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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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Record

비명에서 희망으로

변화해온 한국영화 속 퀴어함에 대하여

이동윤(영화평론가)

History Record는 인물, 배경, 상황 등 다양한 키워드를 주제로 한국영화를 다각도로 조망해 보는 코너다.


장르로서의 퀴어영화

퀴어영화를 장르로서 정의할 수 있을까? 토머스 셔츠는 장르 영화를 “익숙한 상황 설정 아래 예상 가능한 스토리를 만들어 나가는 친숙하고 일차원적인 캐릭터들을 그리는 영화”라고 정의한 바 있다. 라파엘 무안은 “유사한 주제, 내러티브, 형식 등의 특성을 제시하는 영화들과 시리즈로 놓는 것”이라 정의했고, 배리 랭포드는 “동일함과 다양함의 조합 속에서 장르의 본질적 속성”이 발생한다고 파악했다. 만약 장르가 유사한 요소들의 반복이 만들어내는 익숙한 관습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라면, 퀴어영화를 장르로 정의하기 위해서 퀴어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동일한 요소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관객들에게 익숙하게 다가갈 수 있을 정도로 관습화하고 있음을 증명해내야 할 것이다.

퀴어영화를 단일 장르로 규정하려는 태도는 퀴어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유사성으로 퀴어영화를 장르화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퀴어 캐릭터가 등장한다면, 또는 그 캐릭터들이 주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면 이를 퀴어영화라 정의할 수 있다는 논의가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이러한 단순한 퀴어영화에 대한 장르적 접근은 퀴어영화 담론을 축소시킨다. 퀴어영화는 퀴어 이론의 영향 아래에서 전개되고 있으며 영화의 서사성에 국한되어 논의되기보다 작품 자체가 기존의 이성애 규범성에 어떻게 도전하고 균열을 내고 있는지를 더욱 중요하게 사유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퀴어영화를 정의함에 있어 퀴어 캐릭터들의 등장 여부는 더 이상 그리 중요한 논의 지점이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캐릭터들을 통해서 어떻게 기존 사회의 이성애 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전복을 시도하는지, 그 여부가 퀴어영화를 규정하는 중요한 기준점이 될 수 있다.

비명 가득했던 한국 퀴어영화의 퀴어성

퀴어영화는 기존의 장르 문법으로 사유할 수 없는, ‘퀴어성’을 바탕으로 그 성격을 규정해야 하는 개념임에도 한국에서 퀴어영화는 손쉽게 장르화되었다. 어쩌면 성소수자가 등장한 작품을 독해할 만한 담론이 부재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성소수자가 등장하니 무조건 퀴어영화일 것이라는 강박과 성소수자를 긍정적으로 그려야만 퀴어영화라 주장할 수 있다는 입장들이 퀴어영화에 대한 담론을 납작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 책임은 게이바를 처음으로 등장시켰던 박재호 감독의 <내일로 흐르는 강>(1996) 이전까지의 작품들에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작은 단역을 통해서라도 존재를 증명해야 했던 과거의 많은 퀴어영화들은 성소수자들을 범죄자로, 왜곡된 성적 욕망만 가득한 존재로, 분장으로 정체성을 가려야 하는 대상으로 묘사했다. 찰나의 등장임에도 부정적으로 성소수자를 묘사한 작품들을 퀴어영화라 호명하기 위해서는 좀 더 폭넓은 논의의 장을 필요로 하지만 한국의 영화 역사는 그럴 만한 여유를 갖지 못했다.

