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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경원 감독 <양치기>

이대로 보내기 아쉬운 작품의 심층 평론

박예지(영화평론가)
사진
(주)마노엔터테인먼트
괴물이 된 아이와 거부하는 어른의 히스테리

손경원 감독의 <양치기>

글 박예지(영화평론가)

<양치기>는 신경 쓰이는 반 학생에게 사소한 친절을 베풀었던 초등학교 담임교사가 도리어 그 아이의 거짓말로 인해 피해를 입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교사 수현(손수현)은 등굣길에 비를 맞고 있는 반 학생 요한(오한결)에게 우산을 씌워준다. 요한에게 베풀었던 이 작은 호의는 가정폭력과 학교폭력을 당하며 기댈 곳 없이 살던 요한이 수현에게 과도한 기대를 품는 계기가 되고, 수현이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돌아오게 된다.

돌봄의 대상이었던 아이가 오히려 나에게 해를 끼칠 때, 어른은 어떤 식으로 반응해야 하는가? 아이의 거짓말로 인해 교사의 지위가 위태로워지면서 수현은 예민해진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간단히 해결되리라 믿었던 문제는 무수한 소문과 오해를 낳으며 수현의 사회적 지위를 흔든다.

아이의 거짓말로 교사라는 직업에 위협이 생기면서 수현은 결혼 준비에도 위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사실 예비 신랑과의 관계를 처음 흔들게 된 것은 아이의 거짓말이 아니라 수현 본인의 거짓말이다. 수현은 자신의 사회적 이미지를 생각해 곧 결혼할 남자에게 자신의 가정사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수현과 예비 신랑의 관계는 이 거짓말이 들키게 되면서부터 삐그덕거리게 된다.

수현의 입장은 최근 문제가 되는 교사의 교권 문제를 컨텍스트로 불러온다. 아이의 인권 보호라는 명목으로 교육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고, 학부모의 고발이 있을 때 사건의 진위를 제대로 조사하기보다는 아이의 말과 학부모의 입장에 우선해 교사를 처벌하는 문제. 하지만 이 영화를 교권의 위기를 다룬 영화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요한은 단순히 거짓말을 한 문제아가 아니라 심각한 가정폭력을 당하고 있는, 보호가 필요한 아이다. 그리고 수현은 요한에게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 주었던 존재이자, 요한이 자신의 폭력 상황을 말하고 의지하고자 한 존재이다. 이런 관계성 속에서 요한의 돌발적 거짓말로 인한 갈등은 둘의 소통으로 풀어낼 여지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영화에는 둘 사이가 점차 가까워지고 서로 소통하며 서로를 이해하는 장면이 빠져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갑작스럽게 거리감을 좁히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문제적 아이에 대한 어른의 공포다.

이해하지 않으려는 태도의 공포

<양치기>의 장르는 드라마, 스릴러로 분류되어 있지만 사실 공포에 가깝다. <양치기>는 왜 어른과 아이의 관계를 공포영화의 문법으로 그리는가? 스릴러가 미스터리한 인물과 예상치 못한 전개로 긴장감과 긴박한 상황을 조성한다면, 공포영화는 철저히 타자화 된 어떤 존재나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는 두려움과 불안을 강조한다. <양치기>를 전반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정서는 바로 긴장감이 아니라 공포와 불안이다. 수현은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에 압도되어 신경이 날카로워진 채 불안에 떨고, 공포에 휩싸여 평소의 자신답지 않은 폭력적인 언사와 행동을 벌인다. 수현이 보이는 것은 미스터리한 존재에 대한 호기심과 그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안정을 위협하는 공포스러운 존재를 자신의 일상에서 몰아내기 위한 발버둥이다. 그리고 이런 수현의 반응으로 인해 요한은 철저히 타자화 된다.

