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2월

Quick Menu

READING ❶

어두운 터널 속 한 줄기 빛

<지우러 가는 길>

글 _ 나원정(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사진 제공 _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2026-02-09

“내가 안 지운다고 해서 나 벌주는 거야. 애 지웠다고 하면 선생님 돌아올 거야.”

유부남 담임교사의 아이를 임신한 고등학생 윤지(심수빈)는 담임교사가 갑자기 잠적하자, 기숙사 룸메이트 경선(이지원)의 돈까지 훔쳐 불법 낙태를 시도한다. 친구들에게 액상 담배를 팔아 호주로 떠날 자금을 모아 온 경선은 윤지를 뒤쫓다가 얼떨결에 임신 중지(낙태)의 험난한 여정에 휘말린다.

“네가 무슨 임신한 후궁이냐?” “어떻게 믿어? 여고생 임신시킨 선생을….” 갈팡질팡하는 윤지에게 이런 직언을 서슴지 않는 경선은 알고 보면, 어려서 ‘싱글맘’이 된 엄마 인생을 지켜보며 너무 일찍 철들어 버렸다. 무책임한 어른들과 낙태죄 폐지 이후 입법 공백으로 사각지대에 갇혀 버린 윤지의 적막한 세계에 넉살 좋고 생활력 강한 경선이 난입하며 실소 터지는 난장을 빚어낸다.



베를린이 주목한 신인 감독 유재인 감독의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졸업 작품 <지우러 가는 길>이 2월 12일 개막하는 76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14플러스’ 경쟁 부문에 초청되었다. 지난해 30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신설한 경쟁 부문에서 쟁쟁한 거장들과 겨뤄 부산 어워드 - 배우상(이지원), 뉴 커런츠상 등 2관왕에 올랐고, 서울독립영화제 넥스트링크상을 수상한 데 이어서다.

장편 데뷔작으로 단번에 베를린행 티켓을 거머쥔 유재인 감독은 이로써, 올해로 7년 연속 베를린에 초청된 홍상수 감독의 신작 <그녀가 돌아온 날>(파노라마 부문), 노장 정지영 감독이 제주 4·3 사건 속 한 어머니를 그린 <내 이름은>(포럼 부문)과 나란히 레드카펫을 밟게 되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국내 흥행과 해외 국제영화제 초청 성적 모두 침체하며 위기론조차 무색해진 한국영화계로선 단비 같은 소식이다.

정치적 메시지가 강한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지우러 가는 길>이 호명된 제너레이션 부문은 아동·청소년의 삶과 세계를 폭넓게 탐구한 작품들을 소개하며 신진 감독을 등용해 왔다. 한국 시장에서 빈약했던 차세대 여성 감독, 여성 인물들의 섬세하고 다채로운 서사가 기반을 닦는 데에 베를린국제영화제 ‘출신’들이 한몫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해 <세계의 주인>으로 토론토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하며 국내 관객 19만 명 이상의 장기 흥행에 성공한 윤가은 감독이 데뷔 초 단편 <콩나물>(2014)로 단편 수정곰상을 거머쥐고, 이어 장편 데뷔작 <우리들>(2016)로 연달아 초청되며 차세대 거장으로 급부상한 게 바로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K플러스 부문이다(이 부문은 어린이 영화 대상의 K플러스와 청소년 영화 대상의 14플러스로 구분된다). 김보라 감독은 첫 장편 <벌새>(2019)로 14플러스 부문 심사위원 대상(그랑프리)을 차지하며 그해 최고의 데뷔작으로 주목받았다. 김혜영 감독의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2024)도 K플러스 수정곰상을 수상한 뒤 지난해 국내 관객 11만 명을 동원했다.

유재인 감독



진지함과 유머 사이 절묘한 균형 올해 제너레이션 부문에선 속독 신동을 꿈꾸는 9세 소녀가 주인공인 오지인 감독 단편 <쓰삐디!>가 K플러스, <지우러 가는 길>이 14플러스에 나란히 호명된 것도 반길 만하다. 두 작품 모두 여성 감독이 성장기 여성 주인공을 유쾌한 태도로 그려낸 점이 공통된다.

특히 올해, 암 투병 소녀의 영국 코미디 <써니 댄서(Sunny Dancer)>를 필두로 초능력자 펑크족이 국제 분쟁을 촉발하는 칠레 영화 <마타판키(Matapanki)>, 성소수자의 자아 발견 코미디 <블랙 번즈 패스트(Black Burns Fast)> 등 내밀한 개인사와 정치 풍자를 장르 문법에 새긴 작품 경향이 도드라진 제너레이션 14플러스 부문에서, <지우러 가는 길>은 청소년 임신과 임신 중지라는 예민한 소재를 선명한 웃음 코드로 차별화했다. 독립‧예술영화에서 그리 낯설지 않은 소재지만, 시시각각 유머로 분위기를 환기시켜 비극에 대한 과몰입을 경계하고, 일상성을 유지해낸 점도 돋보인다. 임신 중지 소재의 기성 작품에 빗대어 설명하면 작가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이야기를 토대로 한 프랑스 영화 <레벤느망>(2021)의 건조하고 냉소적인 세계관에, 17세 미국 소녀들이 합법적 낙태를 위해 10시간 넘는 미국 횡단에 나선 로드무비 <언프레그넌트>(2020) 속 버디 코미디를 이식했다고 할까.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부문 책임자 세바스티안 막트는 <지우러 가는 길>이 “권력 남용과 자기 결정권이라는 주제를 우아하고도 잘 구축된 영화적 세계 속에서 다루고 있다”고 주목했다. 앞서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상 심사평에선 “진지함과 유머 사이를 절묘하게 오가며, 때로는 같은 장면 안에서도 이 균형을 이루어낸다”고 만장일치로 평가받았다.



