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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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하고 까끌까끌한
여성 버디 무비

<하얀 차를 탄 여자>

글 _ 홍수정(영화평론가)
사진 제공 _ 바이포엠스튜디오

2025-11-17

영화계 안착한 ‘여성 서사’ 영화 최근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 영화의 조류 중 하나는 ‘여성 서사’를 다룬 작품의 등장이다. 그렇다. 이날이 오고야 말았다. 한때 여성 서사는 ‘가뭄에 난 콩’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아무리 찾아도 잘 보이지 않았고, 찾는다 하여도 너무 적어서 갈증을 지우기 힘들었다. 하지만 최근 10년간 각지에서 여성의 이야기를 새로 쓰려는 작품들이 나타나길 반복했다.

할리우드에서 여성 서사 영화 흐름을 주도하는 감독으로 그레타 거윅이 있다. <레이디 버드>(2017), <작은 아씨들>(2019)에서 그려낸 섬세하고 치열한 세계는 매출 10억 달러(약 1조 4천억 원)를 돌파한 화제작 <바비>(2023)로 이어졌다. 여성 멤버로 무장한 시리즈물 <오션스8>(2018)과<고스트버스터즈>(2016), 그리고 <캐롤>(2015), <판타스틱 우먼>(2017) 같은 퀴어 장르 수작도 빼놓을 수 없다. 이제 여성 서사 영화는 메인스트림에 안착해 하나의 장르로 뿌리내렸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우리도 부지런히 이런 흐름에 동참해 왔다.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2016)를 비롯해 <허스토리>(2018), <삼진그룹 영어토익반>(2020) 같은 대중친화적 영화부터 <찬실이는 복도 많지>(2020), <최선의 삶>(2021),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2022) 등 굵직한 독립영화까지. 한 명의 여자와 여러 여자. 큰 주제와 작은 이야기. 여러 층위를 오가며 여성 서사를 발굴한 노력은 한 줄기의 빛으로 바뀌어 한국영화계에 내렸다.

이쯤 되면 독자들은 이상함을 느낄 법하다. ‘여성 영화라고 다 같은 영화인가?’, ‘지나치게 다양한 영화들을 한데 묶어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닌가?’. 맞다. 10여 년 전 등장한 여성 영화는 그 희귀함만으로 주목받으며 개별적으로 존재했다. 하지만 이제 여성 영화의 파도 속에서 그것들은 더 세밀한 카테고리로 분기하기 시작한다. 여성들의 우정에 관한 영화, 사랑에 관한 영화, 직장 생활 혹은 가족에 관한 영화. 그러니 이들을 그저 ‘여성 서사 영화’라고 부르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지루한 호칭이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이제 <하얀 차를 탄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오늘 다룰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수한 여성 영화 속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는 작품. <하얀 차를 탄 여자>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서늘하고 까끌까끌한 여성 버디 무비라고.

<하얀 차를 탄 여자>는 2022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2관왕을 하며 일찍이 상찬을 받았다. 그런 작품에서 내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각본이다. 사건을 다각도로 해부하며 세 여자의 삶을 향해 나아가는 영화의 각본이 탁월하다. 여기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영화가 도경(정려원)과 은서(김정민), 두 인물의 관계를 조각하는 방식이다. 거기에 <하얀 차를 탄 여자>만의 특이점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둘의 관계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아래부터 영화에 관한 스포일러가 나오니 유의해서 읽어주기를 바란다.