하지만 <양치기>는 요한을 공포영화의 문법 아래에서 시종일관 타자화된 존재로만 그리지는 않는다. 공포영화에서 공포의 대상이 초반부터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제시되는 반면,
<양치기>에서는 요한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 상황을 자세히 보여주며 관객이 감정을 이입을 하게 한다. 요한이 본격적으로 타자화 되는 것은 그가 수현에 대한 거짓말을 하고, 그 뒤에도 나아지지 않은 가정폭력을 견디다 못해 집을 떠나면서부터이다. 그는 수현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해서 생활하며, 돈을 훔치고, 수현이 성생활을 할 때조차 바로 곁에서 그 소리를 듣는다. 요한은 더 이상 불쌍한 학대의 피해자가 아니라, 수현의 삶에 침입해 그녀의 일상을 훔쳐보고 위협하는 공포스러운 존재가 된다. 그리고 영화는 이후의 러닝타임 내내 요한에 의해 파괴되어 가는 자신의 삶 앞에서 무력함을 느끼는 수현의 불안을 그린다.

왜 <양치기>는 수현과 요한의 소통이나 관계를 포기하고 요한을 공포의 대상으로 그렸을까? 영화 초반에 요한에 대한 감정이입이 가능하도록 보여준 폭력 장면 때문에 감독의 이 선택은 더욱 의아해진다. 엄마의 성행위를 그대로 목격할 수밖에 없는 환경, 엄마와 같이 사는 남자가 자신을 때리는데도 보호해주지 않는 엄마와의 관계, 심지어 아이가 쓰레기봉투 안에 들어가 구타를 당하는 지나치게 폭력적인 장면까지 노골적으로 보여주며 영화는 요한이 피해자임을 강조한다.

의아한 건 암시만으로도 묘사할 수 있는 폭력 장면은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반면, 요한에게 이입하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요한의 심리상태 묘사는 통째로 생략한다는 것이다. 요한은 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고 집을 떠나 수현의 집에서 살 수밖에 없었는가? 이 부분을 이해하는 건 적극적인 관객의 상상력에 맡겨진다. 관객을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건 수현이 느끼는 공포와 신경이 과민해진 그녀의 히스테리이다.

그렇다면 폭력 장면은 혹시 관객이 요한의 상황에 이입하게 하기 위한 게 아니라 사실 요한을 더 공포스럽게 만들려는 장치가 아니었을까? 애정에 굶주린 아이가 나의 사소한 호의로 인해 나에게 과도한 집착을 하게 된다면? 가벼운 선의를 베푼 대상이 내 예상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고통 받고 있었다면? 집안에서 폭력을 당하다 결국 집을 뛰쳐나온 아이가 기댈 곳이 나밖에 없다면? 영화의 대부분은 사소한 호의가 과도한 책임감으로 돌아오는 상황에서 느껴지는 불편함과 그것이 내 일상에 지장을 줄 거라는 점에 대한 과도한 히스테리 반응으로 채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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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현은 이혼가정에서 자라나 간신히 얻은 자신의 정상성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곧 결혼할 남자친구 옆에서도 편안해 보이지 않고 계속 긴장하면서 자신을 숨긴다. 그녀에게 있어 요한은 자신의 정상성과 사회적 지위를 위협하고 자신의 삶에 침범하는 가난한 계급의 아이이다. 요한이 수현의 가슴을 만진 것은 영화 초반에 그가 어머니에게 안겨 가슴을 만진 장면과 연결된다. 그는 엄마에게 받지 못한 보호를 수현에게 받으려고 하다 수현을 엄마처럼 느껴 무의식적으로 그런 행동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수현은 그 행동에 대해 과도하게 반응한다. 남자아이의 갑작스러운 신체접촉이 위협적으로 느껴질 수는 있지만 키가 얼굴 아래로 오는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에게 보이는 반응으로는 과도한 감이 있으며, 요한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 조금도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이상한 것은 요한이 아니라 수현이다. 요한은 심각한 폭력 상황 안에서 학대받는 피해자이자 영악함을 갖고 있는 아이이지만 수현은 이런 아이의 상황을 인식하고 도움을 주려 하는 어른치고는 그 어떤 영화에 나왔던 인물보다 도덕심이 희박하고 방어적이며 이기적이다. 수현은 자기 집에 따라온 요한이 하고 싶다는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는다. 그녀가 요한에게 해 준 것은 우산을 빌려주고 학교폭력 상황을 의심해 편을 들어준 것뿐이다. 이후로 그녀는 더 이상 요한에게 마음을 내어주지 않고, 그 이상을 책임지려 하지도 않는다. 요한을 괴물로 만드는 것은 수현이다.

