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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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감독과 배우 보고 영화 보던 시대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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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과 배우 보고 영화 보던 시대 지났다”
한상일 바이포엠스튜디오 이사
글 _ 라제기(한국일보 영화전문기자)
사진_김기남(한경매거진앤북 기자)
2025-11-03
영화 <소방관>(2024)과 <승부>(2025)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 주연배우가 개인적인 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두 영화는 배우 때문에 완성되고도 극장 개봉을 바로 하지 못하는 아픔을 겪었다. 우여곡절 끝에 늦장 개봉을 했다. 우려에도 불구하고 두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다. <소방관>은 385만 명을, <승부>는 214만 명을 극장에서 모았다. 손익분기점을 각기 넘어 돈을 벌었다. 예상치 못한 해피엔딩이다. <소방관>과 <승부>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점이다. 배급사가 같다. 바이포엠스튜디오다. 요즘 한국영화계에서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회사다. 적극적인 마케팅 공세와 관성을 벗어난 배급 전략이 이 회사의 무기다.
<소방관>과 <승부>뿐만 아니다. 올해 바이포엠스튜디오가 배급한 개봉작 중 <히트맨2>와 <노이즈> 역시 수익을 남겼다. 흥행이 쉽지 않으리라 여겨지던 영화들이었다. 지독한 불황에 시달리는 한국영화계라 더욱 두드러진 흥행 성과다. 운도 한두 번. 이 정도면 실력이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지난 7월 발표한 ‘2025년 상반기 한국영화 산업 결산 보고서’에 따르면 바이포엠스튜디오는 잇단 흥행을 발판 삼아 배급사 점유율 1위(매출액 기준 13.1%)에 올랐다.
바이포엠스튜디오는 기성 투자배급사들이 지갑을 닫은 상황에서 공격적인 투자 계획을 세우고 있어 더욱 눈길이 쏠릴 수밖에 없다. 바이포엠스튜디오가 불황이라는 풍랑에 시달리는 한국영화에 등대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 새로운 사업모델을 모색하는 한국영화계에 새 길을 제시할 수 있을까. 한상일 바이포엠스튜디오 영화·드라마 사업 부문 이사를 바이포엠스튜디오 사무실에서 만났다. 바이포엠스튜디오만의 전략과 장점을 파악하고, 이들의 행보를 내다보기 위해서다. 한상일 이사는 싸이더스FNH와 이스트드림시노펙스 등을 거쳐 2022년 3월부터 바이포엠스튜디오에서 일하고 있다.

한국영화 산업의 불황에도 공격적인 투자 전략으로
성과를 거두고 있는 바이포엠스튜디오의 한상일 이사
잇단 흥행에 1년 동안 시나리오 400편 몰려
바이포엠스튜디오는 2017년 2월 설립되었다. 당초 출판과 음원, 마케팅 사업에 집중하던 회사였다. 2017년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 쿠로코의 농구 라스트 게임>을 수입·배급하며 영화업에 뛰어들었다. 코로나19 대유행 시기를 지난 직후 영화 사업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2022년 한국영화로는 <데시벨>을 처음 투자·배급했다. 같은 해 일본영화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를 깜짝 흥행(총 관객 수 122만 명)시키며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일본 실사영화로는 역대 최고 히트였다. 감독도 배우도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였다. 고교생을 타깃으로, 그들 눈높이에 맞춘 마케팅이 주효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바이포엠스튜디오가 투자·배급한 한국영화에서는 인상적인 흥행을 남긴 영화가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메인 투자로 참여한 <동감>(2022)과 <잠>(2023)은 49만 명과 147만 명을 각각 모았으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소방관>이 기폭제 역할을 했다. <히트맨2>와 <승부>가 흥행 바통을 주고받으며 업계의 시선이 바뀌었다. 지난 6월 개봉한 공포영화 <노이즈>의 성공(총 관객 수 170만 명)은 바이포엠스튜디오를 향한 의심을 확실히 털어내게 했다.
눈여겨볼 점은 꾸준함이다. 관객 천만 이상이 본 영화 한 편으로 배급 시장 점유율 1위에 오른 게 아니라는 얘기다. 한상일 이사는 “(영화 사업 시작 당시) 5대 배급사와 어깨를 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 정도만 했다”며 “한 편 한 편 열심히 하다 보니 상반기 배급 시장 점유율 1위를 하게 되었다”고 자평했다. 그는 “남들이 못해서 또는 우리가 잘해서 1등 한 것은 아니다”라며 “지난해 연말부터 같은 흐름과 같은 생각으로 일을 진행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바이포엠스튜디오가 업계 강자로 떠오르면서 시나리오가 쇄도하고 있다. 웬만한 제작자들이라면 바이포엠스튜디오 사무실 문을 한번쯤 두드렸다는 우스개 섞인 말이 돌 정도다. 기성 투자배급사들이 개점휴업 상태나 다름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바이포엠스튜디오가 <데시벨>로 한국영화 투자배급업에 진출한 뒤 투자 의뢰가 들어온 시나리오는 600편 남짓이다. 한상일 이사는 “지난해 여름 (제작비 100억 원대인) <소방관> 배급이 결정된 뒤부터 바이포엠스튜디오가 돈이 제법 있다고 업계에 소문이 났나 보다”며 “<소방관> 개봉 이후 몰려든 시나리오만 400편 정도 된다”고 밝혔다. 그는 “투자사들이 보통은 2주 정도 후 제작사에 1차 의견을 주지만, 많은 시나리오를 검토해야 하니 저희 회사는 요즘 2~3개월은 걸린다”고 밝혔다.