‘연대하는 여성’에 관한 선입견을 부수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내비치는 도경(정려원)과 은서(김정민)의 관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라진다. 그들은 처음 자매였다가, 함께 탈출하는 관계였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어떤 사건의 공모자로 밝혀진다. 이것은 얼핏 보아 충격적인 사고를 이해하는 여러 갈래의 해석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이건 두 여자의 관계가 뜨거운 혈연에서 차가운 협력자로 변모하는 여정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여성 간의 연대에 관한 우리의 선입견을 벗겨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피 흘리는 여성과 살려 달라고 소리치는 다른 여성. 그 여린 실루엣과 절박한 외침에 노출되었을 때, 우리의 머릿속에 처음으로 떠오르는 것은 저들이 매우 끈끈할 것이라는 예단이다. 물론 여기에는 둘이 자매라는 도경의 거짓말이 한몫한다. 그러다가 도경이 아프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분위기는 반전된다. 실은 모두가 그들의 차가운 계획이었음이 드러나는 후반부는 영화의 백미다. 이들은 가족도, 사랑이나 우정도 아니며, 죽고 못 사는 관계도 아니다. 그저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만난 동업자일 뿐. 그런 의미에서 도경이 병상에 누운 은서를 툭툭 쳐서 깨우는 동작은 인상적이다. 어떠한 감정도 묻어 있지 않은 그 무감한 손길이 뜨끈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예상하던 우리의 뒤통수를 가격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초반, 우리는 도경과 은서의 관계가 이런 형태일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한다. 그건 단순히 반전 때문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연약한 여성의 연대에 대한 우리들의 선입견이 숨어 있다. 무수한 작품에서 서로를 돕는 여자들은 대개 피 맺힌 사연을 공유하며 유사 모녀나 자매, 혹은 연인을 이뤄 둘도 없는 사이가 된다. 이를 대표하는 작품이 <델마와 루이스>(1991)다. <하얀 차를 탄 여자>는 그 계보를 이어가지만, 이들과 결을 달리한다.



서늘하고 서걱서걱한 협력 도경과 은서 사이는 차갑고 건조하다. 각자의 지옥에서 빠져나올 궁리를 하는 이들은 감정을 나눌 여유도, 이유도 없다. 상대를 동지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나 이외의 인간으로 여길 뿐이다. 서로를 보는 이들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다만 그들은 단 하나의 특성을 공유한다. 바로 믿음. 이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믿는다. 누군가는 거짓이라 매도할 엄청난 사연을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 서로를 각별하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들 모두 만만찮은 지옥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불행을 겪어본 사람만이 또 다른 불행을 상상할 수 있는 법. 그들은 상대의 말에 과장이 없음을 직감한다. 그것은 다정함과 또 다른, 무뚝뚝한 수용이다.

하지만 믿음은 모든 것을 바꾼다. 이들은 서로의 절박함을 믿기 때문에 협력을 약속한다. 또 상대가 이 약속을 목숨 바쳐 지킬 것을 알고 있다. 절망을 경험한 이들이 맺는 단단한 약속. 그건 세간의 계약 따위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은 차근차근 계획을 이행하는데, 이 과정에서 느껴지는 쾌감이 상당하다. 그건 단순히 ‘스토리’의 반전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차라리 ‘관계’의 반전에 가깝다. 예상을 벗어나는 서늘하고 서걱서걱한 협력. 여성들의 연대가 이토록 차갑고 건조한 형태로 스크린에 새겨질 수 있음을 <하얀 차를 탄 여자>는 보여준다.



<델마와 루이스>와 같고도 다른 오해를 피하고자 말하자면 나는 여성 연대의 뜨거움을 평가절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런 작품의 대표 격인 <델마와 루이스>는 <하얀 차를 탄 여자>와 많은 점을 공유하고, 또 달리한다. 후자는 전자를 이어받으면서 변형하기에, 나란히 놓고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두 영화에서 ‘손’은 중요한 매개체다. <델마와 루이스>에서 클럽의 남자는 델마(지나 데이비스)를 손으로 추행하고, <하얀 차를 탄 여자>에서 경찰 현주(이정은)의 아버지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욕조에 처박아 물고문을 한다. 그들을 구원하는 것은 여성의 손이다. <델마와 루이스>의 마지막 장면은 서로를 맞잡은 두 여자의 손으로 유명하다. 또 <하얀 차를 탄 여자>에서 현주는 결정적인 순간 도경에게 손을 내밀어, 그녀를 절벽에서 구해낸다. 이때 현주는 자기 손으로 폭력 대신 사랑을 실행하며 그녀를 내내 괴롭히던 트라우마를 끊어낸다.

