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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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박하고 진지한 균형 찾기
79회 칸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세계 영화산업의 변화
글, 사진 _ 김희영(영화진흥위원회 정책개발팀 선임연구원),
김수빈(영화진흥위원회 정책개발팀 연구원)
2026-06-22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 초청 여부가 영화산업의 성패를 가르는 절대 지표는 아니다. 하지만 <기생충>이 72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한 편의 영화가 한국영화에 대한 세계적 인식을 얼마나 크게 바꿔놓을 수 있는지 경험한 바 있기에 올해도 한국 초청작에 대한 기대감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올해 칸에는 3편의 장편영화 <호프>, <군체>, <도라>와 2편의 단편 <새의 랩소디>, <사일런트 보이스>(미국 국적, 한국인 감독), 그리고 확장현실(XR) 작품 <부우우-피이이>까지 총 6편이 초청되었다. 줄곧 칸의 부름을 받아왔던 기성 감독들의 작품부터 한국영화의 미래를 이끌어갈 신예 감독들의 단편, 첨단기술 융합 작품까지 골고루 초청을 받은 것은 괄목할 만한 성과이다. 여기에 박찬욱 감독의 한국인 최초 심사위원장 위촉 소식이 더해지며 칸영화제에 대한 기대감은 점차 고조되었다.
5월 중순 프랑스 남부 도시 칸은 내리쬐는 햇볕만큼이나 뜨거운 현장이었다. 그 열기 속에서 칸영화제가 단순한 축제를 넘어 전 세계 영화산업의 현재를 마주하고 미래상을 가늠할 수 있는 자리임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정책개발팀도 79회 칸영화제와 칸 필름마켓(Marché du Film) 현장을 찾았다.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피오르>의 크리스티안 문주 감독은 수상 소감으로 “큰 변화를 요구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 작은 변화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이는 유럽 사회를 비롯한 전 세계적 정치 분열 상황을 향한 메시지이기도 했지만, 칸 현장에서 공유된 글로벌 영화산업에 대한 문제의식과 변화의 감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칸영화제를 찾은 각국 영화산업 관계자들은 산업 생태계 변화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균형점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한국 영화산업 역시 글로벌 흐름을 놓치지 않고 기존 문법을 벗어나 새로운 협력과 전략을 모색해야 하는 시점임을 느꼈다. 이 글을 통해 칸영화제 현장에서 확인된 세계 영화산업의 변화 양상, 자세히는 아시아 시장의 부상 및 일본의 글로벌 전략, 극장 회복 전략, AI 시대 창작자의 역할, 그리고 국제공동제작의 변화 흐름을 차례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칸국제영화제 필름마켓 전경
2025 세계 영화산업 회복 이끈 아시아 시장
칸영화제 기간 중 유럽시청각관측소(European Audiovisual Observatory, 이하 ‘EAO’)는 매년 세계 영화산업을 분석한 보고서를 발표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2025년 세계 영화산업을 분석한 ‘FOCUS 2026’을 만날 수 있었다. EAO의 콘퍼런스는 팬데믹 이후 세계 영화산업의 회복 양상과 지역별 시장 변화, 그리고 유럽과 일본의 영화 정책 변화 방향을 엿볼 수 있는 자리였다.
올해 발표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메시지는 2025년 세계 영화시장의 회복 양상이 지역별로 뚜렷하게 갈렸으며, 회복의 중심에 아시아 영화시장이 있다는 점이었다. FOCUS 2026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기준 전 세계 극장 관객 수는 약 50억 명으로, 팬데믹 이전 대비 약 72% 수준으로 회복했으며, 2024년 대비 3% 증가했다. 특히 중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시장이 이러한 성장세를 주도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유럽 시장은 미국 블록버스터 영화의 감소와 자국 영화 흥행 부진 등 영향으로 대부분의 지역에서 전년 대비 하락한 양상이었다.
