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한국애니메이션, 왜 인기가 없을까?
- 글
- 한병아 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 회장, 애니메이션 감독
Opinion
2023년 관람객 감소로 애를 먹고 있던 극장가에 그나마 간헐적 활기를 불어넣었던 작품들 중에는 애니메이션이 있었다. 올해도 비슷하다. 축소된 영화 시장에서 극소수의 작품들만이 천만의 호사를 누리고 있는 틈새로 의미 있는 스코어를 내는 작품들은 애니메이션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한국영화 시장에서 애니메이션은 인기를 끌지만 아쉽게도 한국애니메이션은 외면을 받는 상황이다. 일본의 애니메이션들이 극장가에 돌풍을 일으킨 것과 크게 대비된다. 웹툰 시장을 점령한 한국이 애니메이션 부문에서는 약세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변은 확대됐다지금이야 ‘애니메이션’이란 단어가 대중적으로 흔히 쓰이지만, 한때는 ‘만화영화’라는 단어가 더 익숙하던 시절이 있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개봉하던 2002년만 해도 그랬다. 어린이들에게 반드시 ‘꿈과 희망’을 줘야만 했던 ‘만화영화’가 극장에서 216만의 스코어를 달성한 것은 비단 어린이만 즐겼을 리 없는 결과였다. 이후 2004년 개봉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302만 관객을 동원했다. 어떤 관에는 어린이보다 성인이 더 많이 들어차 있었으니 아마도 이때 즈음부터 ‘만화영화’가 ‘애니메이션’으로 승격하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이후 <쿵푸팬더>(2008) 460만, <쿵푸팬더 2>(2011) 500만, <마당을 나온 암탉>(2011) 220만, <겨울왕국>(2014) 1031만, <인사이드 아웃>(2015) 497만, <너의 이름은>(2017) 391만, <스즈메의 문단속>(2023) 555만, <슬램덩크>(2023) 455만, <엘리멘탈>(2023) 723만, <인사이드 아웃 2>(2024년 7월 현재 상영 중) 808만 등의 추이를 보더라도 애니메이션은 전 세대가 즐기는 영화 산업의 큰 줄기가 된 것이다.
2000년대 초까지 한국애니메이션 산업은 일본애니메이션의 하청업이 주였다. 그러다 2001년 이후 국가의 문화진흥정책 기류와 더불어 큰 기대심리를 업고 몇몇 굵직한 애니메이션 창작 프로젝트들이 기획되었다. 안타깝게도 히트작은 나오지 않았다. 사실 ‘실패’였다. 어떤 경우 ‘참사’에 가까웠다. 업계와 창작자들은 그 실패의 원인을 애니메이션의 협소한 저변과 기획력 부족이라고 여겼다.
현재는 어떨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에 넘쳐나는 애니메이션 콘텐츠들, 그리고 제작 편수로 따지면 극영화와 비교할 수 없는 적은 편수로도 극장가 흥행의 상당 부분이 애니메이션인 것을 보면 적어도 한국애니메이션 창작자들의 큰 고민거리였던 ‘애니메이션 저변 확대’라는 문제는 해결된 모양이다.
2024년 현재 한국의 애니메이션 제작 기술이 월드클래스 수준이란 것에는 이견이 없다. 뛰어난 연출력과 완성도 높은 아웃풋에 대한 데이터는 차고도 넘친다. 그런데 히트작이 없다. 더러 대형 프로젝트들이 진행되긴 했다. 여러 편의 흥행작을 낸 이름 있는 영화제작사에서 진행한 작품이 있었고, 뛰어난 기술력과 안정적인 파이프라인을 보유한 애니메이션 회사들의 자체 기획 작품들이 몇몇 있었다.
실은, 제작 발표 때부터 불안했다. 그 작품들은 공통점이 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더 정확히는, 미국 할리우드나 일본 지브리의 문법은 따라 하지만 그것을 뛰어넘지 못하고 흉내만 내는 게 명백해 보이는 기획력 말이다. 홍보만 요란했거나 기술만 뽐내다 끝나 버린 몇몇 작품들의 기억이 씁쓸하다. ‘국산 애니메이션’이라는 일말의 명분이 떨어지는 작품성을 커버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실패의 사례가 몇 번 반복되다 보니 애니메이션은 투자 기피 대상이 되었고, 그나마 안정적인 영유아 시장만 애니메이션 산업의 명맥을 이어 가고 있다. 실은 이마저도 저출산과 미디어 환경 변화로 더는 안정적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고 여러모로 한계가 있다.
