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Record
이토록 헌신적인 개척자
안종화로 다시 읽는 한국영화의 과거
- 글
- 한상언(한상언영화연구소 대표)
History Record
안종화로 다시 읽는 한국영화의 과거
History Record는 인물, 배경, 상황 등 다양한 키워드를 주제로 한국영화를 다각도로 조망해 보는 코너다.
신파극 시대를 거쳐 해방 이후까지 연극·영화계에서 활동한 안종화(1902~1966)는 우리 영화 역사의 가장 앞자리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20대의 젊은 나이에도 또래의 후배들에게 선생님으로 불렸던 그는 한국영화계가 연륜을 쌓아 가며 각종 단체와 기관을 조직할 때마다 언제나 지도자급 위치에 있었다. 출연하거나 연출한 작품으로 평가받기보다는 최초의 영화인이라는 위상이 그를 규정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안종화의 활동이 주목받기 시작했을 때는 사후 반세기가 흐른 2008년, 그가 연출한 <청춘의 십자로>가 발굴되면서부터다. 이 영화는 그때까지 남아 있던 유일한 무성영화이긴 했지만, 한국영화사에서 그리 중요하게 언급되던 작품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일제강점기 한국영화사는 <아리랑>(1926)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긴 나운규를 중심으로 서술되었다. 그러기에 나운규와 같은 시대를 보낸 안종화는 시대의 조역처럼 묘사되었다. 여기에 안종화가 영화감독으로 마지막 불꽃을 밝힌 1950년대 후반 한국영화계는 신상옥, 홍성기, 김기영, 유현목과 같은 젊은 세대가 등장해 한국영화의 중흥을 견인하고 있었다. 안종화는 반짝이는 별 사이에 큰 주목을 받지 못하는 흐린 별이었다.
2008년 5월 한국영상자료원 개관영화제에서 상영된 <청춘의 십자로>는 캔 속에 봉인된 과거의 시간을 우리 눈앞에 펼쳐 보여주었다. 배우 조희봉이 변사를 맡아 영화를 설명해주는 식으로 상영된 이 영화는 김태용의 연출로 무성영화의 상영 방식을 무대공연 형태로 변화시켜 보여주었다. 연극과 영화, 변사의 설명과 노래가 어우러진 무성영화 시대의 연행 방식은 21세기 관객들에게 1930년대 무성영화의 색다른 매력을 안겨주었다. 나와 같은 연구자들에게는 신일선, 김연실, 이원용 등 무성영화의 스타들이 안종화의 저서 <한국영화측면비사> 속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와 21세기의 관객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처럼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청춘의 십자로>의 감독으로만 한정해 설명하기에 안종화의 활동 범위는 넓고 다양하며 그 역할은 너무나 중요하다. 안종화에 대해 이해한다는 것은 한국영화의 초반 반세기의 빛과 그림자를 살펴보는 것과 같다.
최근 영화진흥위원회가 복원해 해제를 붙인 <안종화 「한국영화 40년 약사」>가 발간 예정(12월 24일)이다. 이 책은 한국영화의 역사에서 그의 넓고 깊은 역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안내판과도 같다. 우리 영화의 시작을 연 개척자로서 안종화가 걸어온 길에는 후진들이 따라서 걸을 수 있는 거대한 발자국이 또렷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자취가 기록된
<안종화 「한국영화 40년 약사」>의 발간을 계기로, 우리는 안종화를 다시 만나고 그를 통해 다시 한국영화의 과거를 읽는다.
1920년 무렵 배우 활동을 시작한 안종화가 처음 예원에 발을 디딘 곳은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1919)를 제작한 김도산의 신극좌와 신파극단의 원조로 불리던 임성구의 혁신단이었다. 이들 극단에서 홍안의 청년 안종화는 여형배우로 활약했다. 여형배우란 여배우가 없던 시절 여자 역을 맡은 남자배우를 말한다.
