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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감독의 <비트><태양은 없다>
이대로 보내기 아쉬운 작품의 심층 평론
- 글
- 구형준(영화평론가)
- 사진
- (주)싸이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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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보내기 아쉬운 작품의 심층 평론
김성수 감독의 <비트><태양은 없다>
글 구형준(영화평론가)
20세기로 돌아가며지난 세기의 끝 무렵, 감독 김성수와 배우 정우성, 그리고 이정재를 어떤 궤도에 올려놓은 두 작품이 다시 극장 개봉했다. <비트>(1997)와 <태양은 없다>(1999)다. 비슷한 듯 다른 두 영화. 말하자면 오토바이와 육상의 영화라고 할까. 혹은 솔로와 듀오의 영화. 아니면 밤과 낮의 영화라고 해도 되겠다. 하여간 일탈과 방황이 하나의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시절의 애틋함과 메마름을 처연하게 그린 두 영화가 다시 우리 앞에 불려 왔다. 왜 지금 이 두 편일까. 물론 표면상으론 <서울의 봄>(2023)의 흥행이 새삼스레 김성수와 정우성이란 이름을 다시 주목하게 만들어 주었고, 그 결과 두 영화를 다시 우리 앞에 소환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서울의 봄>의 이태신(정우성)에게 감화된 2024년의 우리는 20년도 훌쩍 지난 1990년대의 정우성이 비틀대면서도 앞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그에 관해 말해보려 한다.
잠깐 어떤 순간으로 가보자. 늦은 밤, 미묘하게 느긋하면서도 을씨년스러움이 서린 서울. ‘나에겐 꿈이 없었다'로 운을 떼며 밤거리를 휘젓는 맑고 깊은 눈의 고독한 남자가 있다. 그는 싸움과 만취를 번갈아 일삼다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밤늦게 입시학원을 나서는 연인을 오토바이로 데리러 간다. 수줍으면서도 기뻐하는 여자 친구를 뒤에 태운 채 시작된 한밤의 질주. 커다란 배기음. 아스라한 가로등의 노란 불빛. 아찔하고 아릿한 밤들. 하지만 반짝이는 만큼의 야속함이 뒤를 따른다. 둘의 끝은 정해져 있고, 연인은 애달프고도 서글픈 사정으로 인해 헤어진다. 그리고 전화기에 남아 있는 음성 메시지. 뒤늦은 타이밍. 뒤늦은 감정, 뒤늦은 말, 무수하게 수많은 뒤늦은 것들…
삼류 소설의 축약본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철 지난 로맨스 소설의 한 대목이 아니라 <비트>의 몇몇 장면을, 나아가 이 영화 전체를 강하게 감싸고 있는 정서를 나름의 언어로 느슨하게 풀어본 것이다. 물론 언어는 이미지와 다르다. 또 나는 딱히 그럴듯한 작가도 아니다. 당연히 위의 촌스럽고 구태의연한 문장들이 <비트>를 오롯이 대변하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 <비트>를 (다시)본 사람이라면 최소한 양자 사이에 특정한 감성이 공유되고 있음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20세기 말 무렵의 한국영화는 ‘낭만'이란 정서에 어떤 식으로든 도취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유명한 장면, 고속으로 오토바이를 타며 양손을 놓고 두 눈을 감는 민(정우성)에게 서려 있는 아련함과 아름다움에 달리 어떤 수식어를 덧붙일 수 있을까. 나는 의도적으로<비트>를 촌스럽다고 말하고, 또 삼류소설로 비유하며 글을 시작했지만, 이건 영화에 대한 사후적 폄하가 아니다. 그보다 스마트폰이 도래한 시대엔 도저히 체화할 수도, 느낄 수도 없는 특정한 시대적 감각과 정서에 대한 뒤늦은 질투를 에둘러 말하며 툴툴댄 것에 가깝다.