2025년 영화산업에서 특별히 주목받은 국가는 단연 일본이었다. 일본은 주요 영화시장 가운데 유일하게 팬데믹 이전 관객 수준을 넘어선 국가로 소개되었다. 2025년 일본 박스오피스 상위 20편 중 14편이 일본 자국 영화였으며, 미국영화 점유율은 약 20% 수준에 그쳤는데, 이는 대부분 국가의 영화산업이 할리우드 영화에 좌우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이다. 또한, 2025년 일본 영화 관객의 약 45%는 해외시장에서 발생했다. 즉, 일본은 강력한 자국 콘텐츠를 기반으로 내수 시장을 압도하고,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까지 확보한 한 해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글로벌 성장 배경에 대해 일본 측 패널로 참석한 일본 경제산업성(Ministry of Economy, Trade and Industry, 이하 ‘METI’)의 문화창조산업과장 나오히로 카지는 2020년이 주요한 전환점이었다고 설명했다. ‘보너스’에 불과했던 해외 매출이 이 시기를 기점으로 내수 시장 규모를 넘어서며 일본 정부가 해외시장을 핵심 시장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제작비가 증가하고 투자가 확대됐으며, 이것이 콘텐츠 품질 향상으로 이어져 결과적으로 일본영화의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는 구조를 만들었다는 분석이었다.
| 순위 | 영화 제목 | 관객 수 (명) |
|---|---|---|
| 1 |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 | 26,622,670 |
| 2 | 국보 | 13,202,879 |
| 3 | 명탐정 코난: 척안의 잔상 | 10,120,076 |
| 4 | 주토피아 2 | 7,078,511 |
| 5 |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 편 | 6,590,684 |
| 6 | 극장판 TOKYO MER ~달리는 응급실~ 난카이 미션 | 3,888,271 |
| 7 | 극장판 도라에몽: 진구의 그림이야기 | 3,787,301 |
| 8 | 8번 출구 | 3,646,299 |
| 9 |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 | 3,402,028 |
| 10 |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 | 3,206,454 |
| 11 | 마인크래프트 무비 | 3,013,241 |
| 12 | 릴로 & 스티치 | 2,420,535 |
| 13 | 그랑 메종 파리 | 2,323,891 |
| 14 | 위키드 | 2,225,138 |
| 15 | 기동전사 건담 지쿠악스 비기닝 | 2,184,249 |
| 16 | 일하는 세포 | 2,118,639 |
| 17 | 폭탄 | 2,060,538 |
| 18 | 366일 | 2,000,364 |
| 19 | 첫 번째 키스 | 1,982,980 |
| 20 |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초화려! 작열하는 떡잎마을 댄서즈 | 1,908,915 |
지난해 전 세계 극장 관객 수는 약 50억 명으로 전년 대비 3% 증가했다. 특히 일본은
2025년 일본 박스오피스 상위 20편에 자국 영화를 14편 올렸다(제공=FOCUS 2026)
EAO 발표에서는 유럽과 일본의 영화 정책 변화 흐름도 살펴볼 수 있었는데, 양측 모두 자국 영화 경쟁력 강화와 글로벌 시장 확대라는 공통의 산업 목표를 전제로 정부의 역할을 고민하는 점이 흥미로웠다. 민간 중심이던 일본의 산업은 정부가 지원을 확대하며 보다 적극적인 산업 정책으로 변화하고 있었고, 영화의 문화적 기여를 중요시하던 유럽 시장은 조금 더 산업적 측면 강화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정책의 무게 중심이 옮겨가고 있었다.
유럽영화는 제작비의 50~60%가 공공 재원을 통해 조달되는 공공 중심 영화산업 구조를 갖고 있다. 이 바탕에는 국가의 지원 없이 자국 영화산업이 성장하기 힘들다는 인식과 영화를 문화적 다양성 실현을 위한 공공재로 인식하는 정책 방향이 깔려 있는데, EAO는 최근 이러한 전통적인 구조가 ‘자동지원 확대’, ‘제작 인센티브 확대’, ‘스트리밍 플랫폼 투자 의무 확대’의 세 가지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민간 시스템과 정부 정책 양쪽 모두에서 더 극적인 변화를 겪고 있었다. METI의 나오히로 카지 과장은 일본 영화시장의 성장과 함께 전통적인 콘텐츠 공동 투자 구조인 제작위원회 시스템이 점점 규모가 축소되고 있으며, 일본 정부는 해외시장 개척에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일본의 콘텐츠 산업 지원 예산이 전년 대비 두 배 이상 증가하고, METI의 관련 예산 또한 세 배 가까이 확대된 배경에 정부의 인식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 내 변화 흐름을 통해 일본영화의 글로벌 부상이 단순히 특정 작품의 흥행의 결과가 아니라, 글로벌 시장을 전제로 투자와 제작, 정책 방향 모두를 전방위적으로 재설계한 결과임을 알 수 있었다.