연쇄극의 시대가 짧은 전성기를 마감할 무렵 안종화는 윤백남이 이끌던 민중극단으로 몸을 옮겼다. 최초의 여배우 중 한 명인 이월화가 있었던 이곳에서 그는 더 이상 여자 배역으로 무대에 설 필요가 없었다. 민중극단을 이끌던 윤백남은 1923년 저축계몽영화 <월하의 맹세>를 만들며 한국영화사의 거대한 획을 그었다. 이 영화는 관에서 주도해 만들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필름으로 제작된 순 영화로서 의미가 있었다. 안종화는 민중극단에서 윤백남을 보좌하며 영화 역사의 중요한 순간을 함께했다.
대부분의 극단이나 영화 회사들을 운영했던 인물들은 뜻은 높았지만 냉혹한 현실 앞에 절망하기 일쑤였다. 신파극과 다른 청신한 연극을 추구했던 민중극단 역시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안종화는 함흥의 청년들이 주축이 된 예림회의 문예부장으로서 연극을 지도하다가 부산의 일본인 실업가들이 세운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전속 배우가 되어 영화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해의 비곡>(1924)과 <운영전-총희의 연>(1925), <암광>(1925, 원래 <신의 장>이라는 제목이었으나 검열 때문에 바뀌었다) 등에 주인공으로 출연하며 이름을 알린 그는 빛나는 앞날이 펼쳐질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또다시 절망하고 만다. 회사 중역들 사이의 내분으로 회사가 문을 닫게 된 것이다. 안종화는 지인들과 함께 새로운 극단의 깃발을 들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안종화 일행’이었다. 대구를 중심으로 공연을 펼치던 이 극단 역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를 마지막으로 안종화의 배우 생활도 막을 내린다.
이 시기 특기할 만한 사항으로 일제강점기 한국영화계에서 중요한 활동을 펼친 영화인들이 안종화를 통해 영화계에 입문했다는 점이다. 그가 함흥의 예림회에서 만난 주인규, 김태진, 나운규, 이규설 등은 얼마 후 <아리랑>을 만들어내며 한국영화계를 이끄는 핵심 인물들로 활약한다.
연출가 안종화당시 발걸음을 막 떼기 시작한 한국의 연극·영화계에서는 단원 한 명 한 명이 많은 일을 맡아야 했다. 연기자라고 연기에만 충실할 수 없었다. 대본도 쓰고 소품도 챙겨야 했으며 무대와 조명도 알아야 했다. 배우로 명성을 얻은 안종화 역시 연기만 할 수는 없었다. 짧은 기간 다방면의 경험을 얻은 그는 친구들이 참여한 토월회의 무대에서는 분장을 지도했으며 함흥의 예림회에서는 대본 작성을 비롯해 연출까지 맡았다.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서 배우로 활약하면서 관심의 영역이 자연스럽게 연기에서 연출로 옮겨 갔다.
서울로 올라온 그는 한국영화의 질적인 발전을 위해 조선영화예술협회를 설립해 윤기정, 임화, 김유영, 서광제, 추민, 강호 등 훗날 카프영화를 이끈 인물들에게 영화를 가르쳤다. 결국 이들에 의해 협회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음에도 영화 교육과 후진 양성에 대한 열의는 계속되어 윤백남 등이 주도한 조선문예영화협회에 참여했고 이 단체 출신인 최남주가 제작한 <꽃장사>(1930)의 연출을 맡으며 영화감독으로 데뷔한다. 이후 그는 <노래하는 시절>(1930), <청춘의 십자로>(1934), <은하에 흐르는 정열>(1935), <역습>(1936),
<인생항로>(1937) 등을 연이어 연출하며 더 이상 배우가 아닌 영화감독으로 한국영화계에 자리매김한다.
