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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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는다”
백준오 플레인아카이브 대표
글 _ 김혜선(웹매거진 한국영화 편집장)
사진 _ 이승재(한경매거진앤북 기자), 백준오
2026-06-22
천만 영화는 천만 영화다. 지난 2월 4일 개봉 이후 4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주당 3천 명 이상의 관객이 들고 있는 <왕과 사는 남자>(이하 <왕사남>, 6월 19일 기준 누적 관객 수 1천690만 명)는 각본집 또한 흥행에 성공했다. 출간 전 예약판매만으로 4쇄를 찍었고, 지난 3월 23일 출간 직후 예스24 종합 베스트셀러 부문 1위를 차지했다. <왕사남> 각본집은 현재까지 9쇄를 찍었으며 2만 5천 부를 판매했다. 교보문고와 예스24의 2026년 상반기 결산에서 예술 분야 판매 1위를 한 <왕사남> 각본집의 출판사는 플레인아카이브(PLAIN ARCHIVE)다.
한국영화 및 수입 예술영화의 퀄리티 높은 DVD, 블루레이를 제작해온 플레인아카이브는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영화 전문지에서 필자로도 활동했던 백준오 대표가 영상 관련 테크니컬 회사, 홈비디오 제작사 근무를 거쳐 2013년 <멜랑콜리아>(2011)를 첫 블루레이 타이틀로 내면서 창립한 회사다. 지난 13년간 폭넓은 분야에서 재조명해야 할 다양성 영화들의 고품격 아카이빙(DVD, 블루레이, 음반, 도서 등)을 지향하는 물리 매체 전문 회사로 자리매김했다. 이제는 각본집, 메이킹 아트북, 사진집, 영화 관련 에세이까지 내는 영화 전문 출판사로도 상당한 업력을 가졌다. 초판을 겨우 판매한 경우부터 대형 베스트셀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화 출판물을 경험한 백준오 대표. 한국영화 각본집을 둘러싼 시장의 상황과 그 안에 새겨 넣은 애정, 출판 팬덤의 영향력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13년간 국내외 영화들의 다양한 물리 매체를 만들어온 백준오 플레인아카이브 대표
영화의 감동을 ‘빨리’ 손에 쥐도록
<왕사남> 각본집 출간은 배급사 쇼박스가 시사회 직후 플레인아카이브에 먼저 제안했다. 백준오 대표는 “그간 쇼박스와 여러 홈비디오, 출판 작업으로 신뢰 관계가 형성되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시사 직후 관객에게 울림이 있겠다, 각본집에 대한 수요가 어느 정도 있겠다고 판단해서 고민 없이 바로 계약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울림이 클 줄은 몰랐다”고 말한다.
한국영화 각본집의 판권 계약은 시사회 즈음 입소문이 나거나 개봉 전 해외 주요 영화제에서 화제가 되면 출판사들이 배급사에 각본집 출간을 제안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최근에는 영화 개봉 전이나, 초기 기획 단계에서부터 각본집 출간을 타진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화제작의 경우 여러 출판사들이 동시에 제안을 하게 되면 제안서를 받고 비딩을 하면서 선인세 경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미니멈 개런티(Minimum Guarantee, MG)가 급격히 치솟기도 한다. 현재 각본집, 대본집 시장에 문학동네나 창비, 민음사 같은 대형 출판사들도 뛰어들고 있다. 백준오 대표는 “플레인아카이브는 선인세나 마케팅 파워 면에서는 그들과 도저히 경쟁할 수 없는 마이크로 출판사다. <왕사남> 각본집 선제안은 우리도 의아할 정도였는데, 우리 회사의 앞선 작업들을 좋게 봐준 게 아닌가 한다”고 말한다.
<왕사남> 각본집의 경우 중요한 것은 출간 속도였다. 당시 쇼박스는 연일 기록을 갱신하던 영화의 흥행을 위해 전력투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개봉 직후 빠른 출간으로 영화의 기운을 확장하길 원했던 모양새다. 당장 오랜 기간 영화계 안에서 업을 이어온 출판사 플레인아카이브를 선택한 것도 그런 영향이 커 보인다. “<왕사남>은 일반 독자들이 각본집을 구매한 것도 있지만, 전국의 읍·면 소재 도서관들까지 안 들어간 곳이 없을 정도다. 확실히 국민영화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의 영향이 있음을 새삼 느낀다”는 백준오 대표의 말처럼 성공한 영화는 2차, 3차 산업까지 미치는 여파가 크다.