각각 254만, 214만 관객을 동원하며
올해 한국영화 박스오피스 4위, 7위에 오른 <히트맨2>(왼쪽)와 <승부>(제공=바이포엠스튜디오)

170만 관객을 모은 <노이즈>는
올해 여름 극장가 다크호스로 주목받았다(제공=바이포엠스튜디오)
요즘 관객은 자기 판단에 따라 움직인다
바이포엠스튜디오의 최고 강점은 마케팅으로 꼽힌다. ‘창고 영화’로 분류되었던 <소방관>과 <승부>에 ‘심폐소생술’을 했던 것도 바이포엠스튜디오만의 시장 접근 방식이었다. 한상일 이사는 “‘관객들이 우리 영화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많이 한다”며 “영화의 약점과 관객이 기대할 점, 약점을 덮는 방법 등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찾아내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소방관>의 마케팅 방식은 특히 눈길을 끌었다. 국내 소방관들의 처우 개선을 돕겠다며 관객 1명당 119원을 기부하는 ‘119 챌린지’ 캠페인을 해 주목받았다. 소방관들이 열악한 상황에서도 목숨 걸고 업무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그린 영화 내용과 맞닿는 이벤트였다. 당초 바이포엠스튜디오는 개봉 일주일 후 캠페인을 전개하려 했으나, 개봉 전날(12월 3일) 벌어진 불법 계엄 사태가 변수가 되었다. 국가적 혼란에 따라 영화에 대한 관심이 줄 것을 우려해 ‘119 챌린지’를 바로 실시했다.
영화를 둘러싼 상황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은 <히트맨2> 마케팅에서도 읽을 수 있다. <히트맨2>는 개봉 일주일 뒤 포스터를 바꿔 영화를 알렸다. 한상일 이사는 “상영 초기였던 설날 연휴는 가족 단위 관객을 겨냥해 가족애를 강조한 포스터를 사용했다”며 “연휴가 끝난 후에는 ‘친구 또는 연인과 보는 영화’를 찾는 시기라는 점을 고려해 액션을 강조한 포스터로 바꿨다”고 설명했다. “포스터 하나로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 나가는 마케팅은 이제 유효를 다했다”는 게 한상일 이사의 판단이다.
‘영화 완성도가 높다’는 식의 광고 문구를 쓰지 않는 것도 바이포엠스튜디오만의 방식이다. 한상일 이사는 “요즘 관객들은 영화가 좋다는 광고에 반발 심리가 훨씬 강하다”며 “자기가 보고 판단하기를 원한다”고 분석했다. 그는 “영화의 완성도는 관객이 보고 알아주면 되는 것”이라면서 “매체와 영화평론가의 영화평이 아직 영향력이 있다고 하나, 예전처럼 관객의 마음이 움직이던 시대는 지났다”고 봤다. “자기 판단이 강해진 요즘 세대는 다양한 매체나 정보원을 통해서 (영화에 대한) 판단을 명확히 한다”는 이유에서다. 관객의 영화 선택 과정이 깐깐해진 점도 주목하고 있다. “시간이라는 기회비용까지 따진다”는 것이다. 한상일 이사는 “요금이 비싸도 영화의 만족도가 높으면 지갑을 열기 마련”이라며 “가격이 절대적인 기준은 아닌 걸로 보인다”는 의견을 밝혔다.
국내 소방관 처우 개선 기부 캠페인 ‘119 챌린지’를 진행한
<소방관>(왼쪽)과
개봉 이후 웹툰 스페셜 포스터를 공개한
<히트맨2>(제공=바이포엠스튜디오)
한국영화 한 달에 한 편꼴 배급이 목표
영화 업계에서는 1년 총 극장 관객 수가 1억 명에서 1억 3천만 명 선으로 고착될 거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한상일 이사는 “천만 영화가 자주 나오던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쪼그라진 시장에 맞게 새로운 흥행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는 “감독과 배우의 명성에 기댄 콘텐츠들의 생명력이 다한 시대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명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스타 배우가 대거 출연한 블록버스터의 흥행이 이제는 보장되지 않는다는 거다. 한상일 이사는 마동석과 마석도(영화 <범죄도시> 시리즈 주인공)를 예로 들었다. 그는 “마동석 주연의 <범죄도시> 시리즈가 잇달아 천만 관객을 동원했다고 해도, 관객이 마동석 주연 영화를 무조건 보지는 않는다”며 “관객들은 마석도를 즐기지만, 배우 마동석은 또 달리 접근한다”고 분석한다. 한상일 이사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영화’의 몰락을 같은 맥락에서 바라봤다. 그는 “(인기 캐릭터의 퇴장과 더불어) <아이언맨> 시리즈처럼 마블 영화가 몇 백만 명씩 모았던 시대 역시 지났다”고 말했다.