1930년부터 1937년까지 6편의 영화를 연출하는 등 왕성한 창작욕을 불태웠던 안종화는 그 이후 1940년대 중후반까지 10여 년의 시간을 영화감독보다는 연극연출가로 활약했다. 토오키(Talkie, 유성영화) 시대에 극장에 울려 퍼지는 변사의 목소리는 고급 관객에게는 잡음일 뿐이었지만 평범한 관객에게는 여전히 영화의 재미를 책임지는 핵심 요소였다. 하지만 시대는 바뀌었다. 변사가 사라진 극장은 적막했다. 극장 운영자들은 조선인 관객들을 유인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프로그램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그 해결책으로 떠오른 것이 연극이었다. 당시 동양극장은 조선연극을 대표했다. 안종화는 이곳에서 춘원 이광수 원작 <무정>(1939)을 연출하며 연극연출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그는 <개화촌>(1945) 등의 연극으로 조선총독부에서 주최하는 연극경연대회에 참가하기도 하는 등 일제의 전시 선전 정책에 동조하는 작품을 연출하며 어두운 그림자를 남겼다.
연극연출가로 10년의 세월을 보냈더라도 안종화의 본령은 영화였다. 이 시기 안종화는 영화계의 일을 책임지는 위치에서 조선영화계를 대표했다. 1939년 조선영화인협회가 조직되었을 당시 협회장이었으며 해방 후에는 조선영화동맹 초대 위원장으로 영화인을 이끌었다.
해방 후 역사물을 무대에 올리는 작업을 계속하던 안종화에게 인천의 건설영화사가 경찰영화 <수우>(1948)의 연출을 부탁한다. 해방 전 <역습>이라는 경찰영화를 연출한 적이 있는 안종화는 이를 흔쾌히 승낙하고 다시 메가폰을 쥔다. 이 영화는 영화감독 안종화의 후반기를 시작하는 작품이었다. 이후 <나라를 위해>(안종화·서정규, 1949), <사도세자>(1956),
<천추의 한>(1956), <춘향전>(1958), <견우직녀>(1960) 등 주로 그 당시 인기 있던 역사물을 연출했다. 그의 작품은 <춘향전>에서처럼 천연색 영화에 대한 실험 등 영화 기술의 획득을 위한 노력이 보이지만 그 당시 감각적인 작품을 만들어내며 한국영화계에 활기를 불어넣던 젊은 감독들에 비해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영화계 원로의 투혼을 보여줌으로써 젊은 영화인들의 귀감이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신파극 시대의 종막과 영화 시대의 등장을 몸으로 겪었던 안종화는 우리 예원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오랫동안 자료를 모으고 관련자들을 통해 증언을 들어 관련 내용을 풍부히 했다. 그리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안종화의 경력이 증명하듯 그의 글은 연극, 영화의 한 시대를 충실하게 증언한다. 그의 활동은 신파 극단에서부터 시작해 <월하의 맹세>를 만든 민중극단, 나운규를 비롯해 한국영화계의 선각자들이 처음 활동을 시작한 함흥의 예원좌와 부산의 조선키네마주식회사로 이어진다. 최초의 영화교육기관인 조선영화예술협회와 조선문예영화협회를 이끌었으며 무성영화 시대 우리 영화의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 <청춘의 십자로>를 만들기도 했다. 일제 말기 조선영화인들을 전쟁 동원에 이용하기 위해 만든 조선영화인협회의 회장이자 해방 이후에는 민족국가수립을 위해 모인 영화인들의 대표 단체인 조선영화동맹의 위원장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대한영화사의 촬영소장을 맡았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최초의 연극영화대학인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학과에서 후학을 길러냈다.
안종화의 이러한 체험은 <신극사 이야기>와 <한국영화측면비사1>라는 두 권의 책으로 정리되었다. 이 책은 연극·영화 연구자라면 반드시 살펴봐야 할 한국영화사의 중요한 참고문헌일 뿐만 아니라 배우이자 연출가이면서 영화교육자이자 영화행정가이기도 했던 그의 한국영화사에서의 위상을 보여준다.
더불어 생각해본다. 안종화가 남긴 기록이 없었다면 우리의 과거는 얼마나 빈약했을까? 영화 교육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이래 끊임없이 글을 쓴 그는 조상의 위패를 지키고 있는 종손처럼 선각들의 행적을 그 숨결까지도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가 그 시대의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는 것은 안종화의 이러한 헌신 때문이다.
