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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누군가에게 너무 특별한
<이반리 장만옥>
글 _ 차한비(리버스 기자)
사진 제공 _ 인디스토리
2026-06-08
홀로 태어나지 않는 영화
<이반리 장만옥>은 저절로 태어나지 않았다. 이는 영화의 독창성을 의심하는 말이 아니라, 영화가 자신이 놓인 자리와 이미 도착해 있던 목소리들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서울에서 레즈비언 바를 운영하던 중년 여성 만옥(양말복)은 어느 날 가게를 접고, 오래 만난 연인 금자(김정영)와 친구 선아(색자)에게 제대로 작별을 고하지도 않은 채 고향 이반리로 내려간다. 그러나 고향은 지친 몸을 뉠 수 있는 안전한 품이 아니다. 만옥을 기다리는 것은 호기심 어린 시선과 불쾌한 소문, 자신을 끊임없이 설명해야 하는 피로다. 그곳에서 만옥은 FTM(Female to Male, 여성에서 남성으로 정체화) 트랜스젠더 청소년 재연(성재윤)을 만난다. 이반리까지 무지개 깃발을 들고 온 중년 레즈비언과 자신을 지키는 법을 아직 배우는 중인 열일곱 살 청소년. 영화는 둘의 만남을 중심에 두고 가족, 세대 갈등, 로맨스, 정치 등 공동체의 다양한 문제를 한꺼번에 불러들인다.
영화 전면에 흐르는 부산함은 산만함이나 과욕이라기보다 계보의 감각에 가깝다. 앞서 말한 대로 <이반리 장만옥>은 실제 인물과 사건, 이를 다룬 여러 편의 영화를 제 바탕으로 삼아서 나아간다. 서울의 레즈비언 바 ‘레스보스’와 그곳의 사장 ‘명우 형’(윤김명우)을 기록한 <홈그라운드>(권아람, 2023), 혐오가 일상이 되어버린 세상을 비추며 ‘바지씨’(남성적 성향의 레즈비언을 뜻하는 성소수자 은어)의 역사를 불러낸 <불온한 당신>(이영, 2017), 드랙 아티스트(생물학적 성별이나 사회적으로 규정된 성역할의 틀을 벗어나 의상·메이크업·춤·연기 등을 통해 젠더를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퍼포머) 모어의 삶을 좇은 <모어>(이일하, 2021), 노년 레즈비언 부부의 일상을 담은 <두 사람>(반박지은, 2025), 자기 동네를 바꾸겠다며 선거에 뛰어든 최현숙의 이야기를 기록한 <레즈비언 정치 도전기>(홍지유·한영희, 2009) 등 특히 다큐멘터리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도 그래서다. 근래 공개된 극영화 중에서도 함께 이야기할 작품을 찾을 수 있다. 부모의 죽음을 계기로 고향에 내려온 퀴어 주인공이 ‘나 같은 사람’을 만난다는 줄거리는 <공작새>(변성빈, 2024)와 겹치고, 퀴어 공동체의 장소와 역사를 탐색한다는 점에서는 <3670>(박준호, 2025)과도 나란히 놓을 만하다.
<이반리 장만옥>은 이 작품들과 선을 긋기보다, 그들이 열어둔 길 위에서 다른 속도로 달려 보고자 한다. 기존 영화가 퀴어의 존재와 삶을 증언하고 사라질 뻔한 기억을 붙들어 왔다면, <이반리 장만옥>은 그 토대 위에서 현실 너머의 풍경을 바라본다. 질문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향한다. 지금 여기, 이미 내 옆에 있는 이들이 이제 어디서, 누구와, 어떤 표정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퀴어 인물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설명하는 자리에만 머물 필요가 없다면, 그들은 어떤 장르의 중심에 설 수 있을까. <이반리 장만옥>은 그 대답을 비극이나 투쟁의 언어에서만 찾지 않는다. 애써 살아남았으나 주인공으로 선택받지 못한 얼굴들, 늘 공동체의 역사를 이루면서도 좀처럼 파티에는 초대받지 못했던 사람들을 불러내어, 그들에게 한바탕 소란스러운 무대를 내어준다. <이반리 장만옥>은 충분히 환대받지 못했던 이들에게, 웃고 떠들고 망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이야기의 권리를 돌려주려 한다.

