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1
AI가 극장에 갈 이유를 만든다
<아파트: 리플리의 세계> 채수응 감독, 미래형 콘텐츠를 말하다
- 글
- 나원정(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 사진
- (주)아리아 스튜디오
Opinion 1
<아파트: 리플리의 세계> 채수응 감독, 미래형 콘텐츠를 말하다
2080년 미래, 한 형사(장혁)가 기억을 영구 보존하는 ‘마인드 업로드’ 시스템을 이용해 71년 전 미제 살인사건을 재수사한다. 유일한 목격자인 뇌사 상태 소년의 기억을 통해서다.
올해 81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이머시브(확장현실(eXtended Reality, XR)을 담은 몰입형 영화) 경쟁 부문에서 공개된 채수응 감독의 <아파트: 리플리의 세계> 이야기다. 이 영화가 여느 영화와 다른 점은, 관객도 극 중 캐릭터와 교감하며 추리에 동참하는 ‘인터랙티브’ 형태라는 점이다. 인공지능 (AI) 캐릭터가 관객이 어떤 질문을 하건 그에 맞게 실시간으로 반응하며 매번 다른 대답을 해준다. 이를 위해 채수응 감독의 제작사 아리아 스튜디오는 대규모언어모델(Large Language Model, LLM)도 자체 개발했다. 수십 명의 작가진이 만든 수만 쌍의 대사 데이터를 기반으로 AI 캐릭터의 페르소나를 구축했다.
올 들어 한국영화에도 생성형 AI의 존재감이 매섭게 커지고 있다. 기존 영상물 제작의 한계를 부수는 획기적 도구로 급부상했다. 배우, 실사 촬영, 컴퓨터그래픽(CG)도 없이 생성형 AI로 닷새 만에 완성한 권한슬 감독의 단편 <원 모어 펌킨>이 한 예다. 지난 12월 11일엔 배우 나문희를 모델로 학습한 생성형 AI 캐릭터들이 주연을 맡은 단편 모음 <나야, 문희>(12월 24일 개봉)도 언론시사를 통해 공개되었다. 여든셋 노배우가 현실에서는 맡기 힘든 전투기 조종사, 외계 생명체, 암흑가 보스, 젊어진 모습 등으로 등장하는 다채로운 장르의 단편 5편이 신인감독들 손에서 탄생했다. AI 캐릭터들이 나문희의 외모와 목소리, 연기 스타일을 복제했기에 가능했다. 지난 6월 개봉한 김태용 감독의 <원더랜드>가 한국 상업 장편영화 최초로 배우 공유의 목소리 일부를 AI 기술로 복제해 삽입한 지 불과 6개월 만이다.
채수응 감독이 올해 베니스에서 보고 온 ‘미래 영화’는 한발 더 나아간다. AI를 쌍방향 소통 도구로 활용한 인터랙티브 작품들이 기존 영화 문법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머시브 부문 출품작 경향도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 360도 영상을 제치고, 게임 엔진 기반 인터랙티브가 주류로 떠올랐다. “유저(관객)를 내러티브 안에 포함시키려는 시도가 많이 이뤄졌죠. 설치 작품 형태로 직접적인 체험을 유도하는 작품이 증가했어요.” 지난 12월 4일 서울 역삼동에 위치한 제작사 아리아 스튜디오에서 만난 채수응 감독의 말이다. 마침 그의 영화 <아파트: 리플리의 세계>의 2025년도 멀티플렉스 극장 개봉을 위한 계약이 진행 중인 시기다. 이미 영화관보다 다른 플랫폼에서 콘텐츠 소비에 쓰는 시간이 많아진 지금, 기술을 프리즘 삼아 하나의 스토리를 다양한 영화 문법으로 변주하는 시도가 “영화의 생존력을 늘리는 과정”이라고 채수응 감독은 말했다. AI, VR, XR 등 신기술의 날개를 달고 영화의 경계는 어디까지 넓어질 수 있을까? 그에게 현실로 다가온 미래 영화의 현황과 전망을 들었다.
<아파트: 리플리의 세계>는 베니스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선보였다. 현지 반응은 어땠나?
한쪽에선 2D 영화 관람을 하면서 스크린 속 배우와 직접 소통하고, 관객 중 1명은 별도의 VR 체험장에서 3D 공간으로 구현된 가상현실에 접속해 극 중 배우가 요청하는 대로 미션 해결에 참여했다. 방탈출 게임처럼 관객이 영화의 일부가 되는 거다. 또한 2D 관객과 VR 체험자가 각기 다른형태의 스토리 체험을 대화로 나누면서 영화 속 단서를 풀어 갔다. AI 배우가 호스트 역할을 하는 일종의 소셜 체험인데, 현재까지 상당한 체험 데이터가 모였다. 그게 콘텐츠 자체에 유기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게끔 하고 있다.
