로 피해를 극복해내기도 전에 가해자는 자기 자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의 회복을 누리는 것일까.
2) 윌리엄 이언 밀러,『혐오의 해부』, 하홍규역, 한울, 2022, pp.77-78.
3) Ibid, p.78.
정순이 겪은 피해는 표면적으로는 디지털 성범죄로서 사적 영상의 무분별한 불법 유포에 있다. 하지만 좀 더 본질적인 측면은 여성의 지위를 둘러싼 지난한 여성혐오(misogyny)의 구조적 문제가 놓여있다. 우에노 치즈코는 이브 세즈윅을 경유하며 남성 집단들로 구성된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남자에게서 남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배제된다고 설명하며, 이들이 ‘호모소셜’한 유대를 쌓는 방법으로 여자를 활용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또 여성은 오직 성적 객체로서 물화되는 것이어야만 하기 때문에 성적 자기 표현을 하는 여성에 대해 남성들은 공격성을 드러낸다고 설명한다.4) 영화 <정순>은 여성혐오를 둘러싼 구조적 측면을 세 가지의 방향성에서 겨냥한다.
4)우에노 치즈코,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나일등역, 은행나무 2012, 참조.
첫 번째 측면은 영수가 정순과의 사적 촬영물을 유포한 것이 남성연대의 공모에 가담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영수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인 면에서 낮은 위치에 놓여 있는데 이는 그가 육체(팔루스, Phallus)가 손상된 남성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공사장에서 다리를 다쳐 공장에서 일하게 된 그에게 젊은 남성 관리자인 도윤과 그의 일행들은 종종 동정을 가장해 빈정거린다. 도윤은 다리와 허리가 불편한 영수의 상태에 대해 걱정하는 척 열외를 명령하는 한편, 성적 착취물들을 자신들끼리만 돌려보면서 자신들의 공모 바깥에 영수를 위치시켜 놓는다. 영수의 열패감은 정순에게 “당신도 내가 창피하고 쪽팔리지”라는 말로 억지를 부리는 것으로 드러난다. 즉, 자신의 남성성을 인정받기 위해 정순과의 내밀한 관계를 이용했다는 것은 그의 애정이 결국은 팔루스의 유실에 놓인 하층민 남성이 남성 권력의 허울 좋은 연대에 들어가기 위한 자기 본위의 목적에 불과했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 측면은 정순이 성적 자기표현을 적극적으로 하는 여성이라는 점에서 징벌받는다는 것이다. 앞서 살펴봤듯 성적 객체가 자신의 주체성을 드러내는 것은 금기시된다. 여성의 육체를 한낱 낄낄대는 여흥거리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는 인식을 지닌 이들이 영상을 보며 하는 말인 ‘아줌마가 장난 아니다’의 맥락은 정순이 성적으로 표백화된 중년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규범에서 벗어나 영상 속에서 반라의 상태로 적극적으로 노래하고 춤춘다는 점을 주목한 것이다. 중년 여성이 드러내는 섹슈얼리티이기 때문에 더 혐오를 받는 것이다.
세 번째는 정순과 유진 모녀에게 가부장제의 핵심인 남편-부친의 존재가 부재한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페데리치는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재고찰하는데 이때 마녀는 자본주의가 파괴해야만 했던 여성 주체라는 세계의 여러 성격 중 ‘감히 혼자 살아가고자 하는 여성’의 체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다. 요컨대 가부장제 안에 포섭되어 있지 않는 섹슈얼리티를 지니는 여성들은 언제나 마녀사냥의 대상이 될 위협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5)
5) 실비아 페데리치, 『캘리번과 마녀』, 황성원·김민철역, 갈무리, 2011, p.18.
이렇듯 세 가지 측면에서 남성의 권력적 의지와 힘에 대한 열등감을 해소하는 방편이자 여성을 제물 삼아 남성연대의 일원이 되는 과정에서 정순은 희생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으로 보자면, 이는 남성성의 공고한 연대라고 하는 것에 대한 심리적, 성적 보충을 여성이 지탱해줘야만 겨우 유지되는 허울 좋은 권력에 불과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 현실에서도 ‘N번방’ 사건으로 상징되는, 무리에 끼기 위해 자신도 희생양을 물색해서 바쳐야 서로의 범죄 공모가 유지되는 참혹한 상황이 벌어진 바 있다. 이 영화는 동일한 계층 선상에 앞서 젠더적 차이가 구분하는 권력 문제의 교차성에 대해 다시 숙고하게 한다.