‘퀴얼업’ 명랑 코미디
<이반리 장만옥>은 한 가지 이름으로 부르기 난처한 영화다. 생각나는 대로 부르자면 ‘퀴어 멜로드라마 서부극 정치 뮤지컬 액션 코미디 영화’쯤 될 듯하다. 중년 레즈비언의 귀향 드라마로 출발한 영화는 어느새 마을 정치극으로 변모하더니, 한동안 세대 간 우정을 다루며 성장담을 풀어낸다. 명랑만화처럼 산뜻하게 튀어 오르며 과장된 표정을 짓다가도, 곧 우리가 사는 공동체의 폐쇄성과 무지를 향해 몸을 돌려 진지하게 묻는다. 이 변화무쌍한 흐름은 기운차다. 영화는 한 가지 장르를 고집하는 대신, 여러 장르가 부딪히고 뒤섞이는 순간의 과잉과 불균형을 동력으로 삼는다. “이렇게까지 간다고?” 싶은 순간마다 영화는 한 발 더 나아가고, 관객이 의심하려는 찰나 옆구리를 간지럽힌다. 뻔뻔하리만치 명랑한 감각이다. 어떤 장면에서는 독립영화의 제작 조건이 그대로 보일 만큼 기동적인가 하면, 대중 코미디처럼 관객의 웃음을 정면으로 겨냥하는 장면도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균질한 완성도보다 리듬이다.
<이반리 장만옥>의 코미디는 재치 있는 대사나 상황에서만 비롯되지 않는다. 여러 인물과 사건,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와중에도 영화가 태연하게 한 발 내딛는 태도 자체가 웃음을 만든다. 촬영은 이 리듬을 적극적으로 받친다. 전경과 후경을 활용해 인물의 감정과 상황의 우스움을 동시에 포착하고, 미용실과 마을회관, 컨테이너처럼 좁고 제한된 공간에서는 복작이는 활기를 강조한다. 인물들은 종종 한 화면 안에 모여 서로의 말과 몸짓을 가로지르며, 때로는 사건보다 반응으로 장면을 움직인다. 이는 영화가 공동체를 다루는 방식과도 연결된다. <이반리 장만옥>에서 공동체는 능숙하고 점잖은 합의가 아니라, 서로 밀치고 끼어들고 오해하고 참견하는 소동 속에서 겨우 구성된다. 결국 이 영화에서 코미디는 불완전한 사람들이 서로의 박자를 맞춰가는 과정이자 영화가 믿는 공동체의 형식인 셈이다.
이처럼 포용력을 자랑하는 웃음 위에 다양한 정서가 깃든다. 배우들이 이룬 앙상블은 영화의 혼합장르적 성격을 지탱하는 주요 요소다. 배우 양말복은 만옥을 설움과 허세, 피로와 다정함을 한 얼굴에 지닌 인물로 그리며 극의 중심을 든든히 지킨다. 김정영은 오랜 연인을 향한 애틋함과 야속함을 동시에 드러내고, 이번 영화로 데뷔한 성재윤은 첫 연기에 묻어나는 설익은 느낌을 인물의 서툰 생기로 바꿔 놓는다. 음악 또한 영화의 특색을 한층 밀어붙인다. 케이팝, 힙합, 블루스, 맘보 등 그 또한 여러 장르를 오가는 음악은 장면을 장식하는 데 머물지 않고, 영화가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인물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순간, 말로는 다 전달되지 않는 감정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관계, 또한 정치 구호만으로는 붙잡히지 않는 삶의 기운이 화면에 일렁인다.