하지만 두 영화는 결정적인 부분에서 다르다. <델마와 루이스>가 하늘로 비상하는 선더버드(1966년형 포드 스포츠카)로 끝을 맺는다면 <하얀 차를 탄 여자>의 차는 절벽 아래로 추락한다. 두 장면 모두 지긋지긋한 사슬로부터의 해방을 상징한다. 그러나 전자가 세상의 끝을 향한 슬프고도 환상적인 도주를 시도한다면, 후자는 가해자를 저 아래로 처박아 버리는 처단을 감행한다. 또한 <델마와 루이스>가 손을 맞잡으며 끝난다면, <하얀 차를 탄 여자>는 손을 놓는다. 현주는 도경에 대한 마지막 진실을 깨닫고 몸을 떨며 후배 용재(이휘종)에게 수사를 지시하려 한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멈춘다. 그리고 폰을 내려놓는다. 이때 현주의 머릿속을 스쳐 가는 생각을 모두 짐작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것이 앞 장면에서 도경의 ‘손을 잡는’ 동작과 반대로 ‘손을 놓는’ 액션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녀는 지금 손을 내려놓음으로써 다른 여자를 살리고 있다. 이것은 도경을 ‘끌어안던’ 순간과 반대로 그녀를 ‘떠나 보내는’ 행위이기도 하다. 모든 논리를 뒤로한 채 그녀를 자유 속으로 보내주는 마음. 그 마음 덕에 도경은 비로소 홀가분한 웃음을 짓는다. 현주가 도경으로부터 유지하는 이 멀찍한 거리감을 우정이라 불러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나는 선더버드 대신 절벽에 처박히는 차로. 맞잡은 손 대신에 포기하는 손으로. <하얀 차를 탄 여자>의 마지막은 여성 영화의 계보 안에서 상징적이다. 여성 연대를 그려내는 새로운 연출 방식이라고 표현하여도 좋을 것이다.

이 영화의 섬세한 결을 살려내는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정려원과 이정은의 연기는 감탄을 자아낸다. 둘은 대척점에 서서 서로의 연기를 받아친다. 정려원이 변화무쌍하게 돌진하는 거센 파도라면, 이정은은 굳건하게 버티고 서서 모든 파동을 감당하는 방파제다. 이 둘의 앙상블이 영화를 단단하게 붙들고 앞으로 나아갔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런가 하면 계속 남는 아쉬움도 있다. 그건 서사에서 드러나는 사소한 구멍은 아니다(이 영화는 서사보다 관계가 중요하므로). 그것은 영화가 조현병과 같은 질환이나 도경의 언니 미경(장진희), 현주의 아버지 등 악역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이 영화는 병과 악을 다소 평면화하며 서사를 추동하는 장치로 소모한다. 특히 정신질환의 경우 소수성을 띠며 여전히 사회에서 많은 오해를 받는다. 그것을 이렇게 재현해도 될지에 대해 우리는 함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멀고 차가우면서도 충만하다 관계의 거리는 다양하다. 그 거리는 오로지 관계 안에 있는 인간이 결정한다. 그런데 연대하는 두 여자를 볼 때, 우리는 그들이 가깝고 뜨끈할 것이라고 너무 쉽게 재단한 것이 아닐까. <하얀 차를 탄 여자>는 세 명의 피해자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들이 맺는 관계의 거리와 온도에 대한 영화다. 그 방식이 사뭇 다를 수 있다는 점, 이렇게나 멀고 차가우면서도 충만할 수 있다는 점, 그걸 보여줬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의미가 있다.

지금 여성 버디 영화는 일종의 붐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이런 작품은 많아질 것이다. 하지만 소재만 달리하며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진 않기를 바란다. 모든 관계는 고유하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편견을 내려놓은 채로, 그 인물들의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야 한다. 현주가 후배에게 주문했던 것처럼. <하얀 차를 탄 여자>는 그 요청에 응답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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