미치거나 죽지 않고도흥미로운 지점은 정순의 근처에서 자주 출몰되는 여성 노숙자의 존재이다. 그녀는 사회성을 거의 상실한 채, 구걸과 음주, 나태와 방만, 욕설과 위협의 태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진짜’ 미친 여자로 보인다. 정순이 처음 영수의 숙소인 모텔 앞에서 그녀를 봤을 때는 놀랐고, 그다음에는 피했다. 하지만 그다음 번에 다시 만났을 때 그녀가 움직이지 않자 동사했나 싶어서 흔들어 보다가 죽지 않고 대거리를 하는 것을 보고 안심한 듯 웃으며 도망친다. 그리고 결국 영수와 도윤 일행의 반성하지 않는 행위를 보고는 자신의 옷을 그녀에게 내어주고, 사건 이후 처음으로 공장으로 출근하여 이 글의 처음과 같은 일을 벌인다. 중년의 노숙자 여성에게 자신의 옷을 덮어준다는 점에서 역할 전유의 상징성을 분명히 드러내면서, 정순이 더 이상 온순하고 고분고분한 여성이 아니라 ‘미친 여자’ 되기를 적극적으로 결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정순>은 젊은 여성뿐 아니라 사회규범에 충실한 중년 여성도 예기치 않은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그 피해의 양상도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만, 미치거나 죽지 않고도 이 폭력적인 여성혐오의 권력과 구조에 어떻게 대항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이돈구 감독의 <미지수>
글 박동수(영화평론가)
*영화 <미지수>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별은 어려운 일이다. 그 이별이 갑작스러운 사건일 경우엔 더욱 그러하다. 누군가를 떠나보낸다는 것은 나를 구성하던 세계의 한 조각을 잃는 일이다. 가족, 친구, 연인, 동료, 어떤 관계에 있느냐에 따라 그 조각의 크기는 다르겠지만, 상실감이라는 단어의 무게는 모두에게 비슷한 것으로 다가온다. 이돈구의 다섯 번째 장편영화 <미지수>는 이별에 관한 이야기다. 사실 영화에서 ‘이별’이라는 키워드를 곧장 포착하기는 어렵다. 영화의 초반부는 이러하다. 조악한 CGI로 표현된 우주비행사가 등장하고, 악몽을 꾼 듯 잠에서 깨어나는 기완(박종환)이 등장한다. 아내 인선(양조아)과 함께 치킨집을 운영하는 그는 통화하며 운전하려는 라이더에게 배달을 맡기지 않겠다고 심술부린다. 화실에서 뭔지 모를 그림을 그리던 지수(권잎새)는 집에 돌아오자 헤어진 연인 우주(반시온)를 만난다. 우주는 실수로 밀어 죽인 친구를 지수의 집 욕조에 넣어두었다. 우주는 아무런 죄책감도 슬픔도 느끼지 않은 채 지수와 대화한다. 죽은 줄 알았던 친구가 갑자기 깨어나 수돗물을 마신다. 다음 날, 지수의 집 욕조에는 우주의 어머니 신애(윤유선)의 시체가 들어 있다.
<미지수>는 관객을 당황스럽게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상황들은 분절적이다 못해 분열적이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플래시백(장례식장 앞의 기완, 화실에서 선물을 받는 지수, 교복 차림으로 놀이터에 앉아 있는 지수 등)들은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서야 온전히 ‘플래시백’으로써 인식된다. 영화는 끊임없이 현재의 시간 사이에 과거의 순간들을 욱여넣는다. 일상생활 중 문득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과거의 후회들처럼, 불쑥 튀어나오는 <미지수> 속 과거들은 이별이라는 상황을 맞이한 이들의 당혹감을 드러낸다. 관객이 마주하는 당황스러운 감각은 거기에 기인한다. 이 영화를 보는 우리는 저들이 왜 과거를 후회하는지, 기완이 찾아간 장례식장에서는 누구의 장례식이 진행 중인지, 지수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고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 장면이 등장한 순간에는 파악할 수 없다.