<지우러 가는 길>에선 심각한 장면마다 싱거운 농담 같은 순간들이 출몰한다. 윤지가 처음 불법 낙태약을 구매하는 장면에선 어두운 뒷골목의 긴장된 밀거래 대신, 대낮처럼 훤한 지하철역의 형광등 불빛 아래 지친 기색의 퀵서비스 노인이 건네준 종이봉투의 허술함이 상황의 심각성을 상쇄한다. 윤지와 불법 낙태약 판매업자의 전화 통화도 마찬가지다. 목적어가 생략된 이 영화의 제목처럼, 불편한 말들을 죄다 생략한 결과로 실제 상황에 비해 통화 내용이 외려 잔인할 만치 경쾌하게 다가온다.

등장했어야 마땅할 어른들의 부재도 희화화된다. 윤지의 임신 상대인 담임교사는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바보스러울 만큼 활짝 웃은 얼굴의 사진 한 장만으로 등장한다. 윤지가 고아나 다름없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도, 경선이 엉뚱한 어른을 윤지의 가족으로 착각해 식사까지 얻어먹고 나온 해프닝이 더 크게 부각된다.

냉소에 경쾌한 온기를 더하는 건 경선의 존재다. 영화 초반 발랄한 타악기 배경음과 함께 등장하는 경선은 추적 액션극을 패러디한 듯한 슬랩스틱 코미디를 주로 선보인다. 공중화장실에서 윤지를 협박하다가 누가 들어오자 키스하는 척하거나, 높은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줄 알았더니 1층이었다거나 하는 등이다.



온건한 약자, 10대들의 연대 윤지가 일방적으로 ‘빌려간’ 돈 때문에 얽힌 이해관계가 서로를 진짜 이해하는 관계로 나아가게 되는 건 두 사람의 시간이 얽히고설키면서다. 윤지의 행방을 캐던 경선은, 담임과의 관계가 들킬까 봐 기념사진 한 장조차 허락받지 못한 윤지가 다이어리에 담임과의 한때를 ‘인생 네 컷’처럼 그려놓은 흔적을 보고 기울어진 연애 관계를 짐작한다. 또 왜 좀 더 정상적인 방법으로 임신 중지를 할 수 없느냐고 윤지를 다그쳤던 경선은, 낙태죄가 폐지만 되었을 뿐 모자보건법 개선 등 후속 조치가 요원해 사실상 합법적 임신 중지가 쉽지 않은 윤지의 현실을 동행하며 뒤늦게 멋쩍은 사과를 한다.

시스템에 외면당한 이들의 아픔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이해관계로 얽힌 타인의 이기적 동기에 의해 비로소 발견된다는 설정은 사회파 영화에서 종종 활용된다. 신수원 감독의 <마돈나>(2015)에선 무연고 임산부의 장기를 빼돌리려는 병원 간호사가 그의 가련한 삶을 알게 된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본즈 앤 올>(2022)에선 식인을 하는 아웃사이더들이 자신과 닮은 고독한 이들을 찾아내어 잡아먹는다. 10대들의 성장 영화인 <지우러 가는 길>은 물론 이보다는 온건한 약자들의 연대로 방향키를 잡는다.

고슴도치처럼 세상에 가시를 세웠던 윤지는, 경선으로 인해 조금씩 웃는 법을 터득한다. 혼자 부딪히던 힘겨움, 자격지심, 강박들을 누군가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 한 꺼풀씩 벗어 나간다. 두 소녀가 장례식장에서 돈을 훔치기로 도모했을 때, 호주에 사는 동물 웜뱃에 관한 농담을 먼저 던지는 것도 윤지다. 웜뱃의 똥이 정말 네모난지 호주에 가면 확인해 달라는 윤지의 우스개엔 경선이 소원대로 호주에 가길 바라는 미래에 대한 염원이 실려 있다. 영화 후반, 윤지가 미혼모 쉼터에서 만난 중학생 소율과 그 뱃속의 아기를 진심으로 챙겨주게 되는 건 이런 과정을 통해서다.