분리된 세계가 주는 공포

최근 아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들에서 이상한 경향이 보인다. 그건 아이와 어른의 세계 간의 소통 불가와 완전한 단절이다. <양치기>는 그중에서도 아이를 타자화하는 경향성이 가장 극단에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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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괴물>(2023)에서 시점의 전환으로 어른의 세계와 아이의 세계를 분리하고 마지막에 어른들의 시점이 결코 침입할 수 없는 아이들만의 세계를 제시했다면, <여기는 아미코>(2024)에서는 자폐 스펙트럼 선상에 있는 아이가 주변의 무관심 속에서 성장하지 못하고 자기 내면에 갇혀버린다. <막걸리가 알려줄 거야>(2024)에서는 어른들에게 질문하는 것을 포기하고 막걸리와 대화하다가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버리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 영화들은 공통적으로 내용으로나 미학적인 측면에서 아이들과의 소통을 포기하고 아이들의 세계를 그저 온전히 인정하는 데에서 이야기의 결말을 내버린다는 것이다.

<괴물>(2023)은 학교폭력 문제와 학부모의 고발에 의한 교사의 직권박탈을 다룬다는 점에서 <양치기>와 가장 많이 겹친다. <괴물>에서 어른의 세계와 아이의 세계는 시점의 전환으로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어른은 일탈적 행동을 하는 아이의 사정을 이해하려고 애쓰지만, 결코 그들의 세계에 다가갈 수 없고, 모호한 단서들만을 갖고 주변을 맴돌 뿐이다. 그럼에도 <괴물>은 마지막 시퀀스에서 아이들이 사실 괴물이 아니었음을, 그들만의 사정과 세계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양치기>는 끝까지 아이의 세계를 깊이 있게 묘사하지 않고 교사 수현의 시점 샷으로 영화를 끝낸다. 요한은 <괴물>의 주연들처럼 밝게 웃으며 뛰어 놀지만, 수현의 눈에 비친 그 모습은 여전히 불가해하다. 언제 또 자신에게,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지 알 수 없는 괴물 같은 모습이다.

<양치기>는 아이를 비추는 샷에서 시작해 아이의 모습으로 끝나지만, 그것은 항상 어른의 시점 샷이며 아이의 시점에서 보이는 세상에 대한 설명을 생략한다. 어른과 아이의 세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개별 샷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같은 샷에 담길 때조차 거리감이 있다. 이 거리감은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가? 왜 이제 어른은 더 이상 보호받지 못하고 학대 당하는 아이에게 <도희야>(2014)에서 영남(배두나)이 보여줬던 포용력과 용기를 발휘하지 못하는가? 학대를 당하는 상황에서 영악하게 비뚤어진 아이들은 언제나 있다. 달라진 것은 그들을 대하는 어른들과 카메라의 태도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게 가장 공포스럽게 느껴졌던 건 요한의 존재가 아니라 요한을 대하는 수현과 이 영화의 태도였다. 기댈 곳 없는 학대 가정의 아이를 철저하게 타자화해 자신의 삶을 방해하는 괴물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감각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걸까? 왜 최근의 한국-일본영화들에서 어른들은 아이에 대한 이해를 쉽게 포기하고 서로의 세계를 분리해 버리는가? 이 지점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