이즈음에서 미디어 환경 변화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애니메이션 소비의 주 플랫폼은 크게 세 가지다. 극장, 유튜브, 그리고 OTT. 다양한 종류의 완성도 높은 애니메이션 플랫폼은 단연 넷플릭스다. 넷플릭스는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작품을 부지런히 생산해내는 중인데 대부분은 일본 콘텐츠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사업본부가 일본에 있을 정도니 아주 드물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넷플릭스 로고를 단 한국애니메이션을 보기란 쉽지 않아 보이고 업계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진입장벽이 두텁다. 여기까지라면 한국애니메이션은 더 이상 꿈도 희망도 없어 보인다.
한국애니메이션은 극영화만큼 생동감 있는 시장과 팬덤을 형성해 오지 못했다. 앞서서 언급했듯 몇몇 모멘텀은 있었다. 2000년대 초반, 지금이어도 상당했을 예산을 들여가며 야심차게 제작되었던 몇몇 작품들이 흥행에 참패하며 애니메이션 제작 시장을 얼어붙게 한 것은 지금까지도 여파가 있다. 그 이유의 중심에는 엉성하고 설득력이 떨어지는 시나리오에 있었다.
글로벌 콘텐츠가 된 한국의 드라마나 영화는 어떤가? 수많은 시나리오와 연출자가 자신의 기획서를 들고 제작사를 찾아다니며 절실하게 창작을 시도한다. 스토리공모전 등 각종 이벤트들을 통해 수많은 원천 소스가 쏟아지고 그 많은 시나리오 사이에서 제작사는 다음 천만 영화를 고민한다. 이에 반해 애니메이션계는 대부분의 제작사가 자체 기획·제작하는 걸 숙명으로 생각한다. 스스로 기획한 것이 아니면 자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풍토가 있는 것이다. 이미 제작사가 잡아놓은 콘셉트에 작가를 붙이거나, 아니면 연출 감독이나 피디가 스토리 디벨롭을 하는 일이 빈번하다. 그런 스토리에는 힘이 없고 매력도 없기 일쑤다.
두 경우가 있다.
a. 좋은 기획을 가지고 있지만 온전한 제작 환경과 사업 수완이 모자란 창작자들.
b. 뛰어난 기술력과 제작 파이프라인을 가지고 있지만 참신한 기획을 깨닫지 못하는 제작 업체들.
a와 b의 공통점은 내부에서 다 소화하려고 한다는 데에 있다. 뛰어난 기술과 대중에게 제대로 어필할 영리한 기획이 만날 수만 있다면, 영화제작사가 좋은 기획과 역량 있는 연출자를 발굴하고 협업하듯이 애니메이션계에도 이런 시스템이 있다면, 한국애니메이션은 분명 달라질 것이다.
오리지널 스토리가 미래미디어 환경 변화에 따른 애니메이션 시장의 변화는 역동적이다. 근 몇 년간 적자에 허덕이는 토종 OTT 플랫폼들 중 유일하게 흑자 전환을 한 곳이 바로 애니메이션 전문 플랫폼 ‘라프텔’이다. 특정 장르만을 서비스하는 버티컬 플랫폼의 성공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라프텔’은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며 자체 콘텐츠를 생산해내고 있고 해외 서비스까지 시도하고 있다. 물론 전통적인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양상의 작품들로 기존 업계의 제작 방식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이 흐름 역시 미디어 환경 변화에 의한 제작 방식의 진화로 볼 수 있다. 철옹성 같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제작의 벽 앞에 막막해하기보다 이런 신선한 시장의 변화를 오히려 반기며 능동적으로 흐름을 탈 필요가 있다. 자체 플랫폼을 통한 국산 오리지널 작품의 물량이 늘어나면 소비 시장이 증가하고 다양한 국산 애니메이션에 익숙해지며 시장이 성장하는 선순환을 기대해볼 수 있다. ‘라프텔’은 최근 애니메이션 채널을 가진 ‘애니플러스’와 합병까지 했다니 국산 애니메이션 플랫폼의 글로벌 위상이 그려지며 한국애니메이션 업계에 좋은 영향이 되길 기대하고 있다.