베니스에서는 젊은 세대의 호응이 컸다. 상영 후 한참 동안 저희 팀을 붙잡고 범인이 누군지, 영화에서 이랬던 게 맞는지 물어보는 관객들을 보며 많은 가능성을 느꼈다. 극장이 영화 관람 후에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연결고리 역할까지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올해 베니스에선 인터랙티브 작품이 많았다고?
인스톨레이션(Installation, 설치) 형태로 관객이 좀 더 직접적인 체험을 하는 쪽으로 가는 게 인상적이었다. 사실상 한국 극장가도 그렇게 바뀌고 있잖나. 극장이 체험존처럼 변화하고 있다. e스포츠 올림픽을 굳이 아이맥스에서 본다든가, 임영웅 콘서트 영화를 함께 보며 떼창을 한다든가.
<아파트: 리플리의 세계>의 인터랙티브 문법이 이제 실험이 아니라 상업적 검증을 받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본다.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볼 수 있는데 왜 굳이 극장까지 가서 봐야 할까? 개인화된 알고리즘 콘텐츠를 주로 보는 시대에 극장은 체험적 요소를 강화해 가고 있다.
주류 영화·드라마계에선 아직 AI가 제작 효율을 높이는 ‘도구’로 주목받는 것 같다.
현재 AI 활용은 크게 대체와 생성으로 나뉜다. 대체는 기존 제작 공정을 효율화하는 도구로서의 접근이다. 우리도 대본 분석이라든가, 머신러닝에 기반해 제작 효율성을 높이는 데 AI를 활용했다. AI로 관객 데이터를 분석해 흥행 가능성을 높이는 스토리텔링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또 시각특수효과(VFX) 일부를 AI로 대체해 제작 비용을 낮추기도 한다. 해외에서도 최근 이미지 생성 AI 기업인 ‘스테이빌리티 AI’가 <아바타>의 제임스 캐머런 감독을 이사진에 합류시키면서 아예 실사 기반 VFX 도구를 개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렇듯 가능성은 무궁무진하지만, 아직은 속도 면에서 이슈가 있다. 개별 작품 톤에 맞는 비주얼 컨트롤을 하려면 결국 사람이 수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AI를 활용해도 보정이 필요한 거다.
생성 도구로서 국내의 AI 활용 사례는 어떤가.
한국은 SF보다 시대극, 역사물에 현실을 빗대어 보는 게 더 와닿아서인지 생성 분야는 많이 시도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미디어 시장의 관습을 바꾸는 문법이 필요하다. 1990년대만 해도 한국말 영상에 자막 하나가 들어가도 어색했지만, 지금은 게임이나 스트리밍 방송 중 댓글을 주고받는 행위가 익숙하잖나. 사람들이 꼭 극장에서 봐야 할 콘텐츠가 되려면 체험형이 되어야 하고, 이때 몰입 요소로서 AI를 활용한 인터랙티브가 있어야 한다. 준비된 것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관객과 같이 콘텐츠를 생성해 나가는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 협업 중인 미국 회사 ‘겐비드 엔터테인먼트’의 관객 참여형 콘텐츠가 있다. <사일런트 힐>이라는 작품으로 올해 에미상(최우수 신진 미디어 프로그램 부문)을 받았는데, 미래형 콘텐츠의 하나로 게임과 영화 경계에 있는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더라. VR 미디어 전문 회사 ‘페이블 스튜디오’도 ‘AI판 넷플릭스’를 준비 중이다. 유저들이 하나의 IP를 보면서 같이 스토리를 만들어 나가는 일종의 스트리밍 플랫폼이다. 인터넷과 마이크, 카메라, 키보드 입력 기능이 장착된 장비만 있으면 누구든 이용할 수 있다.
전용 장비가 필요했던 VR의 약점을 극복한 셈인가?
그렇다. 관객들의 습관 변화에 맞춰서 기존 기기의 문법을 확장하고 기술을 붙여 가는 거다. VR은 대중적인 ‘습관’이 되기엔 장비가 고가였으니까.
스토리와 그래픽이 뛰어난 기존의 시네마틱 게임과 새롭게 시도되는 AI 인터랙티브 콘텐츠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전용 장비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 접근성이 가장 큰 차이다. 게임이나 VR챗 같은 기존 콘텐츠 소비 행위에서 드러난 현상들을 영화 문법으로 풀어보는 과정 같다. 지금 시점에선 스토리 기반과 관객 참여형 요소, 플랫폼까지 삼박자가 맞물리는 스토리텔링 개발이 절실하다.