플레인아카이브가 제작하는 블루레이, 도서, 음반의 아트워크를 신경 써온 만큼 심플해 보이는 <왕사남> 각본집에도 공들인 부분이 많다. 표지는 실제 <왕사남> 촬영 현장에서 사용했던 옛 서책 콘셉트의 ‘현장고’의 느낌을 살리되, 표지 종이에 패턴을 없애고 단종을 상징하는 학과 구름 등을 그려 넣었다. 표지 종이는 한지 계열의 미색 마분지를 사용했다. 표지와 내지를 연결하는 간지는 양피지 계열 종이를 써서, 각본집을 들고 책장을 넘기면 손에 느껴지는 감촉 때문에 독자들의 리뷰에 호평도 많았다고. 각본집을 소장할 만한 ‘소재’로 만들어 영화의 감동을 손에 쥘 수 있게 해준 셈이다.

왼쪽 위부터 ㄹ자로 플레인아카이브에서 제작한 <D.P.> 시즌 1 각본집, <지옥> 시즌 1 각본집, <들개> 각본집, <구경이> 대본집 세트, <왕과 사는 남자> 각본집,
<기생충> 각본집 & 스토리보드북 세트, <미쓰 홍당무> 각본집, <고양이를 부탁해: 20주년 아카이브>, <장손> 각본집, <대도시의 사랑법> 각본집, <라이스보이 슬립스> 각본집
얼마나 강력한 팬덤이냐
<왕사남> 각본집 성공 요인 중의 하나로 단종 이홍위 역 박지훈 배우의 팬덤 영향력이 꼽힌다. 영화와 각본집이 흥행하면서 박지훈이 출연했던 온라인동영상플랫폼(OTT) 웨이브(Wavve)의 오리지널 시리즈 <약한영웅 Class 1>(2022) 대본집도 판매량이 솟구쳤다. 플레인아카이브는 이 대본집의 판권 기간(통상 5년. 이후 1년씩 재연장하는 게 업계 관행이다)을 연장했다. 곧 10쇄를 찍는다. <왕사남>으로 박지훈에게 ‘입덕’한 이들의 관심이 시리즈까지 옮겨왔기 때문이다. “영화가 성공하면 배우의 팬덤이 배우의 이전 시리즈물까지 계속 유입되면서 영화와 시리즈가 서로를 밀어올린다”는 게 백준오 대표의 설명이다.
영화의 흥행은 당연히 각본집에 영향을 미치지만 백준오 대표는 “흥행이 다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플레인아카이브가 낸 첫 정식 출판물은 극장 총 관객 수가 3천400명에 불과했던 영화 <들개>(2014)의 각본집이다. <들개>는 김정훈 감독의 한국영화아카데미(이하 KAFA) 졸업 작품이고, 당시 신인이었던 배우 변요한과 박정민이 출연했다. 소수의 독립영화 팬들 사이에서 ‘나만의 최애 영화’로 여겨지던 <들개>의 각본집을 역시 이 영화의 팬이었던 백준오 대표가 냈고, 개정증보판까지 3쇄를 찍었다. “영화를 아끼는 소수의 강력한 팬덤이 있었기에” 가능한 성과였다.
팬덤은 우선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참여한 책을 ‘갖고 싶다’는 마음으로 영화 각본집이나 드라마 대본집에 접근한다. 그러나 오직 배우만을 보고 구매하는 것만은 아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표현되지 못한 캐릭터 설정, 극 중에 나오지 않는 추가 장면에 대한 궁금증을 각본집을 통해 해소한다. 백준오 대표는 “각본집은 단순한 대사 모음이 아니라 지문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영화 각본집이나 드라마 대본집 안에 적혀 있는 지문들은 일종의 영화 만들기 매뉴얼 같은 기능을 하지만 그중에는 문학적 완성도가 매우 높은 경우가 많다. 영화 <캐롤>(2015) 각본집만 해도 시나리오 작가 필리스 나지가 쓴 지문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소설 속 문장들을 연상시킨다. 그런 부분을 좋아하고 아끼는 독자들도 많다”며 팬덤의 속성이 단순하지 않음을 전하기도 했다.