그러니까 <비트>는 1990년대라는 시간이 지닌 청춘의 어떤 단면, 예컨대 자아도취와 허황된 망상, 순진함과 순수함의 동거에 관해, 특히나 그것의 순간적인 반짝임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비트>가 그런 시절을 담은 밤의 영화라면, 2년 후 개봉한 <태양은 없다>는 같은 것을 다루는 낮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내리쬐는 햇살 아래 남루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지닌 두 남자가 압구정 여기저기를 누빈다. 그들은 사기를 치고, 경마를 하고, 연애를 했다가 헤어지고, 거들먹거리며 허풍을 떨고, 싸운다. 그러다 얻어맞거나 도망다니기도 한다. 때론 쏟아지는 비를 맞고, 또 심지어는 서로에게 사기를 치기도 한다.
얼핏 보면 유사한 청춘의 방황인 것 같지만 그럼에도 <태양의 없다>는 <비트>와 달리 낮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 우선 물리적으로 <태양은 없다>가 <비트>에 비해 낮 장면이 월등히 많긴 하지만, 단순히 그 때문에 <태양은 없다>가 낮의 영화라는 건 아니다. 그보다도 이 영화엔 <비트>에 없는 대책없는 낙관이 있기 때문이다. 도철(정우성)과 홍기(이정재)는 각자 복싱선수와 부동산 부자라는 꿈이 있다. 하지만 사실 주변인들과 관객 모두, 심지어 본인들조차 그 꿈이 실현 불가능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도철과 홍기는 그걸 알고도 자신들의 허황됨을 절대 놓지 않는다. 도철은 아무리 펀치 드렁크가 와도 다시 링에 올라서려하고, 홍기는 사채업자들에게 숱한 괴롭힘을 당하고도 언제 그랬냐는 듯 일확천금을 노리며 경마장에 간다. 그리고 둘은 또다시 술에 취하고 배회한다. 즉 <태양은 없다>엔 끈질길 정도로 무지막지한 낙관이 있고, 도철과 홍기 듀오는 모든 것에 실패한 뒤에도 기어이 바닷가에서 일출을 보며 그 낙관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이 낙관이 <태양은 없다>를 (제목과 반대로) 낮의 영화로 만들어 준다.
말하자면 <비트>와 <태양은 없다>는 세기말의 청춘에게 서려 있던 비관과 낙관, 비장함과 무모함, 그리고 무엇보다 낭만의 초상을 각각의 방식으로 그려낸 짝패 같은 영화다. 그 시절의 우리는 뭐가 그리 매사 심각하고 또 왜 그렇게 사소한 로맨틱에 취약했을까? 두 영화는 그 질문에 두 가지 얼굴로 답한다.
과거와 현재의 사이에서<비트>를 좀 더 자세히 생각해 보자. 사실 2024년에 이 영화를 다시 보면 복잡미묘한 감흥이 든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간이 20년 넘게 흘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20년의 시차는 다소 애매하다. 20년 전이 그리 먼 과거가 아니기에 그렇다. 이 영화에 등장한 배우들은 대개 현재도 활동하고 있고, 그 속의 풍경과 지금의 현실 또한 얼마간 유지되고 이어져 있다. 그래서 <비트>는 동시대를 오롯이 표상하기엔 조금 오래됐지만, 그렇다고 우리와 완전히 떨어져 있지도 않은 모호한 시대에 걸쳐 있다. 그래서 미묘한 기분이다. 뭐랄까. 오래된 사진첩을 열었을 때 추억에 깃든 아련함이 풍기면서도, 동시에 (디지털이 아니라) 현실의 물질로 현상된 사진의 물성에서 오는 이물감 같은 것이 함께 다가오는 느낌. 그런 것이 이 영화에 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위태롭고도 찬란한 방황의 여정은 단순히 아름답지도, 그렇다고 지독하게 리얼하지도 않은 미묘함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현재의 우리는 이미 <아수라>(2016)와 <서울의 봄>의 정우성을 지나왔다. 현재의 정우성은 더 이상 단순한 미남 배우가 아니고, 방황과 청춘의 상징도 아니다. 그는 이제 배신과 암투와 비굴함의 동굴을 지나와 산전수전을 다 겪어 잔뼈 굵은 (미남) 아저씨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그는 여전히 미디어에서 우리에게 얼굴을 비춘다.