관객의 영화 소비 패턴이 급변한 환경에서 한상일 이사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콘텐츠가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불편 없이 영화를 즐길 수 있던 극장의 편리성보다 만족도를 중시하는 세대가 출현했다”는 이유에서다. “스포츠 경기나 전시, 공연 등이 영화보다 더 큰 카타르시스를 주니 더 활성화된 듯하다”는 것이다. 그는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의 중요성이 더 커졌다”며 한국영화의 흥행 부진 탈출을 위해선 “일단 시나리오의 완성도가 더 올라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이포엠스튜디오는 되도록 한 달에 한 편꼴로 영화를 개봉시킬 계획이다. 2026년 개봉 예정 영화 역시 대략 12편 정도다. 기존 투자배급사들이 1년 동안 한 자릿수로 영화를 개봉하고 있는 최근 동향과는 정반대 행보다. 불황기에 더 영화에 투자하는 ‘역발상’ 사업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한상일 이사는 “유귀선 바이포엠스튜디오 회장은 출판업으로 사업을 시작했다”며 “사람들이 책을 누가 사보냐며 말할 때 시장에 진입해 사업에 성공했다. 영화업 역시 불황이라고 하나 수익은 충분히 낼 수 있다”고 말했다.
바이포엠스튜디오는 영화들 개봉 시기는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으면 계획표대로 진행할 생각이다. 한상일 이사는 “성수기와 비수기 구분이 사라져 굳이 특정 시기를 겨냥할 필요가 없다”며 “‘경쟁에서 이기려면 어떻게 할까’를 고심해야지, 센 영화 때문에 개봉을 미룬다고 흥행하지는 않는다”고 힘주어 말한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바이포엠스튜디오가 배급한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가족드라마),
<태양의 노래>(로맨스), <하얀 차를 탄 여자>(스릴러), <귀시>(공포).
한상일 이사는 장르 불문하고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제공=바이포엠스튜디오)
GLC 부재, 이견 있을수록 성공 가능성 커
바이포엠스튜디오는 이미 만들어졌거나 촬영 중이던 한국영화를 ‘구매’해 개봉시켜 왔다. 기획이나 시나리오 단계부터 시작하는 진정한 ‘바이포엠스튜디오표’ 영화는 없었던 셈이다. 이제는 다르다. 12월 3일 개봉하는 <윗집 사람들>은 시나리오 단계에서 투자를 결정한 첫 영화다. 배우 하정우가 주연과 연출을 겸한 작품이다. 한국판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김혜영 감독)가 크리스마스를 겨냥해 개봉하며 <윗집 사람들> 뒤를 잇는다. 내년 설날 연휴를 조준한 <넘버원>(김태용 감독)도 순수 ‘바이포엠 영화’다. 한상일 이사는 “투자 결정 후 되도록 1년 안에 개봉시키려 한다”며 “투자금 회수 사이클을 감안한 것”이라고 말했다. <윗집 사람들>은 지난해 12월 투자를 결정해 올해 1월 촬영에 들어갔다.
바이포엠스튜디오가 내년 개봉할 한국영화들에 투여할 돈은 약 500억 원 정도다. 제작비는 30억 원에서 100억 원 정도까지 다양하다. 수백억 원이 투입된 영화는 라인업에 없다. 한상일 이사는 “자금 운영을 위해 (투자금) 회전율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한 영화에 수백억 원을 ‘올인’하는 식의 투자를 하면, 거금이 오랜 시간 잠겨 있게 되어 곤란하다는 의미다. 한상일 이사는 “그렇다고 우리가 제작비 30억 원대의 작은 영화만 하는 게 아니다”라며 “공동 투자를 통해 대형 영화에도 참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첫 ‘바이포엠스튜디오표’ 영화인
하정우, 공효진, 김동욱, 이하늬 주연의 <윗집 사람들>(제공=바이포엠스튜디오)
바이포엠스튜디오의 영화·드라마 사업 부문 직원은 한상일 이사를 제외하면 4명이다. 영화·드라마 사업 부문 전 직원이 시나리오를 함께 읽고 직원들 의견을 취합해서 한상일 이사가 투자를 결정하고, 바로 투자를 진행한다. 거금이 들어가는 영화 정도만 회장과 협의를 거친다. 기존 투자배급사들이 운영하는 ‘그린 라이트 커미티(GLC, 진행 여부 허가 시스템)’는 없다. 한상일 이사는 “(직원들과) 만장일치로 투자 여부를 결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견이 있는 작품일수록 성공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투자배급사의 누군가 한 명이 책임지고, 무모하게 어떤 영화를 끌고 갈 때 한국영화가 잘 되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모든 사람이 동의하지 않으면 투자로 넘어가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다 보니 영화의 색깔이 사라지는 거죠. 이런 상황은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