이번 FOCUS 2026 발표에서 중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시장이 2025년 세계 영화산업 회복을 주도했다는 분석은 분명 고무적이었지만, 그 중심에 한국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한국 영화산업 역시 관객 회복뿐 아니라 콘텐츠 경쟁력과 해외시장 전략,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정부의 정책 지원까지 다각도의 고민이 필요한 시점임을 느꼈다.
유럽시청각관측소(EAO)와의 미팅(왼쪽) 및 FOCUS 2026 발표 현장
일본 IP의 글로벌화, 진정성이 열쇠
앞서 살펴본 FOCUS 2026 보고서가 숫자로 일본의 부상을 설명했다면, 칸영화제 필름마켓 현장의 콘퍼런스들은 그 숫자 뒤에 어떤 구조와 전략이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올해 필름마켓에서는 일본이 주빈국으로 참여하며 곳곳에 일본 관련 세션이 배치되었고, 일본 영화산업의 현재와 미래를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일본 IP의 글로벌 전략을 다룬 세션들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된 키워드는 ‘진정성(Authenticity)’이었다. 소니 픽쳐스 관계자는 만화 <원피스>의 넷플릭스 실사화 성공 사례를 들며, 할리우드 어댑테이션이 실패를 반복하다 최근 성과를 내기 시작한 배경에는 원작에 대한 깊은 이해와 원작자의 실질적인 각색 참여가 있었다고 설명했다.1) 과거 할리우드식 각색·실사화가 실패를 반복했던 이유도 결국 원작의 세계관과 팬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감각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본 IP가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일본성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특수성과 고유한 정서를 제대로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 맥락에서 팬덤의 역할도 조명되었다. 할리우드가 일본 IP에 주목하게 된 배경으로 만화에서 극장판 애니메이션까지 이어진 <체인소 맨>도 언급되었다. <체인소 맨>은 기존의 강한 극장 기반 없이도 팬 커뮤니티와의 진정성 있는 소통을 해내어 성공한 사례로 소개되었다. 결국 일본 IP의 글로벌 확장은 대규모 마케팅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원작에 대한 이해와 팬덤과의 관계 설정에 달려 있다는 분석이었다. 또 다른 세션2)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코믹스 웨이브 필름(CoMix Wave Films)과 스튜디오 트리거(Studio TRIGGER) 관계자들 역시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했다. 글로벌 관객을 의식하되 특정 해외시장에 맞추기 위해 창작 방식을 바꾸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감독이 자신의 세계를 온전히 담아낼 때 그 진정성이 오히려 국경을 넘는다는 믿음이었다.
배급의 관점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해외 배급을 다룬 세션3)에서는 젊은 세대에게 일본 애니메이션은 더 이상 하위문화가 아니라, 자신들의 문화 감각을 형성하는 중요한 콘텐츠가 되고 있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이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일부 마니아층의 콘텐츠를 넘어 세대적 문화 경험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일본 IP의 세계화는 원작과 창작자에 대한 신뢰, 팬덤과의 관계, 그리고 시대적 수용이 함께 맞물려서 가능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1) ‘The Global Impact of Japanese Intellectual Property(일본 IP의 세계적 영향력)’, 79회 칸국제영화제 필름마켓 콘퍼런스
2) ‘The Global Appeal of Japanese Anime and the Creative Forces Behind It(일본 애니메이션의 글로벌 시장 어필과 창작 동력), 79회 칸영화제 필름마켓 콘퍼런스
3) ‘From Japan to the World: Expanding the International Distribution Potential of Japanese Animation(일본에서 세계로: 일본 애니메이션 국제 배급 가능성의 확대)’, 79회 칸영화제 필름마켓 콘퍼런스
일본 도쿄국제영화제 콘텐츠 마켓(Tokyo International Film Festival Content Market,
TIFFCOM)과의 미팅 현장(왼쪽) 및 일본 IP 관련 콘퍼런스 현장
글로벌 시장에서 찾은 극장 회복의 조건
영화산업의 환경 변화에도 불구하고 극장은 여전히 관객과 만나는 가장 중요한 접점이다. 프랑스 국립영화센터(Centre National du Cinéma et de l'Image Animée, 이하 ‘CNC’)는 올해 칸영화제 기간에 맞춰 14개 주요국 영화시장을 대상으로 한 ‘글로벌 극장 트렌드’ 연구4)를 발표하며 관련 콘퍼런스를 주최했다. 이 자리에서는 최근 영화시장의 변화 원인을 찾고 극장 중심의 미래 전략을 들어볼 수 있었다. CNC의 연구 결과가 보여주는 극장 회복의 조건은 세 가지, 콘텐츠 공급과 프리미엄 경험, 그리고 다양성이었다.