그런 상황에서 <비트> 속 아무것도 모르고, 한 치 앞도 계산하지 않은 채 무턱대고 치기 어리기만 한, 민의 얼굴을 보는 것에는 이 영화와 현재의 시차만큼 복잡함이 새겨져 있다. 나는 당연히 정우성이 아니지만 <비트>를 보고 있노라면 왠지 그 시절의 정우성에게서 지나 버린 나의 어떤 시절을 투사하고 싶게 만드는 힘이 이 영화에는 있다.
결국 <비트>는 뮤직비디오다운 시각적 과잉으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적인 과거 한구석을 정확히 자극하는 기이한 감수성을 지닌 영화가 되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이 영화를 다시 대면하면서 그 힘은 더 강해진 것 같다.
그렇다면 <태양은 없다>는 어떨까? 이 영화는 듀오의 영화이기에 <비트>처럼 어느 한 인물에게 강하게 이입되진 않는다. 그 대신 앞서 말한 것처럼 <태양은 없다>엔 대책 없는 낙관이 있고 또 그걸 기어코 설득하는 힘이 있다. 생각해 보면 도철과 홍기, 그러니까 정우성과 이정재는 <태양은 없다>를 통해 1990년대 이전까지 한국영화계에서 나타난 적 없는 청춘의 어떤 전형을 창조해 냈다. 이 듀오는 마냥 마초적이거나 강인하지도 않고, 딱히 정의롭지도 않다. 그렇다고 도드라지게 풋풋하거나 청초하지도 않으며, 조금 얄개같은 면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순수하진 않다. 그보다 이들은 어딘가 지독하게 삐뚤어져 있거나 마비되어 있으며 도착적인 면도 있고 도덕적으로 결여되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양은 없다>를 보고 이 비틀거리는 도철과 홍기가 반짝거리는 청춘이 아니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정말 독특한 듀오다. 이들은 그다지 건강하지 않은 출세욕이나 부에 집착하고 있으며, 심지어 매사 그 욕망을 성공시키지도 못하고 고꾸라지기 일쑤다. 이제껏 이렇게 불건전한 청춘의 얼굴이 있었을까? 하지만 결국 우리는 도철과 홍기에게 설득되고 만다. 우여곡절 끝에 나간 복싱시합에서 곤죽이 되도록 쥐어터진 도철과 도저히 수습하기 어려운 사고를 한가득 치고 돌아온 홍기가 자기 집도 아닌 미미(한고은)의 집 옥상에서 투닥대며 웃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내 그들의 대책 없는 낙천성에 마음을 나눠주게 된다. 이렇게 일그러진 인물들에게 기어코 감화되고 마는 것이 <태양은 없다>가 지닌 낙관의 힘이다.
그리고 다시 지금으로 돌아오며돌아보면 이제와서 <비트>의 민이나 <태양은 없다>의 도철과 홍기를 마주하는 일은 마냥 아름답지도, 그렇다고 온전히 남일 같아서 시큰둥하지도 않은 양가성을 띠고 있는 것 같다. 한편으론 그들이 속한 1990년대의 아날로그에 모종의 노스탤지어를 느끼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그들이 아직 살아 보지 못한 21세기를 알고 있기에 씁쓰레한 기분이 함께 드는 것이다. 어쩌면 <비트>와 <태양은 없다> 이후의 김성수 감독도 비슷한 느낌을 지니고 있지 않았을까. 두 영화를 만든 이후, 결국 비루하고 풍파에 찌든 <아수라>의 한도경과 정의와 윤리의 영웅이지만 실패하고 마는 <서울의 봄> 속 이태신이 정우성이라는 한 배우의 얼굴을 빌리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쩔 수가 없다. 누구라도 과거는 미화하고 현재를 초라하게 여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뒤를 되돌아보기에 우리의 남루한 현재를 조금 더 긍정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비트>와 <태양은 없다>를 보며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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