한국영화는 어떻게 시작되어 한 세기를 넘어왔는가? 아마 이 질문에 대해 가장 명확하게 답해줄 이를 꼽으라면 단연 영화인 안종화일 것이다. 영화감독이자 배우, 영화사가로서 드문 성취를 남긴 1세대 한국영화인 안종화가 집필한 원고 「한국영화 40년 약사」는 우리 영화사에 큰 의미를 지닌 기록물이다. 활동사진 초창기부터 1961년까지의 한국영화사를 총 13장으로 정리해 당시 한국영화의 흐름을 짚어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 40년 약사」는 1979년 한국영화인협회가 한국영화 60주년 기념 전시와 행사를 준비하던 중 안종화의 배우자 이애경 님을 통해 친필원고를 기증받게 되면서 세상에 그 존재가 알려졌다. 당시 영화진흥공사 발행 잡지 『영화』 5·6월호와 7·8월호(총 2회)를 통해 이 원고의 일부가 소개되었다. 이후 세월에 묻혀 있던 「한국영화 40년 약사」는 2024년 국가기록원 맞춤형 복원·복제 지원작으로 선정되면서 마침내 전체 원고를 검토하고 출간할 수 있는 계기를 맞았다.
그간 영화의 다양한 분야와 주제들을 다루는 ‘영화이론총서’들을 발간해 온 영화진흥위원회는 안종화가 쓴 「한국영화 40년 약사」를 복원함과 동시에 김명우, 김종원, 남기웅, 유창연, 이화진, 이효인, 전지니, 정종화, 조성민, 한상언, 함충범(가나다 순)까지 11명의 전문 연구자들을 통해 안종화의 기록을 토대로 한국영화사를 재검토하고 각자의 해제를 담은 11편의 원고까지 함께 수록해 <안종화 「한국영화 40년 약사」>를 펴냈다. 이 책이 증언해주는 한국영화 초 반세기의 풍경과 그 의미는 향후 한국영화 연구의 필수불가결하고 귀중한 자료로 남을 것이다.
한국영화는 어떻게 시작되어 한 세기를 넘어왔는가? 아마 이 질문에 대해 가장 명확하게 답해줄 이를 꼽으라면 단연 영화인 안종화일 것이다. 영화감독이자 배우, 영화사가로서 드문 성취를 남긴 1세대 한국영화인 안종화가 집필한 원고 「한국영화 40년 약사」는 우리 영화사에 큰 의미를 지닌 기록물이다. 활동사진 초창기부터 1961년까지의 한국영화사를 총 13장으로 정리해 당시 한국영화의 흐름을 짚어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 40년 약사」는 1979년 한국영화인협회가 한국영화 60주년 기념 전시와 행사를 준비하던 중 안종화의 배우자 이애경 님을 통해 친필원고를 기증받게 되면서 세상에 그 존재가 알려졌다. 당시 영화진흥공사 발행 잡지 『영화』 5·6월호와 7·8월호(총 2회)를 통해 이 원고의 일부가 소개되었다. 이후 세월에 묻혀 있던 「한국영화 40년 약사」는 2024년 국가기록원 맞춤형 복원·복제 지원작으로 선정되면서 마침내 전체 원고를 검토하고 출간할 수 있는 계기를 맞았다.
그간 영화의 다양한 분야와 주제들을 다루는 ‘영화이론총서’들을 발간해 온 영화진흥위원회는 안종화가 쓴 「한국영화 40년 약사」를 복원함과 동시에 김명우, 김종원, 남기웅, 유창연, 이화진, 이효인, 전지니, 정종화, 조성민, 한상언, 함충범(가나다 순)까지 11명의 전문 연구자들을 통해 안종화의 기록을 토대로 한국영화사를 재검토하고 각자의 해제를 담은 11편의 원고까지 함께 수록해 <안종화 「한국영화 40년 약사」>를 펴냈다. 이 책이 증언해주는 한국영화 초 반세기의 풍경과 그 의미는 향후 한국영화 연구의 필수불가결하고 귀중한 자료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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