‘영화관의 위기는 관객 감소가 아니라 콘텐츠 부족이다.’ 패널들은 세계 영화시장이 팬데믹 이전 수준으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는 배경을 단순히 관객 감소로 설명하지 않았다. 영화 공급이 감소했고, 특히 중저예산 영화와 다양한 장르영화가 줄어들면서 관객들이 영화관을 찾을 이유도 함께 감소했다는 분석을 제시했다. 흥미로운 점은 회복세가 상대적으로 빠른 국가들의 공통점이었다. 일본, 베트남 등 최근 극장 시장이 성장하고 있는 국가들은 모두 강력한 자국 영화산업을 보유하고 있었다. 기존 프랑스나 아시아를 중심으로 관찰된 자국 영화 선호 현상이 이제 다른 지역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뿐 아니라 자신들의 이야기, 자신들의 문화 등 공감할 수 있는 영화를 원하고 있다는 변화를 짚었다.
CNC의 이러한 분석은 최근 한국 영화산업이 직면한 상황과도 매우 맞닿아 있다. 한국 역시 팬데믹 이후 중저예산 영화의 공급 위축이 심화되었고, 이는 곧 전체 시장 관객 감소로 연결되고 있는 양상이다. 또한, <왕과 사는 남자>를 비롯한 최근 한국 영화시장 흥행작들 사례는 한국 관객들도 우리의 문화와 정서를 반영한 로컬 콘텐츠에 수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경험과 커뮤니티.’ 패널들은 오늘날 프리미엄 극장 경험이 중요해지고 있다고 언급하며, 프리미엄이 단순히 기술을 의미하진 않는다고 짚었다. 오히려, 편안함과 큐레이션, 환대의 기분, 공간 디자인 등 전체 경험적 측면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스트리밍 플랫폼에 익숙해진 관객이 영화관을 찾는 것은 단순히 특별한 영화를 보기 위해서가 아닌 집에서 경험할 수 없는 사회적 경험을 얻기 위해서다. 특히, 젊은 세대에서 극장이 이전보다 오히려 더 중요한 공간이 되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Z세대와 알파세대는 스트리밍 플랫폼을 가장 적극적으로 이용하면서도 동시에 영화관을 가장 자주 찾는 세대이며,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경험이라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패널들은 “스트리밍은 극장의 적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극장 경험과 관련하여 독립예술영화관의 역할도 주목받았다. 대형 극장 체인과 비교하여 독립예술영화관은 아이맥스(IMAX)와 같은 기술을 보유하기 어렵고, 수익성도 높지 않기에 끊임없이 관객을 모으기 위해 큐레이션과 커뮤니티 등 관객의 경험적 측면을 고민한다. 이런 측면에서 현재 독립예술영화관들이 하는 고민과 대응은 약 10년 후 전체 영화관 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유럽의 많은 독립예술영화관들은 이미 지역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영화제, GV, 공연 등을 연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관객과 연결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패널들은 독립예술영화관뿐 아니라 대형 극장 체인 또한 앞으로 영화 상영 외에 프로그래밍과 이벤트 기획, 영화 마케팅에서 훨씬 더 많은 역할을 요구받게 될 것이라는 데 공감했다. 미래 영화산업에서 극장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지점이었다.