1999년 당시 서울애니메이션센터(현 SBA서울경제진흥원)에서 한국 최초로 ‘단편애니메이션 제작지원제도’가 시작되었다. 캐나다 NFBC의 문화진흥사업을 벤치마킹한 것으로 한국애니메이션의 다양성과 문화적 가치를 배양한다는 기치로 시작된 것이었다. 이후 장편애니메이션, TV 시리즈 등의 애니메이션 제작지원제도가 줄줄이 만들어졌다. 현재 한국의
장·단편 독립애니메이션들은 국내외 영화제에서 월드클래스 수준의 작품성과 독창성을 인정받고 있다. 독립 작품이라고 해서 난해한 예술적 서사와 철학적 사색만 담고 있지는 않다. 근래 들어서는 짧지만 기획력이 돋보이며 대중적 스토리텔링을 지닌, 참신한 구성의 작품들이 눈에 띈다.
현재 진행 중인 극장판 장편애니메이션 중에는 올해 상반기 영화진흥위원회 극장용 중저예산 애니메이션 제작지원작으로도 선정된 데굴데굴 스튜디오의 <직장인 체육대회>,
명필름의 세 번째 장편애니메이션 <꼬마> 등이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작품들이다. 단편으로는 중학생 소녀 지리나의 과민성 대장증후군 극복기를 다룬 정다히 감독의
<과대증소녀 지리나>를 비롯해 임용기 감독의 <일해라! 몸속 친구들>, 조예슬 감독의 <울렁울렁>, 최희승 감독의 <사랑은 꿈과 현실의 외길목에서> 등이 몇 년 전부터 주목받아왔다. 이 젊은 감독들의 연출력은 기발하다.
한국영화의 전성기에는 수많은 독립영화가 제작되었고 그만큼 많은 영화제가 열렸다. 영화제를 즐기던 관객은 영화인이 되기도 하고 영화 마니아가 되기도 했다. 독립영화인들의 활발한 활동과 열정이 한국영화 산업의 비옥한 자양분이 되어 현재 K-드라마, K-콘텐츠가 탄생한 것을 복기해보자. 애니메이션 업계는 독립애니메이션 신에서 파트너를 찾아보아도 좋겠다. 어쩌면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을 찾아내는 혜안을 가진 프로듀서와 그 기획자의 제안을 채택하는 업계의 지혜가 오히려 시급한지도 모르겠다. 격변하는 시장의 흐름을 잘 읽어내는 순발력, 혹은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난 색다른 시도만이 남아있는 방법이다. 하던 대로 하면 이전처럼 아무것도 될 수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한국 최초의 장편애니메이션은 1967년 신동헌 감독의 <홍길동>이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남겼다. 우리는 어쩌면, 한국 최초의 애니메이션 <홍길동>에서 우리 애니메이션의 미래를 모색해볼 수 있을지 모른다.
<홍길동>은 척박한 환경에서 만들어졌고 그 당시 흔했던 모방의 흔적을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는 순수 오리지널 그 자체였다. 열악한 환경에서 제작되었지만 탄탄한 스토리와 수준 높은 완성도로 개봉 4일 만에 10만 관객을 모으며 화제가 되었고 일본에까지 수출된 작품이다. 이 영화의 흥행으로 이후 한국영화계에 장편애니메이션 붐이 일어나 연이어 작품들이 제작되는 현상이 벌어졌다. <홍길동> 같은 뚝심과 시도와 영리한 기획이 지금이라도 있다면.
*요즘 애니메이션 업계에서는 웹툰이나 게임 등 이미 성공한 원천 콘텐츠를 기반으로 진행되는 프로젝트들이 제법 많지만, 이는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이 아니기에 이 지면에선 다루지 않았다. 웹툰이나 게임을 작품성 있는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것도 창작으로서 가치 있는 작업이다. 다만 애니메이션을 위한, 애니메이션에 의한 원천 구성으로서의 작품이 살아야 소중한 장르적 가치가 흐트러지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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