자존심이 강해 힘든 기색을 않던 경선 역시 감춰 왔던 속내를 토해낸다. 자신을 낳은 탓에 엄마 인생을 망친 것 같다고, 제발 엄마 인생을 살라고 울먹이는 장면에선 지금까지와는 딴판으로 허물어진 표정이 장면 전체를 장악한다. JTBC 드라마 <스카이캐슬>(2018~2019), SBS <라켓소년단>(2021) 등 아역 시절부터 유연한 연기로 눈도장을 찍어 온 배우 이지원의 더욱 대담해진 감정 묘사가 발군이다.

<지우러 가는 길> 속 10대들의 관계가 가면 뒤에 경직되어 있던 무표정을 벗고 진심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극 중 어른들은 자신이 편한 방향으로 진실을 왜곡하며 기어코 그것을 기정사실로 고착시키려 한다는 점이 대조된다. 배우 장선이 연기한 담임교사의 아내가 대표적이다. 그는 남편의 외도에 대한 합리적 의심을 하지만, 교사로서 남편의 명예가 실추될 경우 자신의 삶까지 흠집이 날 거란 두려움 탓에 의혹을 외면한다. 담임교사의 아내가 윤지와의 대화 끝에 학생도 나중에 자신의 남편 같은 남자를 만나라고 너스레를 떠는 대목이 절정이다. 처음 장편영화 주연을 맡은 신인 심수빈과, <해피뻐스데이>(2017), <소통과 거짓말>(2017), <바람의 언덕>(2020),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 <비밀의 언덕>(2023) 등 이미 독립영화에서 인상적인 행보를 보여 온 중견 배우 장선의 팽팽한 에너지도 이 장면의 볼거리다.



힘들어도 웃을 수 있는 힘을 주기 위해 미술로 경력을 시작해 늦깎이로 영화에 데뷔한 유재인 감독에게 불행 속 웃음은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주제다. 자칭 예술가를 빙자한 백수로 출연을 겸한 초기 단편 <해피해피쿠킹타임>(2017) 연출의 변에 “정말 웃긴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적었을 정도다. 최근 기자와 통화에서 스스로 염세적이라고 소개한 그는 “보통 나쁜 일이 지나가면 좋은 일이 온다고 많이 위로하는데 저는 그게 무책임하게 느껴진다. 살면서 나쁜 일이 생긴 다음에 더 나빠질 수도 있다. 나쁜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힘을 주고 싶다”고 전했다.

<지우러 가는 길>은 유 감독이 KAFA 사전제작 과정 및 장편제작연구 과정에서 처음 완성한 장편 시나리오다. “영화로 찍겠다는 목적보다 관심 있는 소재를 갖고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것 자체가 목표였다”는 그는 “유사성을 피하기 위해 비슷한 소재로 평가받은 영화들을 보며 공부했는데 다들 굉장히 진지하더라. 그러다 유쾌한 무드의 <언프레그넌트>를 발견했다”며 참고 작품으로 언급했다.



첫 장편에서 청소년 주인공을 다루게 된 건, 어릴 적 진리라 배웠던 윤리적 가치들을 실제 어른들은 지키지 않는다는 사실에 눈뜨며 성장통을 겪는 시기여서다. 순수하고 아름답기만 했던 사랑도 성인이 되면 책임 소재가 생긴다. “책임질 수 있을 만큼만 잘해줘야 된다”고 밝히는 극 중 대사에 대해 유재인 감독은 “사랑은 감정인데 책임은 이성의 문제가 된다. 윤지가 선생님을 사랑한 건 죄가 아니지만 선생님이 윤지를 사랑하면 왜 죄가 되는가. 어른과 미성년자를 가르는 건 책임의 무게다. 그런 차이점을 다뤄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영화는 보호자의 책임 소재보다 윤지가 ‘망한 첫사랑’ 이후 이 아픔을 어떻게 이겨내고 나아갈 수 있을지에 집중하기 위해 어른들의 존재는 가급적 배제했다. 윤지가 경선을 비롯한 또래들에게 의지하게 되는 것도 의도적이다. 유재인 감독은 “우리 주변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어떤 이웃이 되어줄 수 있을까. 그런 성찰이 세상에 필요하다”면서 “그런데 살아보니 어른들은 비겁하다. 알면서도 귀찮아서 모르는 척하고 자신이 편하자고 남들한테 마음의 짐을 지운다. 그런 어른들이 도와주는 그림보다는, 윤지에게 가장 가까운 이웃인 경선이 친구가 되어주는 과정을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지우러 가는 길>의 시작과 끝에는 도돌이표 같은 장면이 등장한다. 똑같이 힘겨운 밤이지만, 함께 아침을 맞은 든든한 아군이 생겼다는 점이 모든 것을 바꾼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이 영화에선 정반대로 작용하는 듯하다. 온 세상이 괴롭힐지라도, 살아남는 데에 필요한 건 마주보고 웃을 수 있는 단 한 명의 이웃이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는 한국영화계에 찾아온 미더운 신인 감독의 등장이 반갑다.

지우러가는길 한국영화아카데미 KAFA 유재인감독 심수빈 이지원 장선 베를린국제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