‘산업의 경쟁력이 될 다양성.’ 볼만한 콘텐츠의 공급도, 극장에서의 프리미엄 경험도, 결국 다양성의 문제로 연결될 수 있다. 한국 영화산업이 가진 고민과 마찬가지로 유럽 시장 역시 특정 작품에 관객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현상에 대한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패널들은 극장 생존을 위한 핵심 과제로 미래 관객 개발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다양성의 중요성에 공감했다.
유럽 전역에서 1천300개 이상의 영화관 네트워크를 가진 유로파 시네마(Europa Cinemas)의 대표 파티마 주메르(Fatima Djoumer)는 유로파 시네마의 지원을 받아 네덜란드에서 시작한 독립예술영화관 구독 서비스 ‘시네빌(Cineville)’을 다양성을 기반으로 관객을 확대한 사례로 소개했다. 시네빌은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벨기에, 독일, 스웨덴 등 유럽 각국으로 서비스를 확대해 나가며, 일부 국가에서는 25%에 가까운 관객 수 증가 효과를 보였다. 이러한 극장 구독 서비스가 관객 취향을 다양화시키며 일상적으로 극장에 가는 문화를 만들었다는 얘기다. 결국, 극장 회복의 핵심은 흥행을 보장하는 블록버스터 한 편, 천만 영화 한 편이 아니라 다양한 영화가 지속적으로 공급되는 생태계를 갖고 있느냐는 것이다.
4) CNC, ‘Les salles de cinema : quelles tendances a l'international?’, 2026. 5. 17.

프랑스 국립영화센터 주최 글로벌 극장 트렌드 포럼 현장
결국 통제권은 창작자에게
AI 기술 관련 콘퍼런스에서는 AI를 대하는 전 세계 영화인들의 태도 변화가 흥미로운 점이었다. 그간 영화산업에서 AI를 둘러싼 논의는 ‘창작자의 자리를 위협할 것인가’, ‘영화의 예술성이 훼손될 것인가’ 등의 우려가 중심이었다면, 올해 칸에서는 ‘어떻게 잘 활용할 것인가’로 논의의 중심이 옮겨갔다. 칸에서 만난 영화인들은 AI를 더 이상 창작자를 대체할 위협으로만 보지 않았다. AI는 창작자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 제작 효율성을 높여주는 새로운 도구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모습이었다.
할리우드 제작 현장을 경험한 VFX 및 프로덕션 전문가로 구성된 콘퍼런스 패널들은 현재의 생성형 AI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능력에 있어서는 굉장한 발전을 이뤘지만, 감독이나 VFX 아티스트 등 창작자가 원하는 수준까지 세밀하게 수정하는 능력은 여전히 부족한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예를 들어, “카메라를 조금만 더 아래로 움직여 달라”거나 “배우의 감정을 미묘하게 바꿔달라”는 요구 등을 AI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VFX 슈퍼바이저이자 AI 영상 기술 스타트업 창업자인 니콜라 토도로비치(Nikola Todorovic)는 이런 면에서 앞으로 AI 기술 발전의 핵심이 단순 생성 기술이 아니라 ‘편집 가능성(Editability)’과 ‘세밀한 통제력(Control)’ 확보가 될 것이라고 말하며, “결국 통제권은 창작자에게 있다(Control starts with the creator)”라고 강조했다.