게이바를 처음으로 등장시켰던 박재호 감독의 <내일로 흐르는 강>(1996) | 삼우미디어센터
게이바를 처음으로 등장시켰던 박재호 감독의
<내일로 흐르는 강>(1996) | 삼우미디어센터

만약 퀴어영화의 퀴어성이 당사자들에 대한 ‘긍정적 재현’을 통해서만 정의될 수 있다면 1990년대 중반 이전까지 한국에는 퀴어영화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남자들이 떠난 바닷가 마을에서 서로 욕정을 나누는 아낙들의 단편적인 모습만으로 그들을 ‘레즈비언’으로 호명하는 것은 타당한가?(김수용 감독의 <갯마을>(1965)) 왕의 죽음 이후 억울하게 감금당한 궁녀들이 서로 성관계를 나눌 때, 우리는 그녀들의 욕정을 억압된 성적 욕망의 분출로 볼 것인지, 궁 내 여성 관계에 존재했을 레즈비언 재현으로 볼 것인지 단호하게 주장할 수 없다.(신상옥 감독의 <궁녀>(1972)) 최초의 한국 레즈비언 영화라 호명되는 <금욕>(김수형 감독, 1976)조차도 동성애적 감정을 정신병의 범주 내에서 묘사한다. 이러한 작품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우리는 영화 속 퀴어 캐릭터들이 비체(Abject, 非體)로 왜곡되어야 했던 시대적 현실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쉽게 해석할 수조차 없는 알레고리화한 존재들에 이름을 붙이고, 삭제되고 외면당한 그들의 서사를 구조해내야 한다. 어쩌면 과거의 퀴어영화들이 요구하는 것은 ‘퀴어영화’로서의 인증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들이 어떤 폭력적 시대를 살아야 했는지, 그들의 비명소리에 귀 기울이길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청취의 태도 없이 한국의 퀴어영화는 절대 독해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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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용 감독의 <갯마을>(1965)과 신상옥 감독의 <궁녀>(1972)
| (주)프리즘웍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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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한국 레즈비언 영화, 김수형 감독의 <금욕>(1976)
| (주)프리즘웍스
동시대 퀴어영화의 멜로드라마적 속성

2000년대로 넘어오며 한국 퀴어영화는 양적으로 급격히 팽창한다. 재현 방식도 과거와 달리 성소수자를 주체적 대상으로 재현하려 노력한다. 군사 독재체제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문화적 해방기를 맞이한 한국 현대사 속에서 퀴어 캐릭터들은 잠시 해방기를 맞이한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작품들의 양적 팽창이 곧바로 퀴어영화의 담론을 확장시키진 못한다. 오히려 ‘퀴어영화는 흥행하지 못한다’는 편견과 자본의 억압 속에서 퀴어영화를 퀴어영화로 호명하지 못하는 사태가 빚어진다. 독립영화의 부흥기가 시작한 2010년대 이후 한국 퀴어영화는 다큐멘터리와 더불어 다양하게 분화하기 시작하지만 그 작품들 속 퀴어 캐릭터들 또한 비극적 세계 속에서 처참히 희생된다. 성소수자들의 비극적 현실이 영화 속에 반영된 것이라고 하기에는, 그들의 처절함이 때로 현실의 고통을 넘어서 과잉된 채로 표현된다. 알레고리가 아니라면 과잉될 수밖에 없는 퀴어 캐릭터들의 영화적 현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대도시의 사랑법>이 로맨틱 코미디라면
<딸에 대하여>와 <폭설>은
비극적 서사 구조를 지닌 멜로드라마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공작새>와 <럭키, 아파트>는 구조적으로
미스터리 서사를 토대 삼고 있고
<우.천.사>는
역사극을 바탕에 둔 러브 스토리다.”