<미스터 고>(2013) 3D 프로듀서, <적인걸 3>(2018) VFX 총괄 등 상업영화 시각효과도 맡아 왔다. AI, VR 같은 신기술이 주류 영상 산업과 어떻게 융합할 수 있다고 보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올해 할리우드 신작 <메가로폴리스>를 선보이면서 인터랙티브 배우가 관객과 소통하는 특별 영상을 상영하기도 했다. 내가 2018년 <버디 VR>로 베니스국제영화제에 갔을 때도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VR과 인터랙티브에 큰 관심을 보였다. 한국에도 인터랙티브에 관심을 갖는 정상급 감독들이 이미 있다. 자신의 스토리 세계관을 다른 포맷으로 영속성 있게 확장하고자 하는 거다. 기존에는 극장 개봉 후에 게임판이 개발되거나 했다면, 이젠 포맷을 유기적으로 넘나드는 콘텐츠가 나오는 쪽으로 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렇게 AI 콘텐츠가 활성화하게 되면, AI가 재현할 수 있는 관습적인 스토리텔링의 작품은 굳이 극장에서 상영하지 않을 것 같다. 관객들이 함께 목소리를 내거나 생각을 교류하면서 콘텐츠를 만들어 가는 포맷이 극장에서 봐야 할 이유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의외성은 잠시일 거고. 정말 몰입해서 좋은 체험의 기분을 가져간다면 성공이지 않을까.
신기술이 영화 문법에는 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시간 개념에 대한 부분일 것이다. 2D로 보면 느린 호흡도 VR 체험자에겐 3배 정도 빠르게 느껴진다. 몸으로 직접 체험하는 시간은 눈으로만 보는 체험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인터랙티브 영화도 체험 요소 때문에 상영시간에 대한 기준이 달라질 것 같다.
영화 시작 5분 안에 ‘훅(몰입 요소)’을 줘야 한다는 1990년대 공식이 지금껏 쓰이고 있었다면, 인터랙티브는 관객의 체험을 유도하는 형태라서 시간을 많이 들이지 않아도 관객이 주인공에 공감하게 된다.
극장 개봉판 <아파트: 리플리의 세계>는 어떤 형태로 계획하나?
베니스 땐 관객에게 도전을 던지는 부분에 집중했다면 극장 개봉판은 좀 더 친절해졌다. 상영시간 내에 내러티브를 체험하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2022년 시그라피 아시아(SIGGRAPH ASIA: 세계 최대 규모의 컴퓨터그래픽 및 인터랙티브 기술 콘퍼런스 겸 전시회)에서 관객 참여형 단편영화 <아리아시티>를 극장에서 상영했을 때 카카오톡 오픈 채팅창을 활용했는데, 참여도가 높았던 경험이 있다.
현재 영화관 서버 용량으로 AI와 관객의 실시간 쌍방 소통이 가능한가?
요즘은 영화관이 생중계도 하지 않나. 유튜브 4K 콘텐츠를 볼 수 있는 정도의 인터넷 속도면 쌍방향이 가능한 인프라가 구축된다.
타깃 관객층은 어떻게 보고 있나?
극장 측에선 10대에서 20대까지의 젊은 층을 주로 본다. 게임과 스트리밍 콘텐츠, 방탈출을 즐기는 세대다. 관객이 각자의 추리를 통해 AI로 이미지를 생성하고 공유하는 일종의 공모전 성격의 대체현실게임(ARG)을 개최해서, 다같이 추론하고 이야기의 결말을 찾아보는 캠페인도 계획 중이다.
영화 포맷으로 먼저 <아파트: 리플리의 세계> IP를 알린 후, 16부작 드라마 시리즈도 개발하고 있다. 같은 세계관 내에서 방탈출 같은 VR‧MR(혼합현실, Mixed Reality) 게임도 개발해 스팀(Steam: 멀티미디어 유통 플랫폼)에 업로드할 수도 있고. 해외 미술관 초청 의뢰도 많고, 국내외 영화제와도 공개를 검토 중이다.
신기술 영화의 시장 정착을 위해 필요한 제도적, 사회적 보완점도 있을까?
VR 영화 때처럼 인터랙티브 영화도 게임 심의를 받아야 하느냐, 영상물 등급 심의를 받아야 하느냐 하는 고민이 있다. 이번 작품이 그런 이슈를 많이 일으키면 좋겠다. 앞으로도 생성형 AI를 사용한 영상에 대한 저작권이나 윤리적 책임 문제가 다양하게 나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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