물론 이와 같은 <미지수>의 영화적 전략을 익숙한 것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플래시백으로 판단될 수 있는 장면의 시제를 명확히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의도적으로 플롯의 효과를 만들어내는 영화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드니 빌뇌브 감독은 <컨택트>의 광폭한 플래시백/포워드를 통해 시간을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인식하는 외계인의 관점을 포착하고자 한다. 외계인의 시간 인식 방법을 깨달은 언어학자는 그럼으로써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인간적 관점을 벗어나 상실감의 재사유를 시도한다. <미지수>의 방법론 또한 그와 비슷하다. 과거는 영화 속 인물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툭툭 튀어나온다. 그것이 우연히 마주하는 일상의 순간이건 악몽 속의 마주침이건 말이다. 사실 ‘플래시백’ 장면들만 놓고 본다면 <미지수>의 전략이 눈에 띄게 특별한 것은 아니다. 흥미로운 지점은 죽은 사람들의 귀환이다.
영화에 나오는 첫 번째 죽음, 지수의 집 욕조에 죽은 채 놓여 있던 우주의 친구 영배(안성민)를 떠올려 보자. 피로 가득한 욕조에 누워 있던 영배는 지수와 우주가 말다툼을 이어가던 사이 깨어나 수돗물을 마신다. 두 주인공은 그를 보고 당황스러워한다. 영배는 자신이 죽어있었음을 알지 못한다. 두 번째 죽음, 이번엔 신애의 시체가 욕조에 담겨 있다. 넋나간 듯한 우주는 자신이 어머니를 죽였는지조차 모른다. 지수와 우주는 산속에 신애의 시체를 암매장하려 한다. 집에 돌아와 시체를 비닐로 감싸자, 지수의 휴대전화에 신애의 전화가 걸려 온다. <미지수>에서 죽은 이들은 계속 부활한다. 우주가 영배를 두 번째로 죽였을 때, 우리는 영배가 정말로 죽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영화의 후반부 자신 앞으로 배달 온 택배를 뜯어 그 안에 든 액자를 확인하는 영배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지수에게 신애의 전화가 걸려온 다음 장면은 기완과 인선의 치킨집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던 우주의 모습이다. 비가 오던 날, 기완은 퇴근하려던 우주를 붙잡고 잘못 배달된 치킨의 재배달을 부탁한다. 신애는 지수를 자신의 집으로 부른다. 지수와 우주 커플에게 종종 해주던 꽃게탕을 끓여준다. 두 사람의 대사를 통해서야 <미지수>에서 정말로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관객은 그 순간에서야 우주가 죽었음을, 이미 죽은 우주가 지수 앞에 나타났던 것임을 알아챌 수 있다.
<미지수>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간다. 영화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것은 과거뿐만이 아니다. 기완은 꿈에서 표류하는 우주인을 마주한다. 우주선 발사에 대한 기완의 집착은 아마도 우주의 죽음 이후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영화는 신애의 전화를 받고 그의 집으로 향하는 지수와 치킨집 주방에서 우주선 발사 뉴스를 보는 기완을 교차하여 보여준다. 우주는 지수가 그린 그림을 들고 그의 뒤를 따라오고 있다. 우주는 “다리가 아프다”는 말을 남긴 채 사라지고 그가 들고 있던 그림은 길 위에 놓여있다. 우주선이 발사되는 순간의 장면이 등장하고, 스마트폰으로 그 장면을 보고 있는 기완의 시선은 인선과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는 (과거의) 우주에게 향한다. 지수가 신애의 아파트에 도착하자 하늘 멀리 날아가는 우주선의 형상이 보이고 지수는 그것을 바라본다. 우주의 죽음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순간은 이후 등장하는 지수와 신애의 대사를 통해서이지만, 이 시점을 마지막으로 우주라는 인물은 더이상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마치 우주선이 날아가는 장면을 통해서야 기완과 지수가 마침내 우주가 죽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처럼, 우주는 다시 영화로 귀환하지 못한다.