최근 두 달 동안 관객 앞에 퀴어영화들이 집중적으로 도래했다. <딸에 대하여>(개봉 9월 4일), <대도시의 사랑법>(개봉 10월 1일), <우리는 천국에 갈 수는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이하 <우.천.사.> 개봉 10월 16일), <공작새>(개봉 10월 23일), <폭설>(개봉 10월 23일) <럭키, 아파트>(개봉 10월 30일)가 그렇다. 이 일련의 퀴어영화들을 바라보기 위해선 조금은 다른 결의 시선이 필요하다. 퀴어영화를 퀴어영화로서 분석하지 못하는 현실이 개탄스럽긴 하지만 퀴어영화를 장르로 인식하는 대중적 오해가 여전한 지금, 퀴어영화를 말하기 위해서 다른 우회로를 선택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두 달 동안 여섯 편의 퀴어영화가 개봉하는 이례적 상황을 하나의 증상으로 파악해보면 어떨까? 다수의 퀴어영화가 공개되는 현실이 하나의 증상이라면 우리는 서로 동일하지 않은, 단일한 장르로 엮일 수 없는 여섯 편의 퀴어영화 속에서 특정한 경향을 발견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다시 장르에 대한 논의로 돌아가야 한다. 특정한 경향이 지니는 유사성은 장르의 중요한 속성이기 때문이다. 장르는 일종의 영화가 입는 옷으로서 다수의 영화가 지니고 있는 성질이기에 퀴어영화라는 ‘장르’의 옷을 벗긴다면 분명 그 속에 드러나는 다른 옷의 장르가 존재할 것이다. 그랬을 때 우리는 개별 작품들이 지니는 고유한 속성들을 바탕으로 이 작품을 퀴어영화로 호명할 수 있는 근거들을 되짚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대도시의 사랑법>이 로맨틱 코미디라면 <딸에 대하여>와 <폭설>은 비극적 서사 구조를 지닌 멜로드라마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공작새>와 <럭키, 아파트>는 구조적으로 미스터리 서사를 토대 삼고 있고 <우.천.사>는 역사극을 바탕에 둔 러브 스토리다. 여섯 작품을 모두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를 선택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멜로드라마’일 것이다. 김소희 평론가는 <정말 먼 곳>(2020)의 멜로적 속성을 분석하며 이성애 멜로가 실종된 틈 사이를 퀴어 멜로가 부상하고 있음을 비평한 바 있다. (씨네플레이, ‘아이, 게이 그리고 양, <정말 먼 곳>의 거리두기가 의미하는 것’) 페미니즘 리부트(Reboot)와 백래시(Backlash)적 상황 속에서 이성애 멜로를 사유할 여유가 없는 한국 사회의 현주소를 돌아봤을 때 보다 안전하고 ‘내게 무해한 사람’이라 증명된 관계 속에서 멜로를 향유하려는 대중의 욕망이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도 있겠다. 멜로드라마에는 파토스라는 과잉된 감정을 통해서 시대적 비극을 유희하려는 속성이 담겨져 있다. 피터 브룩스는 이를 도덕적 비의(Moral Occult)로 정의하며 ‘드라마가 과장을 통해서 일상에서 현전시키고자 하는, 숨겨져 있으나 작동하고 있는 가치’가 파국적 사태 속에서 역설적으로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한국 사회에서 존재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성소수자들의 삶의 처지를 고려했을 때 그들의 비극적 삶의 조건을 멜로드라마로 표현한 것은 하나의 우연한 경향이기보다 필연적 사태에 가깝다. 일상이 비상사태인 이들의 고통스런 몸부림은 사회화된 언어 속에서 유별난, 과격한, 폭력적인 언어와 감정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고통의 표현이 과잉된 언어일 수밖에 없는 소수자들의 삶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장르가 멜로드라마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 그 자체가 비극으로 다가올 뿐이다.

퀴어 서사의 비극성과 희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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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코미디의 외피를 장착한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대도시의 사랑법>이 장착한 ‘코미디’라는 외피는 영화 속 인물들의 비극적 상황들을 좀 더 대중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선택된 극적 장치다. 아웃팅의 공포, 커밍아웃 했을 때 부모님이 극단적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겪어보지 않은 대중에게 절대 직접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어두운 골목을 홀로 걸어갈 때 여성들이 느끼는 공포를 남성은 절대 공감할 수 없는 것처럼 어떤 감정들은 공유하려 애쓰기보다 그 자체를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코미디’는 이러한 난점을 대중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도구다. 모든 것을 풍자의 대상으로 여기는 코미디는 날카롭고, 뾰족하고, 경직된 비극적 파토스의 감정들을 용해시킨다. 그리고 비극적 정서들을 ‘연민’하게 만듦으로써 좀 더 손쉽게 공감대를 형성한다. 여성 집단을 지배하고 여성들의 사랑을 터부시 여겨 온 남성 폭력과 종교 이데올로기를 러브스토리라는 코미디적 요소로 승화시킨 <우.천.사.> 또한 <대도시의 사랑법>과 같은 전략을 펼친다. 천국은 갈 수 없지만 사랑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제목이 제시한 기대감 속에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을 영화적으로 성취하겠다는 야망이 담겨져 있다. 그 야망을 극적으로 재현하기 위해서 코미디는 필연적 선택이다.