<들개>는 저조한 관객 수를 기록했지만
각본집만큼은 개정증보판까지 3쇄를 찍을 만큼 인기였다
한국 영화인들의 목소리로
DVD, 블루레이 전문 제작사였던 플레인아카이브가 출판사로까지 영역을 확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코로나19 이후, 홈비디오 시장이 위축되면서 출판 쪽으로 활로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애초의 이유는 조금 다르다. 백준오 대표는 “<캐롤>, <폭스캐처>(2014) 같은 영화들은 블루레이를 제작할 당시에 각본도 남기고 싶어서 아예 각본집을 부록으로 넣었다. 오직 블루레이를 위해서 번역을 새로 했다. 주변에서 그렇게 공들일 거면 아예 각본집을 단행본으로 따로 내라는 의견이 많았다”고 말한다. 플레인아카이브는 이후 <들개> 각본집,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와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각본집을 출간했다.
그때만 해도 홈비디오 사업 비중이 훨씬 컸던 플레인아카이브가 출판 시장에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기생충>(2019) 각본집 이후다. “봉준호 감독님이 <마더>(2009) 10주년 사진집을 만들고 싶다고 먼저 연락을 주셔서 미팅을 갔다. 그런데 플레인아카이브가 각본집도 만드냐고 물어보셨고, 그때 <들개> 각본집을 보여드렸다. 마침 봉준호 감독님이 KAFA 장편제작연구과정 작품들을 보던 가운데 <들개>를 눈여겨보고 추천사를 남겨 주셨던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기생충> 개봉을 준비 중인데 각본집을 내볼 수 있겠냐고 제안하셨다. 무조건 하겠다고 했다. 엄청 큰 복이 굴러들어온 셈이다. (웃음)”
<기생충>이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개봉한 후 <기생충> 각본집 & 스토리보드북 세트는 국내 주요 서점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골든글로브 시상식 외국어영화상 수상 때는 각본집이 품절됐다. 아카데미 4관왕 수상 다음 날 오전 11시 광화문 교보문고에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몰려든 기자들 앞으로 수레를 끌고 각본집을 공수해야 했다.
이후 코로나19가 닥쳤다. “<기생충> 각본집 & 스토리보드북 세트의 성공과 출판 영역으로의 사업 확장이 없었다면 플레인아카이브도 문을 닫았을지 모르는” 시절이었다. OTT로 직행하는 한국영화나 시리즈들이 늘어나고 글로벌 OTT들이 IP를 가져가게 됐다. 백준오 대표도 “한국영화 투자가 넷플릭스로 몰리게 되면 결국 홈비디오를 만드는 우리 같은 회사들에게 판권이 안 나오고, 물리 매체 콘텐츠 공급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고민을 하던 차”였다.
그즈음 블루레이 컬렉터이자 물리 매체 마니아이면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2021~2024)을 만든 제작사 클라이맥스의 변승민 대표가 넷플릭스를 설득하고 플레인아카이브에게 각본집을 제안했다. 독립 애니메이션 시절부터 플레인아카이브와 연이 깊은 연상호 감독도 목소리를 내주었고 결국 <지옥> 각본집을 낼 수 있었다. 백준오 대표는 이 기회를 살리고자 “실익을 따지지 않고 디자인부터 사양까지 충격을 줄 만한” 각본집을 만들고 싶었다고. 이후 <지옥> 각본집이 포트폴리오가 되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D.P.> 각본집과 <약한영웅 Class 1> 대본집까지 출간할 수 있었다.
결국 OTT와의 협업은 한국 영화인들의 아카이빙에 대한 열정과 아쉬움이 기반인 셈이다. “한국영화 제작사들과 감독님들은 혼신을 다한 작품을 끝낸 후 물리적으로 남기고 간직할 수 있는 무언가를 원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최근에는 힘 있는 감독님들과 제작사들이 OTT 플랫폼을 설득하고 있어서 조금씩 기회가 열리는 것 같다. 얼마 전 <대도시의 사랑법>(2024) 각본집으로 인연을 맺은 이언희 감독이 제작하고 이권 감독이 연출한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킬러들의 쇼핑몰>(2024~2026) 시즌 1, 2 합본 대본집의 출간 계약을 맺기도 했다.” 백준오 대표의 설명이다.