“우주를 향해 날아가는 우주선”이라는 묘사는 일종의 말장난이다. 우주는 기완의 꿈에 등장하는 표류한 우주인이고, 기완은 세상을 떠나 우주를 떠돌고 있는 우주에게 닿고자 우주선 발사에 집착한다. 그것은 우주인에게로 향하는 우주선의 모습으로써 표현된다. 다소 조악한 CGI로 그려진 우주의 모습은 기완과 지수를 비롯한 ‘살아남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계와는 동떨어진 무언가로,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지만 그리워하는 이가 발이 묶여 있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물론 이와 같은 장면들은 기완의 망상에 불과하다. 아니, 망상이라기보단 기완의 소망과 가깝다. 기완이 우주선의 발사를 보던 장면 중 끼어드는 것은 비 오는 날 재차 배달에 나가던 우주의 마지막 모습이다. 영화 초반부에 등장한 잠든 기완이 TV 소리가 시끄럽다며 소리지를 때 들려오는 빗길사고 뉴스를 기억한다면, 우주가 사고로 죽었음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다소 산만하게 <미지수>의 장면들을 이야기했다. 재차 말하자면, <미지수>의 장면들은 서로 분열적이다. 과거의 장면들은 하나의 선형적인 이야기로 구성되기보단 툭툭 터져 나오는 기완의 죄책감과 지수의 후회를 표현하듯 현재의 장면들 사이를 파고든다. 그러한 구성은 <미지수>의 전체를 쉽사리 파악하지 못하게끔 방해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마지막까지 관객은 영화의 장르를 무어라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우주인과 우주선이 등장하지만 SF는 아니다. 시체가 등장하지만 호러나 스릴러는 아니고, 시체가 되살아나지만 판타지는 더욱 아니다. 통속적인 멜로드라마나 가족드라마의 틀을 따르지도 않는다. <미지수>는 ‘우주의 죽음’이라는 사태를 각자 소화하고 있는 사람들을 담아낸 군상극에 가깝다. 영화의 두 축인 기완과 지수는 영화 내내 마주치지 않는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평행선을 그리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우주선이 발사되는 순간 교차편집을 통해 잠시간 겹쳐질 뿐이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고 기완에게 외치는 인선의 대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미지수>는 죽음이라는 이별 이후의 삶을 살아내는 각자의 방식을 담아낸다.
그런 맥락에서 신애의 집 베란다에 놓여있던 소총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수에게 꽃게탕을 차려주고 대화하던 신애는 밖에서 폭발음이 들리자 망설임 없이 베란다로 향해 소총을 집어 든다. 갑작스레 펼쳐진 전쟁 같은 상황을 지수는 멍하니 바라본다. 파편과 먼지가 흩날리고, 건너편의 아파트는 반쯤 무너져 있다. 집으로 돌아온 지수는 거실 소파에 앉는다. 꿈에서 만난 마술사가 딱 10분만 우주를 만나게 해주었다는 그의 내레이션은 앞서 등장한 우주의 모습이 환상에 가까웠음을 드러낸다. 우주를 잊지 못한 지수는 우주의 환상을 만들어냈고, 우주에게 죄책감을 지닌 기완은 그에게 자신이 닿기를 소망하며, 우주의 어머니 신애는 아들이 배달 중 사고로 죽은 세상에 맞서가며 살아간다. 지수는 우주를 다시 만나는 판타지를 꿈꾸고, 기완은 ‘누리호’의 발사 성공이라는 사실을 빌어 우주에게 닿고자 하는 SF적 망상을 벌이며, 신애는 전투로 가득한 디스토피아 속에서 살아간다. <미지수>라는 군상극은 각 인물에게 미묘한 장르적 성격을 부여하고, 그것들의 교차 속에서 ‘우주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서서히 묘사한다. 영화는 그 사건을 보여주지도 들려주지도 않는다. 다만 그 주변을 묘사해냄으로써, 다소 투박할지라도 죽음과 이별을 우리 앞에 존재하는 사건으로 다뤄낸다.
올해 4월은 유독 심란한 한 달이었다. 세월호참사 10주기를 맞이해 여러 편의 영화가 극장을 찾았고, 영화들 속에 누적된 10년의 세월을 바라보았다. <세월: 라이프 고즈 온><바람의 세월><세 가지 안부>는 모두 우리가 지난 10년 동안 어떤 이별을 겪었는지에 관한 영화들이었다. 개인적으로 올해 첫 극장 관람작이었던 <별은 알고 있다>도 마찬가지다. 10.29 이태원참사 1주기에 맞추어 처음 공개되었던 이 영화는 지난 1년을 담아낸다. 10년과 1년, 단순한 숫자계산으로는 10배의 차이를 갖지만 두 세월이 주는 시간의 의미는 비슷하다. 꼭 참사를 직접 묘사하거나 언급하지 않음에도 우리에게 그것을 인식시키는 영화들을 종종 보게 된다. <미지수>는 우리에게 그 죽음들을, 그 이별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별의 상실감은 하나의 방법으로만 표현되지 않는다. 상실감의 다양한 표현 속에서야 우리는 “어떻게 이별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미약하게나마 답변할 수 있다. <미지수>는 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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