<딸에 대하여> | (주)아토, <폭설> | 판씨네마(주)

반면, <딸에 대하여>와 <폭설>은 좀 더 직접적으로 성소수자들의 비극적 현실을 목도하려 노력한다. 그 불가능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세 작품은 각자의 스타일을 선취하는데 그중에서도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딸에 대하여>다. 작품의 주된 시선은 레즈비언 딸을 둔 엄마에게 있다. 엄마의 시선으로 딸과 그녀의 파트너를 바라보며 느낀 다양한 모순된 감정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미랑 감독은 그녀들의 감정을 회피하거나 은유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생략하거나 추상화시키지도 않는다. 오히려 더 정직하게 그 감정들을 주워 담고 카메라의 시선 안에서 진지하게 펼쳐낸다. 레즈비언 관계의 불가능성을 파도타기라는 행위 속에서 은유적으로 풀어낸 <폭설>과는 사뭇 다른 태도다. <딸에 대하여>는 <폭설>보다 오히려 <럭키, 아파트>와 유사하다. <럭키, 아파트>의 시선은 오랜 시간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온 강유가람 감독이 만들었기에 가능한 카메라의 시선일지도 모르겠다. 정직하고 투명하게 레즈비언 관계를 담아낸 감독의 시선은 오롯이 한 노년의 레즈비언 고독사에 맞춰진다. 죽음의 냄새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호소할 수 있는 비체로서의 노년 레즈비언에게 서사성을 부여해주는 주체로서 젊은 레즈비언 커플을 세웠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체성을 인정받지 못한 존재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역량이 주체성을 인정받지 못한 존재들뿐이라는 영화적 현실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소수자들의 현실을 가장 잘 반영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미스터리의 외피를 입은 구원 서사
<공작새> | (주)영화사 그램, <럭키, 아파트> | ㈜인디스토리

<럭키, 아파트>와 <공작새>가 취한 미스터리 서사는 서사성을 부여받지 못한 자들을 영화적으로 호명하기 위해 자주 사용해온 장치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그을린 사랑>(2010), 다르덴 형제의 <언노운 걸>(2016)이 이에 대한 좋은 레퍼런스일 것이다. 미스터리는 진실을 파고드는 드릴에 가깝다. 강제적으로 진실을 매장했건, 무관심 속에서 먼지 속에 진실이 파묻혔건, 미스터리는 그 속을 파고 들어가 진실을 목도하게 만들고 이로서 관객들에게 반전의 충격을 안긴다. 장르로서의 미스터리는 그 반전의 충격을 장르적 쾌감으로 소비시키기 위한 관습을 만들어 왔다. 하지만 위 영화들은 이러한 장르적 한계를 소수자의 서사성을 복원하기 위한 장치로 역이용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스터리로 이끌림을 당하는 작품 속 주인공들의 내적 동기다. <럭키, 아파트>는 시민권을 인정받지 못한 채 미래를 보장받지 못한 레즈비언 커플의 불안감을 원료 삼는다. 그녀들에게 고독사한 여성 노인의 현재적 사태는 곧 자신들의 미래로 받아들여지며 어떻게든 노인을 기억하고 추모해야 한다는 강박을 추동한다. 이는 미스터리 서사를 이끌어 가는 서사적 힘이며 미래의 불안을 현재의 행동으로 극복하려는 작은 몸부림이다.