<이반리 장만옥>은 명랑만화처럼 유쾌하고, 독립영화답게 사정이 빤히 보이며, 대중 코미디처럼 보편의 농담을 던지고, 퀴어영화답게 오래된 결핍과 새로운 욕망을 동시에 껴안는다. 어지러운 혼합이 실패하지 않는 이유는, 영화가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반리 장만옥>의 명랑함은 가벼움과는 다르다. 이는 상처 많은 인물을 우선 웃게 해주고 싶다는 영화적 태도이며, 슬픔을 통과한 사람도 여전히 사랑스럽고 때로는 철없이 굴 수 있다는 믿음이다. 영화는 대의를 앞세워 웃음을 희생하지도 않고, 웃기기 위해 인물을 납작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그렇게 <이반리 장만옥>은 규범적 세계가 낮춰놓은 목소리의 볼륨을 높이면서, 그 목소리들이 장르와 농담을 타고 무대 중앙으로 뛰쳐나오도록 판을 벌이면서 저만의 ‘퀴얼업’ 명랑 코미디를 완성한다.

“친구면 걱정도 좋지만, 응원을 좀 해줘”
이반리는 순박한 농촌 공동체로 이상화되지 않는다. 작은 마을에서는 서로를 잘 안다는 이유로 더 쉽게 판단하거나, 조금이라도 다른 존재는 의심과 조롱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서울이 만옥에게 온전히 나은 장소였던 것도 아니다. 서울에서는 모든 것이 지나치게 빠르게 변하고, 관계와 장소마저 생존의 속도 앞에서 밀려나기 일쑤다. 만옥은 레즈비언 바를 운영하며 공동체의 온기와 피로를 모두 겪어 온 인물이다. 누군가에게는 선배였고,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어른이었으며, 스스로 돌아보면 오래 버텼음에도 유의미한 뭔가를 남기지 못한 실패자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이반리와 서울 사이에서 만옥이 겪는 고립감과 허무는 그저 귀향자가 마주하는 낯섦만은 아니다. 이는 자신이 일군 세계에서 도태되어 새로운 공간에 적응해야 하는, 그러나 어디에도 편안히 합류하지 못해 제 쓸모와 의미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피로에 가깝다.
하지만 영화는 만옥을 자기 연민 안에 가두지 않는다. 만옥은 다치고 지친 채로도 주변을 본다. 자신보다 어리고, 더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쉽게 상처받을 수 있는 재연에게 다가간다. 연인과 친구의 마음을 너무 늦지 않게 헤아리고, 마을 사람들의 무지와 폭력 앞에서 도망치기보다 제대로 맞서기를 택한다. 만옥은 모범적인 어른이 아니다. 자기 방식을 앞세울 때는 ‘꼰대’ 같고, 다정함을 표현하는 데도 꽤 서툴다. 바로 그 불완전함이 만옥의 돌봄을 흥미롭게 만든다. <이반리 장만옥>이 말하는 ‘더불어 사는 삶’이란 무해하고 완벽한 사람들이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일이 아니다. 서로의 결함을 알고 난 후에도, 그 결함을 핑계로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일이다. 만옥은 걱정 대신 응원을 바란다. 걱정하는 사람은 멀리 떨어져서 지켜볼 수 있고, 상대의 실패를 진작 예감하기에 책임에서 비켜날 수 있다. 하지만 응원은 다르다. 응원은 상대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내 힘을 보태는 일이다. 불안해도 그의 가능성을 믿고, 때론 같이 오해받거나 덩달아 넘어지는 것도 감수한다.