<지옥> 각본집(왼쪽), <D.P.> 각본집 등 플레인아카이브는 영화뿐만 아니라
OTT 시리즈 등의 분야에도 발을 넓히고 있다
한국영화 각본집은 더 성공해야 한다
플레인아카이브는 지난해 가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영화 <장손>(2024), <얼굴>(2025), <만약에 우리>(2025), <왕사남>의 각본집을 연달아 냈다. 그간 높은 완성도를 추구하는 만큼 각본집 출간이나 블루레이 제작이 ‘오래 걸린다’는 아쉬움을 들어왔던 터이지만, 이 각본집들은 적확한 시기에 나온 셈이다. 네 편 모두 영화 자체가 좋았다는 백준오 대표는 <장손>은 각본집 저작권이 있는 오정민 감독의 대명필름을 통해서, <대도시의 사랑법>은 김고은 배우의 출연작 블루레이를 많이 만들었던 만큼 배우에 대한 팬심에 더해 배급사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와 새롭게 연을 맺으며 출간했다. <만약에 우리>는 영화적 울림과 문가영, 구교환 멜로의 신선함을 주목했다. <얼굴>은 오랜 인연이 있는 연상호 감독을 향한 응원을 담는 동시에 박정민 팬덤도 생각한 작업이다.
지금껏 플레인아카이브가 내온 영화 출판물이 모두 잘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영화 출판을 계속하는 플레인아카이브의 철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백준오 대표는 이렇게 답한다. “솔직히 철학으로 내세울 건 없다. 냉정하게 손익계산을 하지 않고, 인연을 거절하지 못해서 출간했다가 바로 손해를 본 경우도 많다. 경영적인 측면에서 출판 결정에 대해 더 신중해야 했다는 마음도 든다. 다만 그럴 때조차 퀄리티를 타협한 적은 없다. 너무 잘 만들려고 해서 오랜 시간과 큰 제작비를 들여 손해가 컸던 경우는 있었지만. ‘아카이브’라는 회사의 지향점을 돌아볼 때 결코 후회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새로운 IP 관련 출판이나 블루레이 제안이 오는 경우 “플레인아카이브에서 출간했던 작업물이 인상적이어서 연락했다”는 얘기를 듣는데, 그 작업물이 수익을 거두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출판이나 콘텐츠의 특성상 무엇이 언제 어떻게 역주행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수익이 나지 않더라도 다음 일로 연결되는 결과물의 기획력과 후회하지 않을 완성도. 플레인아카이브와 백준오 대표를 지탱해 주는 힘이기도 하다.
출판 시장에서도 예술 분야의 책들은 독자들의 눈길을 끌기 쉽지 않다. 하지만 최근 한국 드라마, 시리즈 대본집 시장은 초과열 상태다. tvN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2024) 대본집 세트(2권)가 그 열기의 중심에 있다. 방영 중에 신드롬급 인기로 여러 출판사들이 판권 경쟁에 뛰어들어 MG가 치솟았고, 5만 5천 세트 판매됐다. 한국영화 각본집 시장에서 ‘히트작’은 손에 꼽힌다. <아가씨>(2016) 각본집이 2만 부 이상, <기생충> 각본집 & 스토리보드북 세트가 3만 부 이상 판매됐다. <헤어질 결심>(2022) 각본집은 25쇄를 찍었다. 현재 한국영화 각본집 시장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박찬욱 감독의 경우, <공동경비구역 JSA>(2000)부터 <어쩔수가없다>(2025)까지 묶은 각본집 컬렉션이 나올 예정이기도 하다.
JTBC 드라마 <구경이>(2021) 대본집을 텀블벅 펀딩으로 성공시켰던 백준오 대표는 “드라마 대본집보다 영화 각본집의 리스크가 더 크다. 독립영화나 무거운 주제의 상업영화의 경우 초판으로 수익을 내지 못하면 제작비 회수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나마 특정 배우 팬덤이 있거나 예술적으로 평가받았던 영화들이 개봉 시기나 OTT 공개 시기와 상관없이 조금씩 출간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벌새>(2019), <너와 나>(2023), <세계의 주인>(2025) 등 예술성과 대중성을 인정받은 영화들이 여러 출판사에서 각본집을 출간해 좋은 평가를 받은 경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국영화의 각본집은 그 숫자가 적다. 더 성공해야 할 필요가 있다.