<공작새>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전근대적 혈연 집단 속에서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다. <럭키, 아파트>가 미래에 대한 불안을 원료 삼는다면 <공작새>는 과거에 받은 상처를 원료 삼는다. 트랜스젠더로서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전통적 가치 속에서 주인공 신명(해준)은 아버지(기주봉)가 남긴 유언의 수수께끼를 풀어 가며 (트랜스젠더였던) 할머니의 존재를 밝혀낸다. 신명이 아버지의 유언을 따른 것을 서사는 수술비용이라는 인과성으로 연결 짓지만 서사 표면 아래에 흐르는, 보다 근원적인 동기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던 과거로부터 인정받으려는 해준의 욕망에 있다. 그녀가 최종적으로 가 닿게 된 할머니의 존재를 통해서 그녀는 살아남은 자의 불안을 다스리고 잠재우기 위한 굿이 아닌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하고 보다 좋은 길로 영혼을 인도하기 위해서 굿을 벌인다. 스피박의 말처럼 죽음으로써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자들이 서벌턴(Subaltern)이라면 죽음조차도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자들은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들의 죄의식을 움켜잡을 수밖에 없다. <공작새>는 이를 증명해내며 신명-아버지-할머니의 트랜스 역사를 다시금 회복시켜낸다.

과도한 해피엔딩이야말로 퀴어함이다

하지만 논의한 여섯 작품들의 장르적 속성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의구심을 떨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이 작품들 모두 공통적으로 취하고 있는 해피엔딩에 대한 태도다. 이들은 모두 희비극의 서사적 양식 속에서, 또 미스터리 서사 구조 속에서 꾸준히 한국 사회의 문제들을 영화 속에 기입한다. 사실주의적 시선 속에서 펼쳐낸 실재적 사건들이 극화되어 주인공들이 쉽게 넘을 수 없는 난관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그 난관을 극복하고 해피엔딩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지극히 관습적이고 상투적이다. 그토록 자신을 괴롭혀 왔던 현실의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손쉽게 해소되어 찬란한 미래를 손쉽게 희망한다. 그래서일까? 이들의 해피엔딩은 캐릭터의 의지로 이뤄낸 결과라기보다는 ‘데우스 액스 마키나’를 이용해 작가가 의도적으로 개입해 이뤄낸 성취로 다가온다. 영화를 벗어나 반드시 해피엔딩을 이뤄야한다는 일종의 강박이 작용한 결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쩌면 비극으로 점철되었던 과거 한국의 퀴어영화 현상에서부터 거리를 두고 영화를 통해서 희망을 애써 찾으려는 의지의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작품의 인과성을 해치면서까지 무리하게 희망을 결론짓는 것은 비평적 관점에서 비판의 대상임에 분명하다.

<우.천.사> | (주)메리크리스마스

하지만 그것조차 하나의 퀴어함으로 받아들여본다면 어떨까? 그리고 이 영화를 관람할 성소수자 당사자 관객들을 배려한 결과라고 이해해보면 어떨까? 영화를 통해서라도 ‘천국은 못 가겠지만 사랑을 하고 싶은’ 이들의 소망을 대신 이뤄주려는 감독의 의지가 서사성을 해치면서까지 스크린 밖으로 뚫고 나올 때 그 상투성의 기이함은 ‘퀴어한’ 요소로 받아들여지기에 충분할 것이다. 영화를 통해서 현실의 위로를 얻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서사적 상투성은 문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이 외면한 나를 영화는 인정해주길 바라는 적극적 의지가 그 한계를 뛰어 넘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들은 관객을 성소수자 당사자로 소환한다. 당사자가 아니라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난점들이 영화 곳곳에 배어 있다. 현실을 바꿀 수 없다면 영화적 사태를 투박하게 변형시켜서라도 희망을 찾으려는 의지가 이 작품들을 해피엔딩이란 경향으로 묶어낸다. 만약 여섯 작품들을 모두 퀴어영화로서 정의할 수 있다면 그 요소는 상투적이라 비판한 요소들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과감하게 해피엔딩으로 밀어붙인 영화적 뻔뻔함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한국의 퀴어영화가 탄생하는 순간을 우리 모두 목도하고 있는 셈이다.