만옥과 재연의 관계가 특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둘은 단지 어른과 아이, 선배와 후배, 멘토와 멘티로만 묶이지 않는다. 오래 살아남은 약자와 이제 막 자기 삶을 시작하려는 소수자가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 둘 사이에는 설명을 생략할 수 있는 친밀함과 끝내 설명해야만 하는 차이가 동시에 생긴다. 영화는 그 차이를 갈등의 근거로 쓰는 대신 차이 덕분에 서로에게 나눠줄 수 있는 깨달음과 용기에 집중한다. 재연은 만옥 곁에서 무방비한 시간을 얻고, 만옥은 자신이 누군가의 세계를 넓혀줄 수 있는 사람임을 실감한다. 이 과정에서 우정과 연대는 추상적 가치가 아니라 구체적 행동으로 나타난다. 모르면 묻고, 알게 되면 바꿔 보고, 위험에 처한 이를 발견하면 멀찍이 구경하는 대신 가까이 가서 돕기. <이반리 장만옥>은 서로 다른 언어와 속도, 경험을 가진 이들이 귀찮음과 불편을 견디며 같은 편이 되어 보려는 시도를 담는다.

너는 누군가에게 너무 특별해
영화 후반부, 서울로 떠난 재연은 화려한 분장을 한 채 퀴어 바 무대에 선다. 따뜻한 눈빛과 환호를 마주한 그는 더는 숨어 있는 아이처럼만 보이지 않는다. 저만의 아지트에서 몰래 거울을 보거나 호숫가에서 홀로 주저앉아 웅크리던 몸은 이제 무대에서 서툴지만 씩씩하게 움직인다. 전남편 철주(박완규)의 횡포에 맞서 이장 선거에 출마한 만옥은 점차 진심으로 의지를 다진다. 쫓기듯 고향에 내려온 기색을 지우고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다시 앞으로 나선다. 자신의 설움과 분노에 매몰되는 대신에 세상이 따갑게 느껴질 또 다른 이들에게 기꺼이 보호막이 되고자 한다. <이반리 장만옥>은 인물들에게 다음 기회를 준다. 살다 보면 잘못 판단할 수 있다고,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 주고 나서야 무엇을 놓쳤는지 알게 되기도 한다고 일러준다. 그런 실패를 가볍게 용서하지 않지만 한 번의 실패로 인생을 닫아 버리지도 않는다.
영화가 선보이는 낙관은 현실을 모르는 순진함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차라리 현실을 알기에 필요한 상상력에 가깝다. 차별금지법 제정도, 동성혼 법제화도, 성소수자의 안전한 삶도 자꾸 유예되는 세계에서 행복을 말하는 일은 때로 지나치게 조심스러워진다. 영화에서 만옥의 이장 선거는 퀴어문화축제를 방불케 하는 퍼레이드 신으로 묘사되며 클라이맥스를 점한다. 현실이 허락하지 않는 감각과 풍경을 영화가 먼저 당겨오는 것처럼 보인다. 청년들이 이반리로 몰려오며 선거는 잔치 마냥 시끌벅적하니 들뜨고, 무지개는 오래된 상징답게 마을 한쪽을 차지한다. 누군가는 너무 뻔하다거나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지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반리 장만옥>은 전위적인 새로움보다 평범한 행복의 힘에 무게를 싣는다. 대찬 낙관은 단순히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아니라 가 본 적 없는 곳을 상상하는 대담함을 뜻한다.

영화는 세대와 살아온 환경, 지향하는 가치 등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영영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젓는 그 자리에서부터 대화가 열려야 한다고 말한다. 만옥이 그러했고 만옥에게 그러했듯 무지는 공포와 혐오를 낳는다. 영화는 우리에게 묻고 듣자고, 잘못은 바로잡고 상처를 냈다면 사과하자고 권한다. 물론 자신을 반성하고 관계를 돌보는 과정은 매끄럽지 않다. <이반리 장만옥>의 인물들 또한 아름답게만 성장하지 않는다. 싸우고, 도망치고, 한참 돌아서야 제자리를 찾는다. 다만, 영화는 그 우회와 지연을 실패로 보지 않는다.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시행착오를 통과하며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 가는 일이라서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언젠가 선배와 후배, 친구와 동료, 이웃과 가족으로 연결될 수 있다. 영화는 바로 그곳을 향해 달린다. 누군가를 걱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가 덜 외롭게 삶을 이어가도록 힘을 보태는 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