플레인아카이브는 서적, 블루레이 등 보는 것과 함께 ‘듣는’ 물리 매체 제작에도 힘쓰고 있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2020), <벌새>, <헤어질 결심>,
<해피엔드>(2025) OST LP

플레인아카이브가 만든 해외 작품들의 블루레이.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 4K 스틸북 프리미엄 콜렉터스 블루레이 박스 세트, <폭스캐처> 블루레이 스틸북 디럭스 박스 세트,
<패터슨> 블루레이 프리미엄 박스, <크리스티안 페촐트 컬렉션>과 <셀린 시아마: 성장 3부작 컬렉션> 블루레이 박스 세트
한국 ‘상업영화’ 아카이빙의 의미
플레인아카이브의 영화 출판물 가운데 각본집을 제외하고 손에 꼽히는 또 다른 히트작은 사진집 <아가씨의 순간들>(2022)이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의 현장 스틸을 담당했던 이재혁 작가의 비공개 사진들을 엮은 책이다. 13만 원대의 고사양 아트북으로 만들어졌는데, 3천 부가량 팔리면서 시장에서 이런 시도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준 사례가 됐다.
<아가씨의 순간들>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이 사진집이 한국 상업영화의 아카이빙 서적이라는 것이다. 아카이빙은 주로 고전영화나 예술영화에 필요한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한국 상업영화의 프리 프로덕션부터 포스트 프로덕션까지 영화의 수많은 중요 자료들이 개봉 전후 제대로 사용되거나 보관되지 않은 경우가 부지기수다. <아가씨의 순간들>은 <아가씨> 촬영 현장의 생생한 현장감은 물론, 프로덕션 디자인, 촬영 구도, 배우들의 놀라운 표현력을 순간 포착해 영화의 예술적 감성을 고스란히 기록한 자료로서 그 가치가 높다.
여전히 “한국 상업영화에 대한 아카이빙이 ‘굳이 필요한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답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K-엔터, K-무비를 외치지만 아카이빙에 대한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 것 같다”는 게 백준오 대표의 생각이다. 올해 출간 예정인 <외계+인>(2022~2024) 메이킹 아트북 또한 한국 상업영화의 어떤 순간을 아카이빙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외계+인>이 흥행 면에서는 아쉬운 결과를 낳았지만, 프로덕션 차원에서는 당시 한국영화계 최고의 스태프들을 모아 규모와 콘셉트에서 기념비적인 시도를 한 작품이다. 한국영화 역사에서 블록버스터의 끝까지 가보려고 했던 야심을 가졌기에 전문가들이 어떤 고민을 하며 완성했는지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다”며 그 의미를 전했다.

한국 상업영화의 대표적인 아카이빙 서적인 <아가씨>의
첫 공식 사진집 <아가씨의 순간들>
백준오 대표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작업도 있다. 분명 클래식이지만 한국영상자료원의 고전 복원작 리스트에 아직 포함되기 어려운 1990년대 후반에서 2010년대까지의 한국영화들, 이른바 ‘그레이존’ 영화들의 물리 매체 작업이다. 그 시기의 영화들은 홈비디오든 출판이든 접근이 어렵다. 지금의 한국영화와는 다른 방식의 투자가 이루어졌던 시기이고, 이후 폐업한 영화사들이 많아 판권 해석의 향방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해낸 작업 중 하나가 정재은 감독의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2001)의 20주년을 맞아 발간한 <고양이를 부탁해: 20주년 아카이브> 서적과 본편 4K 리마스터링 작업이다. 20주년 서적에는 각본, 스토리보드, 현장 스틸까지 수록했다. 플레인아카이브가 오랜 시간 지지를 보내온 정지우 감독의 <사랑니>(2005)도 판권 문제를 잘 해결한다면 언젠가 꼭 블루레이로 출시했으면 하는 영화 중 하나다.
디지털 구독과 AI 사용이 당연한 시대여서 오히려 아날로그를 소비하고 즐기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이미 오래전부터 손에 닿는 무언가에 진심인 물리 매체 회사로서 그 영역을 확장하고 지켜온 플레인아카이브와 백준오 대표는 “AI 시대에도 우리는 늘 주력했던 일을 당연히 계속하고 있다”면서 “여러 가지로 한국 영화계가 어려운 가운데, 올 상반기는 조금씩 좋은 성과들이 보인다. 홈비디오와 출판 등 여러 면에서 다양한 작품들을 준비하며 한국 영화계의 성과에 부응해야겠다는 책임감이 커진다”고 말한다. 영화를 깊고 넓게 간직하고자 애쓰는 이들에게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많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