패널들은 AI가 영화 제작비 구조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전망했다. 토도로비치는 현재 할리우드 영화의 제작비 구조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진단하며, AI가 제작비를 낮춤으로써 보다 많은 중소 규모 영화가 제작될 수 있고, “5천만 달러 영화 한 편보다 500만 달러 영화 열 편이 만들어지는 환경이 산업적으로 더 건강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할리우드에서 AI 기반 영화 제작사를 운영하고 있는 바바라 포드 그랜트 역시 이러한 방향에 동감하며, AI가 새로운 세대의 영화인들을 등장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각종 기술 콘퍼런스들에서 공통적으로 강조된 점은 AI 등 기술 발전에서 결국 창작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AI 등 최신 기술 동향 관련 콘퍼런스
공동제작은 계약이 아니라 관계
전 세계 영화시장에서 국제공동제작이 화두로 떠오름에 따라 올해 필름마켓에서도 관련 콘퍼런스들이 다수 진행됐다. 그중 인상 깊었던 세션 중 하나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다>의 제작 과정을 다룬 케이스 스터디였다. 일본 원작으로 일본 감독이 연출하는 영화가 프랑스, 벨기에, 독일이 참여하는 유럽 공동제작 구조로 완성된 사례로, 국제공동제작이 왜 단순한 자금 조달의 문제가 아닌지를 잘 보여주었다. 이 프로젝트는 약 5년의 제작 기간 중 제작 구조를 설계하는 데만 거의 3년이 소요됐다. 3시간이 넘는 긴 러닝타임과 섬세한 서사로 인해 일반적인 제작 방식으로 만들기 쉽지 않은 프로젝트였다. 일본의 오시다 코스케 프로듀서는 하마구치 감독의 창작 방식과 판단을 향한 국제적인 신뢰가 여러 파트너를 프로젝트에 연결하는 중요한 기반이 됐다고 설명했다. 제작에 참여한 독일의 베티나 브로켄바흐 프로듀서는 일본과의 첫 공동제작 경험을 마치고 “국경을 넘어 영화라는 이름 아래 힘을 합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태국영화 <9 Temples to Heaven>도 약 9년에 걸친 다국적 공동제작 과정을 공유했다. 프로듀서는 케이스 스터디를 통해서 공동제작의 본질이 ‘계약’이 아닌 ‘신뢰’와 ‘장기적 관계’임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이 작품은 태국, 싱가포르, 홍콩, 프랑스, 인도네시아, 중국, 노르웨이, 카타르 등이 참여했다. 제작진은 공동 제작을 처음 시작할 때 “(파트너들에게) 잘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했다”는 사실을 농담처럼 털어놓으면서도, 결국 소통과 신뢰, 정직함이 가장 중요한 역량이었다고 돌아봤다. 공동제작의 본질이 계약서상의 조건만이 아니라 오랜 시간 불확실성을 함께 견디는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카밀라 안디니 감독의 신작 <Four Seasons in Java> 케이스 스터디 역시 비슷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7개국 공동제작으로 기획되었으며, 공공 펀드와 민간 투자, 브랜드 파트너십이 결합되어 제작된 케이스였다. 인도네시아 제작사 포르카 필름스(Forca Films)의 프로듀서 이파 이스판샤(Ifa Isfansyah)는 여러 펀드에 지원했다가 탈락하고 아마존 스튜디오의 철수로 개발이 중단되는 등 수차례 좌절을 겪었지만, 그때마다 새로운 파트너와 자금 조달 방법을 찾아 나섰다. 그는 “공동제작은 거절과 탈락의 연속”이라면서도, 반대로 자신이 파트너를 선택할 때는 단순한 투자 규모보다 제작, 기술, 배급 과정에서 어떻게 실질적 역할을 해줄 수 있는지를 중요하게 보았다고 설명했다.
AI국제공동제작 케이스 스터디 현장
세 사례를 관통하는 공통점은 하나였다. 공동제작에서 자금 구조와 계약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사람에 대한 신뢰, 즉 서로의 비전을 이해하는 사람과 오랜 시간을 함께 견디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한국 역시 국제공동제작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커지고 있는 만큼, 실행 경험과 노하우를 체계적으로 축적해 갈 필요가 있다. 국제 마켓과 랩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개별 프로젝트 단위를 넘어 파트너십 자체를 장기적으로 쌓아가는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칸영화제 현장에서 만난 세계 영화산업 관계자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변화에 적응하며 새로운 균형을 찾고 있었다. 팬데믹 이후의 불확실성, AI 기술의 부상, 스트리밍과 극장의 긴장 관계, 그리고 할리우드 중심에서 로컬 콘텐츠로의 무게 이동까지. 이 모든 변화의 흐름 속에서 반복된 말은 결국 창작자, 관계, 진정성이었다. 올해 칸은 화려한 레드카펫 너머에서 세계 영화산업이 얼마나 절박하고 진지하게 스스로를 갱신하려 하는지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 한국 영화산업 역시 그 흐름 안에서 우리만의 언어로 새로운 챕터를 써나가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